2016년 12월 8일 목요일

Fair Playing "Fairest of the Seasons"





"영정 사진에 잘 어울리는 얼굴". 예전에 김승희 시인이 요절한 어느 여류 시인의 장례식에 다녀와서 한 말이다. 한창 나이였던 고인의 죽음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고, 그런 만큼 촬영 당시에는 사진사도 모델도 장차 그럴 용도로 쓰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찍은 사진임이 분명한데도, 까만 뿔테 안경, 그 뒤로 반짝이는 커다란 눈, 창백한 안색 등등 모델이 워낙 우수에 찬 얼굴을 가져서인지 그만 장례식장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사진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니코의 Chelsea Girl 앨범의 첫 곡 "Fairest Of The Seasons"를 들을 때면, 노래 내용도 내용이지만 무엇보다 목소리가 장송곡이나 진혼곡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전까지는 벨벳 언더그라운드 앨범에서는 니코가 나오면 다음 트랙으로 건너뛰곤 했다. 모름지기 벨벳의 노래는 무엇보다 루 리드가 그 퇴폐적이고 발칙한 노래를, 그 청초하고 담백하며 냉소적이고 체념한 듯한 담긴 목소리로 불러야 하거늘. 그소리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전적으로 니코의 목소리가 거슬렸다. 중저음에 중성적인 목소리가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Femme fatale" 같은 경우는 니코가 아닌 다른 보컬을 상상하기 힘든 것이 사실. 그런데 딕션이 이를 반감시킨다고 생각했다. 노래 처음부터 끝까지 음색 변화 없이 일정한 톤을 유지하는 대신, 가사 전달에 있어서는 노랫말마다 음절 하나 하나를 분절하는 부름새가 벨벳의 정신과 너무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All Tomorrow's Parties" 를 to-mo-row-z-par-tee-z 로, 거기에서 또 마지막 z는 길게 늘여서 부르는 식. 뜻도 모르고 그저 앵무새처럼 가사를 외워서 단어 단위도 아니고 음절 단위로 하나 하나, 또박 또박 따라 부르는 품에서, 동요대회에 출전한 아동이 연상되곤 했던 것이다. 의 노래가 무심한 듯해도 진심이 담겨있는 느낌이라면, 니코는 온갖 진심과 정성을 들이는 것은 알겠는데 모종의 아쉬움을 계속 남기곤 했던 것이다. 악센트를 감추려는 의도 같기도 하고, 아니면 유창하기는 해도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노래를 하느라, 그 사실을 매순간 스스로 자각하며, 단어 하나 하나, 음절 하나 하나마다 각성하고 긴장한 상태로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외국어와 불화하며 10년 이상을 살아온 자의 지나친 투사일까. 

그런데 "Fairest of the Seasons", 즉 "가장 찬란한 계절", 그리고 저 노래가 실린 니코의 독집 앨범, Chelsea Girl , 가수로서, 나아가 뮤지션으로서의 그녀에 대한 회의적 평가를 전면 수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앨범에서 니코는 루 리드, 존 케일, 밥 딜런 등 거물들에게 받은 곡들을 소화하는데, 첫 번째 곡인 이 곡이 단연 압권. 과장하거나 과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슬픔을 애써 억누르거나 감추지도 않고, 담담하게 드러내는 낮은 목소리가 돋보인다. 기타와 현악 위주의 편곡에도 잘 어울린다. 여기에서도 "seasons"를 sea-son-z 로, 또 z는 길게 늘여서 부르는 건 여전하지만, 그것도 도드라지거나 거슬리기보다는 그녀만의 고유하고 개성적인 스타일로 받아들여진다.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구스 반 산트의 영화 Restless 에서였다.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뒤 우울증세를 보이며 연고없는 이들의 장례식장 다니는 게 취미인 소년과 시한부 인생인 소녀의 따라서 시한부인 사랑을 그린 영화. 문제의 노래는 영화 마지막 소녀의 장례식 시퀀스에 나온다. 소녀의 행복했던 시간에 대한 소년의 플래쉬백, 그리고 그 시간을 생각하며 빙그레 미소짓는 소년을 배경으로. 거기에 니코의 목소리가 현악 위주의 편곡에 어우러지며 "언제 떠나느냐고 묻거든 가장 찬란한 계절에 떠나리"라 읊조리는데, 거기에는 죽음이라는 비극적 상황 앞에서 바로 그 소년과 같은 미소를 짓게 하는 힘이 있다. 루 리드식의 냉소적이며 자못 패배주의적인 무심함과는 다른, 따뜻함이 느껴지는 담담함이랄까.

한동안 잊고 있던 이 노래를 웨스 앤더슨 헌정 음반인 I Saved Latin 에서 다시 만났다. 웨스 앤더슨 영화에 쓰인, 고로 웨스 앤더슨의 음악 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하면서 그 자체로 전설들인 곡들을 이 시대 인디밴드들이 커버해서 만든 음반. 벨벳(내가 좋아하는 "Stephanie Says")도 있고 데이빗 보위도 있고 또 프랑수아즈 아르디의 "Temps de l'amour" 도 있다. "Fairest of the Seasons"는 여기에서는 인디밴드 Trespasser's William 가 불렀다. 단순한데도 몽환적인 기타 반주로의 편곡도 좋고, 보컬은 니코보다 실력이 단연 월등하다. 그러면서도 니코가 연출하던 담담한 목소리를 또 다른 방식으로 살렸다. 떠나야 한다면 찬란한 계절에, 그리고 떠날 때는, 당당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대도, 담담하게,라 전하던 바로 그 목소리.

2016년 12월 1일 목요일

카프카의 "계단"생각

Comment, dans cette vie brève, hâtive, qu'accompagne sans cesse un bourdonnement impatient, descendre un escalier ? C’est impossible ! Le temps qui t'est mesuré est si court... qu'en perdant une seule seconde, tu as déjà perdu ta vie entière, elle n'est pas plus longue, elle ne dure justement que le que tu perds ! t'es-tu ainsi engagé dans un chemin, persévère à tout prix, tu ne peux qu'y gagner, tu ne cours aucun risque ! Peut-être qu'au bout t'attend la catastrophe, mais si dès les premiers pas tu avais fait demi-tour et si tu avais redescendu l'escalier, tu aurais failli dès le début, c'est plus que probable, c'est même certain. Ainsi ne trouves-tu rien derrière ces portes, rien t'est perdu, élance-toi vers d'autres escaliers ! Tant que tu cesseras de monter, les marches ne cesseront pas : sous tes pieds qui montent, elles se multiplieront à l'infini. 
뭐라고? 계단을 내려가겠다고? 그렇잖아도 짧고 서두르면서 또 못참고 징징대는 것이 인생인데? 그건 불가능해! 네게 주어진 시간은 짧아. 일분 일초라도 잃으면 그건 인생 전부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야. 한평생이라 한들 네가 잃은 그 순간보다 더 길다고 할 것도 없어. 그러니까 한번 가기로 한 길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계속 가야 해. 잃을 것은 없어. 위험할 것도 없고. 어쩌면 길의 끝에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만약 첫걸음부터 되돌아갔거나 계단을 내려갔더라면 넌 아마도 시작부터 이미 실패했을 거야. 아마도가 아니라 확실히. 문 뒤에는 아무 것도 없어. 네가 잃은 건 없어. 다른 계단을 찾아 걸음을 디뎌 봐.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면 계단은 계속해서 나올 거야. 네가 계속해서 걷는다면 계단은 끝없이 펼쳐질 거야. 
- Franz Kafka, "Protecteurs" in La muraille de Chine Gallimard, 1950, p. 173. Citation tirée de Tiphaine Rivière, Carnets de thésard, Seuil,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