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30일 목요일

푸생의 에우리디케

ㄴ 언니의 초대로 가서 보고 온 루브르의 기획전 <푸생과 신>. 그곳에서 뜻밖에 Scarph : PauvRe, Haute, Solitaire et melAnColique: 에우리디케 상황 에서의 그 에우리디케를 다시 만났다.

Orphée et Eurydice, Nicolas Poussin, 1664. Huile sur toile 124 x 200 cm.

요전에 언급한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 이야기는 에우리디케가 죽음을 맞이한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에우리디케 상황"의 원인이 되었던 에우리디케의 죽음이라는 사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어가는데 오르페우스는 리라를 타느라 보지 못한다. 보려면 얼마든지 볼 수 있을 만큼 제법 가까운 위치에, 아니,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바로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무엇보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권한을 가졌음에도!

내가 기억하는 푸생이라고는 루브르에 소장된 이른바 "풍경화"들, 그 중에서도 4계절 연작 정도가 전부였는데, 그와는 사뭇 다른 스타일, 르네상스풍부터 고전주의 형식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다양한 스타일을 추구했는 줄은 몰랐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인상파를 연상케 하는 붓터치마저. 그러나 아무래도 르네상스 회화, 특히 푸생과 비교되고 실제로 초기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진 라파엘로에 비한다면, 전반적인 색조에서부터 인물의 표정과 안색까지가 무척 어둡고 윤곽마저도 희미하다는 것이 이번 전시를 통해 느낀 전반적인 인상. 조명 탓도 있겠으나 그림들 자체가 어찌나 어두운지 중간에 라파엘로가 한두 점 나오니 눈이 확 트이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누가 더 천재였는지를 겨루는 것은 무의미하고, 나는 차라리 15-16세기 이탈리아와 17세기 프랑스 사이의 지역적이고 시대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좀더 나아가 말해 본다면, 시대보다는 오히려 토포스의 차이가 더 결정적이리라는 심증을 나는 가지고 있다. 똑같이 태양을 근원으로 가졌음에도 이탈리아에서 맞은 태양광은 프랑스에서와는 분명히 다르게 느껴지더란 말이다. 단지 일조"량"의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가 있더란 말이다. 프랑스에서의 햇빛은 그저 눈만 밝히는 빛으로서의 역할이 전부요, 그마저도 실질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이고 상징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전부인 반면, 이탈리아에서는 좀더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것이어서 몸을 따스히 감싸는 볕의 기능도 충실히 수행한달까.

그러나 이것은 그저 옹호할 가치도 없고 나로서도 그럴 의지도 없는 지극히 주관적인 테제. 특히 내가 비교 대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프랑스라 함은 파리이고, 이탈리아라 함은 피렌체나 피사 등의 지중해를 낀 토스카나 지방이니, 비교가 부당함은 당연하다. 이 반론에 대한 재반론도 물론 가능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본산은 피렌체고 프랑스 회화 및 기타 예술의 중심지는 어쨌든 파리였으니까. 문제는 푸생의 경우 파리에서도 활동했지만 로마 교황청을 위해서도 일했고 결국 여생을 마무리한 것도 로마에서였다는 것.

좀더 진지하게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본다면 이렇다. 종교개혁 이후 구교 세력이 신교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미지숭상(iconolatrie)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는 과정에서 특히 회화를 장려했고, 이러한 배경을 업고 17세기 종교화의 경향을 바로 대표하는 것이 바로 푸생이다. 그러나 동시에 푸생은 17세기, 화이트헤드가 "천재의 시기"라 부른 바 있는, 과학혁명 시기의 산물이기도 하다. 데카르트, 파스칼, 갈릴레오, 뉴턴 등의 이 "천재"들은, 18세기의 급진적 무신론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지만, 믿음을 합리적 근거에 정초하거나 반대로 믿음을 수단화하되 이 또한 합리적 논거와 논증을 거친 경우에만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한 이신론(déisme)의 전통을 마련하는데, 푸생의 종교성은 바로 이 전통을 따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갈수록 배경으로서의 자연이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그 자연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측면이 강조된다...고 보는 것은 좀 무리인가? 실제로 푸생의 이력을 종교화에서 풍경화로의 이행으로 볼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푸생의 이른바 풍경화를 보면서 칸트의 숭고 개념을 떠올린 것은 사실이다. 이성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파악하고 나아가 이를 통해 자연 내 불리한 존재조건을 넘어설 줄 아는 것이 인간이요,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바로 단적으로 크거나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자연을 관조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재확인하도록 한다는 것이 칸트 숭고 이론의 대략적 요지. 푸생의 4계절 연작을 처음으로 봤을 때에는 아마도 <판단력비판>을 읽은지 얼마 안 됐었고 그래서 숭고를 떠올렸던 것 같으나, 다시 생각컨대 푸생의 자연관을 숭고로 해석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겠다. 독일과 프랑스라는 차이에 100년 이상의 시대 차이는 물론이고, 100년도 그냥 100년이 아니라 계몽시대를 거쳐 프랑스 대혁명까지를 포함하지 않는가. 칸트적 의미에서의 숭고를 체화하는 작품으로 흔히 거명되곤 하며 칸트와 동시대인이기도 했던 프리드리히의 작품과의 비교하면 차이가 좀더 분명해질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과 갈등이라는 구도야 사상적으로는 베이컨을 위시, 17세기부터 이미 널리 퍼져 있던 관점이었을 것인데, 푸생과 그의 시대는 이러한 구도를 받아들임에 있어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모티브에 여전히 갇혀 있지 않았는가 하는.

그러나 이 역시 그다지 진지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좀더 진지할라치면 공부와 사유가 필요하겠다. 실제로 전시장에서, 혹은 전시장을 나서며, 당장 떠오른 것이 세르가 푸생에 대해 쓴 글. 그 밖에 관련 주제로는 바로크와 역동론/동역학(dynamisme/dynamique)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들뢰즈의 <주름>에서도 푸생이 언급되고 있던가?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봤던 유진 그린(Eugene Green)의 영화 <라 사피엔자 (La Sapienza)> 역시 바로크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 ; 참고로 푸생은 1594–1665)를 주요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린의 오랜 관심 주제였던 바로크에다가 또 그 특유의 규범적이고 설명적인 스타일이 건축이라는 주제와 접목한 결과로 나온 일종의 바로크 "건축학개론".  이 모든 것을 당장 뒤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참는다. 사실 위에 적은 얘기도 자신이 없고 나중에 보면 마냥 부끄러워질 테지만 그냥 첫인상에 대한 기록 차원에서 남겨둔다.

수미쌍관의 원칙에 입각해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 마무리를 하자면... tant pis pour Orphée et merci à ㄴ 언니.

2015년 4월 25일 토요일

두 가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내 앞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궁금해서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 왜들 저리 날을 세우는지 알 수 없었다. 다들 마그네슘 결핍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고, 저들도 많이들 지쳤나 보다, 힘든가 보다, 그래서 예민해졌나보다, 하고 생각도 해보았다. 발밑은 가시밭길인데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가시나무나 고슴도치뿐인 세상. 하루빨리 그 모든 가시가 거두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깨달았다. 하필이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들 삶에 지치고 나약해진 게 아니라, 나를 만나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 보는 편이 설명으로서는 훨씬 간명하고 개연성이 있음을. 칸트는 인식의 형식과 원리들을 대상이 아닌 주관에 근거하도록 함으로써 대상적/객관적 인식의 문제를 (잠정적으로나마) 해결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상대적으로) 간소화하고, 이를 스스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부른 바 있다. 과연, 온 천상계가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보면, 천문학의 많은 난문이 해결되거나 간소화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 앞에서 유독 과민하게 반응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반응을 자극하고 촉진하는 무언가가 내게 있다는 얘기. 요전에 말한 가해망상의 징후인지도 모르겠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질문이라고 다 순수한 게 아니고 (그 유명한 유도질문, loaded question!) 내가 던지는 질문이야말로 그 전적인 예일 수 있다는 얘기다.

내가 가졌던 또 하나의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왜 내가 마음을 둔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주지 않을까. 내게 그렇게 매력이 없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이, 내게 마음을 준 사람도 없지 않았으니까.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건 그 사람들에게 실례가 되는 거니까. 혹시 너무 쉽게 마음을 주는 것이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마음 주는 일이 실제로 "쉽"기라도 한 양. 그러나 마음이 오간다는 것은 쉽고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그저 어쩔 수 없는 일. 합리적 사고나 의지와 무관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음"에 관한 이러한 소박하고 단순한 낭만주의-신비주의가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태도는 아닐 것이다. 또 하나의 가설은 이런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끌리게 되면, 그 누군가 앞에서는 긴장을 해선지 아니면 마음을 숨기려는 의도에선지, 엉뚱한 방향으로 행동하게 되어 그나마 있던 매력마저 스스로 손상시키는 결과를 낳곤 한다는 것.

그러다 깨달았다. 하필이면 내가 마음을 둔 사람들이 나를 맘에 들어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나를 맘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주로 끌린다는 것이다. 나야말로 내게 마음을 주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내 마음이란 것이 작동하는 원리는 매우 범속한 욕망의 메커니즘에 가깝다. 욕망의 대상이라는 것은 단지 충족되지 않음으로써만 비로소 유효하고 충족되는 순간 무화되는, 일종의 맥거핀이고, 실제 대상은 욕망 그 자체라는 것. <스완의 사랑>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 처음에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오데트에게 안색이 창백하다느니 광대뼈가 도드라졌다느니 하는 이유를 들어 다소 시큰둥하던 스완. 그러던 그가 오데트의 마음을 갈구하게 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떠나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다. 그러나 그녀를 품에 정작 안는 순간, 스완은 깨닫는다. 그녀가 심지어 자신의 "타입"마저도 아니었음을. "그 많은 세월을 허비하고, 죽고 싶어지기까지 하고, 더없이 큰 사랑을 했구나. 내게는 매력도 없고 내 타입도 아닌 여인 때문에."† "타입"에 속한다 해도 마음에 들까말까인데 그 타입의 조건에마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사실 나는 이런 종류의 타입-토큰 이론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런 깨달음은 늘 뒤늦게서야 온다. 요전에 말한 "계단생각"을 변주해서 말하자면 계단전회 (révolution de l'escalier). 모든, 최소한 많은, 전회/혁명이 그렇듯.§



* 사실 전회의 방향은 반대. 코페르니쿠스의 경우 천구 운동의 중심을 지구에서 세계-태양-으로 돌렸다면, 칸트는 역으로 인식의 근원을 세계에서 자아로 돌렸기 때문이다.

† « Dire que j'ai gâché des années de ma vie, que j'ai voulu mourir, que j'ai eu mon plus grand amour, pour une femme qui ne me plaisait pas, qui n'était pas mon genre! » -- Extrait de: Marcel Proust. « Du Côté de Chez Swann. » iBooks. https://itun.es/fr/pNCUD.l

§ 벤야민? Référence à venir.

2015년 4월 20일 월요일

이게 다 볼테르와 루소 탓

집중력, 이해력, 논리력, 한 마디로 지적 능력 일반의 감퇴. 대신에 감성적인 것에 대한 감응력은 인플레이션 단계. 그러나 이 부문의 성장은 그저 상대적일 뿐이다. 즉 지성의 자리를 감성이 대신하게 된 것일 뿐이다. 에너지 보존 법칙과의 유비로 이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 정신 능력의 총량이 일정하다면 지적 능력의 부분이 감성적 능력으로 변환한 것이다... 총량이 일정하다는 전제 하에. 그리고 감성에 있어 "능력"을 논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그렇다고 미적 판단력이 나아졌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판단력 일반은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나 능력으로서의 취미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계발되었다 볼 수 있겠다. 특히 청각과 미각에 관한 한.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순간적인데, 특히 청각과 미각이 그렇다. 덧없는 것들. 그렇다고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의미가 있는 것들인데. 단지 순간적으로만 현전함으로써 오히려 영원할 수 있는. 아니면 이렇게 말해보자. 다른 종류의 시간성을 지녔다고. 측정가능한 물리적 시간과도 다르고,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넘어서 있는, 즉 탈시간적(atemporel)인 논리 및 이데아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닌. 심리적 시간? 아니면, 아인슈타인이 베르그손을 겨냥해서 말한, "물리학자의 시간"과 구분되는, "철학자"의 시간? 프루스트의 마들렌느와 성당 종소리, 기차소리, 스푼으로 찻잔을 두드리는 소리, 뱅퇴이 소나타 등등의 시간. 흔히 베르그손의 지속과 비교되는 그 시간 말이다. 그 유명한 커피 속 설탕의 시간. 커피에 설탕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프루스트나 베르그손에게 특권적인 예가 청각과 미각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생각보다 크다. 영화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다는 사실도. 왜? 로고스가, 즉 언어가, 즉 이성이 개입하므로. 베르그손에게는 지성. 베르그손은 아예 지성을 영화적이라 특징 짓는다. 끊임없이 생성하고 유동하는 실재-지속을 지성화하고 박제화하는 것이 바로 로고스-이성이다. 

이게 다 지난 12년 간의 감성교육 탓이다. 데카르트적 합리주의 및 계몽주의의 현현인 동시에, 그것이 그에 대한 반작용인 낭만주의의 계보와 늘 긴장 관계를 유지해 온 나라에서 오래 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게 다 볼테르와 루소 탓*이다.


*« On est laid à Nanterre,
C'est la faute à Voltaire,
et bête à Palaiseau,
C'est la faute à Rousseau.

Je ne suis pas notaire,
C'est la faute à Voltaire,
Je suis petit oiseau,
C'est la faute à Rousseau.

Joie est mon caractère,
C'est la faute à Voltaire,
Misère est mon trousseau
C'est la faute à Rousseau.

Je suis tombé par terre,
C'est la faute à Voltaire,
Le nez dans le ruisseau,
C'est la faute à....  »

Extrait de: Victor Hugo. « Les misérables Tome V. » iBooks.

2015년 4월 17일 금요일

혼자서 또는 여럿이. 조류열전

로잔. 2008년 11월.


사라 문. 파리 자연사 박물관 전시. 2013년 12월.
파리, 빌라 뒤프렌느. 2015년 초.

 
파리, 빌라 뒤프렌느. 2015년 4월.




2015년 4월 16일 목요일

에우리디케 상황

내가 걸음이 느린 편은 아니다. 하이힐을 신고도 잘도 걸어서 주위의 감탄을 사곤 한다.빨리 걷는 습관은 아마도 엄마 걸음을 따라가다 익히게 된 것 같다. 일찍이 엄마는 작은 키임에도 훤칠한 친구들이 못 따를 정도로 빠른 걸음의 소유자로 유명했다. 어린 동생과 나와 걸을 때도 마찬가지여서 엄마는 늘 앞선 채로 뒤에 있는 우리에게 손짓하곤 했다. 그러면 나와 동생은 엄마가 흔드는 손을 잡기 위해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걸음이 빨라졌고, 최소한 다른 사람들과 걸을 때 걸음이 뒤쳐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유난히, 거의 유일하게, 같이 갈 때면 늘 저만치 앞서가는 사람이 있다. 나와 걷는 게 싫은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원래 그렇게 걸음이 빠르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원래 그렇다고 했다. 같이 있는 사람과는 걷는 속도가 맞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 정도로 걷는 속도가 빠르기는 힘든데 만약 맞다면 상대방이 맞춰주는 것 아니냐고도. 그랬더니 함께인 그 사람은 다리가 길다고 했다.

뒤에서 따라오는지 돌아보지도 않고 혼자만 앞서가는 뒷모습을 보며 오르페우스를 생각했다. 그였다면 오히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주문을 충실히 지켜 에우리디케를 되찾을 수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런데 이는 또한 전적으로 무심하기에 또 가능한 일이니, 그런 무심함이라면 저승까지 따라가서 그녀를 찾아올 이유 또한 없었을 것이고 미션이 아예 주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오르페우스의 뒤를 따르는 에우리디케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그 어느 주도권도 선택권도 의무도 없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들고 망치고 하는 것도 다 오르페우스다. 이건 너무 불공평하다. 

어쨌든 일이 그렇게 되어 오르페우스를 가만히 따라가야 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그녀 또한 앞서가는 이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을까. 뒤로는 눈길 한 번 안 주는 것을 보며 서운키도 하지 않았을까. 그러던 중 앞선 이가 뒤를 돌아 보고 그리하여 보고 싶던 얼굴을 보려는 찰나, 아, 그것이 결국에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헤어져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야 한들 어떠랴, 그의 마지막 얼굴과 마음을 확인한 순간만큼은 영원할 테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극적이고 부당할지언정 에우리디케의 상황이 부럽기도 하다. 같이 걷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 배려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최소한의 배려를 받을 자격도 없다는 것인가, 아니, 약자-이 경우 다리가 짧은 사람-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그랬다면, 오, 그것은 약자 배려 원칙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그저 동행인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도 그러면 안되지 않나, 옆에 잘 걷지 못하는 어르신이나 아이가 있다 해도 그렇게 걸을 것인가, 그러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아무래도 역시 나와 걷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보기가 싫어서,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같이 있는 순간을 어떻게든 단축하고 싶어서... 등등의 끝없는 피해망상에서는 최소한 자유로울 수 있었을 테니.  

-- Va, va, Eurydice, tu perds ton temps !

2015년 4월 2일 목요일

가족이 나오는 꿈

꽃, 나비, 나무, 하늘, 바람, 별, 강물, 물고기, 강아지 등등으로 가득한 친환경적이고 도교적인 세상. 그러나 그 세상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순간이 있으니. 그 순간, 꽃은 숨겨두었던 가시를, 나비는 날개의 상처를 드러내고, 나무는 누군가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는 화살이 되고,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강물은 바닥을 드러내고, 그 바닥 위에서 물고기는 힘겹게 파닥대고, 강아지는 어둠을 향해 컹컹 짖는다. 루시드폴 노래를 듣다 보면 가끔 그런 느낌을 받는다.

물론 그는 미선이 시절부터 이미  "송연" 이나 "치질" 등 가시가 돋힌 가사들을 써왔다. 그러나 아무래도 독집부터는 서정의 정서가 지배적. "사람이었네"와 앨범 <레미제라블>의 몇몇 노래들에서는 세상의 불의에 선연히 분노하는 것 같긴 했으나, 그 표현이 절대로 직접적인 일은 없었고 어디까지나 은유의 차원에 머물 뿐이었다. 현실에의 "참여"라 해도 지극히 은밀하고 소극적이이어서, 세상을 향해 열린 창 없이 오직 자기 안에 표현된 세상을 노래하는 모나드 같은 느낌. 즉 근본적으로 내향적(introspectif)이란 얘기고 그 노래도 결국은 내성(introspectoin)이라는 얘기다. 부적응자이거나 자폐아이거나 자급자족형이어서라기보다는, 세상 어디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서성대는 태생적 이방인이어서라는 것이, 내 자신의 경우를 투사한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해석. 결국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으로만 보자면 앞의 세 병리와 다르지는 않겠으나.

이러한 내향적 인간 특유의 현실에 대한 태도에서 보이는 것과 처음에 말한 그림자는 좀 다르다. 그것은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어두움이다. 평소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숨겨 놓지만 가끔씩 드러나고 마는 어둠의 그림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은 그 어둠의 그림자가 숨겨져 있었다 생각하면 무서워진다.

<꽃은 말이 없다> 앨범에 실린 "가족"이라는 노래는 그가 만든 중 최고로 어두운 것 같다. 듣다 보면 지난 세기 초, 민중의 빈곤하고 비참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른바 사실주의 가요(chanson réaliste) 생각이 난다.

다락방에 모여 사는 가족이 서로 떨어지지 말자고, 무너지지 말자고 소리친다. 아이도 소리친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엄마 아빠는 보이지 않는다. "듬성듬성 붙어 있는 천정의 벌레들/금세 울음이라도 터질 듯한 얼굴들"와 같은 묘사는 무척 사실적이고 섬뜩하다. 조르주 브라상스의 "기도(La prière)"나, 좀더 멀게는 토머스 하디의 <주드>에서 "because we are too many"라는 말을 남겨 놓고 동생들을 죽이고 스스로도 목을 맨 어린 소년이 생각나는 대목.

그 중에서도 특히 "가족들이 나오는 꿈은 늘 불안하지/온통 걱정스런 눈빛만 가득하니까"라는 구절은 들을 때마다 도망가고 싶어진다. 이 노래를 들은 뒤로 실제로 꿈에 가족이 나오면 불안해지기도 했다.

바로 그 가족이 나오는 꿈을 며칠 전에 꾸었다. 야학 모임에 가는 꿈. 개교 몇 주년이거나 기타 기념 행사였을 것이다. 할머니도 오셨다.

이게 왜 가족이 나오는 꿈이고 또 "야학"과 "할머니"가 무슨 연고인가 할 수 있겠는데, 그러게, 내가 생각해도 보통은 상관 관계가 있기 힘들겠고, 하다못해 자유연상으로도 연결이 자명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내 개인사의 맥락에서는 그러하니, 나의 친할머니가 바로 서울의 한 야학에서 교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계셨고, 나는 바로 그 야학에서 교사로 활동을 했던 것이다.

다시 꿈에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람들이 내게 "이 분이 당신의 할머니되시는 분이다"라고 소개해주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분명 보통은 아닌 상황. 그러나 이 또한 그럴 법도 한 것이, 나는 친손녀라 해도 못 뵌지 5년이 넘은 데 반해, 야학의 제자들과 선생들은 가끔 모여서 찾아뵙고, 또 최근 "폐교" 행사에서는 다들 모였다고도 하니. 그런데 내 눈앞의 할머니는 몹시 앳된 얼굴과 표정이었다. 그저 아흔을 넘기고도 정정함을 유지한 수준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소녀였다. 그것도 사춘기 소녀. 수줍어하면서도 또 눈빛은, 걱정스럽기커녕, 천진난만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그 와중에 생각했다. 다들 모이는 거면 그도 올까? 그랬더니 실제로 멀리서 걸어 들어오는 그가 보였다. 교수가 됐다더니, 회색 정장을 한 말쑥한 차림. 가는 눈. 내리깐 시선.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그럼에도 나는 단숨에 알아 보았다. 할머니는 알아뵙지 못했는데. 그도 나를 보았는지, 알아보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알아채기 전에 꿈에서 깼다.

두 사람 모두 내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인물. 최근에는 할머니 생각이 부쩍 늘었다. 어느새 아흔을 훌쩍 넘기셨는데, 빨리 가서 뵈어야 하는데. 문제의 "그"는 계속 잊고 있다가 얼마 전에 불현듯 생각이 났다. 궁금하기도 하고 또 그리워지기도,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보지 못할 것이다.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가족(과 한때 최소한 가족만큼, 아니 가족보다 훨씬, 친밀했던, 일종의 유사가족)이 나오는 이 꿈에서 모종의 불안감과 두려움이 느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걱정스런 눈빛이 가득해서가 아닌, 그와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눈빛이 걱정스러우면 차라리 좋겠다. 눈빛이 아예 사라지거나, 아니면 더 이상 나를 향하지 않을 것, 그것이야말로 더 걱정되고 또 걱정할 만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오래 전 두고 온, 너무 오래 비워둔 내 자리, 지나온 시간,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대한 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