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4일 월요일

장미 화분 이야기를 해볼까

전에도 얘기했던 그 장미 화분 말이야. 수퍼마켓에서 파는 한 철용 싸구려였지. 원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그저 물을 가끔 주는 것 빼면 무관심으로 일관해선지 언젠가부터 줄기가 하나둘씩 줄어들기 시작했지. 무관심하긴 해도 신경은 좀 쓰였었는지, 어느 날엔가는 안 되겠다, 안됐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가망 없는 건 잘라내고 줄기 두 개만 남겨놓고는 분갈이를 했지. 그랬더니 남은 줄기는 되살아나고 제법 잘 자라서 지난해에는 한두 송이나마 꽃도 피워내더군. 그 꽃이 지고 나서도 한참은 잘 자랐어. 잎도 별로 없고 병약해 보이긴 했어도. 그래도 잎들이 제법 고왔어. 붉은빛이 감도는 짙은 녹색. 그런데 문제는 그 잎이 달린 가지들이 밑단에서부터 고르게 뻗지 않고 위쪽 부분에만 집중돼 있었다는 거야. 아마 밑의 줄기들은 그사이에 떨어져 나갔었나 봐. 그래도 윗부분은 잘 자라고 있었으니 별문제는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줄기만 삐죽 솟은 모습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어. 중간을 잘라서 키를 줄이면 딱 좋겠다 싶었지. 그러던 어느 일요일. 줄기를 자르고 접붙이기 시도를 감행했지. 밑동과 줄기 부분을 잇고 막대를 덧대어 이 세 부분을 끈으로 묶어서 말이야. 그랬더니 원래 가지들은 시들해진 대신 새로운 잎이 나기 시작했어. 파릇파릇하던 잎들을 잃은 게 좀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기뻤어. 새로운 생애를 선사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했고. 그런데 그마저도 오래 가진 못했어. 줄기가 마르기 시작했어. 이어 붙인 부분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던 거야. 봉합이 부실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화분 밑에 고인 물을 빼느라 화분을 들었다 놓느라 그 부분을 움직였던 것이 주요인이었던 것 같아. 며칠, 아니 몇 주는 고민을 한 끝에, 어느 일요일. 재수술을 시도했어. 붕대를 풀고,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이는 부위를 절단하고, 비교적 건강해 보이는 윗동과 밑동을 잇고 새로운 부목을 덧대고 다시 붕대를 붙였지. 지난번처럼. 아니, 그래도 지난 번보다는 그래도 요령이 생겨서 붕대도 제법 솜씨 있게, 좀 더 단단히 감았어. 그랬다고 생각했어. 처음에는 또 새잎이 그래도 나더라고.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사실 지난번이랑 똑같았는데, 그래도 차이가 없지 않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였겠지. 그러던 어느 날 밤, 바람이 세차게 불었어.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접합 부위가 엇나가고 붕대 사이로 노출돼 있는 거야. 다시 자세를 잡아 주고 며칠 예후를 지켜보았어. 그리고 생각을 해보았어. 또다시 재수술을 시행한다 한들 차도가 있을까. 소수에 불과할지언정 그래도 경험이 쌓이고 요령을 터득했으니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삼세번은 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던 어느 날. 잘린 줄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넣었어. 사실 이번에는 특별히 숙고를 거치지는 않았어. 그저 순간적으로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을 뿐이야. 사실 애당초 결론은 나와 있었어. 맨 처음 가지를 잘라내던 그 순간부터. 근거없 희망적 사고요, 에 모든 걸 파스칼적 도박이었던 것이지. 데, (), 지. 그 모든 숙고는 합리화와 정당화의 과정에 지나지 않았고, 그에 따른 그 모든 시도 또한, 결론을 재확인할 순간을 지연시키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이야. 순간적 판단, 아니 차라리 충동이, 그 모든 것을 무화시켰어. 충동을 결단으로, 결단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무척 쉬웠어. 쓰레기통에 담긴 줄기와 잎사귀를 보니 헛웃음이 났어. 지난 몇 주, 아니 몇 달간 쓰레기를 키운 셈이었던 거지. 그런데, 그러고 나니까, 옆에 나 있던 다른 줄기가 보이기 시작했어. 뿌리는 같은데 가지도 없고 그저 몸통만 남아 있어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던 이 줄기가 글쎄, 이웃 줄기가 몸이 잘리고 두 차례 대수술을 받고 하는 동안에, 조용히 성장하고 있었던 거야. 뿌리로부터 공급되는 영양을 독점하게 되면서부터는 성장률이 가속되기 시작했어. 가지도 제법 뻗고 끝에는 푸른 싹도 보이고. 그리고는 마침, 마침내, 봄이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