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12일 수요일

상처를 어루만지려다

blogin.com · 2004-05-12

새벽에 사다리를 타고 침대로 올라가려는데 밤마다 사다리를 타고 침대로 오를 때마다 상상하던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 짜릿한 추락 그토록 꿈꾸었던 마지막 순간 그러나 눈앞을 스친 건 백합 꽃더미에 파묻힌 창백한 얼굴이 아녔다 뒤께로 말라붙은 피와 파리떼로 범벅된 시커먼 머리통 

넘어진 사다리를 일으켜 세우고 이리저리 튄 나무 조각들을 주워담으려다가 문득 피멍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를 달고 다니던 어린 시절   다리가 알록달록 물드는 게 좋아 딱지가 앉을 무렵이면 나는 또 넘어지고 넘어졌던 거였다 

하늘하늘한 하늘색 잠옷을 걷어올리니 과연 기다렸던 상처들이 하얗게 굵은 내 종아리를 예쁘게 장식하고 있었다 발목에는 피가 고여든 자그마한 웅덩이 하나 그 옆에는 허옇게 벗겨진 살갗들이 일어나 바람결따라 춤을 추고 무릎에는 어느새 아기 우주 하나가 태어나 보랏빛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어루만지려던 상처가 나를 어루만지기 시작하고 그 손길에 통증이 가라 앉아갈 무렵에 20유로 주고 산 중고 책상이 한모퉁이가 떨어져 나간 채 흉칙한 몰골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순간 다시 푹푹 쑤시기 시작한 삭신 어느새 웅덩이랑 우주는 간데 없고 A/S 가능 조건과 영수증 따위가 어지러이 떠돌고 아아 나는 이미 추락해버린 나머지 백합 속의 죽음을 꿈꾸기에는 너무 까맣게 타들어버렸던 거였다

—박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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