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ly, there is a culture of allowing anything whatever in speculative cosmological theories—sometimes abandoning basic principles that have been fundamental to physics so far. Science writer Margaret Wertheim attended a 2003 conference on string cosmology at the Santa Barbara KITP, and reported as follows (Wertheim, 2012):
"That string cosmology conference I attended was by far the most surreal physics event I have been to, a star-studded proceeding involving some of the most famous names in science...After two days, I couldn't decide if the atmosphere was more like a children's birthday party or the Mad Hatter's tea party—in either case, everyone was high... the attitude among the string cosmologists seemed to be that anything that wasn't logically disallowed must be out there somewhere. Even things that weren't allowed couldn't be ruled out, because you never knew when the laws of nature might be bent or overruled. This wasn't student fantasizing in some late night beer-fuelled frenzy, it was the leaders of theoretical physics speaking at one of the most prestigious university campuses in the world."
워트하임이라면 <피타고라스의 바지>의 저자 아닌가. 한때는 내게 중요한 책 중 하나여서 석사논문에 인용까지 했었는데. 사실 논문 주제와 크게 상관이 있지는 않았음에도. 그러나 거기에는 나름대로 숨은 의도가 있었으니. 나를 철학의 길로 이끈 여성주의 과학학에 대한 헌정의 의미였달까. 비록 그로부터는,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멀어지긴 했지만.
그런데 엘리스의 인용도 맥락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좀 뜬금이 없어 보이거나, 아니면 다소 불필요하다는 인상을 준다. 인용구는 워트하임의 2012년 저서 Physics on the fringe: Smoke rings, circlons and alternative theories of everything (Walker & Company)에서 따온 것. 엘리스 같은 최고의 이 분야 권위자가 과학저술가의 아마도 대중서에 가까울 이 책을 인용하다니, 의외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무릇 인용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권위에의 호소 기능이 없잖은가. 스스로가 최고의 권위자라면 또 얘기가 달라지고 말하자면 탈권위에 호소할 필요가 생기는 걸까.
한편으로는 과학이론과 과학대중화 사이의 관계에 관한 흥미로운 사례라고도 하겠다. 특히 우주론처럼 상당수 이론들이 미완성 단계이자 진행중(in progress)인 경우에서, 내가 논문에서도 다루는 바, 대중화가 이론에 대해 단지 종속적이고 일방적 흡수 및 전파의 대상에 머물지 않고 구성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인데. 이 가설을 입증하기에는 좀 미약한 감이 있으나 어쨌든 무관치는 않은 예.
다른 한편으로 인용된 부분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것이 사실. 저 참으로 저널리스틱한 첫 문장은 직업 물리학자들의 아무래도 부족한 표현력으로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이를 필두로 인용구 전체가 엘리스 자신이 지적하고자 하는 바, 그리고 나를 포함,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을 바를 직관적이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시대 우주론의 사변적이고 "초현실적"인 경향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급인 다중우주론자들의 주장은 이렇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으면 *물리적*으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어디에선가는.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것마저도. 왜냐하면 우리의 것과는 다른 법칙이 통하는 세계가 어디엔가 있을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므로. 나아가 그러한 세계가 단지 *가능*할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이기까지 한 것이, 그 세계에서의 법칙이야말로 우리의 물리법칙을 뒷받침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 이런 얘기가 물리학과 대학생들의 술자리에서가 아니라 물리학의 세계적 석학들이 모인 자리에서 진지하게 오간다는 생각을 하면 실로 기분이 묘하다.
경험과학 중에서는 아무래도 가장 추상적이고 경험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심지어 경험적 검증가능성조차도 확실하지 않은, 그리하여 남은 최소한의 진리조건이라고는 내적 일관성뿐이다 보니, 이 업계 종사자들이 알려진 모든 물리법칙과 모든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수단들을 총동원해서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엄밀성을 추구하게 됨은 이해함직하다. 그런데 이들을 한 군데 모아 놓으면 아무리 최고급 학회라도 아이들 생일잔치거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미치광이 모자의 티파티 같이 모두가 들뜬 분위기가 된다니.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는 짐작된다.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이념뿐 아니라 이론 역시 추상적이고 관념적일수록, 그리하여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지지 근거가 결여돼 있을수록, 이를 보상하기라도 하듯 교조화 및 극단화되기 쉽고, 그리하여 잘못하면 극단주의나 광신주의를 낳기 쉬운데, 저 초끈우주론 학회의 정경 또한 간접적으로나마 하나의 예증으로 제시할 수 있겠다...면 아무래도 과장이겠으나...과연 과장이기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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