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력, 이해력, 논리력, 한 마디로 지적 능력 일반의 감퇴. 대신에 감성적인 것에 대한 감응력은 인플레이션 단계. 그러나 이 부문의 성장은 그저 상대적일 뿐이다. 즉 지성의 자리를 감성이 대신하게 된 것일 뿐이다. 에너지 보존 법칙과의 유비로 이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 정신 능력의 총량이 일정하다면 지적 능력의 부분이 감성적 능력으로 변환한 것이다... 총량이 일정하다는 전제 하에. 그리고 감성에 있어 "능력"을 논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그렇다고 미적 판단력이 나아졌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판단력 일반은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나 능력으로서의 취미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계발되었다 볼 수 있겠다. 특히 청각과 미각에 관한 한.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순간적인데, 특히 청각과 미각이 그렇다. 덧없는 것들. 그렇다고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의미가 있는 것들인데. 단지 순간적으로만 현전함으로써 오히려 영원할 수 있는. 아니면 이렇게 말해보자. 다른 종류의 시간성을 지녔다고. 측정가능한 물리적 시간과도 다르고,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넘어서 있는, 즉 탈시간적(atemporel)인 논리 및 이데아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닌. 심리적 시간? 아니면, 아인슈타인이 베르그손을 겨냥해서 말한, "물리학자의 시간"과 구분되는, "철학자"의 시간? 프루스트의 마들렌느와 성당 종소리, 기차소리, 스푼으로 찻잔을 두드리는 소리, 뱅퇴이 소나타 등등의 시간. 흔히 베르그손의 지속과 비교되는 그 시간 말이다. 그 유명한 커피 속 설탕의 시간. 커피에 설탕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프루스트나 베르그손에게 특권적인 예가 청각과 미각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생각보다 크다. 영화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다는 사실도. 왜? 로고스가, 즉 언어가, 즉 이성이 개입하므로. 베르그손에게는 지성. 베르그손은 아예 지성을 영화적이라 특징 짓는다. 끊임없이 생성하고 유동하는 실재-지속을 지성화하고 박제화하는 것이 바로 로고스-이성이다.
이게 다 지난 12년 간의 감성교육 탓이다. 데카르트적 합리주의 및 계몽주의의 현현인 동시에, 그것이 그에 대한 반작용인 낭만주의의 계보와 늘 긴장 관계를 유지해 온 나라에서 오래 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게 다 볼테르와 루소 탓*이다.
*« On est laid à Nanterre,
C'est la faute à Voltaire,
et bête à Palaiseau,
C'est la faute à Rousseau.
Je ne suis pas notaire,
C'est la faute à Voltaire,
Je suis petit oiseau,
C'est la faute à Rousseau.
Joie est mon caractère,
C'est la faute à Voltaire,
Misère est mon trousseau
C'est la faute à Rousseau.
Je suis tombé par terre,
C'est la faute à Voltaire,
Le nez dans le ruisseau,
C'est la faute à.... »
Extrait de: Victor Hugo. « Les misérables Tome V. » iBooks.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