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드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필요 이상으로 뒤를 돌아보거나 앞을 내다보게 되니까. 갈수록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더더욱 힘들어지니까.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적, "행복"을 이렇게 정의한 적이 있다.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온 신경과 모든 에너지를 쏟느라 행복을 느낄 틈도 없이,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는 것"이라고. 행복이나 평화나 진리나 정의와 같은 가치들에 대한 질문은 대개 그러한 가치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되게 마련이고, 그러한 욕구는 그것의 결핍에서 나오는 법. 행복을, 평화를, 진리를, 정의를 이미 획득하여 그것들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정의로운 삶인가" 등등의 질문은 무가치하다. 앎에의 의지는 권력에의 의지가 가장 빈곤하고도 기만적인 방식으로 표출된 형식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스물 일곱 살때까지는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온 셈이다. 바로 내 눈 앞에 놓인 책을 읽고, 그 순간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됐었으니까. 물론 어릴 적 "이다음에 커서 ~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어린 시절의 꿈이 대부분의 경우 시간에 비례해서 대통령에서 시작해서 점점 평범한 샐러리맨/우먼으로 축소되는 반면에,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내 꿈과 시간 사이에는 함수 관계 자체가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라는 변수가 아예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제사 돌이켜보건대, 어쩌면 그것이 이제껏 아주 심히 불행하게 살지는 않았다고 해도 될 만큼 살아낼 수 있었던 비결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행복한 줄 알아야 해. 유학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라는 말을 들으면 할 말이 없긴 하다. 내가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던 바를 조금씩 실현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지만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 한편으로는 예의 그 행복의 정의에 따른다면 결코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꿈의 실현 정도"를 행복에 대한 새로운 기준으로 삼아서 판단한다 해도, 이제는 그 '꿈'이 뭔지를 통 모르겠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유학"이라는 딱지 때문에 내가 앞으로 할 수 있을 일의 범위가 줄어들 거라는 사실. 가뜩이나 지금 가지고 있는 보잘 것 없는 "학위"도 버거워 죽겠는데. 지나온 세월 때문에 더 이상의 변화를 꿈꾸지 못할 날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두렵다. 더구나 나는 지금까지 쌓아온 걸 깡그리 접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만큼 쿨한 인간도 못 되지 않는가.
아, 난 너무 늙어버렸다. 서른도 되기 전에 마흔을 훌쩍 넘겨버린 기분이다.
—박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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