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 신현림, "나의 싸움"
생산은 고사하고 재생산도 힘에 겨워 이렇게 며칠째 복제만 반복하고 있는 걸 보니, 무기력증이 정점에 달한 모양이다. 이미 뇌세포들에는 이끼가 내려앉은지 오래. 기분 전환도 하고 마음도 다잡고 그 와중에 언어 실력도 연마할 요량으로 집었던 소설들도 내팽개쳐진지 너무도 오래. 전공책들과 각종 복사물들은 어느새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다. 이렇게 넋나간 채로 몇 날을 그냥 흘려보내놓고 나니, 며칠 다니러 오겠다던 몽실에게 퇴짜를 놓은 것이 몹시 후회스럽다. 몽실과 신나게 놀았더라면, 그리고 난 뒤 맘을 다지고 새롭게 6월을 맞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건만. 주어진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해야할 일을 하지 않기 위한 모든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골몰하고 있었다면, 그래도 최소한의 의지는 있었던 게 아닌가. 그 의지가 무얼 향한 것이었든지 간에. 그런데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지금 내 안팎에서 살아 움직이는 유일한 것은 오직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뿐.
방안에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베르메르나 렘브란트를 볼 수 있는 이 수퍼울트라급 기술복제시대를 살았더라면, 벤야민은 분명히 땅을 쳤으리라. 분명한 건 그 천인공노할 기술 덕분에 작품이 물리적(또는 시공간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등의 제약을 넘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저 위에다가 "복제"해 놓은 시만 해도,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은 오로지 시인의 이름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라는 마지막 구절뿐이었는데도, 구글에서 "지겨운 고통 신현림"이라는 검색어만으로 바로 그 전문을 찾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복제품" X'는 결코 "원본" X 의 "붕어빵"이 아니다. X'는 X 이상의 다양한 의미들을 생성해낸다. 물론 시의 존재론을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는 건 당치도 않은 일이다. 시의 "원본"이라니? <세기말 블루스>의 96년 초판에 찍혀 있는 활자들? 시인이 직접 이 시를 낭독하면, 그게 이 시의 "원본"이 되는 겐가? 아니, 구체화되기 전의, 시인의 머릿속에서 "영감"의 형태로 떠돌고 있던 그 상태가 "원본"이라고 해야하잖는가? 그렇지만 시는 소설과는 달리 물리적인 것의 영향을 꽤 많이 받는다. 똑같은 시라 하더라도 문자들을 종이 위에 어떻게 배열하느냐, 누구의 목소리로 어떤 세팅에서 낭독되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시를 처음 본 건 학부 3~4학년 무렵, 교지에 실린, 그 나이 즈음에 다들 한 번씩은 해봤음직한, 그 누구로도, 그 무엇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그렇지만 지나고 보면 별 것도 아닌, 고만고만한 고민에 관한 글이었다. 우울, 불안, 쓸쓸함, 치욕, 슬픔, 저 시에서 말하고 있는, 그 모든 20대 초반의 정서들을 가득 담은. 그 친구는 시인의 입을 빌어 그것들더러 꺼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꺼지라"는, 그 투박하기 짝이 없는 시어가 주는 해방감이란! 그렇지만 그것은 맘놓고 만끽할 수 있는 종류의 해방감은 아니었다. 사실 그것들은 고통스러운 십자가인 동시에 자랑스러운 훈장이자 사랑스러운 보물이기도 했다. 늘 우울, 불안, 쓸쓸함, 치욕, 슬픔들에 시달리다가도, 그것들이 잠시라도 내 안에서 사라지기라도 하면 오히려 더 불안해지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4~5년이 흐른 지금, "꺼지라"는 말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삶은~"이라는 진부한 말로 시작하는 첫 구절이다. 아니, 어쩌면, 마지막에는 눈길을 두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워라.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하라. 남아있는 나날을 위해. 고통은, 지겨운 고통은, 꺼지란다고 얌전히 꺼져주지 않는다. "꺼지라"는 말은 그렇게 텅빈 구호로 남거나 아니면 공기 중에 흩어져 버렸다.
무기력증에 시달리다가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라는 시귀를 떠올리고 전문을 찾아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조악하기 짝이 없는 시학과 재미없는 시론을 주절거리다니. 사실인즉슨, 고통의 주변을 우회하고 또 우회하는 것, 이것이 내가 얼마 전에 발견해서 써먹고 있는 고통 퇴치법이다. 그런데 그새 내성이 생겨버렸는지 별 효과가 없다. 좀더 강력한 뭔가가 필요하다.
—박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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