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내 앞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궁금해서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 왜들 저리 날을 세우는지 알 수 없었다. 다들 마그네슘 결핍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고, 저들도 많이들 지쳤나 보다, 힘든가 보다, 그래서 예민해졌나보다, 하고 생각도 해보았다. 발밑은 가시밭길인데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가시나무나 고슴도치뿐인 세상. 하루빨리 그 모든 가시가 거두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깨달았다. 하필이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들 삶에 지치고 나약해진 게 아니라, 나를 만나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 보는 편이 설명으로서는 훨씬 간명하고 개연성이 있음을. 칸트는 인식의 형식과 원리들을 대상이 아닌 주관에 근거하도록 함으로써 대상적/객관적 인식의 문제를 (잠정적으로나마) 해결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상대적으로) 간소화하고, 이를 스스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부른 바 있다. 과연, 온 천상계가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보면, 천문학의 많은 난문이 해결되거나 간소화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 앞에서 유독 과민하게 반응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반응을 자극하고 촉진하는 무언가가 내게 있다는 얘기. 요전에 말한 가해망상의 징후인지도 모르겠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질문이라고 다 순수한 게 아니고 (그 유명한 유도질문, loaded question!) 내가 던지는 질문이야말로 그 전적인 예일 수 있다는 얘기다.
내가 가졌던 또 하나의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왜 내가 마음을 둔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주지 않을까. 내게 그렇게 매력이 없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이, 내게 마음을 준 사람도 없지 않았으니까.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건 그 사람들에게 실례가 되는 거니까. 혹시 너무 쉽게 마음을 주는 것이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마음 주는 일이 실제로 "쉽"기라도 한 양. 그러나 마음이 오간다는 것은 쉽고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그저 어쩔 수 없는 일. 합리적 사고나 의지와 무관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음"에 관한 이러한 소박하고 단순한 낭만주의-신비주의가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태도는 아닐 것이다. 또 하나의 가설은 이런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끌리게 되면, 그 누군가 앞에서는 긴장을 해선지 아니면 마음을 숨기려는 의도에선지, 엉뚱한 방향으로 행동하게 되어 그나마 있던 매력마저 스스로 손상시키는 결과를 낳곤 한다는 것.
그러다 깨달았다. 하필이면 내가 마음을 둔 사람들이 나를 맘에 들어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나를 맘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주로 끌린다는 것이다. 나야말로 내게 마음을 주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내 마음이란 것이 작동하는 원리는 매우 범속한 욕망의 메커니즘에 가깝다. 욕망의 대상이라는 것은 단지 충족되지 않음으로써만 비로소 유효하고 충족되는 순간 무화되는, 일종의 맥거핀이고, 실제 대상은 욕망 그 자체라는 것. <스완의 사랑>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 처음에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오데트에게 안색이 창백하다느니 광대뼈가 도드라졌다느니 하는 이유를 들어 다소 시큰둥하던 스완. 그러던 그가 오데트의 마음을 갈구하게 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떠나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다. 그러나 그녀를 품에 정작 안는 순간, 스완은 깨닫는다. 그녀가 심지어 자신의 "타입"마저도 아니었음을. "그 많은 세월을 허비하고, 죽고 싶어지기까지 하고, 더없이 큰 사랑을 했구나. 내게는 매력도 없고 내 타입도 아닌 여인 때문에."† "타입"에 속한다 해도 마음에 들까말까인데 그 타입의 조건에마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사실 나는 이런 종류의 타입-토큰 이론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런 깨달음은 늘 뒤늦게서야 온다. 요전에 말한 "계단생각"을 변주해서 말하자면 계단전회 (révolution de l'escalier). 모든, 최소한 많은, 전회/혁명이 그렇듯.§
* 사실 전회의 방향은 반대. 코페르니쿠스의 경우 천구 운동의 중심을 지구에서 세계-태양-으로 돌렸다면, 칸트는 역으로 인식의 근원을 세계에서 자아로 돌렸기 때문이다.
† « Dire que j'ai gâché des années de ma vie, que j'ai voulu mourir, que j'ai eu mon plus grand amour, pour une femme qui ne me plaisait pas, qui n'était pas mon genre! » -- Extrait de: Marcel Proust. « Du Côté de Chez Swann. » iBooks. https://itun.es/fr/pNCUD.l
§ 벤야민? Référence à ven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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