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17일 월요일

늑대, 양의 수용소에 가다

blogin.com · 2004-05-17

여기는 집 잃은 어린 양들의 임시 수용소
양치기는 선의의 거짓말에 능하다
양들은 온순한 데다 쾌활하기까지 하다

오늘은 그들이 한바탕 축제를 벌이는 날
어느새 제의는 희극으로 치닫는다
상쾌한 바람이 숨막히던 수용소를 감싸고
양들은 바람 때문에 간지러워 죽겠다며 깔깔대고
그 틈을 타 세속의 냄새가 들어와 제사 향을 밀어내고
양치기의 입에는 벌써부터 침이 고여 있다

간신히 뒤집어쓴 탈이 오늘따라 버겁다
배에서는 꾸르륵 꾸르륵 소리가 그치지 않고
코는 제멋대로 킁킁거린다
뾰족한 발톱과 뻣뻣한 털을 숨긴답시고
너무 두꺼운 가죽을 걸쳐서인지
온몸이 박박 긁어달라고 아우성이다

어느덧 의식이 끝나고 기다리던 성찬의 시간
한껏 들뜬 양들이 이번에는 풍악을 울린다
낯선 땅에서 듣는 꽹과리 소리에
양들은 둥실둥실 춤을 춘다
수용소의 좁다란 마당이 출렁인다

어느새 모든 것이 넘실댄다
몸뚱아리가 꿈틀대고 가죽이 흘러내린다
고개가 흔들리고 탈이 덜컹댄다
입맛은 어느새 싹 달아나 있고
굶주려 벌겋게 갈라졌던 눈이 물기를 머금는다

조용히 물가로 내려와 발길을 돌린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중얼거린다,
어차피 맛도 없었을 거라고,
맛있었다 해도 소화가 잘 안 됐을 거라고.


- 파리 한인 성당 창립 50주년 기념일에.
그들 누구도 쫓아내지 않았으나,
 쫓긴 듯 돌아오다.

—박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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