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31일 일요일

A Turing test (sort of) with Siri



A test that costed me a lot. This is my first encounter with Siri... after all those years they must have experimented everything they could do with this creature! Sounds correct to me, polite, modest and gentle (maybe too gentle to be human), in short not that silly after all... only if connected to internet, which is not always the case with me. Quite amused when I'm called by my name, pronounced almost perfectly, in a much better way than by those real human francophones. Still a long way for Siri to evolve. Or maybe better like this: a Siri like "Sam" in the film her, an OS to fall in love with, would be too much. Suffices to be friend with, and it does just as it is now. A friend we like just the way he or she is... if only connected.


2015년 5월 25일 월요일

플라톤, 데플레솅의 마들렌느

아르노 데플레솅의 새 영화, <젊은 날의 세 가지 추억 Trois souvenirs de ma jeunesse>는 요전 에 언급한 바 있는 그의 96년작 <나는 어떻게 싸웠는가 Comment je me suis disputé...>의 시퀄이자 프리퀄이다. 

20년 전 철학 박사 논문을 쓰던 폴 데달뤼스는 인류학자가 되어 세계 전역을 떠돌며 살고 있다. 그러다 "다언어 구사자라는 이유로" 외무부 발령을 받고 귀국하는데, 입국 절차를 밟던 중 신분증이 문제가 되어 다소 곤란을 겪게 된다. 이로써 그와 단지 동명이인일 뿐 아니라 국적과 생년월일과 출생지까지 모든 것이 꼭 같은 인물이 실존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는 그가 고등학생 시절, 구소비에트로의 수학여행 중에 한 유대인에게 자신의 여권과 비자를 이행함으로써 이스라엘 입국을 도운 사실에 연유한 것(80년대 프랑스에서는 이런 일이 꽤나 있었던 모양이다. 몇 년 전 같은 소재를 다룬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로써 폴은 지금껏 그 유대인이 자신의 신분을 간직한 채로 살아오다 2년 전에 사망했음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가 전제. 이를 계기로 폴은 과거를 회상하고, 영화는 그의 플래시백을 프롤로그, 유년 시절, 고교 시절, 청년기, 그리고 에필로그라는 참으로 교과서적인 구성으로 보여준다. 

물론 세부로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 그리고 세부 하나하나가 기가 막히고 어떤 것들은 숨이 막히게 아름다워서 그것이 전부라 해도 좋을 정도다. 데플레솅의 작품들은 참으로 섬세해서 다른 장점도 많지만 특히 세부가 전부인 것이 강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강점이 특히 돋보였던 작품이 <나는 어떻게...>였다. 주인공 폴의 책상 앞에 붙은 포스트잇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경이감을 굳이 숨기지 않은 채 짚어 내려가던 카메라, 몇 달째 소식이 없던 월경이 되돌아 오자 환희에 차 담배를 무는 여주인공 에스테르를 환히 비추던 아침 햇빛 등등. 인물들의 현학적이고 문어체적인 어투가 종종 조소의 대상이 되곤 했지만 내가 보기에 이 정도는 유진 그린 같은 노골적 반자연주의에 비하면 준수하고 그렇게까지 과장도 아니다...고 강변하고 싶을 정도로 내가 이 영화와 감독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음은 부인키 힘들다. 

<세 가지 추억>은 나 같은 팬들에 대한 거의 노골적인 팬서비스였으니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전적인 지지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겠다. 게다가 유년기에서 청년기 사이의 성장담이다 보니 전작을 지배하던 실존적인 무게는 걷히고 훨씬 산뜻하고 자유로운 공기가 영화 전반을 감싸고, 인물들 사이에 흐르던 팽팽한 긴장감도 훨씬 누그러진 데다, 무엇보다 싱그러운 십대 배우들이 향수를 자극하는 80년대 의상 및 머리를 하고서 화면을 채우다 보니.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냥 밝지만은 않다. 전작에서도 다루어진 바, 주인공을 둘러싼 다소 병리적인 관계들은 여기에서도 여전하다. 폭압적이고 혐오의 대상인 엄마, 무기력하고 부재중인 아버지(그러나 이번에는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반면에 지도교수로는 여기에서는  흑인이자 여성인 인류학 교수가 등장, 주인공과는 훨씬 부드럽고 인간적인 유대 관계를 맺는다. 단지 스승이 아니라 엄마의 대리이자 대안적 부모 역할까지. 그리고 에스테르. 폴과 그녀의 관계는 힘겹고 아슬아슬하고 요즘 말로 하면 "밀당"의 지리한 반복이다. 사랑이라기보다는 격정이고, 그래, 정념에 가까운. 그럼에도 이 모든 것에서 과거에 대한 자족적이고 나르시시스틱한 향수라기보단 젊음에 대한 동경과 경이가 지배적으로 느껴진 정서. 

그리고 트뤼포에 대한 거의 노골적인 오마주. 로맨티시즘, 그리고 여성에 대한 찬미 (특히 에스테르 역을 맡은 신인 여배우는 정말로 르느와르 그림의 주인공이 살아난 듯한 외모를 지니기도 했지만 특히 데플레솅의 카메라에서는 더더욱 눈부시다. 전작에서도 칙칙한 남자인물들에 비해 여배우들은 다들 빛이 났었다. 에스테르 역을 맡았던 에마뉴엘 드보에서부터 단역으로 나왔던 앳된 마리옹 코티야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사소하게는 전작에서도 나왔던 "영상편지" 장면. 그러니까 에스테르가 폴에게 보낸 편지를 영상화함에서, 보통 같으면 보이스 오프의 내레이션으로 깔고 화면 상으로는 실제 편지라든지 아니면 발송인이나 수신인을 비추는 식으로 연출했을 것을, 그게 아니라 직접 카메라를 향해 편지의 내용을 구두로 읊는 에스테르를 비추는 것이다. 이 영상편지 기법은 트뤼포가 <두 영국여인과 대륙 Deux Anglaises et le continent>에서 쓴 걸로 유명하다. 나는 트뤼포를 아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가 즐겨 쓰던 이런 영화적 장치들은 너무나 좋아한다. 누벨바그 특유의 기법이기도 했고. 기법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특별한 기술 없이 그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인물과 상황을 연출한 것인 뿐임에도, 이렇게 사소한 터치 하나로 사실과 허구, 실제 대상과 표상 사이에 위치한 어떤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공간이 열리고 그곳에서는 또 극중 인물들과 관객의 만남의 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시퀀스는 정말 압권. 플래시백이 끝나고 영화는 다시 현재 40대 폴의 시점으로 돌아온다. 아무 일 없었던 듯 외무부에 출근하며 독신 파리지앵의 삶을 영위하던 폴. 그러다 청년기를 함께 했고 에스테르와 삼각관계에 놓이기도 했던 친구 장-피에르의 편지를 받는다. 에스테르 생각이 났는데 혹시 연락처를 알 수 있겠냐는 내용의. 그러던 중 폴은 음악 공연을 보러갔다 바로 그 장-피에르를 우연히 만난다. 부인과 대동한. 부인의 제안으로 셋은 한 잔 하러 가는데, 거기에서 폴은 과거사와 장-피에르가 편지를 보낸 사실을 폭로하며 쌓였던 분노와 배신감 등등을 폭발적으로 드러낸다. 마티유 아말릭의 배우로서의 진가가 돋보이기는 했지만 보기 힘들었던 장면. 그러다가 화면은 다시 과거의 폴과 에스테르가 사랑을 나누던 침대로 돌아간다. 환한 아침 햇빛을 뒤로 눈부신 몸을 드러낸 채 에스테르가 폴에게 낯선 말로 책을 읽어주는데, 처음에는 무슨 언어인지 몰라 히브리어인가 했더니, 세상에, 희랍어였고, 책은 플라톤이었다. 아마도 <파이드로스>. 바칼로레아도 겨우 통과했을 정도로 공부에는 통 관심이 없어 보였던 그녀가 인류학 전공생인 폴에게 플라톤을 희랍어로 읽어주다니. 거의 "금발의 역전"이랄까. "왜 희랍어를 관뒀니? 잘 하는 것 같은데" 하고 묻는 폴. 이 질문은, 극중 앞서 폴이 지도교수와 처음 대담할 때 희랍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받았던 면박("어떻게 희랍어도 모를 수가 있어? 그러면서 감히 내 지도를 받겠다니!)과 절묘하게 대치된다. 그리고 다시 장면은 전환되고 30년 후의 폴. 아마도 장-피에르 부부와 헤어져서 나오는 길이었던 것 같다. 센느 강의 다리를 지나는 그의 머리 위로 웬 종이들이 흩날린다. 한 장을 들어 들여다 보는 폴. 희랍어로 쓰여진 책장들이다. 에스테르가 희랍어는 더 이상 관심 없다면서 폴에게 가지라며 건넨 바로 그 플라톤. 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물질과 기억>에서의 베르그손의 구분에 대한 "기억"에 의존해서 써보건대, 이전까지의 플래시백이 그야말로 "추억(souvenir)"이라면, 의도적으로 복기된 것이라면, 이것은 그야말로 "기억(mémoire)", 자발적으로 환기되는 것이다. 어떤 촉발의 계기들을 통해. 프루스트에게 마들렌느였던 것이 데플레솅에게 와서는 플라톤이 된 것이다. 말하자면, 조야한 줄 알면서 감히 말해 본다면, 플라톤화된 마들렌느 (Madeleine platonisée). 과거는, 기억은, 그렇게 "있"다. 행복한 것이든, 아픈 것이든 간에. 그리고 어떤 순간에 현전한다. 주로 기대치 않은 순간에. 그러면 어떻게든 맞아야 하는 것이다. 맞거나 아니면 맞서거나.  

2015년 5월 24일 일요일

괴팅겐의 추억 혹은 또 다른 나태의 증거

"푸앵카레의 괴팅엔 강연을 읽다. 아, 괴팅엔! 20세기 초 학이란 학은 다 거기에서 나왔다"고 일기에 적던 오륙년 전의 나와, 괴팅엔행 기차에서 "괴팅엔, 괴팅엔이라, 많이 들어봤는데, 어디에서 들었더라?"며 머리를 긁적였다가 도착해서야 비로소 무지/망각을 깨달은 두 해 전의 나, 그리고 이 두 일화를 떠올릴 때마다 부끄러움에 몸둘 바를 몰라 하며 스스로의 과학사가로서의, 아니 학자로서의 자질을 의심하는 요즈음의 나. "잘 잊는 사람은 복되다, 자신의 허물까지 덮어버리는즉" (니체, 선악을 넘어서). 기억력이 지금보다 좋았던 시절엔 하루에도 몇번 씩 부끄런 기억을 끄집어 내고는 몸서리치곤 했다. 심지어 허물이 될 만한 걸 행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기의식이나 의지조차 없었거나 있었다 해도 그 효력이 지극히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아주 어린 시절조차도, 그보다는 조금 덜 어린 시절의 내겐 받아들이기 힘든 수치스런 기억이렀다.
...라고 적은 것이 2010년이니 이도 벌써 자그마치 5년 전의 일이다. "푸앵카레의 괴팅엔 강연"을 읽은 것은 2005년이고, 괴팅겐행 기차를 탔던 것은 2008년. 그리고 저 두 일화를 떠올리며 몸둘 바를 몰라했던 것은 2010년. 후자의 상황은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즉 괴팅겐이라는 이름을 접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두 일화가 떠오르고 또 부끄러움에 몸서리쳤다는 얘긴데, 문제는 저 이름이 내 전공과 주제의 특성상 도대체 피해 가기 힘들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럴 것 같다는 사실이다. 망각의 교설보다는 자의든 타의든 영원회귀 모델을 따라야 할 상황.

괴팅겐이 다시 떠오른 것은 어제 참관한 한 학술행사 덕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전파 및 해석이 주제였으니 말 다했다. 괴팅겐을 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가우스, 그리고 가우스의 제자 리만이 다 괴팅겐에 있지 않았는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포문을 실질적으로 연 리만의 1854년 교수자격논문, <기하학의 기초를 이루는 가설에 관하여>는 리만이 가우스의 주문에 따라 쓰고 실제로 괴팅겐 대학의 청중 앞에서 읽은 것이었다. 이 강연에는 수학과보다는 타 학과에서 많이 왔다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많이"라는 부사는 아주 상대화해서 이해해야겠으나. 이후 20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 괴팅겐은 영화계의 헐리웃처럼 과학계의 많은 스타들을 배출하고 또 끌어들였다. 당장 떠오르는 이름만 기억에 의존해서 열거해 보면, 프레게, 힐베르트, 민코브스키... 그리고 아마도 플랑크도? 그리고 이번 강연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슈바르츠쉴트도 1901년에서 1909년까지 괴팅겐에 머물고, 체류 과정에서 우주론적 사변에 관심을 가졌다 한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푸앵카레의 1909년 괴팅겐 강연이 힐베르트의 초청에 따른 것이었다는 것. 이들은 힐베르트의 <기하학의 기초> 출간 후 벌어진 논쟁으로 다소 의가 상한 상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좁힐 수 없는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었던 차였다. 그래도 힐베르트가 가우스를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하면서 푸앵카레를 초청하면서 둘 사이에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으나, 그러나 모르는 일, 이라 발표자는 덧붙였다. 그 행사란 다름이 아니라 가우스가 삼각형의 합이 실제로 180도인지 아니라면 얼마나 어긋나는지를 경험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괴팅겐 인근의 산 꼭대기 세 개를 골라 그 사이각들을 실제로 측정한 실험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우스의 기하학적 경험론의 증거이자, 혹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경험적 반증이라 평가되는 바로 그 전설적 측정이다 (그저 전설이라는 견해도 있다. 갈릴레오의 사탑 실험처럼 말이다). 힐베르트는 초청장에서 일종의 소풍격으로 가우스가 실험 대상으로 삼은 산을 직접 탐방하는 프로그램도 마련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실제로 성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는 것이 발표자의 전언.

이 모든 것과 별개로, 이제는 괴팅겐을 생각하면 저 유수한 과학자, 수학자, 철학자들의 이름만큼이나 바르바라가 떠오르는 것 또한 사실이니.



바르바라의 "괴팅겐"은 당시 괴팅겐 대학에 다니던 한 팬의 초청으로 괴팅겐에 가서 보고 느낀 내용을 담은 노래다. 아름다운 노래. 그러나 나에게는 또 하나의 나태의 증거이자 분열의 상징. 반성. 또 반성.

2015년 5월 20일 수요일

나태의 증거

수년 전, 영화학 하는 ㅇ 선배가 내게 농담으로 "아인슈타인? 에이젠슈쩨인은 알아도..." 해서 웃은 일이 있다. 한 분야에 오래 있다 보면 이런 직업병 증세야 흔한 일이고, 아니 병적이라 할 것도 없는 것이, 이런 경우를 두고 상아탑이니 우물 안 개구리니 하며 비난하고 스스로도 부끄러워하던 시대는 지났고, 오히려 선택과 집중이야말로 학자로서 가질 의무이자 갖춰야 할 덕목이기도 한 전문화 시대를 살고 있는 걸 생각하면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전공은 뒷전이고 다른 쪽에 곁눈질 하느라 얼마나 나태했고 해이해져 있었는지, 느끼고 뉘우친 계기가 몇 있었으니.

수학철학자 알베르 로트만(Albert Lautman)의 책을 오랜 만에 펼쳤는데, 순간적으로 그 이름이 "로버트 알트만(Robert Altman)"으로 읽히는 것이 아닌가. 사실 알트만은 그리 좋아하는 작가도 아닐 뿐더러 제대로 본 작품도 없는데. 반면 로트만은 워낙 난해해서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나 그래도 동경하는 철학자 중 하난데. 변명을 하자면 이름이 좀 비슷하긴 하다. 여차하면 아나그람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보니 그건 아니겠다. Lau와 Ro 때문에 교환불가능.

벼룩시장에서 광물(심지어 운석 조각도 있었다)과 고고학 유물 같은 것들을 전시해 놓은 노점상을 지나는데, "pointe de flèche"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말뜻을 모르겠어서 같이 있던 ㅇ 언니에게 "flèche"의 뜻을 물었다. "화살. 그러니까 화살촉들이네." 답을 듣는 순간 아찔. 어떻게 그걸 모르고 물어볼 수가. "시간의 화살(flèche du temps)"의 그 "화살"인데 말이다. 당연히 아는 단어였다. 아니 모를 수가 없는, 몰라서는 안 될. 논문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열역학 2원리를 논하는 이상 피해갈 수 없을 뿐더러 그 자체로도 매우 중요한 개념. 물론, 자주 보던, 특히 책에서나 보고 일상적 대화에서는 거의 쓸 일이 없는 이런 개념어들은, 그런 개념어들일수록 더더욱, 다른 맥락에서 접하게 되면 순간 낯설게 느껴질 수는 있다. 그래도 한 개념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다면 그것이 어느 맥락에 놓이든 바로 그 익숙한 의미가 거의 반사적으로 떠오름이 마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만큼 익숙해져 있지 않았다는 얘기다. 반성, 또 반성.

2015년 5월 16일 토요일

비교우위의 불행이 주는 위안

중세철학자 아벨라르의 Historia calamitatum. 말그대로 그가 겪은 온갖 불행한 개인사를 기술한 자전적 서신이다. 발단은 그의 친구 중 하나가 겪은 또 다른 불행. 본인에게는 더없이 심각한 사태요 비극적 사건이었을 것이고, 그로 인한 비통한 심정을 친구에게 하소연하며 위안을 구했던 모양인데, 그 상대가 하필이면 아벨라르였던 것이다.

아벨라르가 누군가. 파란만장도 그냥 파란만장 정도가 아니라, 몇 세기를 거쳐 몇 명 나올까말까한 드라마틱한 생애를 한 몸으로 산 인물 아닌가. 그 드라마도 어디 그냥 드라마인가. 그저 당대 최고의 사상가로서 겪은 명성, 질투, 모함, 몰인정, 오해, 가난 등등이야 역사상 전례와 후례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실재했더라도 울고 갔을 사상 최고의 연애담을 실제로 살았던 인물은 내가 보기에는 정말로 전무후무할 것 같다.

브르타뉴 출신으로 일찍부터 명석한 두뇌로 두각을 나타내어 파리로 올라와 소르본느에서 신학과 철학 등등을 수학, 당대 최고의 석학의 교리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 그가 당시로서는 파리 외곽에 속해 있던 생트 주느비에브에 개설한 강의에는 소르본느보다 더 많은 제자들이 모이고, 그의 명성은 날로 퍼져 세계 각지에서 그에게 배우러 오기에 이른다. 그렇게 교육과 연구에 여념이 없는 세월을 보내다가 한 사십 줄에 접어들 무렵, 그는 명망있는 성직자로부터 가정교사 제안을 받는다. 그가 맡은 학생은 성직자의 조카인 엘로이즈. 열여덟의 꽃 같은 외모에 학문적 교양까지 갖추어 이미 명성이 자자했다. 이를 회상하며 아벨라르는 말한다. 그 삼촌도 너무하지 않았는가, 그런 어린 양을 늑대에게 맡겨 놓다니.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갈수록 교리문답보다는 달콤한 말이 오가고, 말만 오가는 게 아니라... 급기야 엘로이즈는 태기를 보이기에 이른다. 그러자 아벨라르는 그녀를 브르타뉴 시골집으로 데리고 가 출산까지 돌보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에게 엘로이즈는 아스트롤라브(Astrolabe), 즉 천구의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아스틀로라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이후 엘로이즈의 편지에서도 마찬가지). 이후의 행보를 논하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에게 파리 부근 아르정퇴이 수녀원에 일단 들어갈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엘로이즈의 삼촌과 가족들의 화를 잠재우기 위해 엘로이즈와 결혼할 것을 언약. 대신에 두 사람의 명예를 위해 결혼은 비밀리에 올리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엘로이즈는 이에 반대한다(오, 엘로이즈! 나중에 편지에도 나오지만 그녀는 아벨라르의 연인이기 전에 가장 뛰어난 제자다. 때로 스승을 넘어서는). 이유인즉슨, 결혼생활이 아벨라르의 학문 탐구와 진리 추구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것(위대한 성인과 철학자들이 대부분 독신자로 남았다는 역사적 근거를 대며), 그리고 또 하나는 만약 결혼을 한다면 이는 엘로이즈 자신의 명예를 실추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 자신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단지 결혼이라는 저속하고 현실적인 목표를 가졌던 것으로 오인될 것이므로. 그러나 결국 둘은 비밀결혼식을 올리고 엘로이즈는 수녀원으로 돌아가는데.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고 또 아벨라르가 술수를 쓴다고 의심한 삼촌 일가. 어느날 밤 아벨라르의 숙소에 찾아가 자고 있던 그에게... 거세를 감행한다. "죄를 저지른 바로 그 부분으로 죄값도 치루어야 한다"는 미명 하에.

그 이후에도 아벨라르의 시련은 끊기지 않고 이리저리 방랑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나, 그의 명성만은 여전하여 찾아오는 제자들은 끊이지 않는다. 엘로이즈는 그녀대로 수녀원에서 명성을 쌓아가고. 아벨라르는 그녀를 위해 수녀원을 창립, 원장수녀로 앉힌다. 이후에 둘이 다시 만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아벨라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입수해서 읽은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편지를 보내고 이로부터 둘 사이에 오간 서신 몇 편이 전해질 뿐. 성직과 수녀원 운영에 관한 다소 공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가끔 자신들의 뜨거웠던 과거를 회상하고 또 현재의 감정을 토로하는 대목도 나온다. 아벨라르는 스승이자 성직자로서 자못 엄숙한 태도를 유지하는 반면, 엘로이즈는 상대적으로 감정의 표현에 있어 자유롭고 때로는 놀랄만큼 과감하게. "내가 수녀원에서 수녀로서 한 모든 일은 신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사랑에서였다", "세상을 다 가진 아우구스투스 같은 황제가 나에게 청혼한다 해도, 나는 그의 황후가 되느니 당신의 창녀가 되는 편을 택하겠다", "모두들 나의 정숙함과 신실함을 칭송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 위선자라 느낀다. 어찌 보면 당신이 겪은 그 큰 불행이 당신에게는 오히려 다행인 것이, 당신은 육욕으로 괴로울 일은 없으니. 나는 심지어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고 기도를 드릴 때조차 자꾸 과거 당신과 나눈 그 달콤한 육체의 기억이 자꾸 되살아나 괴롭다" 등등.

다시 처음의 편지로 돌아가면, 요는 이렇다 : 친구여, 그대의 불행은 내가 겪은 바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니, 괴로워하지 말게나. 그러나 과연 그런가? 친구의 더 큰 불행이 내게 위안이 될 수 있는가? 불행을 호소하는 자에게 그보다 더한 불행을 생각하라, 흔히 하는 위로 중 하나다. 그러나 지구상 어딘가에서 지진이 일어나서 수천 명의 사람이 죽어나가도 내 몸에 난 미소한 상처가 실질적으로는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실질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게다가, 비교우위의 불행, 특히 그 불행의 당사자가 친구일 때, 친구의 아픔을 위안으로 삼는 태도는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다른 것을 떠나서 무엇보다 실제로는 위로로서 그다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 오히려 나의 불행으로 겪은 아픔이 친구의 불행으로 인해 배가되지 않겠는가?

아벨라르의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이 가르침과 사례를 본받아 용기를 내어, 시련이 부당하면 부당할수록 믿음을 가지고 견뎌내세나. 이 시련이 우리에게 이롭지 못하다 해도 속죄에 기여하는 바가 있음은 의심하지 말지어니. 모든 것은 신의 뜻에 따르고, 각 신자들은 고난의 순간에 최고선인 신이 세상 어느 것도 당신의 전지적 질서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사, 이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당신이 직접 나서 좋은 결과로 맺어지도록 한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받으니.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 현명한 것일세 :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 되도록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는 사도의 권위있는 말은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안인지. 이것이 현자 중의 현자가 잠언서에서 "정의로운 이는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이라 쓰면서 염두에 두었던 진리이네. 시련이 신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알면서도 이에 노여워하는 사람들은 정의의 길로부터 벗어나고 있음을 그는 보여주고 있네. 그리고, 입으로는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라 말하면서 속으로는 반발하여 자신의 의지를 주의 의지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은 신의 의지보다 자신의 의지에 얽매인 사람임을. 잘 있게나.
이것만 보면 전라이프니츠적 낙관론인가 싶지만, 신이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다 잘 될거야"라는 사소하고 다소 무성의한 위안과 다를 바가 뭔가 싶기도 하지만, 저 모든 불행을 겪은 이가 그에 비하면 사소한 불행에 불평하는 자에게 건네는 말이라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사소한 말이라도 거기에 진심이 담겨 있을 때 그만큼 큰 위안이 되는 것도 없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민망한 제목이지만 어쩌겠는가. 자꾸 이 말이 머릿속에 맴도는 것을. 이어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내 평생 그토록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네라" 등등의 문구들도. 이 모두를 쫓아내기 위해서라도, 이를 둘러싼 모든 생각을 비워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써야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비교적 최근 기형도를 다시 떠올린 계기가 있었다. 최근이라 해봤자 기록을 보니 1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규명되어질 필요가 있다"에 관해 ㅅ 언니와 얘기하면서. 당시에 기쁨, 슬픔, 노여움, 즐거움, 요컨대 희로애락의 정서(affect) 혹은 정념(passion)에 관해 얘기를 나누던 중 문득 떠오른 시가 바로 그것이었다. 도대체 이 정서나 정념이라는 것이 내게는 도통 개념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어서 당시에 조금 공부를 해보다가 관두었지만, 그리고 그 이후로도 가끔씩 생각해 보지만,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그중 단연 흥미로웠던 것은 스피노자의 정서(affectus) 개념. 정서보다는 감응 혹은 감응소라는 말을 나는 더 좋아하고 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에티카> 3부는 이런 종류의 감응을 그야말로 "논리적으로 규명"하는 기획이다. 이를 모든 정신과 합리적 이성에 반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그리하여 대개는 배척의 대상으로 보았던 다른 합리론자들과는 달리, 스피노자는 부적합한 관념이 아니라 적합한 관념, 즉 원인을 알고 원인을 내부에 포함하는 관념일 수 있다고 본다. 감응은 정신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신체와 유기/조직적이고 평행한 관계를 맺은 결과로서 나오는, 혹은 그러한 관계의 증거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순수 관념과 다르다. 단지 외부 자극이나 정신의 상태에 대응하는 신체적 혹은 신체상의 반응이거나 반작용이 아니라, 정신과 신체가 감응/변용(affectio)의 원인이거나 결과로서 함께 참여해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감응은 능동적/적극적인 것과 수동적/부정적인 것의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내가 내 변용의 원인에 대한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을 갖지 못할 때 그것은 수동적인 감응, 즉 정념이 된다. 즉 외부의 어떤 것에 영향을 받을 때. 정확히는 그렇다고 생각, 아니 실은 착각할 때. 실은 외부의 자극-나의 반응이라는 과정이 일방향적이지 않고 그 자극을 감각하고 인지함에서부터 이미 나 자신 그 변용 과정에 참여하고 기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모르기 때문에 내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감응 발생의 또 다른, 좀더 근본적인 원리는 일종의 관성 원리. 모든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완전해지기 위한 경향성을 지니는데, 원인에 따라서, 변용에 따라서, 그 존재가 가진 역량 혹은 행위 능력은 증감된다. 어떤 원인으로 인해 내 존재가 감소/위축되면 이것이 내게는 슬픔이 되고, 슬픔은 다시 증오, 분노, 질투 등등 다른 모든 부정적인 감응들의 토대가 된다. 반면에 이 변용의 양태에 따라  내 존재의 역량이 상승하여, 내가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나는 기쁨을, 그 기쁨의 원인을 제공하는 대상에 대해서 나는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그 대상 또한 나와 같은 방식으로 감응하기를 갈구한다.

그러면 그 사랑을 잃었을 때에는? 내가 느꼈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사실은 원인(을) 제공(했다 생각했던) 자에 대한 그릇된 관념으로 인한 부적합한 관념의 소산이었다면? 답 : 그건 사랑이 아니었던 게다. 정념이었던 게다. 완전성은커녕 내 이 한 줌의 존재조차 가누지 못하게 만든. 그래서 더 무서운. 그런만큼 단연코 벗어나야 할.

2015년 5월 14일 목요일

이런 차이 없는 반복이 있나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또 하나의 박사 탄생을 축하하며"라는 제목으로 친구들에게 보낸 메일에다 나는 이렇게 적어 놓았었다 :
이제 남은 예비 박사라고는 정말 나 하나뿐이구나. 이젠 정말 상황 보고하기도 힘들다. 민망하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도 지루해서. 계속 statu quo 이니 말이야. 변화라 할 만한 게 있다면...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싸서 도서관에 정기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 나로선 꽤 큰 변화인 것이 사실. [...] 삶 전반을 뭔가 정규화하고 규칙화하려는 태도의 변화를 상징한다고나 할까.

예전에는 댄디즘이나 혹은 영혼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명목하에, 그리고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을 운운하면서, 일체의 계획적인, 목표에 맞춰 현재를 희생하는 삶을 두려워하고 회피했었는데, 그것이 결국 삶에 대한 진지하거나 치열하지 않은 태도에 다름 아님을 깨달은 순간이 있었어. 여전히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그에 맞춰 일정을 조직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긴 하지만 (예를 들어 논문 일정은 여전히 차일피일 연기되고 있는 중 : 아무래도 빨라야 올가을), 최소한 일상에서만큼은 규칙성을 담보하고 이를 습관화, 나아가 체질화하는 데까지는 이를 수 있을 것 같고, 한 달여의 경과, 어느 정도는 이른 듯도 한데. 비록 아직 생산성 있는 결과(즉 논문의 진전, 나아가 완성)까지는 이르진 못했지만.
그런데 그로부터 2년 후인 불과 며칠 전. 최근의 새로운 깨달음이랍시고 다른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
최근에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뷜가트한 니체주의랄까요. 불확실하고 미결정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는 삶을 거부하고 현재에 충실하자. 운명을 사랑하자. 이것이 20대부터 제 모토였는데, 실은 그것이 나태와 불성실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깨달음. 성실한 삶의 태도란 목표를 세우고 그에 맞춰 계획을 세우는, 그리하여 목표를 달성하고 그야말로 미래를 예정된 바대로 현실화하는 것이었구나 하는. 계획 경제, 목표량 달성, 이런 체제의 미덕.

그래서 계획을 사소하게라도 세워 그에 맞추는 습관을 길러보자, 이런 취지 하에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논문, 나아가 인생에까지 적용해 보려 했는데... 그게 참 안 되더란 말이지요. 계획대로 안되니까 대안인 플랜 비, 그도 안 되어서 씨, 디... 무한까지 가거나 아니면 무한 루프.
같은 결심, 같은 계획, 같은 실패, 같은 재계획의 무한 반복 재생. 이건 뭐 영원회귀에 가깝다. (무려 15년 전에 읽고 배우고 이해한 기억에 의존해서 써보건대)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 순간 하나하나를 견디거나 심지어 사랑할 자신이 있느냐, 그렇게 살아야 한다, 라는 것이 니체 영원회귀 교설이 뜻하는 바라면, 나는 이를 본의 아니게 실천해 왔던 셈. 범속할지언정 태생적 니체주의자였달까. 그런데 바로 그에 모순되는 모토를 세웠으니 실현될 리가 있나.

원칙주의의 필요성. 아니 필연성. 경험적 수행과 시행착오를 거쳐 축적된 자료로부터 요행히 "우연적" 결과를 얻으리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아무리 확률론적 근거를 찾는다 해도 이는 기껏해야 희망적 사고에 대한 합리화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어떤 원리나 원칙, 하다 못해 사전 모의나 계획 없는 실험 및 관찰이 그 어느 생산적 결과도 가져다 주지 못함은 소박한 경험주의자나 귀납주의자가 아닌 이상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실. 하물며 이론의 영역에서도 그러한데 실천의 영역에서는 어떠하랴. 실천의 영역에서는 의지가 현실에 대한 구성력과 미래에 대한 결정력을 분명히 가지니 말이다. 때로 도덕법칙이 자연법칙보다 오히려 강한 구속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래서다...

... 여기까지 쓴 후 그로부터 다시 2개월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반복. 2년 전부터 지금껏. 이제는 정말 반복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아니 이미 끊겨 있었거늘, 그러고도 못내 아쉬워서, 간신히, 간간이, 그럼에도 끊임없이 고리를 잇고 있었던 것이다. 비누방울처럼 잠깐 피어올랐다 사라지고 말, 그러고 나면 그 뿐일, 그런 고리를. 그러는 동안에 발목에는 사슬이 감기고 그 고리는 점점 더 길고 무거워지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른 채. 이제는 정말 끊어야 한다. 반복한다. 이제는 정말 끊어야 한다.

2015년 5월 11일 월요일

책상 수난사

상처를 어루만지려다 - [le bruit bleu]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당시 살던 지붕밑 하녀방에는 침대가 없었다. 대신에 메트리스를 올려두도록 만든 메자닌이 있었다. 사실 메자닌이라 하면 좀 거창하고, 두꺼운 나무판자를 두 벽 사이에 걸쳐놓은 것이 전부. 게다가 일단 올라가면 앉아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천장에 가까운 높이. 아주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르내릴 때는 사다리를 타야했는데, 그 사다리란 것도 사실 매우 낡고 부실한 것이라 아무리 익숙해졌다 싶어도 늘 조심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산 2년 동안 총 2회의 추락사고가 있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11년 전, 날짜를 보건대 아마도 요맘 때였던 것 같다.

온몸에 멍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책상이 파손된 사실이 당시로서는 더 속상하고 큰 일이었다. 떨어지면서 메자닌 바로 밑에 놓아둔 책상과 부딪히는 바람에 책상판의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것. 내 몸이 던진 충격이 적진 않았겠으나, 그 책상이란 것도 톱밥을 채워 만든 허술한 제품이었던 것이다. 손상된 모서리를 보며, 새로 사야 하나, 한숨을 쉬다가, 결국에는 그냥 쓰기로. 파손된 부분에다가는 어딘가에서 주워온 브레송 영화 카탈로그의 포스터 사진들을 잘라다가 붙였다. <잔 다르크의 재판>, <소매치기>, <돈> 등등. 누군가 와서 보더니 브레송을 좋아하냐고 물었는데, 마침 가지고 있었고 또 잘라서 써도 아깝지 않을 만한 것으로 골랐을 뿐. 오히려 이를 계기로 브레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 이후로 중간에 몇 번 교체의 기회가 있었고 실제로 교체하기도 했으나, 결국 원래의, 그 문제의 책상판으로 돌아와서 지금껏 쓰는 중. 놀라운 것은 책상에 달려있던 서랍 같은 부위는 몇몇 연유로 해체 분리했음에도, 이 책상판만은 여전히 보유하고 또 사용중이라는 사실. 브레송 사진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남아 수난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나의 파리생활 12년을 함께 한 유일한 가구인 것 같다. 

그 책상의 다리...라기보다는 지지대 구실을 하는 나무 판대기 또한, 부실하긴 해도 계속 쓰고 있었다. 며칠 전, 또 다른 불의의 사고가 있기 전까지는.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서서 기지개를 켰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다. 가끔 있는 가벼운 현기증인가 싶었는데, 웬걸, 몸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사태에 이르렀다. 순간적으로는 사태가 파악되지도 않았다. 몸이 쓰러진 것까지는 알겠고, 다른 무언가가 쿵 하고 쓰러지는 소리를 아련하게 들은 듯도 했다. 의식은 있었다.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서 사태를 파악해야겠는데, 하는 생각까지는 했으니까.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고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몇 초 지나니 감각이 돌아와서 사태를 확인해본즉슨, 책상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위에 올려놓은 물건들도 함께. 몸이 쓰러지면서 책상을 쳤고, 그렇잖아도 부실했던 다리가 충격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실신은 처음이었다. 원인이 무엇인가, 수면 및 영양 부족인가, 아니, 그보다는, 이 새로운 종류의 지각경험을 어떻게 전유할 것인가 등등의 상념에 빠진 것도 잠시, 사고의 방향은 즉시 현실적인 쪽으로 전환되었다. 이제 와서 다리를 새로 사다가 끼워야 하나, 속상해 하던 중, 벽장에 넣어둔 두 개의 이동식 난방기 생각이 났다. 난방 시설이 따로 없는 이 집의 유일한 난방 수단. 책 몇 권을 받치면 높이가 얼추 맞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지금은 임시로 이동식 난방기를 지지대로 쓰고 있는 중. 임시라고는 하나 아마도 마지막이 될 것이다. 책상의 수난도 이것이 마지막이길.

2015년 5월 8일 금요일

"그 초끈 우주론 학회는 내가 가본 중 가장 초현실적인 물리학 학술행사였다"

우주론자 조지 엘리스의 2013년 논문 "On the Philosophy of Cosmology"에서 생각지도 않게 마거릿 워트하임의 이름을 접했다.  

Currently, there is a culture of allowing anything whatever in speculative cosmological theories—sometimes abandoning basic principles that have been fundamental to physics so far. Science writer Margaret Wertheim attended a 2003 conference on string cosmology at the Santa Barbara KITP, and reported as follows (Wertheim, 2012): 
"That string cosmology conference I attended was by far the most surreal physics event I have been to, a star-studded proceeding involving some of the most famous names in science...After two days, I couldn't decide if the atmosphere was more like a children's birthday party or the Mad Hatter's tea party—in either case, everyone was high... the attitude among the string cosmologists seemed to be that anything that wasn't logically disallowed must be out there somewhere. Even things that weren't allowed couldn't be ruled out, because you never knew when the laws of nature might be bent or overruled. This wasn't student fantasizing in some late night beer-fuelled frenzy, it was the leaders of theoretical physics speaking at one of the most prestigious university campuses in the world."

워트하임이라면 <피타고라스의 바지>의 저자 아닌가. 한때는 내게 중요한 책 중 하나여서 석사논문에 인용까지 했었는데. 사실 논문 주제와 크게 상관이 있지는 않았음에도. 그러나 거기에는 나름대로 숨은 의도가 있었으니. 나를 철학의 길로 이끈 여성주의 과학학에 대한  헌정의 의미였달까. 비록 그로부터는,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멀어지긴 했지만. 

그런데 엘리스의 인용도 맥락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좀 뜬금이 없어 보이거나, 아니면 다소 불필요하다는 인상을 준다. 인용구는 워트하임의 2012년 저서 Physics on the fringe: Smoke rings, circlons and alternative theories of everything (Walker & Company)에서 따온 것. 엘리스 같은 최고의 이 분야 권위자가 과학저술가의 아마도 대중서에 가까울 이 책을 인용하다니, 의외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무릇 인용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권위에의 호소 기능이 없잖은가. 스스로가 최고의 권위자라면 또 얘기가 달라지고 말하자면 탈권위에 호소할 필요가 생기는 걸까. 

한편으로는 과학이론과 과학대중화 사이의 관계에 관한 흥미로운 사례라고도 하겠다. 특히 우주론처럼 상당수 이론들이 미완성 단계이자 진행중(in progress)인 경우에서, 내가 논문에서도 다루는 바, 대중화가 이론에 대해 단지 종속적이고 일방적 흡수 및 전파의 대상에 머물지 않고  구성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인데. 이 가설을 입증하기에는 좀 미약한 감이 있으나 어쨌든 무관치는 않은 예. 

다른 한편으로 인용된 부분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것이 사실. 저 참으로 저널리스틱한 첫 문장은 직업 물리학자들의 아무래도 부족한 표현력으로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이를 필두로 인용구 전체가  엘리스 자신이 지적하고자 하는 바, 그리고 나를 포함,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을 바를 직관적이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시대 우주론의 사변적이고 "초현실적"인 경향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급인 다중우주론자들의 주장은 이렇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으면 *물리적*으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어디에선가는.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것마저도. 왜냐하면 우리의 것과는 다른 법칙이 통하는 세계가 어디엔가 있을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므로. 나아가 그러한 세계가 단지 *가능*할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이기까지 한 것이, 그 세계에서의 법칙이야말로 우리의 물리법칙을 뒷받침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 이런 얘기가 물리학과 대학생들의 술자리에서가 아니라 물리학의 세계적 석학들이 모인 자리에서 진지하게 오간다는 생각을 하면 실로 기분이 묘하다. 

경험과학 중에서는 아무래도 가장 추상적이고 경험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심지어 경험적 검증가능성조차도 확실하지 않은, 그리하여 남은 최소한의 진리조건이라고는 내적 일관성뿐이다 보니, 이 업계 종사자들이 알려진 모든 물리법칙과 모든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수단들을 총동원해서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엄밀성을 추구하게 됨은 이해함직하다. 그런데 이들을 한 군데 모아 놓으면 아무리 최고급 학회라도 아이들 생일잔치거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미치광이 모자의 티파티 같이 모두가 들뜬 분위기가 된다니.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는 짐작된다.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이념뿐 아니라 이론 역시 추상적이고 관념적일수록, 그리하여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지지 근거가 결여돼 있을수록, 이를 보상하기라도 하듯 교조화 및 극단화되기 쉽고, 그리하여 잘못하면 극단주의나 광신주의를 낳기 쉬운데, 저 초끈우주론 학회의 정경 또한 간접적으로나마 하나의 예증으로 제시할 수 있겠다...면 아무래도 과장이겠으나...과연 과장이기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