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31일 월요일

딴짓, 에필로그

blogin.com · 2004-05-31

연 한 달째 계속되는 딴짓. 이젠 지겨워서라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지금만큼은, 수업도 끝났겠다, 시험까지는 한 달 남았겠다, 계절은 후덥지근하지도 않고 오싹하지도 않은 게 딱 초여름이겠다, 며칠 정도 "자학하지 않으면서 놀"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적어도 내일까지는 (지금까지 포스트로 올린 이런 비슷한 내용의 각서만 해도 벌써 몇 갠지, 원).

어제 선배 언니집에 저녁 먹으러 갔다가 몸과 맘의 양식을 얻어왔다. 선배가 직접 담근 김치, 팔도비빔면, 말린 미역, 그리고 전경린, 은희경, 권지예의 소설들. 덕분에, 거의 퇴화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혀의 돌기들이 되살아나고, 상당 기간 녹슬어 있었던 뇌에서 문학 텍스트 독해(혹은 해독)를 관장하는 영역이 삐걱 소리를 내면서이기는 했지만 어쨌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혀가 맛의 자극을 그렇게 그리워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 동안 맛을 너무 잊고 살았던 게다. 매운맛이건, 소설 속에서 재현되는 "인생의 쓴맛"이건 간에.

점심으로 비빔면을 먹고서 미역냉국을 만들기 위해 다시마 국물이 우러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권지예의 소설집 <꿈꾸는 마리오네뜨>를 읽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파리의 풍경들이나 그와 비슷한 정도로 체화된 유학 생활의 경험들이 여기 저기에서 튀어나오니 꽤나 반갑다. 개중에는 쓸만한 정도들도 더러 있어서, 가히 재불 유학생용 <론리 플래닛>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이국, 그것도 파리라는, 세계인이 하나되어 동경해 마지 않는 도시, 그곳에서 아시아계 여성으로서 직접 산 체험이 "소재 발굴"의 측면에서 작가를 유리한 곳에 위치시키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참신한" 소재를 구하기 위해 새벽 우시장에 몇 달을 들락거리거나 도서관에서 먼지 뒤집어쓴 자료들과 씨름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냥 여기서 유학생이라는 지극히 불안정한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겪은 고단하고 지난한 일들을 그대로 풀어내면, 그것만으로도 한국 독자들의 이국에 대한 취향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니까. "옥시덴탈리즘"에 호소한다고나 할까.

사실 제일 맘에 안 들었던 건 문체였다. 너무 성글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들을 엮어가는 방식도 어딘지 모르게 서툴러 보인다. 내가 너무 순수주의자여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들은 작가가 사실은 했을지도 모를 진지한 고민이나 성찰의 가시적인 깊이를 한층 낮추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 기준은 매우 상대적이다. 이를테면 허수경--모국어를 쓰지 않는 생활을 권지예보다 오래했으면 오래했을-- 의 단편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조각난 문장들은 결코 불완전하지 않다). 

반면에 은희경의 문장들은 뻔한 소재들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잘 짜여져 있다. 문제는 그런 문장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을만큼 너무 뻔한 얘기들이 전부라는 데 있다. 어느 정도까지냐면,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몇몇 기시감을 자극하는 문장들을 보기 전까지는 내가 예전에 그 소설들을 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을 정도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내 기억력 탓이겠으나, 달리 말하면 그만큼 얘기들이 인상적이지 않았다는 뜻도 되겠다.

어쨌든, 저 두 소설집은, 썩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딴짓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부족하지는 않았다. 난독증 치유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됐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행스럽고도 고맙게도, 만사 제쳐두고 몰두하게 만들만큼 재미있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남아있는 전경린의 소설 두 권과 또 하나의 권지예 장편 소설을 시험 이후로 미루고 딴짓을 이쯤에서 잠시 멈춰두기로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덕이다.

—박쥐

2004년 5월 29일 토요일

우울할 땐 소리에 기대어 보아요

blogin.com · 2004-05-29

♥ 우울해 하는 그대를 위해 ♥

i love you more than i should so much more than is good for me more than is good oh the timing is cruel oh i need and don't want to need more than i should. i am falling say my name and i'll lie in the sound what is love but whatever my heart needs around. oh my sheet is so thin so i say i can't sleep because it's so very cold but i know what i need and if you were just near to me would you go.... i am falling say my name and i'll lie in the sound what is love but whatever my heart needs around i am falling say my name and i'll lie in the sound what is love but whatever my heart needs around and it needs you too much now


Trespassers William, "Lie in the Sound", Different Stars, 2002
♬1 ' target='_son'>http://www.cdbaby.com/mp3lo ... 4441199e1f>♬1  2분짜리 맛보기용 파일 
♬2 ' target='_son'>http://www.trespasserswilli ... _Sound.mp3>♬2  full and download-friendly version
from ' target='_son'>http://www.trespasserswilliam.com>http://www.trespasserswilli ... om
 

—박쥐

2004년 5월 26일 수요일

새의 선물

blogin.com · 2004-05-26

When, in disgrace with fortune and men’s eyes,

I all alone beweep my outcast state,

And trouble deaf heaven with by bootless cries,

And look upon myself, and curse my fate,

Wishing me like to one more rich in hope,

Featured like him, like him with friends possessed,

Desiring this man’s art and that man’s scope,

With what I most enjoy contented least;

Yet in these thoughts myself almost despising,

Haply I think one thee, and then my state,

Like to the lark at break of day arising

From sullen earth, sings hymns at heaven’s gate;

For thy sweet love remembered such wealth brings

That then I scorn to change my state with kings.


William Shakespeare, Sonnet 29




아,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나, 종달새가 되어 날아갈 것 같아. 금방이라도 이 어둑한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하늘에 닿을 것만 같아. 진짜 그 어느 왕도 부럽지 않아. 정확히 30분 전까지만 해도, 진짜로, 내 꼴이 그렇게 한심스러울 수가 없었는데.
 
네가 직접 쓴 네 주소와 내 주소를 단 채로, 먼 길 달려오느라 닳을대로 닳고 헤질대로 헤진 소포 상자, 내가 끔찍이도 아끼는 레종 네 보루, 아마도 내가 이곳으로 떠나와 있는 동안에 새로 출시됐을 그린 버전 레종 두 갑, 새우깡, <네멋>의 전경이 빨대를 꽂아 즐겨 마시곤 했던, 그리고 지리산에 갔을 때 별을 보면서 너와 나눠 마셨던 참이슬 팩소주 여섯 개, 술 먹은 다음에 "술 깨는 약"이라고 우겨가면서 먹고 또 네게도 먹이곤 했던 멘토스, 그리고 늘 덜렁대면서도 어쩔 땐 혀를 내두를만큼 꼼꼼한 네 성격이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한 눈에 보여주는 하드 커버 논문, 그 번잡한 우체국에서 글씨 쓰는 법을 잊어버린 손을 애써 움직여가면서 겨우 썼을 네 편지.

그뿐이니? 이 멋진 블로그 템플릿을 선사한 것도, "광명"을 찾아준다는 미명 하에 소주를 한 박스 씩이나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너잖아. 단 하루 동안 이렇게나 많은 선물을 받다니, 산타가 두 가지 착각을 한꺼번에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야. 하나는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가 진짜로 있을 거라는 착각, 다른 하나는 내가 한 해 동안 착한일을 아주아주 많이 했을 거라는 착각.

정말 고마워. 네 말대로, 나, 건강하고, 밥 잘 먹고, 공부 잘 할게.
 

# 선물상자를 보내준 시바, 선경, 라영, 벼리, 그리고 토리, 템플릿을 선물해 주신 스파이크님, "광명을 찾아달라"는 반쯤 농담 섞인  요구에 역시 반쯤 농담을 섞긴 했지만 그래도 듣기만 해도 힘이 되는 말씀을 해주신 을님, 모두 정말 고맙습니다. 

—박쥐

2004년 5월 23일 일요일

프랑스 과학철학에 대한 일갈

blogin.com · 2004-05-23

정말 잘 읽었습니다. 한국 프랑스 철학 연구의 뿌리가 거기에 있었군요. 그런데 프랑스의 메타과학적 전통이 베르그송 이후로 "죽었다"는 말씀은 프랑스 인식론을 공부하고 있는 제겐 다소 생경하게 들립니다. 바슐라르-깡길렘-푸코로 이어지는 과학철학/인식론 연구는 여전히 유효하거든요. 베르그송이 실증과학을 바탕으로 한 형이상학의 전통에 마침표를 찍었다면 모를까요 (정확하게 말하면 마침표는 아니겠지요. 들뢰즈도 있고 세르도 있으니). 분자생물학의 등장 역시 메타과학으로서의 프랑스 철학에 타격을 입혔다기보다는 일종의 탄력 혹은 자극으로 작용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크 모노-프랑수아 자콥에서 이어진 생물철학이 (대개 생물학자 출신인) 신진들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거든요.

이런 역동적 흐름들이 멈춘 것처럼 보이게 된 건, 아무래도 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특히 영미 분석철학이 주류를 이루게 되면서부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프랑스 철학 전공자들이 대학 내에 자리를 잡지 못한 탓도 크겠습니다만. 어쨌든 이건 비단 한국의 현상만은 아닌 듯합니다. 이곳 사람들도 프랑스 철학이 예전만큼 대접받지 못한다며 불평을 늘어놓곤 하는 걸 보면 말이지요.
 
혹시 소칼 논쟁에 대한 부산대 이지훈 선생님의 글을 읽어보셨는지요? 98~99년쯤에 "소칼 논쟁 독후기"라는 제목으로 한 계간지에 실렸었는데,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네요. 하여간 제가 그 논쟁과 관련해서 읽어본 중 가장 균형잡힌 관점에서 쓰여진 글이었습니다.



박홍규 선생의 <형이상학 강의> 2권이 얼마 전에 출간됐다는 얘길 들었다. 이 글은 그 책에 대한 노정태님의' target='_son'>http://www.mediamob.co.kr/r ... ?no=21682>노정태님의 평--아주 훌륭한 평이었다--에다가 내가 달아놓은 답글인데, 다시 보니 뻔하디 뻔한 얘기지만, 그래도 프랑스 과학철학에 대해 대강이나마 정리를 해야겠다는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워밍업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리 옮긴다. 이렇게 공언이라도 해놔야 부끄러워서라도 뭔가 시작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박쥐

하리우스 포테르 : 죽은 언어를 위한 찬가

blogin.com · 2004-05-23

서점에서 우연히 해리 포터 라틴어판(trad. Peter Needham, Bloomsbury Publishers, 2003)을 발견했다. "해리"라는 이름이 "하리우스"로 바뀌어 있다.

사어의 대명사인 라틴어가 아직까지 죽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단지 많은 서양말들이 거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근대까지의 문헌들 중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것들 중 상당수가 라틴어로 쓰여졌기 때문만도 아니다. 카톨릭 미사에서든, 일상 대화에서든, 판타지 소설로든,  어떻게든 지금/여기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 읽고, 쓰고, 말하고, 듣고, 옮기기 때문이다. 요컨대 라틴어의 "현재"는, 그것이 대과거형으로서도 과거형으로서도 과거완료형으로서도 아닌, 현재진행형으로서 미약하게나마 살아 숨쉬고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중세사를 전공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중세 불어를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보다는 라틴어를 해야 한단다. 당시 문헌들은 주로 라틴어로 쓰여졌었기 때문에 (그때 친구로부터 들은 한 중세 불어 전공자 얘기가 생각났다. 현대문학 전공자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렵게 공부했는데, 막상 귀국하고 보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는 것. 사실 당시 사람들이 썼던 말에 더 가까웠고, 지금 쓰이는 말과도 생각보다 그리 다르지는 않다. 같은 어휘이되 표기 방식에서 약간 차이가 나는 정도?). 그렇지만 그것이 현재 라틴어의 유일한 효용 가치는 아니다. 고전 문헌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의 라틴어 수요가 아주 없지는 않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내가 학부를 마칠 무렵에 교양 강좌로 라틴어 수업이 개설됐었는데, 사람이 꽤 많았었다고 들었다. 그 수업을 신청했던 동기는 "그저 재미있을 것 같아서" 들었고 또 재미있었다고 했다.

지금보다 어렸을 적, 언어를 공부하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꽤 빨리 배우고 썩 잘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심지어 내게 주어진 유일한 재능이 외국어 습득이라고까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외국어 배우는 게 "재미"가  아닌 "필요"/"필수"가 되어버렸고, 그때부터 실력도 형편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굳이 변명하자면, 아마도 언어에 대한 나의 순수한 열정이 "취업"이나 "미국 대학 진학"을 위한 일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오인되면 어쩌나 하고 조바심을 냈던 것 같다.

어쨌든, 라틴어건, 중세불어건, 수메르어건, 오늘날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말들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경외를! 단지 재미에서든, 아니면 필요에 의해서든 간에, 이들은 언어가 획일화, 특히 특정한 하나의 언어로 흡수되지 않도록 고군분투하는, 그리하여 죽은 언어를 살려내고 죽어가는 언어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박쥐

2004년 5월 22일 토요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blogin.com · 2004-05-22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 신현림, "나의 싸움"






생산은 고사하고 재생산도 힘에 겨워 이렇게 며칠째 복제만 반복하고 있는 걸 보니, 무기력증이 정점에 달한 모양이다. 이미 뇌세포들에는 이끼가 내려앉은지 오래. 기분 전환도 하고 마음도 다잡고 그 와중에 언어 실력도 연마할 요량으로 집었던 소설들도 내팽개쳐진지 너무도 오래. 전공책들과 각종 복사물들은 어느새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다. 이렇게 넋나간 채로 몇 날을 그냥 흘려보내놓고 나니, 며칠 다니러 오겠다던 몽실에게 퇴짜를 놓은 것이 몹시 후회스럽다. 몽실과 신나게 놀았더라면, 그리고 난 뒤  맘을 다지고 새롭게 6월을 맞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건만. 주어진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해야할 일을 하지 않기 위한 모든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골몰하고 있었다면, 그래도 최소한의 의지는 있었던 게 아닌가. 그 의지가 무얼 향한 것이었든지 간에. 그런데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지금 내 안팎에서 살아 움직이는 유일한 것은 오직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뿐.

방안에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베르메르나 렘브란트를 볼 수 있는 이 수퍼울트라급 기술복제시대를 살았더라면, 벤야민은 분명히 땅을 쳤으리라. 분명한 건 그 천인공노할 기술 덕분에 작품이 물리적(또는 시공간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등의 제약을 넘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저 위에다가 "복제"해 놓은 시만 해도,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은 오로지 시인의 이름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라는 마지막 구절뿐이었는데도, 구글에서 "지겨운 고통 신현림"이라는 검색어만으로 바로 그 전문을 찾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복제품" X'는 결코 "원본"  X 의 "붕어빵"이 아니다. X'는 X 이상의 다양한 의미들을 생성해낸다. 물론 시의 존재론을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는 건 당치도 않은 일이다. 시의 "원본"이라니? <세기말 블루스>의 96년 초판에 찍혀 있는 활자들? 시인이 직접 이 시를 낭독하면, 그게 이 시의 "원본"이 되는 겐가? 아니, 구체화되기 전의, 시인의 머릿속에서 "영감"의 형태로 떠돌고 있던 그 상태가 "원본"이라고 해야하잖는가? 그렇지만 시는 소설과는 달리 물리적인 것의 영향을 꽤 많이 받는다. 똑같은 시라 하더라도 문자들을 종이 위에 어떻게 배열하느냐, 누구의 목소리로 어떤 세팅에서 낭독되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시를 처음 본 건 학부 3~4학년 무렵, 교지에 실린, 그 나이 즈음에 다들 한 번씩은 해봤음직한, 그 누구로도, 그 무엇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그렇지만 지나고 보면 별 것도 아닌, 고만고만한 고민에 관한 글이었다. 우울, 불안, 쓸쓸함, 치욕, 슬픔, 저 시에서 말하고 있는, 그 모든 20대 초반의 정서들을 가득 담은. 그 친구는 시인의 입을 빌어 그것들더러 꺼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꺼지라"는, 그 투박하기 짝이 없는 시어가 주는 해방감이란! 그렇지만 그것은 맘놓고 만끽할 수 있는 종류의 해방감은 아니었다. 사실 그것들은 고통스러운 십자가인 동시에 자랑스러운 훈장이자 사랑스러운 보물이기도 했다. 늘 우울, 불안, 쓸쓸함, 치욕, 슬픔들에 시달리다가도, 그것들이 잠시라도 내 안에서 사라지기라도 하면 오히려 더 불안해지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4~5년이 흐른 지금, "꺼지라"는 말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삶은~"이라는 진부한 말로 시작하는 첫 구절이다. 아니, 어쩌면, 마지막에는 눈길을 두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워라.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하라. 남아있는 나날을 위해. 고통은, 지겨운 고통은, 꺼지란다고 얌전히 꺼져주지 않는다. "꺼지라"는 말은 그렇게 텅빈 구호로 남거나 아니면 공기 중에 흩어져 버렸다.

무기력증에 시달리다가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라는 시귀를 떠올리고 전문을 찾아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조악하기 짝이 없는 시학과 재미없는 시론을 주절거리다니. 사실인즉슨, 고통의 주변을 우회하고 또 우회하는 것, 이것이 내가 얼마 전에 발견해서 써먹고 있는 고통 퇴치법이다. 그런데 그새 내성이 생겨버렸는지 별 효과가 없다. 좀더 강력한 뭔가가 필요하다.

—박쥐

2004년 5월 20일 목요일

22시 30분 : 일몰 30초전, 월출 30초후

blogin.com · 2004-05-20

내가 생리중에 모기에게 왕창 물어 뜯기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것은

밤이 밤 열시를 훨씬 넘긴 다음에야 겨우 해를 밀어내고 빼꼼이 고개를 들이밀던 어느 다 늦은 봄날이었다

복도는 이미 옆집 콧수염 신사와 그의 애인의 살섞는 냄새로 가득차 있었고

복도 끝 화장실의 좁은 창문틈으로는 실종됐던 달이 8개월만에 둥 둥 떠오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박쥐

2004년 5월 19일 수요일

너 어느 나라에서 왔니? 중국? 일본?

blogin.com · 2004-05-19

……, 낯선 한 이방의 도시에서 또 낯선 한 이방에 속한 도시로 내가 떠났을 때 나는 낯선 풍경들을 향해 이렇게 중얼거렸다. 무정한 당신……, 유정한 나를……, 나를 용서하세요……, 나……, 유정해서……, 서러웠더랬지요……, 불편은 저의……, 이대도록 기나긴 꽃이었구요, 늦은 저의 창으로……, 설분분합니다, 설분분……, 합니다,

[...]

나는 의자에서 일어난다, 이미 달아오른 얼굴을 숙이고 느릿느릿 걸어서, 헤이, 보 콤스트 두 헤어? 히나? 야판? 헤이, 바룸, 하스트 두 니히츠 게작트? 비스트 두 베트룽케? 페어뤽트?http://fadel.namoa.net/suky ... ng/loneliness.html#3 name=(3)>(3) 나는 천천히 기차 중간문을 연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화장실 문을 연다, 나는 힘껏 문을 연다, 나는 머리 끝에 식은 땀이 나는 것처럼, 눈을 감고, 다시 문을……, 그래, 나에게는, 이런 힘이, 힘이 필요했어, 왜냐하면, 나는 살아야 했거든, 나는 그렇게 죽을 수는 없었거든……,왜냐하면, 나는 마음이 언제나 너무 젖어 있어서, 젖은 마음은 언제나 그렇게 길바닥에 누워……, 나는 거울을 본다, 이 얼굴을 들고 그렇게 먼 길을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거울 속의 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세상에서 쉽게 묻어온, 저런 저런, 저건, 세상을 한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탓일까……,

3) 헤이, 너 어느 나라에서 왔니? 중국? 일본? 헤이, 너, 왜, 아무 말도 안하니? 너, 술 취했니? 미쳤니? (Hey, wo kommst du her? China? Japan? Hey, warum hast du nichts gesagt? Bist du betrunken? verrckt?)


- 허수경, "어떤 쓸쓸함에 대하여"
(『문예중앙』 94년 여름호 )에서 발췌
 from fadels' target='_son'>http://fadel.namoa.net/suky ... g/index2.html>fadels fan page dedicated to the poet

—박쥐

2004년 5월 17일 월요일

PCism : 종교의 경우

blogin.com · 2004-05-17


Passion: Regular or Decaf?






Those who virulently criticized Mel Gibson’s The Passion even before its release seem unassailable: Are they not justified to worry that the film, made by a fanatic Catholic known for occasional anti-Semitic outbursts, may ignite anti-Semitic sentiments?

More generally, is The Passion not a manifesto of our own (Western, Christian) fundamentalists? Is it then not the duty of every Western secularist to reject it, to make it clear that we are not covert racists attacking only the fundamentalism of other (Muslim) cultures?


The Pope’s ambiguous reaction to the film is well known: Upon seeing it, deeply moved, he muttered “It is as it was”—a statement quickly withdrawn by the official Vatican speakers. The Pope’s spontaneous reaction was thus replaced by an “official” neutrality, corrected so as not to hurt anyone. This shift, with its politically correct fear that anyone’s specific religious sensibility may be hurt, exemplifies what is wrong with liberal tolerance: Even if the Bible says that the Jewish mob demanded the death of Christ, one should not stage this scene directly but play it down and contextualize it to make it clear that Jews are collectively not to be blamed for the Crucifixion. The problem of such a stance is that it merely represses aggressive religious passion, which remains smoldering beneath the surface and, finding no release, gets stronger and stronger.


This prohibition against embracing a belief with full passion may explain why, today, religion is only permitted as a particular “culture,” or lifestyle phenomenon, not as a substantial way of life. We no longer “really believe,” we just follow (some of) the religious rituals and mores out of respect for the “lifestyle” of the community to which we belong. Indeed, what is a “cultural lifestyle” if not that every December in every house there is a Christmas tree—although none of us believes in Santa Claus? Perhaps, then, “culture” is the name for all those things we practice without really believing in them, without “taking them seriously.” Isn’t this why we dismiss fundamentalist believers as “barbarians,” as a threat to culture—they dare to take seriously their beliefs? Today, ultimately, we perceive as a threat to culture those who immediately live their culture, those who lack a distance toward it.


Jacques Lacan’s definition of love is “giving something one doesn’t have.” What one often forgets is to add the other half: “… to someone who doesn’t want it.” This is confirmed by our most elementary experience when somebody unexpectedly declares passionate love to us: Isn’t the reaction, preceding the possible affirmative reply, that something obscene and intrusive is being forced upon us? This is why, ultimately, passion is politically incorrect; although everything seems permitted in our culture, one kind of prohibition is merely displaced by another.


Consider the deadlock that is sexuality or art today. Is there anything more dull and sterile than the incessant invention of new artistic transgressions—the performance artist masturbating on stage, the sculptor displaying human excrement? Some radical circles in the United States recently proposed that we rethink the rights of necrophiliacs. In the same way that people sign permission for their organs to be used for medical purposes, shouldn’t they also be allowed to permit their bodies to be enjoyed by necrophiliacs? This proposal is the perfect example of how the PC stance realizes Kierkegaard’s insight that the only good neighbor is a dead neighbor. A corpse is the ideal sexual partner of a tolerant subject trying to avoid any passionate interaction.


On today’s market, we find a series of products deprived of their malignant property: coffee without caffeine, cream without fat, beer without alcohol. The list goes on: virtual sex as sex without sex, the Colin Powell doctrine of war with no casualties (on our side, of course) as war without war, the redefinition of politics as expert administration as politics without politics. Today’s tolerant liberal multiculturalism wishes to experience the Other deprived of its Otherness (the idealized Other who dances fascinating dances and has an ecologically holistic approach to reality, while features like wife beating remain out of sight). Along the same lines, what this tolerance gives us is a decaffeinated belief, a belief that does not hurt anyone and never requires us to commit ourselves.


Today’s hedonism combines pleasure with constraint. It is no longer “Drink coffee, but in moderation!” but rather “Drink all the coffee you want because it is already decaffeinated.” The ultimate example is chocolate laxative, with its paradoxical injunction “Do you have constipation? Eat more of this chocolate!”—the very thing that causes constipation.


The structure of the “chocolate laxative,” of a product containing the agent of its own containment, can be discerned throughout today’s ideological landscape. Consider how we relate to capitalist profiteering: It is fine IF it is counteracted with charitable activities—first you amass billions, then you return (part of) them to the needy. The same goes for war, for the emerging logic of humanitarian militarism: War is OK insofar as it brings about peace and democracy, or creates the conditions to distribute humanitarian aid. And does the same not hold true for democracy and human rights? It is OK to “rethink” human rights to include torture and a permanent emergency state, if democracy is cleansed of its populist “excesses.”


Does this mean that, against the false tolerance of liberal multiculturalism, we should return to religious fundamentalism? The very absurdity of Gibson’s vision makes clear the impossibility of such a solution. Gibson first wanted to shoot the film in Latin and Aramaic and show it without subtitles. Under pressure, he allowed subtitles, but this compromise was not just a concession to commercial demands. Sticking to the original plan would have displayed the self-refuting nature of Gibson’s project: That is to say, the film without subtitles shown in large suburban malls would turn its intended fidelity into the opposite, an incomprehensible exotic spectacle.


But there is a third position, beyond religious fundamentalism and liberal tolerance. One should not put forth the distinction between Islamic fundamentalism and Islam, a la Bush and Blair, who never forget to praise Islam as a great religion of love and tolerance that has nothing to do with disgusting terrorist acts. Instead, one should gather the courage to recognize the obvious fact that there is a deep strain of violence and intolerance in Islam—that, to put it bluntly, something in Islam resists the liberal-capitalist world order. By transposing this tension into the core of Islam, one can conceive such resistance as an opportunity: It need not necessarily lead to “Islamo-Fascism,” but rather could be articulated into a Socialist project. The traditional European Fascism was a misdirected act of resistance against the deadlocks of capitalist modernization. What was wrong with Fascism was NOT (as liberals keep telling us) its dream of a people’s community that overcomes capitalist competition through a spirit of collective discipline and sacrifice, but how these motives were deformed by a specific political twist. Fascism, in a way, took the best and turned it into the worst.


Instead of trying to extract the pure ethical core of a religion from its political manipulations, one should ruthlessly criticize that very core—in ALL religions. Today, when religions themselves (from New Age spirituality to the cheap spiritualist hedonism of the Dalai Lama) are more than ready to serve postmodern pleasure-seeking, it is consequently, and paradoxically, only a thorough materialism that is able to sustain a truly ascetic, militant and ethical stance.


Slavoj Žižek, a philosopher and psychoanalyst, is a senior researcher at 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in the Humanities, in Essen, Germany. Among other books, he is the author of The Fragile Absolute and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



지젝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해 쓰고 In These Times에 실은 글. (특정 종교의) 근본주의, 원리주의, 반유대주의, 나아가 문화 현상/라이프스타일로서의 종교에 대한 예리한 통찰. (아마도 개봉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영화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었을) 지난 2월에 쓰여진 거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시의적절하다. 이라크나 팔레스타인의 상황도 그렇거니와, 이곳에서도 얼마 전 재경부 장관인 사르코지(차기 대권 주자로 유력한 좌파 인물)가 국회에서 정부의 반유대주의 성향이 미국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뒤로 반유대주의/유대주의 논쟁이 한창이다(어제는 대규모 반유대주의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뭣보다 돋보이는 건 "정치적 올바름"을 하나의 새로운 주의/이즘(PCism)으로 볼 줄 아는 지젝의 앞서가는(?) 감각이다. 다양한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똘레랑스의 정신, 분명히 아주 중요한 미덕이다. 문제는 그 기준이 애매모호하다는 것, 그리고 그 자체로 순결무구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우선 이 관용의 정신 자체가 어쩔 수 없이 자기모순적이다. 이 정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관용의 정신을 유지할 것인가 말것인가? 게다가 이 정신이 누구에게나 다 똑같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관용을 베푸는 자와 그 시혜를 입는 자 혹은 베풀 것을 강요받는 자가 있다. 뿐만 아니라, 특히 "베푸는 자"의 것일 경우, 관용은 뿌리깊은 반성에서 나온 것이 아닌, 자신의 "쿨함"을 과시하기 위한 혹은 그저 허울뿐인 말에 불과하거나 때로는 가장 편향된 태도를 정당화하는 기제가 될 수 있고, 또 가진 자가 내세우는 논리의 수많은 버전 중 가장 세련된 형태일 수 있다("우린 우리와 다른 너희를 존중해. 그런데 너희는 왜 너희와 다른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니? 좀 맞고 정신 차리면 우릴 인정할 수 있게 될거야"). 

아, 사실 지젝의 현란한 논리 전개를 따라가는 일은 쉽지 않다. 좀더 곱씹어봐야겠다.

—박쥐

늑대, 양의 수용소에 가다

blogin.com · 2004-05-17

여기는 집 잃은 어린 양들의 임시 수용소
양치기는 선의의 거짓말에 능하다
양들은 온순한 데다 쾌활하기까지 하다

오늘은 그들이 한바탕 축제를 벌이는 날
어느새 제의는 희극으로 치닫는다
상쾌한 바람이 숨막히던 수용소를 감싸고
양들은 바람 때문에 간지러워 죽겠다며 깔깔대고
그 틈을 타 세속의 냄새가 들어와 제사 향을 밀어내고
양치기의 입에는 벌써부터 침이 고여 있다

간신히 뒤집어쓴 탈이 오늘따라 버겁다
배에서는 꾸르륵 꾸르륵 소리가 그치지 않고
코는 제멋대로 킁킁거린다
뾰족한 발톱과 뻣뻣한 털을 숨긴답시고
너무 두꺼운 가죽을 걸쳐서인지
온몸이 박박 긁어달라고 아우성이다

어느덧 의식이 끝나고 기다리던 성찬의 시간
한껏 들뜬 양들이 이번에는 풍악을 울린다
낯선 땅에서 듣는 꽹과리 소리에
양들은 둥실둥실 춤을 춘다
수용소의 좁다란 마당이 출렁인다

어느새 모든 것이 넘실댄다
몸뚱아리가 꿈틀대고 가죽이 흘러내린다
고개가 흔들리고 탈이 덜컹댄다
입맛은 어느새 싹 달아나 있고
굶주려 벌겋게 갈라졌던 눈이 물기를 머금는다

조용히 물가로 내려와 발길을 돌린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중얼거린다,
어차피 맛도 없었을 거라고,
맛있었다 해도 소화가 잘 안 됐을 거라고.


- 파리 한인 성당 창립 50주년 기념일에.
그들 누구도 쫓아내지 않았으나,
 쫓긴 듯 돌아오다.

—박쥐

2004년 5월 16일 일요일

자연에 대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

blogin.com · 2004-05-16

한 시인은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언제 단 한번이라도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었던 적이 있느냐"라고 물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길가에 연탄재가 뿌려져 있다면 그걸 밟거나 차지 않고 지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연탄재를 차게 되는 게 연탄재를 경시하거나 모독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연탄재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연을 바라봄에 있어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란 무엇일까? 이 쿠바 출신의 미국 여성작가 아나 멘디에타(Ana Mendieta, 1948~1985)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멀게는 자연을 사회의 진보를 위해 아낌없이 착취하고 이용해야 할 도구로 본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가깝게는 베이컨의 자연관을 변형하여 일종의 놀이개로 전락시킨 남성 환경미술가들보다는,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이 무엇이건 간에,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멘디에타는 자신을 아폴론에게 쫓기다가 나무로 변해버린 다프네와 동일시한다. 그녀는 "찍는" 쪽보다는 자연과 더불어 "찍히는" 쪽에 가깝다. 다시 말해 그녀 자신이 자연이거나 혹은 자연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때 자연은 분명히 일개 피사체를 넘어서는 무엇이 되고,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는 사라진다.
 
그런데 멘디에타가 나무나 풀밭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녀가 자신의 피사체들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그토록 그것들과의 합일을 꿈꿨던 것일 게다. 문제는 그 사랑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 사랑의 본질이 어느 정도는 바로 그 이루어질 수 없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그녀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넘어서려고 했으나 결국 넘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애초에 원했던 바가 결과로서 넘어서는 것이었다기보다는 과정으로서 넘어서려는 노력 자체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라는 게다.

사실 사랑이란 그런 거다. 그 대상이 누구/무엇이건 간에, 그 대상 자체에 대해서라기보다는 그 대상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사랑에 빠지는 것. 나르시시즘 없는 사랑은 불가능하다. "자연을 사랑하자"는 표어가 아주 가끔씩은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게 들리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멋대로 이용하고 착취해먹고 이제 쓸만큼 썼으니 도로 놓아주자고?

여성, 자연, 동양 등 "타자"에 대한 감수성은 정치적으로 올바를 수 있지만, 그 감수성이 자기 반성의 결과로 체득된 것이라기보다 어떤 당위로서 머물 경우에는 주체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고착화시킬 수도 있다. 이 경우 감수성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 보면, 결국에는 타자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로 편향된, 그러면서도 교묘하게 포장된 자기애가 나오게 마련인 것이다.

환경 운동에 반기를 들려는 건 아니다. 그저 갑자기 "어머니 자연"이 인간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져서 해본 말이다. 어머니 자연은 새삼스레 자신을 위한답시고 친환경적 제품들을 비싼 돈 주고 사는 자식들을 예뻐해 줄까? 돈 벌려고 산 깎아놓고서 그리 해서 번 돈으로 유기농 야채 사먹는 사람보다는 담배 한모금 빤 후에 대기 오염에 일조했다는 사실에 살짝 가슴 아파하는 사람을 더 어여삐 여기지 않을까? 인간으로서 자연에 남긴 작은 흔적/상흔을 담은 멘디에타의 실루엣 연작이 이룰 수 없는 자연과의 합일을 형상화한 다른 작품들보다 애착이 가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연탄재 함부로 찬다고 너무 뭐라 하지 말라. 연탄재를 차지 않았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할 일 다했다고 자만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어쩌면 연탄재는 발길에 채여서라도 바람따라 날아가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잖는가.

—박쥐

2004년 5월 15일 토요일

비상전야

blogin.com · 2004-05-15

picture by Young



떠나올 때의 그 마음으로 되돌아가기에 아직 그리 늦은 건 아니겠지. 다시 날아오를 수 있겠지. 그래도 날개가 다시 돋힐 옆구리는 남아 있으니.

réécrit le 7 juillet 2004
Je n'avais jamais dit que c'était un poème, mais je m'en étais toujours inquiétée depuis que je l'ai écrit. Comment distinguer un poème des autres formes de l'écriture ? Plus de, sinon trop de, l'espace ? Soit franche. Tu n'es pas Simone WEIL. Même si tu laisses des mots aphoristiques, personne n'en tiendra compte.

—박쥐

노화현상

blogin.com · 2004-05-15

나이가 드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필요 이상으로 뒤를 돌아보거나 앞을 내다보게 되니까. 갈수록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더더욱 힘들어지니까.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적, "행복"을 이렇게 정의한 적이 있다.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온 신경과 모든 에너지를 쏟느라 행복을 느낄 틈도 없이,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는 것"이라고. 행복이나 평화나 진리나 정의와 같은 가치들에 대한 질문은 대개 그러한 가치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되게 마련이고, 그러한 욕구는 그것의 결핍에서 나오는 법. 행복을, 평화를, 진리를, 정의를 이미 획득하여 그것들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정의로운 삶인가" 등등의 질문은 무가치하다. 앎에의 의지는 권력에의 의지가 가장 빈곤하고도 기만적인 방식으로 표출된 형식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스물 일곱 살때까지는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온 셈이다. 바로 내 눈 앞에 놓인 책을 읽고, 그 순간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됐었으니까. 물론 어릴 적 "이다음에 커서 ~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어린 시절의 꿈이 대부분의 경우 시간에 비례해서 대통령에서 시작해서 점점 평범한 샐러리맨/우먼으로 축소되는 반면에,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내 꿈과 시간 사이에는 함수 관계 자체가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라는 변수가 아예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제사 돌이켜보건대, 어쩌면 그것이 이제껏 아주 심히 불행하게 살지는 않았다고 해도 될 만큼 살아낼 수 있었던 비결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행복한 줄 알아야 해. 유학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라는 말을 들으면 할 말이 없긴 하다. 내가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던 바를 조금씩 실현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지만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 한편으로는 예의 그 행복의 정의에 따른다면 결코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꿈의 실현 정도"를 행복에 대한 새로운 기준으로 삼아서 판단한다 해도, 이제는 그 '꿈'이 뭔지를 통 모르겠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유학"이라는 딱지 때문에 내가 앞으로 할 수 있을 일의 범위가 줄어들 거라는 사실. 가뜩이나 지금 가지고 있는 보잘 것 없는 "학위"도 버거워 죽겠는데. 지나온 세월 때문에 더 이상의 변화를 꿈꾸지 못할 날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두렵다. 더구나 나는 지금까지 쌓아온 걸 깡그리 접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만큼 쿨한 인간도 못 되지 않는가. 
 
아, 난 너무 늙어버렸다. 서른도 되기 전에 마흔을 훌쩍 넘겨버린 기분이다.

—박쥐

2004년 5월 13일 목요일

55 jours jusqu'au Jour J

blogin.com · 2004-05-13

한국 갈 날까지 55일 남았다. 왜 5월은 31일까지 있는 걸까. 그나마 6월은 30일까지 있어서 다행이다. 아니지, 다행인 것도 아니다. 28일까지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지금 이런 날짜를 계산하고 있다는 사실은 두 가지 점에서 웃긴다.
 
첫째, 이곳으로 떠나올 적에 나는 나를 아는 모두에게 앞으로 2~3년 간은 못 볼 거라고 겁을 단단히 줬었다. 그리고 돌아올 기약없는 뱃길을 떠나기라도 할 것처럼 굴며 거한 환송회를 몇 번씩이나 치루었다. 그런데 채 1년도 안돼서 그들 앞에 얼굴을 들이밀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달아오른다.

둘째, 정작 내가 달력 날짜를 일일이 짚어가면서 계산했어야 할 날짜는 따로 있었다. 당장 2주 후면 시험 하나가 있고,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시험까지는 1+1/2 개월이 남아 있다. 소논문을 가을까지 제출하는 걸로 미룬다 해도 교수에게 양해를 구하려면 대강의 안을 잡아 놔야 한다. 논문도 지도 교수와 얘기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구상해 놔야 한다.

그렇게 떠나고만 떠나고만 싶었던 그 땅을 이렇게 미치도록 그리워하다니. 물론 난 윤이상 선생처럼 마당에 대한민국 땅덩어리를 형상화해 놓은 연못을 만들어 놓고 볼때마다 눈물지을 정도의 애국심도 돈도 없다. 흔히들 "나라를 떠나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다. 그 "애국자"라서 귀국 날짜를 손으로 꼽고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그리워하는 건 "국가"나 "민족" 같이 거창하고 추상적인 가상체가 아니다. 술잔 부딪히는 소리, 여럿이서 침 섞어가면서 먹던 오뎅 국물, 도서관 옆 계단에서 뿜던 담배 연기, 학교 앞 가게의 샌드위치, 비온 뒤 여름의 교정 가득히 번지던 풀빛 안개, 신촌의 술집을 채우던 알코올향과 안주에서 나던 기름 냄새, 뭐 그런, 지극히 감각적인 것들. 아니면 내 방 침대, 집앞 조깅 코스, 아침이면 엄마와 두런두런 얘길 나누며 들던 오믈렛이랑 커피, 외할머니의 백김치, 뭐 그런, 아주 구체적이고 사소한 것들. 하긴, 윤이상의 통영도 그런 것으로 남아 있었던 거겠지. 타향살이 하는 이들이 고향이나 모국을 그리워하는 것도 다 그런 것들 때문일 거고.

기다려지는 것일수록 더디게 온다. 그러니 기다리지 말자. 그러면 7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들이닥칠 거다.

—박쥐

은하계 소식

blogin.com · 2004-05-13

이모씨가 잉태한 아기 우주들, 계속해서 팽창중
온도도 상승 - 자색의 분포가 눈에 띄게 늘어나

지난 5월 12일 새벽 폭발적으로 생성된 새로운 아기 우주들이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APA(Association for Pseudo-Astronomy)의 관측에 따르면, 각 우주들이 차지하는 면적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으며, 그 색깔은 갈수록 자색으로 변화, 우주들의 온도가 상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기 우주들은 이모씨(여, 만 26세)와 항성들의 충돌로 인해 잉태된 것으로, 현재 이모씨는 원치 않았던 임신의 충격에서 벗어나 우주들이 맘놓고 무럭무럭 자랄 수 있도록 몸을 아끼지 않고 있다. 가명을 요구한 APA의 한 관계자는 "눈에 띌 정도는 아니나, 각 우주들이 자체적으로 충돌하거나 쌍성계를 형성함으로써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면서, "이들의 이러한 자생성을 생각해볼 때, 이모씨는 더이상 자기 몸을 학대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모씨는 사다리와 책상을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내고 둘 중 하나에게 양육비를 요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박쥐

2004년 5월 12일 수요일

상처를 어루만지려다

blogin.com · 2004-05-12

새벽에 사다리를 타고 침대로 올라가려는데 밤마다 사다리를 타고 침대로 오를 때마다 상상하던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 짜릿한 추락 그토록 꿈꾸었던 마지막 순간 그러나 눈앞을 스친 건 백합 꽃더미에 파묻힌 창백한 얼굴이 아녔다 뒤께로 말라붙은 피와 파리떼로 범벅된 시커먼 머리통 

넘어진 사다리를 일으켜 세우고 이리저리 튄 나무 조각들을 주워담으려다가 문득 피멍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를 달고 다니던 어린 시절   다리가 알록달록 물드는 게 좋아 딱지가 앉을 무렵이면 나는 또 넘어지고 넘어졌던 거였다 

하늘하늘한 하늘색 잠옷을 걷어올리니 과연 기다렸던 상처들이 하얗게 굵은 내 종아리를 예쁘게 장식하고 있었다 발목에는 피가 고여든 자그마한 웅덩이 하나 그 옆에는 허옇게 벗겨진 살갗들이 일어나 바람결따라 춤을 추고 무릎에는 어느새 아기 우주 하나가 태어나 보랏빛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어루만지려던 상처가 나를 어루만지기 시작하고 그 손길에 통증이 가라 앉아갈 무렵에 20유로 주고 산 중고 책상이 한모퉁이가 떨어져 나간 채 흉칙한 몰골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순간 다시 푹푹 쑤시기 시작한 삭신 어느새 웅덩이랑 우주는 간데 없고 A/S 가능 조건과 영수증 따위가 어지러이 떠돌고 아아 나는 이미 추락해버린 나머지 백합 속의 죽음을 꿈꾸기에는 너무 까맣게 타들어버렸던 거였다

—박쥐

2004년 5월 11일 화요일

맑스씨의 기술사 수업을 듣는 시간

blogin.com · 2004-05-11

몇 주 전부터 기술史를 배우고 있다. 사실 기술의 역사는 별로 재미가 없다. 공학도나 엔지니어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기술 쪽은 한없이 "단무지"스럽게만 보인다. 워낙 내가 기어다닌 바닥이 극도로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어서 그런지, 기술이 갖는 즉물성은 그저 낯설다. 거참, 사실 부끄러운 얘기다. 속해 있는 학문에 대해서는 틈만 나면 그 관념성과 추상성을 도마 위에 올려놓곤 하면서도, 정작 그러한 측면들을 물질적으로/구체적으로 체화/체현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흉보고 깔보다니. "박쥐"라는 내 아호가 전혀 아깝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것들이 전혀 만만하게 볼 게 아니라는 걸 (이제서야 비로소) 깨달아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수업이 인상적인 건, 전혀 몰랐던 분야에 눈떠가는 재미도 쏠쏠하거니와, 무엇보다 담당 교수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68세대이자 맑시스트라는 혐의(!)를 두고 있다. 기술사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시조를 맑스로 두더니, 그 이후에도 툭하면 맑시스트 퍼스펙티브를 들이댄다. 말하자면 현대 사회의 모든 기술 개발과 관련 정책이 거의 전적으로 시장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식이다. 어느 정도까지냐 하면, 핵발전소나 유전자 변형 식품이 허가되느냐 마느냐의 차이도, 결국은 돈이 많이 드느냐, 혹은 돈이 되느냐에 대한 정부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고, 찬반에 대한 공론화가 이루어질 때는 그러한 결정이 이미 내려진 이후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미국에 대한 시각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의외로 재밌다. 그에 따르면, 미국이 오늘날처럼 과학 기술의 모든 분야를 선도하게 된 비결은 단 몇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 (1) 땅덩어리는 넓고 할 일은 많다 (2) 일할 사람이 없다 (3) 사람을 대신할 기계가 필요하다 (4) 기계를 개발하기 위해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요컨대 인력의 부족이 기술 개발에 대한 절대절명의 요구를 낳았고, 그것이 발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거 내가 단순화시킨 거 아니다. 교수가 몇 번이고 강조한 얘기다. 이 단순한 얘길 그토록 진지하게 하는 그에게서 어쩐지 "늙은 유럽"의 자존심과 자조감이 느껴졌다.

—박쥐

2004년 5월 9일 일요일

이공계 위기론, 인식론적 고찰을 위한 구상

blogin.com · 2004-05-09

이라크전의 참혹한 실상이 공개되면서 온 국제 사회가 미국에 대한 비난으로 들끓고 있는 걸 보면, 미국의 패권적 주도 현상이 이제 좀 수그러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온세계에 퍼져있는 맥도널드, 리바이스, 말보로, 그리고 세계인이 함께 보는 미국 시트콤과 헐리웃 영화 등등을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순미국산 상품뿐 아니라, 그에 전염된 "유사" 미제들이다. 말보로를 피우고 코카콜라를 마시면서 부시를 욕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욕하면서 배우게 되는" 미국식 영어나 문화가 다양한 언어나 관습을 획일화시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런 면에서 미국이 독식하는 여러 가지 분야 중 하나였던 과학에 "이상 신호"가 생겼다는 소식( 뉴욕타임스,U.S.' target='_son'>http://www.nytimes.com/2004 ... ed=1>뉴욕타임스,U.S. Is Losing Its Dominance in the Sciences," 2004년 5월 3일자 기사 )은 내심 반갑다. Physical Review 에 게재된 논문 중 그 저자가 미국 출신인 비율은 1983년 61%였던 데 반해 작년인 2003년에는 29%로 줄었다. 서유럽 20개국과 그 외의 국가들이 이 비율을 앞섰다. 미국은 특허 출원 비율에 있어서도 80년대에 비해 10% 가까이 줄었다. 대신 대만, 일본, 한국 등 동북아 국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냉전 시대에 비해 국가의 연구비 지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국방 예산은 오히려 냉전 시대보다 늘어나 작년엔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다른 이들은 유럽이나 다른 나라들에 비해 과학자들의 경쟁심이 상대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라고도 한단다. 특히 유럽의 경우, 미국을 경쟁 상대로 상정하고 입자물리 등의 분야에서 미국의 산학연 시스템을 벤치마킹하는 동시에 유럽연합이라는 지리적/정치적 여건을 이용해서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 미국은 이를 수수방관하고 있었다는 거다.

이러한 원인 분석에 예외 없이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있다. 인력 부족 혹은 유출이 그것이다. "외국 아이들 데려다가 기껏 길러놨더니, 우리가 가르쳐준 것 가지고 자기네들 나라로 돌아가는 바람에 결국 남의 나라 좋은 일만 하고 우리는 손해만 봤다"는 게 그들 얘기다 (외국인 박사 학위자가 자국으로 돌아가는 비율은 9.11 이후 美정부에서 비자 취득 요건을 강화하는 바람에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거기에 또 한마디가 따라 붙는다. 미국인들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바람에 그 빈자리를 외국인 유학생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고, 그 유학생들은 배운 다음에 다시 자국으로 돌아가니, 결국 쓸 만한 인력들은 하나도 남지 않더라는 것.

그런데 이를 미국의 이공계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건 좀 문제가 있다. 그 동안의 지나친 독점이 이제 겨우 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더욱이, 이는 어쩌면, 미국의 영향력이 전방위로 퍼져 나가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기사에서 한 인터뷰이는 이 아메리카나이제이션을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표현했다!). 그네들이 세워놓은 '과학'과 '과학성'과 '과학적 실천'의 기준이라는 그물망에 보다 많은 국가와 보다 넓은 문화권이 포섭됐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의 경우를 보면 특히 그러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이네들이 논문 게재수가 증가했다는 것은 실제 논문 편찬수가 증가했기 때문일뿐 아니라 편찬된 논문을 유럽 내에서가 아니라 (미국식) 영어로 옮긴 후에 미국에 본거지를 둔 저널에다가 출판하는 경우가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점에서다.

또 하나, 일련의 현상을 그 현상에 대한 몇몇 지표들을 통해 "위기"로 인식하는 근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논문의 국적을 따진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촌스럽게 느껴진다. 누구를, 무엇을 위해서? 요즘 누가 조국의 발전을 위해 연구를 하나? 한국 대학의 교수가 미국에 있는 입자 가속기로 실험하고 논문을 내면, 그 논문의 소속을 어디라고 해야 하나? 이 "글로벌라이제이션" 시대에, 국가별로 과학하는 스타일이 다른 것도 아니고. 또, SCI 지수나 노벨상 수상 인원수를 가지고 그 나라 과학의 발전 정도나 발전을 가능케 하는 조건인 인프라의 구축 정도를 가늠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상식이다. 좀더 그럴듯한 팩터들을 제시할 수 없나? 이를테면 과학의 대중화나 과학기술의 민주화 정도라든지.

이공계 위기론은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세계적인 현상인 듯이 보인다. 한국에서 누누이 들어왔던 얘기를 프랑스에서도 똑같이 듣고 있고 미국으로부터도 간접적으로 듣고 있다. 위기에 대한 체감 지수가 분야에 따라 달라지긴 한다. 대체로 돈 안 되는 분야에서는 돈 되는 분야에서보다, 실험 전공에서보다 이론 전공에서, 더 큰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난 이런 얘길 들을 때마다 답답함을 느낀다. 과학이 지금의 위치에 이른 건 아주 최근의 현상이다. 과학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훨씬 더 가까운 과거다. 같은 과학이라고 해도, 그 주도권의 임자는 아주 빠른 주기로 교체된다 (20세기만 해도, 물리학 -> 화학 -> 생물학의 순으로 "권력"이 교체됐다). "위기"일수록 보다 세심하게 주위를 살피고 또 필요하다면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과학이 자본의 논리에 휘둘린다는 건 분명 심각한 문젠데, 예산 부족이 가장 큰 위기의 원인이라는 판단이 든다면, 왜, 언제부터, 어떻게 돈이 모자르게 된 건지, 나아가 어째서 돈이 과학의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 됐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과학학 하는 사람들은 결코 과학하는 사람들의 적이 아니다.

—박쥐

2004년 5월 8일 토요일

인물 인지과학사 : 데니얼 데닛

blogin.com · 2004-05-08

밉살스러운,
그렇지만 미워할 수 없는 철학
데니얼 데닛의 인지과학에 대한 감상


철학이 미울 수도 있냐고? 그렇다, 적어도 내겐. 난 독단론이나 교조주의의 낌새가 보이는 철학이 밉다. 겉으로 보기에 무척이나 객관이나 관용을 추구하면서 사실상 자기 외의 다른 사상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철학은 더 밉다. 내가 기계론과 과학주의와 물리주의를 비롯해서 그리고 그에 기반한 일부 영미권 분석철학이나 개신교의 원리주의나 신자유주의 등등을 경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인지과학을, 아주 단순하고도 무식하게, 인간을 하나의 "기계"로 보고 인간의 사고와 인식이라는 행위를 특정 세포의 기계적 메커니즘에 의한 "물리적 과정"로 환원하려는 기획으로 이해했을 때, 그에 대해 호오를 말하기란 쉽지 않다.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는 건 분명한데, 마냥 소원하게 지내기는 아쉽고 찜찜한 데다가 아주 가끔씩은 곁에 두고싶기까지 한 이성친구 같다고나 할까. 한마디로 경원지심이다.

정신분석학을 "사변적 심리학"이라고 경멸하는 데서 보듯이 다소 교조의 냄새가 풍기긴 해도, 그들은 겸손한 편이다. 물리주의를 옹호하는 대표적 심리철학자인 김재권도 "인지과학이 모든 걸 설명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의 말에는 "아직까지는 아니다"라는 단서가 붙어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과학이 지금까지 밝혀낸 한도 내로 제한한다.

이들을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기존의 철학사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서 소스를 구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 있다. 뭇 현대 철학자들이 뉴턴 물리학이 무너졌다는 이유로 그에 기반해서 나온 당대 철학들을 낡아빠진 것으로 치부하는 반면에(모든 철학이 그 시대의 패러다임 안에서 나온 것인만큼, 현재의 효용 가치를 묻기 전에 역사적 배경 위에 위치시켜 놓고 봐야 하는 것이거늘!), 일부 인지과학자들은, 멀게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가깝게는 괴델 등 과거 철학자들의 인식론적 테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삼아 그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일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하긴, 인지과학의 물음 자체가, 심신 관계를 비롯해서 플라톤으로부터 이어진 서구 철학의 근본 문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던가.

사실 인지과학은 현대 과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혹은 형성해 가고 있는 다른 분야--생명공학/분자생물학, 나노과학, 인공지능/로봇공학 등--에 비해 사회적 비판의 성역 내에서 보다 안전한 위치에 있는 편이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세 분야와 꽤 밀접하게 연관돼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역사도 짧고 또 "순수" 학문에 머물러 있어 시장에의 의존도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이 미미하기 때문인 듯하다. 거기에다 윤리적 문제에서도 자유로운 편이다. 회의론 역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특성인 "사고"가 "겨우" 분자들의 유희로 설명될 수 있다는 데에 대한 실망감과 반발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될 정도이니.

데니얼 데닛은 인지과학과 인지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생각하는 기계, 즉 인공지능의 개발에 아주 낙관적인 견해를 취하고 있는 대표적 철학자다. 그 유명한 괴델, 에셔, 바흐의 저자자 더글러스 호프스테터와 더불어 편집한 인지과학 선집 The Mind's I 는 한국에서 "이런, 이게 바로 나야?"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 (수록된 글들도 맘에 들고 김동광 선생님의 번역도 괜찮았는데, 제목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언젠가 그분을 뵐 기회가 있었는데, 여쭈어 볼까 하다가 관뒀다). 작년엔가 한국에 다녀갔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그때 가서 얼굴을 보지 못한 게 참 아쉬웠다(데닛의 팬이라거나 그의 철학을 잘 알아서라기보다는, 그저 유명한 사람들 강연에 가서 목소리를 듣고 얼굴 보는 게 취미인지라).
 
그런 그를, 방금 전 영국의 시사지 가디언 기사( "The Semantic Engineer", Andrew Brown, The Guardian, Saturday April 17, 2004 )를 통해 접했다. 데닛 개인뿐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한 최근 인지과학 내의 흐름에 대해 개괄하기에 그만이다. 기자는 (뭇 과학자 위인 전기가 그렇듯이) 인터뷰의 한 1/2를 데닛이 얼마나 뛰어나고 철학뿐 아니라 요트, 악기 연주 등 여러 분야에서 다재다능한 인물인지를 강조하는 데에 할애하고 있는데, 대신에 나머지 1/2은 데닛의 인지과학에 대해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게 소개하는 데에 바쳤다. 이런 식의 인물 중심적 기술이라면 과학사를 서술하는 방법으로도 손색이 없을 듯.

그의 철학적 화두는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없지 않고 있는가?"라는 라이프니츠의 그것과 비슷한 물음에서 비롯된다 ("How can meaning, design and morality arise in a universe that began as meaningless, void and without form?"). 비록, 서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추구되고, 한쪽은 "유심론", 한쪽은 "유물론"이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긴 했지만. 데닛의 유물론은 "기계"적 유물론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기계가 생각할 수 있다고, 그리고 기계나 사람의 사고 과정을 과학에 의해 "기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문제는, 과연, 그렇게 해서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인간은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인식된 내용에 대해 사고할뿐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해서 의사를 결정하고 의미를 창조하기도 한다. 사고, 믿음, 욕망 등이 다 같은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심신 수반론의 가장 큰 걸림돌인 감각질(qualia) 및 창발(emergence)의 문제다. 한편으로 사고라고 해서 다 같은 것도 아니다. 사고의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과정 또한 달라질 수 있다. 사과나 참새에 대해 사고하는 것과 유리수나 무리수에 대해 사고하는 것은 다르고, 또 "나"에 대해 사고하는 것도 다르다. 

여기에서 데닛의 낙관론은 다위니즘으로 이어진다. 의미와 기능의 산출이 생명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왜 우리가 믿음을 갖는지 모른다. 뻐꾸기 새끼가 왜 형제자매를 둥지 밖으로 몰아내는지 모르는 것처럼. 바로 그런 의미에서 믿음에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을 만한) 이유가 없다. 그저 본능처럼 자연발생적인 현상이다. 이 현상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외부의 자극에 대한 내적 표상에 있다. 바로 그것이 믿음을 포함해서 두뇌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의 원인인 것이다 (참고로 원인과 이유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원인-결과는 인과론의 틀 안에 있는 개념이고, 인과론은 환원론의 기본 전제다. 반면, 이유는 분석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결과의 사후에 설명되고 해명되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자극을 인풋해주면, 아웃풋으로서 의미가 산출될 수 있다. 의식 현상 역시, 인풋에 대한 정보와 그 처리 과정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면 설명될 수 있고, 또 기계에 응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기존의 구문론적 기계를 넘어서는 의미론적 공학(semantic engineering)에 대한 데닛의 기획이다.

흠.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뭐라 말하기도 그렇고, 그리고 남의 전공에 콩 내놓아라 팥 내놓아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원대한 포부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포부가 큰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무에서 유가 나오는가?"에서부터,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라는가?", "나는 누구인가?" 등에 대한 답이 하나일 순 없다. 그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을 단 한 마디로 대체하려는 생각은 너무 큰 포부일 뿐더러 착각이요 오만이다.

데닛을 비롯한 뭇 인지과학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러한 생각이 인간의 마음이나 두뇌를 신비화하려는 낭만주의적 태도--흔히 반과학주의와 짝을 짓는 것으로 이해되는--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과학을 "신비화"하려는 그들의 전략을 냉철하게 비판하고자 함이고, 그런 점에서 지극히 "과학적"인 태도다. 나는 인지과학이 모든 시점을 하나로 모으기보다는 시야의 범위를 넓혀 비가시적 영역까지도 볼 수 있게 해주리라 믿는다. 주는 것 없이 미운 그 녀석을 미워하지 못하는, 아니 미워하지 않으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 Daniel Dennett

Born: March 28, 1942, Boston.

Education: Philips Exeter Academy; Wesleyan University; Harvard (BA 1963); Oxford University (DPhil 1965).

Married: 1962, Susan Bell (one son, one daughter).

Career: 1965-70 assistant professor of philosophy, University of California at Irvine; '70-71 assoc prof, Irvine; '71-75 associate prof, Tufts; '75- prof, Tufts, '76-82 chairman, department of philosophy, Tufts; '79 visiting lecturer, Oxford; '85-2000 distinguished prof of arts & sciences, '85- director, Center for Cognitive Studies, 2000- University Professor, Tufts.

Books: 1969 Content and Consciousness; '78 Brainstorms: Philosophical Essays on Mind and Psychology; '81 The Mind's I: Fantasies and Reflections on Self and Soul, co-edited with Douglas Hofstadter; '84 Elbow Room; '87 The Intentional Stance; '91 Consciousness Explained; '95 Darwin's Dangerous Idea; '96 Kinds of Minds; '98 Brainchildren: Essays on Designing Minds; 2003 Freedom Evolves.



사진, 약력, 참고 기사 출처' target='_son'>http://books.guardian.co.uk ... 084,1192975,00.html>http://books.guardian.co.uk ... nbsp;

—박쥐

2004년 5월 6일 목요일

어린이날 기념식

blogin.com · 2004-05-06

또 비다. 게다가 바람까지 매섭다. 어제도 봄비라기보다는 가을비같이 내리더니만. 그래도 어젠 이렇게 춥진 않았었는데. 이러다 내일은 눈보라가 내리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 수업을 빠질 순 없다. 늦어서도 안 된다. 오늘 수업 때 다음 수업 때 읽을 아티클들을 받기로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늘 수업을 할 교수도 매 시간마다 상당한 분량의 핸드 아웃을 돌리곤 하지 않았는가. 이 모든 것들을 제때 받지 않으면, 나중에 커버할 일이 까마득하다. "안녕"하는 인사 외에 별달리 말을 해본 기억이 없는 collegue들에게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부탁이야 할 수 있겠으나, 부탁하는 말을 어떻게 문장으로 구성해야 할지, 그리고 도움을 받은 뒤에는 어떤 식으로 감사를 표시해야 할지를 생각하면... 그래, 늦지 않는 게 상책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교수의 얼굴이 보인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다행히 아직 시작되지는 않은 것 같다. 유인물 배부가 시작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쓴 원근법에 관한 글이다. 예상했던 바다. 수학사가인 그 교수는 얼마 전까지 "원근법의 역사"를 강의했던 바 있고, 오늘의 수업은 그 과목의 연장선상이자 보충이니까. 옆에 있는 친구가 교수 앞에다 대고 또 원근법이냐고 볼멘 소리를 한다. 교수는 웃으면서 자기 전공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고 답한다. 그리고는 모두에게 30분을 줄테니 읽으라고 주문한다.

누군가가 다음 수업용 복사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아직 복사물이 준비되지 않았단다. 토론이 시작된다. 교수가 두 가지 제안을 한다. 하나는 누군가가 월요일 저녁 6시 수업 이전에 꽈사로 가서 복사를 한 다음에 수업 때 모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복사를 해서 모두에게 우편으로 부쳐주는 것이다. 두 번째 제안은 몹시 의외였다. 수업용 복사물을 우편으로 부쳐 준다는 얘긴 들어보지 못했다. 심지어 다음 수업은 그 교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맡은 건데 말이다.

갈등이 시작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번째 제안은 비효율적이다. 내가 월요일 수업 시작 이전에 시간이 있으니 복사를 맡겠노라고 자원하면 된다. 한국에서도 세미나나 수업 시간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곧잘 나서곤 하지 않았던가. 이번 기회에 이미지도 좀 쇄신하고. 그런데 이걸 어떻게 말하나. Je peux faire ça car je suis libre ?

머릿속에서 몇 개의 유치한 문장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사이, 결국 교수의 친절한 제안을 따르기로 결론이 난다. 교수가 주소를 적으라며 백지를 돌리기 시작한다. 아직 늦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하면 될 것 같다고 말하면 된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러면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볼 것 같다. 시선은 텍스트를 향해 있지만 아무 글자도 들어오지 않는다.

옆의 친구가 교수에게 질문을 한다. 종이를 쥔 손을 내 쪽으로 향한 채다. 버릇이겠거니 하고 내버려 둔 채, 그들의 Q&A를 따라가려 집중한다. 그런데 그 친구가 질문을 마치자 내 쪽으로 종이를 '탁'하는 소리가 나게 내려 놓는다. 자세히 보니 교수가 주소 적으라고 돌리고 있는 종이다. 왜 그 손짓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저번에 내가 자기 말을 못 알아듣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던 것도 저 아이였는데.

교수가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한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두피에서 소름이 돋는 게 느껴진다. 모든 게 한탄스럽다.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왜 말하지 못했을까. 왜 반 년이 넘어가도록 여전히 이 모양 이 꼴일까. 이러면 안되는데, 수업에 집중해야지. 시험까지는 채 두 달도 남지 않았다. 더구나 기하학과 미술이 만난 대표적 사례인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은 "과학에서의 美"에 대한 연구를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는 내게 무척 중요한 주제가 아닌가. 그치만, 조금 아까의 내 자신은 정말 용서할 수 없다. 아무래도 난 저 아이들처럼 거리낌 없이 질문하고 토론할 수 없을 것 같다.

문이 열리더니 꽈사에서 일하는 친구가 들어와 손에 한 가득 들고 있던 것을 '쿵'소리가 나게 내려 놓는다. 순간 주위가 밝아진다. 바로 문제의 그 복사물인 것이다. 이제 죄책감/자괴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아, 게다가, 이게 무슨 횡잰가. 그 중 하나가 지난 몇 달동안 찾아 헤맸으나 결국 손에 넣지 못했던 <아날>誌의 그 논문이 아닌가. 그래. 이 정도면 절망에 빠질 스무가지 이유 중 하나는 상쇄될 수 있을 것 같다.

도망치듯 강의실을 나선다. 두 시간 후에 있을 도미니크 르쿠르의 제자들이 발표하는 세미나에는 가지 않기로 한다. 재미있거나 내 전공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주제의 발표는 다음 주부터 시작될 거라는 지레짐작을 핑계/위안으로 삼으면서.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잔 관계로 가서 졸 가능성이 꽤 크다는 것, 내일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쳐야 할 숙제가 있다는 것도 또 하나의 핑계/위안이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다. 숙제를 할 힘을 내려면, 저 깊고 어두운 절망에서 한 발자국은 더 나와야 할 것 같다. 에클레르 까페를 떠올린다. 지난 겨울 사촌 언니의 친구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 처음으로 맛 본 후 잊고 있다가, 스노우캣이 다이어리에다가 에클레르에 대한 향수를 적어놓은 걸 지난 일요일에 보고는 당장 나가서 사다 먹었었다. 마들렌느+홍차-> 맛+향기 -> 기억/상기의 도식이 역전되는 순간이었지. 지금은 그게 되먹임되고 있는 중이고. 단 걸 좋아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 걸 보니.
 
그러고 보니, 오늘이 어린이날이었구나. "과년한" 처녀가 웬 어린이 타령이냐고? 옛말에서 "어린"은 "어리석은"이라는 뜻이었다잖는가. 그래, 오늘만큼은 내가 아무리 어리석었더라도 좀 이해하기로 하자. 뜻밖에도 저 과자 하나가 "관용"의 정신을 상기시켜주는구나. 그 정도면 어린이날 기념食으로 충분하다. 그 하나만으로도 오늘 저녁은 어린이날 기념식을 겸한 성찬이 될 것 같다. 에클레르야,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네가 날 좀 살려줘야겠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니 오늘, 단 하룻밤만이라도.

—박쥐

2004년 5월 5일 수요일

graffiti aphorism

blogin.com · 2004-05-05

흐리고 비가 오다.
오뎅탕, 해물파전, 달걀말이,
 잎새주, 참이슬, 매화수,
그리고 사람들을 생각하다.

문득 신촌 굴다리옆 술집 "나룻터" 옆에
새겨져 있었던 낙서를 떠올리다.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다.
 

—박쥐

2004년 5월 4일 화요일

지나친 자기 반성

blogin.com · 2004-05-04

O
"이건 어디까지나 서구적인 관점에서 하는 얘깁니다."

O'
"종이나 철 등등은 다 중국에서 건너온 겁니다. 과학 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과학은 중국의 그것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낙후돼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중국의 과학은 산업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게 오늘의 차이를 만든 겁니다. 한편으로 과학이 늘 같은 방식으로 전파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프리카의 예를 보면 알 수 있죠. 선진 학문이 받아들여진다고 해서 다 국가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거죠."

O''
"영미권의 천문학사 연구는 아랍의 영향을 깡그리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랍을 빼놓고서 코페르니쿠스 이전 중세까지의 천문학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중국의 천문학은 서양의 중세 이전부터 고도로 발달돼 왔던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쪽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내가 아는 서양과 아랍 천문학에 대해서만 얘기할 겁니다."


언제부턴가 이런 말들이 듣기가 싫어졌다. 수업 시간에 동양이나 중국에 관련된 얘기만 나오면 정말 도망가고 싶다. 내 이런 반응을 보면, 심술이 지나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저렇게까지 알아서 반성해 주는데도, 뭘 더 바라느냐고. 하긴, 이 정도가 어딘가. 그런데도 듣는 심기가 그다지 편치 않은 건 왜일까.
 
똑같이 미운 사람들인데, 아예 생각 없는 부시보다 알 것 다 아는 블레어가 더 미울 때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지도. "내가 하는 말이 무조건 진리야! 그러니 그저 잠자코 들어!"나 "내가 하는 얘기, 다 내가 가진 특권적 위치에서 하는 말이니까, 그걸 새기면서 들어요"나 똑같이 강압적일 수 있는데(대개의 경우, 이렇게 시작하는 종류의 대사-주장은 발화되는 즉시 상대방에게 관철되게 마련이다. 일단 화자와 청자 사이의 일방적인/위계적인 관계가 상정되면서 그 모든 얘기들이 시작되는 거니까), 전자의 경우 대들고 싶은 의지를 샘솟게 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그런 의지를 스르르 녹여버린다. 소수자/낙오자 정서를 가진 사람이 후자같은 말을 들으면 갑자기 적이 동지로 느껴지면서 전의 및 전투력이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아, 이게 웬 뚱딴지같은 군사주의 메타포란 말인가!).
 
문제의 근본은 그런 말들일수록 실제로는 반성하지도 않았으면서 온갖 반성한 척은 혼자 다 하고 있음을 숨기기 위한 것일 확률이 높다는 데 있다. 플라시보 효과를 노린 투명한 방어막일 혐의가 짙다는 거다. 유럽중심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을 교묘하게 포장한 저 O', O''를 보라! 자기 반성 O가 결국 화려한 포장지였다는 얘기다.

애써 반성하려는 이 앞에다가 두고 자기 반성이 지나치면 화를 부른다느니 어쩐다느니 거품을 물며 되지도 않는 설교를 늘어놓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전혀. 그래도 관대한 그/그녀는, 다 자격지심이 터질듯 부풀어 올라 있고 괜한 일들에 쓸데없이 예민해져 있는 탓이려니 하고 이해해 주리라. 더군다나 난 요즘 정체--국적, 인종, 성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요약+정리해주는 외모!-- 때문에 한참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지 않은가.
 
사실 정작 반성이 필요한 건 나다. 오늘도 주느비예브에서 인종별 분포도를 머릿 속으로 계산하고 있지 않았느냐. 아랍 사람이 스쳐 지나갔을 때 가방 속에서 지갑을 확인한 건 또 어떻고. 어쩜 난, 그들이 세련된 방식으로 반성하는 걸, 반성하는 자기의 위치를 저토록 자신있게 드러내는 걸, 질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들은 이미 자신들의 모든 것을 선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정도로 나를 포함한 타자들의 무의식을 잠식해 버린 것이다. 저들 아닌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자신들에 대해 반성하는 바로 그 모습조차 타인들로부터의 부러움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은근하고 아주 깊숙하게.

결론. 별 수 없다면, 생긴대로 살자. 단, 어떻게든 "수" 찾는 일을 포기하지 말자. 그걸 오로지 혼자서 찾겠다는 생각은 버리자.

—박쥐

2004년 5월 2일 일요일

강산이 다섯 번 변하는 동안 변치 않은 것

blogin.com · 2004-05-02

대통령 각하
각하께 편지 올립니다
부디 읽어 주십시오
혹 시간이 되신다면

어제 입영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수요일 저녁까지 입대하라는 내용이었지요

대통령 각하
 저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불쌍한 사람들을 죽이려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도망가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중략]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걸 봤습니다
형제들이 떠나가는 것도 봤습니다
제 아이들이 울고 있는 것도 봤구요
어머니는 또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셨던지요

 [중략]

군에 가는 대신
 제 길을 가겠습니다
방방곡곡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외치렵니다
"복종을 거부하십시오,
전쟁을 하지 마십시오,
전쟁에 나가지 마십시오,
전쟁터로 떠나지 마십시오"

보리스 비앙(Boris Vian), "탈영병의 노래(le Déserteur)"


1. 클릭만 하면 제깍 들을 수 있는 맛보기 파일http://chansonrebelle.free. ... ram/Le_deserteur.ramhttp://borisvian.free.fr/po ... ?piste=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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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약간의 번거로움을 거친 후에야 들을 수 있는 완벽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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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전쟁은 악이다. 필요악이 아니다. 절대악이다. 무조건 악이다. 그 어떤 수단이나 명목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건 정언 명제다. 따라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정언 명령이다. 달리 말해 그 논리적 정당성을 애써 주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지극히 당연한 명제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때론 악을 써가며, 때론 목놓아 울며, 때론 피를 토하며, 때론 목숨까지 바쳐 왔는가. 문제는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말귀를 못 알아듣거나 혹은 귀를 부러 틀어막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인류는 이미 경험할 수 있는 모든 끔찍한 사건들을 충분히 거쳤다. 인간이 어느 정도로 야만스러워질 수 있는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줬던 2차대전이 끝난 지 이제 겨우 50년이 조금 넘었다. 그 전쟁은, 그 이후에도 그칠 새 없이 이어진 몇몇 다른 전쟁들과 더불어, 그것을 직접 체험한 세대뿐 아니라, 역사책, 몸서리칠 만큼 생생한 보도 사진이나 인터넷 동영상, 반전+평화 노래 등으로부터 간접적으로 경험한 세대에게도 공포스러운 기억으로 각인돼 있다. 전쟁에 대한 공포는 이미 동서고금을 초월한 집단적 기억이 돼버린 것이다. 이쯤 되면 반전 및 평화가 지극히 당연한 가치로 자리매김될 만도 한데.

20세기의 그 크고 작은 많은 전쟁들이 인류에 공헌한 바가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주옥같은 반전 노래들일 것이다. 사실 내가 아는 노래라고 해봤자 밥 딜런이 거의 전부다. 그런데 얼마 전에 우연히 보리스 비앙의 노랠 듣게 됐었고,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같은 곡을 미국의 Peter, Paul and Mary 가 자신들의 콘서트용으로 약간 개사해서 부른 걸 찾아냈다. 후자의 개사는 베트남전과 미국의 청중 앞이라는 맥락에 맞춘 것인데, 원래 가사에서의 "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내 아내는 성폭력을 당했어요"라는 부분이 "나는 감옥에 있을 때 영혼을 빼앗겼어요"로 바뀌는 등 전자에 비해 한결 "순화"됐다 (비앙이 처음에 썼던 가사의 마지막은 "각하의 군사들을 보낼테면 보내십시오. 내가 총으로 그놈들 머리를 날려줄 테니"였는데, 이는 주위의 권유로 그 후두가 "난 무기가 없으니, 쏠테면 쏘십시오"로 바뀌었던 바 있다. 만약 그대로 갔더라면 이 노래가 갖는 평화주의적 색채가 조금 바랬을 뻔 했다) . 비앙이 이 시를 쓴 게 1954년이고 미국에서의 콘서트는 1964년이니, 올해로 각각 50, 40주년을 맞는 셈이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노래가 이토록 "시의성"을 보여준다니... 말을 잃을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 아프게 말하고, 목이 터지도록 노래를 불러야 한다. 군사주의와 폭력을 포함해서 전쟁과 관련된 모든 것은 지양돼야 한다고.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는 지지돼야 한다고. 왜? 전쟁은 악이니까. 왜 악이냐고? 악이니까!



Afterwords

구글 엔진을 몇 차례 돌린 끝에, 보물 창고 하나를 찾아냈고, 거기에서 보물 하나를 건졌다. 고맙게도 PPM의 콘서트 실황 LP를 그대로 따다가 놓았다.
또 하나. 알고 보니 이 노래가 영어뿐 아니라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 여러 나라 말로 번안/번역됐다. 한국어 버전도 나왔으면 좋으련만 (내가 한 번 시도해보려 했으나, 잘 안 됐다. 노랫말에 대한 감각이 영 부족한지라).

Peter, Paul, and Mary, "Le Déserteur", ,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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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