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6일 목요일

에우리디케 상황

내가 걸음이 느린 편은 아니다. 하이힐을 신고도 잘도 걸어서 주위의 감탄을 사곤 한다.빨리 걷는 습관은 아마도 엄마 걸음을 따라가다 익히게 된 것 같다. 일찍이 엄마는 작은 키임에도 훤칠한 친구들이 못 따를 정도로 빠른 걸음의 소유자로 유명했다. 어린 동생과 나와 걸을 때도 마찬가지여서 엄마는 늘 앞선 채로 뒤에 있는 우리에게 손짓하곤 했다. 그러면 나와 동생은 엄마가 흔드는 손을 잡기 위해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걸음이 빨라졌고, 최소한 다른 사람들과 걸을 때 걸음이 뒤쳐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유난히, 거의 유일하게, 같이 갈 때면 늘 저만치 앞서가는 사람이 있다. 나와 걷는 게 싫은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원래 그렇게 걸음이 빠르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원래 그렇다고 했다. 같이 있는 사람과는 걷는 속도가 맞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 정도로 걷는 속도가 빠르기는 힘든데 만약 맞다면 상대방이 맞춰주는 것 아니냐고도. 그랬더니 함께인 그 사람은 다리가 길다고 했다.

뒤에서 따라오는지 돌아보지도 않고 혼자만 앞서가는 뒷모습을 보며 오르페우스를 생각했다. 그였다면 오히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주문을 충실히 지켜 에우리디케를 되찾을 수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런데 이는 또한 전적으로 무심하기에 또 가능한 일이니, 그런 무심함이라면 저승까지 따라가서 그녀를 찾아올 이유 또한 없었을 것이고 미션이 아예 주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오르페우스의 뒤를 따르는 에우리디케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그 어느 주도권도 선택권도 의무도 없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들고 망치고 하는 것도 다 오르페우스다. 이건 너무 불공평하다. 

어쨌든 일이 그렇게 되어 오르페우스를 가만히 따라가야 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그녀 또한 앞서가는 이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을까. 뒤로는 눈길 한 번 안 주는 것을 보며 서운키도 하지 않았을까. 그러던 중 앞선 이가 뒤를 돌아 보고 그리하여 보고 싶던 얼굴을 보려는 찰나, 아, 그것이 결국에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헤어져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야 한들 어떠랴, 그의 마지막 얼굴과 마음을 확인한 순간만큼은 영원할 테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극적이고 부당할지언정 에우리디케의 상황이 부럽기도 하다. 같이 걷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 배려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최소한의 배려를 받을 자격도 없다는 것인가, 아니, 약자-이 경우 다리가 짧은 사람-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그랬다면, 오, 그것은 약자 배려 원칙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그저 동행인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도 그러면 안되지 않나, 옆에 잘 걷지 못하는 어르신이나 아이가 있다 해도 그렇게 걸을 것인가, 그러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아무래도 역시 나와 걷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보기가 싫어서,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같이 있는 순간을 어떻게든 단축하고 싶어서... 등등의 끝없는 피해망상에서는 최소한 자유로울 수 있었을 테니.  

-- Va, va, Eurydice, tu perds ton temp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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