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자스민, 혹은 우디 앨런의 미소

 최근 몇년 새 우디 앨런이 유럽과 영국을 방랑하며 찍은 작품들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매치 포인트>와 <미드나잇 인 패리스> 정도를 제외하면. <매치 포인트>가 뛰어난 스릴러 감각에 영국 계급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 돋보이는 수작이라면, <패리스>는, 작가로서의 욕심과 역량을 드러내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 취향을 여과없이 담는 데에 주력, 비슷한 취향을 소유한 나같은 관객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어느 작품도 내가 앨런에게서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켜주진 않았다.

내가 앨런에게서 기대하는 바란 이런 것이다. 불평불만 가득하고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도 인간과 관계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하고 그런 가운데 자아와 세계를 성찰하고 나아가 새로운 자아상 및 세계관을 확립할 가능성. 인간주의적 냉소랄까, 냉소적 인간주의랄까. 영화 내내 곤두서 있던 신경을 누그러뜨리며 아주 잠깐, 아주 살짝 미소짓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맨해튼>의 마지막 컷이 엘런 세계의 이러한 근본 이념을 집약해서 보여준 바 있다.

뉴욕은 단순한 로케이션을 넘어 그러한 이념을, 더불어 그 이념을 말하자면 극복할 계기를 보여주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장치였다. 그리고 앨런의 작품들은 뉴요커로서의 존재 증명이었다. 뉴욕에서 찍지 않은 작품들마저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그가 뉴욕만 벗어나면 힘을 잃는다고 단언하는 한편, 어서 외유를 접고 그만의 도시로 돌아가길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블루 자스민> (2013)의 배경은, 애석케도, 뉴욕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다. 주인공은 부유층에서 하루 아침에 빈털터리로 전락한 중년 여성. 영화는 뉴욕에서 최상류층의 삶을 구가하던 그녀의 과거와, 샌프란의 동생네 집에 얹혀 살며 새 인생을 시작하려 애쓰는 현재를 교차하면서 보여준다. 플래시백에서 등장하는 뉴욕은 이전까지 앨런이 그려왔던 뉴욕과는 다르다. 허위와 과시욕과 위선으로 가득한 부자들의 삶. 샌프란의 프롤레타리아 "루저"들의 그것과 대비되지만 둘다 공허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이 같고도 다른 사회에 대한 시선에서 계급 사회 및 현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풍자를 읽을 수 없는 바는 아니나, 전반적으로는 희화화와 진지한 비판이 무질서하게 섞여 블랙유머도 아니고 페이소스도 없는 어정쩡한 코미디가 되어 버렸다.

특히 주인공 케이트 블랜챗은 배우 개인으로서나 앨런 영화의 여주인공으로서나 낯설었다. 정확히는 불편했다.

영화는 그녀가 어떻게 "하락"한 "신분"으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치과병원 접수원이라는 "모욕적"인 직장에서 피곤한 환자들을 상대하는 걸로도 모자라 의사의 성희롱까지 겪는다든지. 그러나 그저 달리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일 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새 삶을 개척하려는 의지는 결여돼 보인다. 계속해서 과거를 복기하며 바로 그 과거로 복귀하길 꿈꿀 뿐이다. 그것도, 과거와 꼭 같이, 돈 많은 남자를 만나는 방식으로.

여기까진 클리셰다. 얼마든지 풍자하고 조롱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그런 그녀의 내면을  관찰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울분을 터뜨리고 마스카라가 범벅된 눈물을 시도때도 없이 흘리거나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신경안정제를 상습적으로 복용하는 등, 그녀의 행태는 희화화 대상으로 삼기엔 심각한 수준의 병리적 상태로 보인다. 이러한 묘사와 관점이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함을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해당 분야 전문가의 몫이겠다. 나는 그저, 인물에 대한 타자화 혹은 소외 혹은 몰이해 혹은 공감부족으로 점철된 시선이 영화의 내적 완성도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앨런은 이전에도 말많고 신경쇠약 직전에 항우울제를 달고 사는 여자들을 즐겨 그려왔다. 그녀들은 대상화되었다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투사, 말하자면 여성적 페르소나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녀들에 대한 묘사는 특별히 친여성적이거나 여성주의적이지는 않았다 해도 적어도 반여성적이진 않았다. 이것은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작가의 대상과의 동일시와 공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로서의 앨런이 단순히 여성관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펠리니의 이탈리아나나 누벨바그 감독들의 파리지엔느처럼 여성 이미지의 창조는 앨런의 작가적 스타일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였다.

다이앤 키튼으로 대표되는 앨런 영화의 뉴욕 여성들은 거개가 전문직에 종사하는 인텔리 계급에 속한다. 거기에 자스민과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자스민은 엑스 뉴요커이긴 해도 신흥 부르주아에 가깝다. 그것도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투자 사업으로 쌓았고, 그마저도 사기 행각으로 점철된 부다. 내가 아는 한 이 시대 최고의 스노브이자 모랄리스트 중 하나인 앨런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부류인 것이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남편의 재산에 의존해 안일한 삶을 구가한 원죄가 있고 따라서 인텔리 여성 동지들이 혐오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췄다. 앨런으로서는 대상을 얼마든지 대상화하고 타자화할 안전 거리를 확보한 셈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획득된 관점이 내 눈엔 의뭉스럽게 보인다. 한 부르주아의 경제적이고 도덕적인 몰락에 안도하는... 또 다른 부르주아의 타락한 도덕과 허위의식을 보는 것만 같다. 

샤워를 마친 뒤 거리에 나와서는 젖은 머리 그대로에 화장기가 전혀 없이 늙고 지친 모습으로 공중 벤치에 앉아 혼잣말을 중얼대는 자스민의 얼굴을 화면 가득 비추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마지막 장면을 다시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맨해튼>의 그 마지막 미소가 더욱 그리워진다.

- 2013년 10월 작성한 글을
2018년 8월 복원하여 게재하다

Lutte des classes & #MeToo

1.

Je lutte des classes. 프랑스에서 언젠가부터 집회에 심심찮게 등장하곤 하는 구호다. 볼 때 마다 낯설었다. Lutte des classes 하면 계급투쟁이고 이는 맑스가 역사 진보/발전의 기본 원리로 삼았던 개념 아닌가. 즉 역사적 사실이지 지향할 가치나 이념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계급 투쟁을 한다? 등록금 투쟁이나 임금 투쟁을 하듯이? 내가 이 이야기를 하자 ㅇ 언니는 계급 타파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호, 그렇다면, 과연, "투쟁" 구호로서 의미가 있다. 심지어 갈수록 의미심장해지고 있다. 계급 제도는 타파는커녕 점점 더 견고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소리냐고? 신분제가 폐지된 지가 언제고, 왕족과 귀족을 다 갈아엎는 혁명을 겪은 지 250년이 다 돼가는 21세기에?

지금으로부터 어언 이십 년 전, 한국. 나는 이른바 계몽에 대한 <상록수> 식의 몹시 낭만적(! 이름하여 낭만적 계몽주의!)이고 소박한 이상을 품고 야학에 뛰어든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다. 그 시대 특유의 근거 없고 근시안적인(아이엠에프 1년 전) 낙관론에, 그 나이 고유의 치기에, 짝사랑, 그리고 거기에서 이어진 첫사랑의 열병을 앓으면서, 그 와중에 제국주의의 볼모인 영어 과목 담당으로 겪는 온갖 모순과 내적 갈등에 시달리는 한편, 치열하게 읽고 토론하며 고민하던 시절.

그중에서도 특히 <교육과 계급 재생산>이라는 책이 기억에 남는다. 같이 세미나를 하던 선배는 이 책의 주요 논제가 원제에 가장 쉽고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고 했다 : How working class kids get working class jobs, 어떻게 노동 계급의 자녀들이 노동 계급으로 재진입하는가. 특히 근대 국가의 최고의 성과물 중 하나이자 불평등 완화의 수단이라 여겨져 온 공교육 제도가 여기에 어떻게 기능해 왔는가를 다룬다. 답은, 기대와는 전혀 달리, 오히려 그 반대로, 계급 재생산 및 계급 제도의 공고화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것. 이는 사실 이제는 거의 고전적인 논제이자 역사적 법칙이 되었고 점점 더 고착돼 가고 있는 듯하다.

프랑스에서 이 문제의 권위자는 단연 피에르 부르디외. 재미있는 것은 부르디외 자신이 교육의 계급 재생산 기능에 관한 자신의 논제에 대한 반례라는 사실. 달리 말하면 그 반대급부인 계급 초월(transclasse)의 사례라는 것. 그러나 일단 역전을 이룬 후 그는 다름 아닌 자신의 2세들을 통해 계급 재생산 법칙을 뒷받침하는 사례를 제공했다. 그의 아들인 에마뉘엘 부르디외는 부친의 뒤를 이어 고등사범을 졸업하고 파리 대학에서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영화 각본가 및 감독으로 활약 중이다.
 그가 쓰거나 만든 영화들은 매우 현학적이고 제법 난해한 것이 특징으로, 부르주아 그리고/혹은  지식인 계급의 취향에 최적화돼 있다는 비난을 받곤 한다.

2.

가히 제4의 페미니즘 물결이라 불러도 좋을 만한 시대. #MeToo 로 대변되는 반 성폭력 운동은 시발점이 아니라 이미 전개되어 온 거대한 물결의 한 단면이지만 한편으로는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 확실하다. 
과거 여성주의가 소수 엘리트 여성 중심이었다면 현재의 그것은 계급을 초월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중적 혹은 대중추수적이고, 전략에 있어서도 다양성과 대중성을 추구하며, 그런 만큼 효과가 강력하고 파급이 빠르다. 

기존의 여성주의가 참정권 획득이나 호주제 폐지 등 제도적 차원에서 성과를 일구어냈다면, 이제는 심성 및 의식의 차원을 개혁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말이 의식 개혁이지 사실 문화적 사회적 측면뿐 아니라 인간의 인류학적 혹은  생물학적 근원과도 관련이 없지 않아 쉽지 않은 문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제도 또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떠올려 보면, 그리 어렵기만 한 일도 아니다. 제도적 차원과 심성의 차원은 상부 구조와 하부 구조의 관계라기보다는 동전의 양면 관계에 가깝다. 이 경우 대대적이고 전면적이면서도, 뭐랄까, 투지보다는 기지로 승부하는 기민한 투쟁이 효과적이고 또 이 시대의 요구에도 부합한다. 미투 운동은 이러한 이념 및 시대의 요청에 적합한 응답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는 새삼스럽게도 낡디낡은 계급론을 환기한다. 바로 일부 (진보) 지식인 남성들의 반발에서. 그리고 다름 아닌 내 자산의 미묘하고 복잡한 반응에서.

내가 보기에 소위 진보 남성들의 여성주의에 대한 거부감의 기저에는 계급적 편견 및 허위 의식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마초 남성 집단과 구별짓기 위한 전략으로서 친여성주의적 면모를 부각시켜 왔다. 마초 남성은 미국으로 따지면 남부의 레드넥, 트럼프 지지자이고, 프랑스로 따지면 무슬림, 방리유 출신들, 아니면 반이민 정서를 가진 하위 계층 노동자들, 아니면 아예 구세대 카톨릭. 이에 반해 지식인 남성들은 여성의 사회 진출에 위협받을 일 없고 따라서 여성을 경쟁 상대나 혐오의 대상으로 삼거나 아예 관심을 가질 필요조차 없는 고소득에 안정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 혹은 그러한 사실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가장 기초적인 상식조차 깨우치지 못하고 여성 일반을 대리물이자 희생양으로 삼아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에 따른, 어떤 면에서는 정당할 수 있는 분노를, 부당하고 엇나간 방식으로 투사하고 혐오 정서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일군의 남성들과 동일시되기를 이들은 거부한다. 한마디로 "나를 저런 낙오자들과 한통속으로 몰지 말라"라는 절규인 것이다. 

저들이 #MeToo 운동에 반감을 느낀다면, 나는 어떤 소외감을 느낀다. 소외감까지는 아니고 불편함이라 해두자. 아니 불편함도 아니고 섭섭함에 가깝다. 일단은 먹물 특유의 허위의식과 스노비즘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성주의의 보편화를 반기는 한편으로 상업화와 대중화에 대한 저항감도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계급론보다는 세대론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일 것 같다. 2010년대 이후 여성주의를 주도하는 세력은 80년대 이후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다. 한국에서는 82년생 김지영으로 대표된다. 70년대 후반 태생인 내가 그들과 세대 차이를 논하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나이는, 이 나이야말로, 단지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스스로 여성주의자라 규정하는 데에 늘 주저해 왔다. 학부 시절 여성학 수업을 듣고서 의식화되었고 또 그렇게 해서 갖게 된 여성주의적 관점이 내 진로를 바꾸었음에도, 정통 여성학 이론과 운동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고 또 본격적으로 실천가로 활동한 바도 없다는 이유에서. 내게 여성주의는 여전히 관념이고 이념이었다. 특별한 차별을 몸소 겪지 않고 오히려 남동생 이상의 관심과 지원을 받고 자랐고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남동생은 또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고 하니 사실과 다른 이야기일 수 있으나 어쨌든 나 스스로 그렇게 느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여대라는 특수한, 그야말로 이상화된 환경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주의라는 이념이 먼저고, 차별과 불평등의 경험적 사례는 그야말로 아 포스테리오리 하게 축적되는 형국이었다. 모든 의식화 과정이 어느 정도는 그러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겠지만서도. 세계관/관점의 변화에 따라 경험세계도 변화하는 것이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 등등 여성적 조건이 가진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계기들을 전혀 겪지 않은 데다가, 이 모든 것들을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여성이라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간접적으로나 혹은 대리로 경험하게 마련인 30대라는 시기를 온전히 외국에서 보냈다는 특수성이 나에게는 있다.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그 동안 모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이래저래 피해왔고, 그런 만큼 문제의식을 함양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다.

젊은 여성주의자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경이감, 거리감, 낭패감, 우수와 향수 같은 정서가 복합적으로 환기된다. 저 친구들은 어쩜 저리도 쉽게,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여성주의를 말하고 여성주의자임을 선언하는가. 객관성과 중립성에 대한 강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편향성 비판에도 주눅 들지 않고서 여성주의 입장을 표명하는가.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강조한 제3세대 여성주의의 세례를 받은 나는 아직도 백인 부르주아 여성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는데, 저 친구들은 그렇게 고민하느라 주저할 시간에 당장 트윗을 날리고 페북을 공유하는 등 행동에 나선다. 에스엔에스로 행동 및 실천 자체가 상대적으로 용이해지고 접근성이 높아진 것도 하나의 이유겠다. 내가 한편으로는 성적 주체화와 성적 해방의 추구,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 및 남성 중심의 성문화에 대한 거부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실상은 비자발적(!) 금욕 실천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 저들은 당당히 가슴을 드러내고 구호를 외치는 한편으로 욕망을 표현함에 있어 훨씬 적극적이고 또 자유롭고 풍요로운 성생활을 영위한다. 성적 억압 및 대상화에 저항하되 스스로 성적 매력을 드러냄에 있어서도 주저함이 없으며 성적 주체화를 실천한다. 패러다임 전환기 늙은 과학자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3.

1. 에서 2. 까지의 윗글은 지난 1월 말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추행 피해 사실을 밝히고, 이어 최영미 시인이 동참함으로써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던 시점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글의 역사는 사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계급 문제를 다룬 서두는 아주 오래 전에 쓰기 시작했다. 중반부는 말하자면 여성주의의 누벨바그, 즉 새로운 물결을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은 메갈리아나 강남역 살인사건 논쟁이나 미국 대선 등 일련의 사건들과 이에 대한 젊은 여성주의자들의 반응과 행동에서 자극을 받아 쓰기 시작했다. 이 두 문제를 같은 시기에, 그것도 같은 맥락에서 재론하게 된 데에는 아무래도 최근 미투 운동의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인데, 2주 전 포스팅을 하던 때만 해도 그때의 들불이 횃불이 되고 이 정도로 번져서 세상을 발칵 뒤집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면서 위 2.에서 전개한 논리(...랄 것이 있었다면!)를 전면적으로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번 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김지영" 세대가 아니라 그 윗세대인 386을 포함하는 이른바 4050 세대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에게는 이미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운동 사회와 문단과 학계의 성폭력을 지적하고 폭로했으나 은폐와 침묵을 강요당하며 좌절했던 경험이 있다. 그랬던 그들이 용기를 낸 데에는, 지난해부터 세계적으로 미투의 반향이 컸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김지영"들의 자극과 지지와 연대의식 또한 한몫 하지 않았을까.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플랑크의 악명 높은 냉소적 발언을 인용하며 쿤은 정상과학 패러다임 하에서 평생을 보낸 늙은 과학자들이 혁명 과학에 전도되기를 기다리기란 힘들고 이들이 별세나 은퇴 등등의 이유로 전선에서 물러날 때서야 비로소 혁명이 완수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회의 경우는 과학과 달라서 기성 세대가 혁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나아가 선봉장에 서거나 버팀목이 되어주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 좁은 의미에서의 패러다임, 즉 범례가 넓은 의미에서의 패러다임, 즉 문법 체계와 세계관 등등을, 나아가 세계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 

의식 흐름의 기록

혹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에 대한 모방의 시도. 결과는 물론 모방의 대상과는 전혀 무관하게 나오리라. <마장동>. <한양도 성>. <공원을 읽다>. 현재 바로 눈앞에 들어오는 한글책들. 이런 책들이 눈앞에 두고 하필이면 또 파리 한복판에 위치한 도서관에서 그 책들과는 전혀 무관한, 무척이나 프랑코프랑스적인 논문을 가지고 전전긍긍하는 상황. 10년째. 이제 조금 있으면 정말 10년을 꼭 채우게 된다. 이곳은 ㅅ 언니가 다녔고 또 논문 심사까지 마친 곳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어언 7년 전. 그리고 그녀는 나보다 7살 위이니, 당시 그녀는 지금의 내 나이였다. 그녀가 힘든 여름을 보낸 끝에 가을에 논문을 제출하고 겨울에 심사를 받기까지의 과정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그녀가 그 여름을 얼마나 치열하게 보냈는지도. 역사의 반복. 그런데 역사는 반복되는가? 푸앵카레에게서의 역사성의 의미에 대해 적다가 만 참이다. 그는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역사적 사실과 과학적 사실을 구분한다. 반복되는 사실이 있어 그 사실이 축적되어 자료/소여가 되어야 하고, 그 가운데에서 항상적인 패턴을 발견해야 그로부터 법칙을 수립할 수 있고, 그로부터 예측을 이끌어내는 것이 과학이라면, 역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곧잘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 않는가? 그러나 반복이라고 꼭 동일한 것이 재연되는 것이 아니고 그에 우선하고 그보다 근본적인 것은 차이라고 들뢰즈는 설파하지 않았는가? 들뢰즈에 대한 오독/모독. 결국 들뢰즈는 제쳐두기로 했다. 대신에 푸코를. 그렇지만 푸코 독해 역시 오독/모독으로 점철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슈발레나 앙젤 등의 전례를 기억하자. 이들은 과학철학/과학사에서 출발, 각각 양자역학의 역사와 철학, 언어분석철학 및 인지과학의 철학에서 착실한 커리어를 쌓아왔는데 언젠가부터 푸코의 독자가 되었다. 이에 대해 앙젤이 <에른느> 시리즈의 푸코 편에 실은 글에서 말하길, 70년대에 보낸 학부 시절부터 충실히 푸코를 따라왔다고. 뱅센느에서 들뢰즈의 강의를,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푸코의 강의를 듣느라 주중 내내 바빴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푸코의 강의를 들으려면 두세 시간 전부터 가서 줄을 서야 했다니까. 그러다가 학업을 마친 후 전임강사 시절, 푸코를 초청하여 직접 만나게 되었는데, "예전에 당신 수업을 열심히 들었는데 지금은 논리학자가 되었다"고 하니 푸코가 웃더라고. 앙젤보다는 조금 세대가 앞서지만, 앙젤이 속한 프랑스의 소수파 분석철학 진영의 수장, 자크 부브레스도 최근에 푸코에 관한, 약간 안티푸코 성격을 지닌 저서인 Nietzsche contre Foucault 를 출간했는데, 그 역시 초창기부터 꾸준한 독자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다른 일례로 영미권이지만 이 분야의 정통인 해킹은 또 어떤가. 그의 통계학의 역사나 정신분석학 역사 연구는 푸코의 고고학 방법론에 영감을 받은 바 크다 (그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2003-4년 경 푸코 세미나를 열었었다. 그리고 앙젤도 이번 학기에 재직중인 사회고등과학원에서 푸코 세미나를 열었다. 나는 둘 다 가지 않았다). 내 경우를 말하자면, 독자...라기엔 무척 편파적이요 파편적으로 푸코를 읽긴 하지만, 어쨌든 남몰래 자칭 푸카디엔느가 되어 논문에서 어떻게든 써먹을 요량에 이르게 된 계기는 "고전시대" 때문이었다. 인문학/인간과학의 고고학. 고전시대 광기의 역사. 소위 초기의 인식론자 푸코. 그래서 나는 "지식-권력"이나 생권력 등등으로 환원되는 소위 중기나 <성의 역사> 이후의 후기는 전혀 모른다. 파레지아, 자기 통치, 자기에의 염려 등등의 개념을 양산한 70년대-80년대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연도 전혀 모른다 (계속 "소위"라는 말을 붙이는 까닭은 한 사람의 학문적 인생을 시기별로 구분하는 일은 늘 한계를 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코의 경우 단순한 편리상의 이유나 또 그만큼의 한계를 넘어 그의 사상의 진화를 잘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수년 전, 푸코랑 전혀 무관한 한 수학사 세미나에서, 17세기 데카르트 혹은 라이프니츠를 주제로 발표한 한 미국 학자가 그랬다. "고전시대라는 말을 쓰고 싶어요. 푸코의 나라이니까요." 한편 게리 거팅은 A Short Introduction to Foucault 에서 푸코를 소개하는 서너가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푸코로 너무 나가 버렸다. 더 길게 잇지 않는 것은 원래의 논의로 돌아가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 이어 쓸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재활이다. 논리력과 집중력 재활 훈련. 원래의 논의로 돌아가서 그 논의를 이어가는 연습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의 논의가 무엇이었더라? 역사. 역사의 반복.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연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의 역사는 어떠한가? 과학 자체는 우연의 지배를 받지 않는데 그것의 역사는 역사이기 때문에 우연의 지배를 받는다 ("과학 자체가 우연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도 기실은 이미 푸앵카레 시대에 수정되는 중이었다. 우연의 법칙--오늘날 용어로는 통계학 법칙이 물리학에서도 중요한 방법으로 쓰이기 시작하고 또 그 자체 엄밀하고 독립적이고 고유한 방법 중 하나로 인정돼가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푸앵카레는 역시 이 부문에서도 양가적이고 모호한 태도를. 모든 종류의 "신문물"에 대해 그는 참으로 일관적으로 양가적이고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를테면 왜 열역학은 2개의 근본 법칙을 바탕으로 정립되었는가? 왜 2개이고 왜 하필 그것들인지를 연역적으로 보이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푸앵카레는 수립과정을 카르노에서 마이어, 줄, 클라우지우스, 톰슨 등등이 2개 법칙을 어떻게 정립했고 그로부터 어떻게 열역학의 이론들이 구축되었는지 역사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고 <열역학 강의> 서문에서 말한다...

해밀토니안 상념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의 일. 한 선배의 논문심사가 끝난 후 사람들과 카페에 갔다. 아는 사이도 있었고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 불문학을 전공하는 한 분이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고 했다. 내심 반가웠다. 더구나 지금은,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18세기 여류 시인을 공부한다니, 더더욱 놀랍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역시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철학을 하는 ㅌ 선배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분은 모른다고, 학부는 다른 학교에서 했다고 했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나야말로 다른 학교이고 심지어 대학원도 다른데, 내가 "선배"라고 해서 그 학교 후배인 줄 안 모양인데... 이 말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당연히 그 학교 출신일 거라고 짐작한 것은 내가 먼저인데, 그래서 그분도 똑같이 짐작했나 본데, 이런 선판단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그 판단을 전달하는 것은 또 어떻고, 정치적 올바름까진 아니더라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가, 문제의 그 학교가 한국 사회에서 갖는 특권적 위치가 아니었다면 또 얘기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인가, 등등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보니 정정할 기회를 놓쳤다.

또 그런 일이 있었다. 누군가를 새로 만났는데 그 사람이 학부에서 밴드 활동을 했다길래 무슨 밴드냐고 물었는데, 어디 어디 라고 답을 하는데, 아무래도 학내에서는 유명했나 본지, 말을 하면 내 쪽에서 알리라 짐작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자신과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전제하에. 그런데 여기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나중에서야 계단생각으로 떠오른 답 : "그렇게 유명한 밴드는 아니었나 보네요. 다른 학교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또 다른 예. "전에는 어디에서 공부하셨나?"라는 한국에서 오신 교수님의 질문에, 출신 대학에 관한 질문임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서 "물리학과에서 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때는 옆에 있던 사람이 정정 혹은 보충 답변을 해주었다.

사실 나는 내 출신 학교가 부끄럽지 않다. 그곳에서 보낸 7여 년은 내 인생 최고로 행복한 시기였으며 -- 물론 이때가 20대 초반의 꽃다운 시절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그와 같은 기회를 누린 것은 내 인생 최고의 행운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가장 중요한 사상적이고 정서적 토양의 상당 부분은 그곳에서 나왔고, 그것이 내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만큼, 나의 이 "출신 성분"은, 굳이 사회적 코드가 아니더라도, 나를 소개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뺄 필요도 없고 심지어 빠져서는 안 되는 사항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졸업 후, 특히 외지에 나와 살면서부터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의 이 전기적 사실을 밝혀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차라리 프랑스나 다른 외국 사람 앞에서는 오히려 편하게 말할 수 있다. 심지어 짐짓 자랑스럽게 덧붙일 때도 있다. 세계에서 제일 큰 여자대학이라고.

처음에는 내가 나온 학교가 가부장 사회의 편견, 게다가 요새는 여성혐오 정서까지 가세, 표적이 되는 경우가 워낙 많아 이에 따라 발생할지 모를 불필요한 갈등과 불이익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인가 했는데, 꼭 그건 아닌 것 같고 (다행히 그런 문제를 직접 겪어 본 적은 없다. 같은 학교 출신, 그러니까 나에게는 동문이 되는 이와의 소개팅 담을 늘어놓는 경우는 더러 있었어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내가 가지고 있을지 모를 모종의 특권의식을 경계하는 태도인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고, 그렇다고 굳이 학벌 사회에 대한 저항의 표시인 것 같지도 않다. 그보다는, 내가 어느 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 자체(이건 내가 그 학교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와는 별개의 문제)가 나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그리 많지는 않고, 더욱이 그 학교에 대해 세상이 갖는 관념이 나에 대한 그릇된 인상(그 유명한 "ㅇ대 나온 여자"!)을 심지 않을까, 혹은 나 스스로가 그 인상을 재확인하는 사례로 추가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라 해두자. 어느 쪽이든 나와 큰 상관은 없지만 피곤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

그보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정체성 확인 및 구별 짓기 전략, 그리고 너무 안일하고 상투적인 유형학적이고 분류학적 사유에 대한 저항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류학적 사유의 경우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고 그러한 사유에 사용되는 범주에서의 상상력의 부족이 문제다. 이러한 나의 정서 태도는 이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끊임없이 국적/출신을 환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더구나 여기에서 "출신"은 곧 근본(origine)이 아닌가. 사실 국적에 대한 정보가 나에 대한 편견으로 직결되기에는 내 출신 국가라는 것이 이네들에게는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대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어차피 편견은 국적에 대한 정보 습득 이전에 이미, 그리고 히잡이나 키파 같은 종교적 상징으로 애써 가시화 수단을 쓰지 않더라도, 외양이나 이름을 통해 동양인, 게다가 여성, 이라는 판단이 내려지는 순간 이미 결정되는 사태. 나는 그렇게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판단 기제, 그 속에서 작동하는 상징 권력의 기제가 거북한 것이다. 물론 그런 모든 부문에서 판단중지를 하고 순수히 개별자 대 개별자로 만나기란 쉽지 않거나 거의 불가능한 일. 그 개별자란 것도 결국 결코 단적으로 독립된 존재일 수 없고, 어느 종류든 집단의 구성원이거늘.

물론 그런 인상비평 하나하나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나아가 상호 피상적 인식을 벗어나 나를 알리고 너를 알고 어슴푸레한 너의 언어를 이해함으로써 서로의 편견을 교정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내가 그럴 만한 의지도 없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게 된 데에 있다. 단순히 (그러잖아도 부족했던) 사교능력의 퇴화 때문만은 아니고, 그 기저에는 사실 자존감 상실이 있을진대. 스스로 너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자각. 겉으로 드러나는 바 이상의 심오하고 본질적인 이면, 말하자면 나의 본질--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사르트르는 그런 것 없다고 했다--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졌고, 그래서 더더욱 나를 알리는 게 두려워졌단 얘기다.  

"물리학과 나왔으면 해밀토니안이랑 라그랑지안 알겠네." 이것이 물리학과 출신 불문학도가 내게 한 말이다. 덕분에 나는, 처음에 던진 미숙하고 무례하고 어찌 보면 불온한 첫 질문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중에, 어느 정도나마 긴장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의도했고 심지어 의식했는지도 의문이지만 어쨌든 그렇게 그분은 사소한 듯 던진 한마디로 선행을 베푼 것이다. 내가 어찌 반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척 고맙고 미안한 기억은 계속 남아 있다. 그래서 해밀토니안이 나오면 그분 생각이 나곤 한다.

그런데 해밀토니안과 라그랑지안? 라그랑주는 라그랑주 방정식의 바로 그 라그랑주다. 뉴턴역학을 해석(解析)적으로 해석(解釋)한 해석역학을 정립, 고전역학을 완성했다고 일컬어지는 인물.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동등한 또 하나의 해석역학 체계를 마련한 것이 해밀턴. 이들이 만든 연산자, 해밀토니안과 라그랑지안은 각각 운동에너지와 포텐셜에너지의 합(H=T+V)과 차이(L=T-V)으로 정의된다. 일종의 보존량. 한 역학계가 시간에 따라 어떤 변화를 갖든지 간에 이 양은 보존된다. 고전역학계에서 해밀토니안은 계의 에너지 총량과 일치하고, 따라서 우리가 중학교 때 배웠던바, 역학적 에너지 보존 법칙과 등가가 된다.

일반역학 강의에서 배운 기억은 난다. 내가 물리학과에서 배운 것은 대개 그런 식이다. 그런 사소한 기억들이 현재 전혀 무관하지 않은 주제로 공부하는 까닭에 직간적접으로 도움이 되는 바 없지 않으나, 그러기에는 너무 파편화되어 있고 무엇보다 이해가 수반되지 않아 무용한 것들이 대부분. 그래서 실질적 도움보다는 오히려 주로 학부 때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회한이라는 부수 효과 혹은 역효과만 양산할 뿐. 그래도, 당시 부족했던 이해를 보완하고 "아, 그게 그런 의미였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 인가, 과연? 어째 모든 일에서 이렇게 일관적으로 뒤늦단 말인가. 계단 이해. 계단 답변. 계단 논문. 계단 인생.

지금은 뉴턴을 들이팔 때가 아니다

코이레의 뉴턴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 : 지금 뉴턴을 들이팔 때가 아니다. 

계획대로라면 어제까지만 해도 15장이 채워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혼돈의 상태. 생각은 생각대로, 본문은 본문대로.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서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 그것만 해도 그런데 하루는 꼬박 소일해야 할 것이다. 계획상으로라면 지금은 4장의 첫부분에 매진하고 있어야 하는데. 아침에 나오다가는 그런 생각도 했다. 도서관에서는 채워야 할 내용을 넣는 데에 주력하고, 그러니까 아직 쓰여지지 않은 4장과 6장을, 집에서는 뉴턴, 데카르트, 기타 등등, 이렇게 구분을 해서...? 그러나 지금은 현재 상태 점검도 안 돼있는 상태. 

어제는 무얼 했는가? 아침에는 또 돌발적으로 즉흥적으로 이전에 노트해 두었던 하인츠만의 2012 푸앵카레 100주기 콜로크 발표문을 정리. 푸앵카레 철학 전반에 관한. 관념론자인가 아닌가, 구조실재론자인가 아닌가 등등. 논리주의에 대한 푸앵카레의 반박.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국소적 인식론자. 따라서 구분해서 봐야 한다. 산술에 대해서는 직관주의자가 맞는데, 여기에서 직관은 매우 특수한 의미에서 쓰인다. 일종의 지적 직관. 수학적 귀납법. 그러고 보니 이거 참 재미있는 주제인데. 

여기에서 문득 스치는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 국어 선생이 연역-귀납 추론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p가 1에 대해 성립하고, n에 대해 성립하면 n+1 에 대해서도 성립한다고 했을 때, 나는 손을 들어 그거랑 이른바 경험적 귀납, 즉 어떤 집합 S의 모든 원소 S={s1, s2, s3...}가 모두 P이면 S는 P이다,라 추리하는 건 다른 것 같다, 라고... 정연하게 말하지는 물론 못했고 더구나 왜 그런지는 더더욱 설명하지 못한 채, 그냥 "그건 좀 다른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데서 그쳤는데, 생각해 보면 나는 당시에 무척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푸앵카레-러셀 논쟁의 핵심. 푸앵카레는 여기에서 1에서부터 n이 무한대로까지 가는 모든 경우를 단번에 포착하는 직관의 능력을 보고, 선험적 종합 판단의 전적인 예라 보는 반면, 러셀은 그러니까 수학적 귀납법이란 것은 사실 말이 귀납법이지 이미 대전제에 결론이 주어져 있는 것을 분석해서 나오는 연역의 다른 이름이며 말하자면 각 경우에 대한 소연역을 축약한 것일 뿐이라 본다. 고등학생인 내가 막연하게나마 감지하고 있었던 바는 러셀의 입장이었던 것 같다. 이와는 별개로 수학적 귀납과 경험적 귀납을 구분하는 문제 또한 중요하고, 푸앵카레도 이 차이를 강조한다. 경험적 귀납은 회귀 논리만으로 되는 게 아니고 경험 및 다른 원리, 이를테면 연속성 원리 같은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정확성 면에서 아무래도 떨어지고 등등. 

다시 돌아가서. 공간에 관하여. 아, 공간, 이것이야말로 푸앵카레의 철학소(philosophème)이자 그 철학의 핵심. 구조주의의 근본 문제, 즉 구조 및 구조 내 원소(?)들의 생성과 구조 자체의 보존 간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앞서 말한 회귀에 따라 군(groupe), 일종의 구조를 제공하는 것은 정신. 그렇게 주어지는 군은 무한하다. 그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가 문제. 이 선택에 있어 정신은 경험을 참조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공간이 *생성*된다. 푸앵카레에게서는 이러한 공간의 생성 과정에 대한 기술과 설명이 처음에는 다소 초보적인 수준의 생리-물리학(Fechner 류의) 참조에 머물다가, 갈수록 체계화되고 정교화된다. 그 정점을 이루는 논문이, 루지에 등등이 지적한 바, On the Foundations of Geometry (1898).  간단히 말하면 외부 물체의 운동에 대한 감각 지각을 통해 형성되는 지각 공간, 이것이 가장 원초적인 물리적 공간이다. 어떤 운동은 내 시각과 촉각 지각에 의존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내가 몸을 돌리거나 위치를 바꾸면 원래 상태로 돌릴 수 있다. 즉 위치 변환이 가능하다. 이로부터 무형(amorphe)의 외부 세계는 형태를 갖추고 물리적 공간이 된다. 이런 공간이 절대적 기준점을 가질 리 만무하다. 내 운동은 상대적이다. 상대운동의 원리에서 공간의 상대성 원리로. 그런데 이것과 기하학적 공간은 어떻게 관련을 맺게 되는가? 어떻게 이질적이고 유한하고 비대칭적인 물리적 공간이 무한하고 동질적이고 등방인 기하학적 공간과 동일시되는가? 이 모든 것을 좀더 명료하게 정리해서 상대성이론까지 나아가는 것을 보여야 하는 것이 내 논문 6장의 과제. 하인츠만이 보인 것처럼 문제의 핵심은 상대성원리의 애매성 혹은 이중성. 규약, 즉 선험적 *원리*인 동시에 경험적 *법칙*이기도 하다는 것. 물론 여기에서 푸앵카레적 의미에서 규약 개념을 잘 새겨야 한다. 규약은 원래는 경험적 법칙이다. 물리학에서는. 기하학에서 공리가 규약이라고 할 때는 또 다른 문제. 그러나 그 논리적 성격은 기본적으로 같다. 참 거짓임을 판명할 수 없는 명제, 그저 편리성만을 따질 수 있는 명제라는 것. 편리성의 기준 또한 잘 새겨야 한다. 빛이 직진한다는 명제를 유지하고 그에 의존하는 모든 광학 원리들을 보존하면서 유클리드 평행선 공리를 바꿀 것인가, 아니면 유클리드 기하학은 그대로 두는 대신에 광학을 뜯어 고칠 것인가. 이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답 : 빛이 측지선, 즉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를 따라 이동하는 것은 맞는데, 그 측지선이 직선이란 법은 없고 따라서 "직진"하리란 법은 없다. 곡률을 가진 공간에서 측지선 이동은 굴곡을 함축한다. 푸앵카레의 규약주의는 아인슈타인의 입장과 상충하지 않으며 오히려 포괄한다. 다만 그 기준이 되는 편리성에 대한 이념이 달랐을 뿐. 아인슈타인은 기존의 이론에서부터 기본 개념들을 다 뜯어 고치는 게 더 편리하다고 본 것이고, 푸앵카레는 아무래도 좀더 보수적인 입장에서, 어쩌면 좀더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다 고치는 건 어렵고 다 고치면 기존의 무수한 성과물까지 버려야 하는데, 목욕물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릴 순 없지 않겠는가, 하며 뉴턴 역학과 유클리드 기하학을 보존하자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 간과하지 말하야 할 것은, 하인츠만도 강조하고 있는 바, 편리성이 전체론(holistique)적 입장에서 고려되고 있다는 것. 역학, 물리학, 그리고 기하학을 오가거나 가로지르는. 어찌 보면 국소적 인식론과 모순된다 볼 수도 있겠는데.

쓰다가 또 갑자기 생각나는 것, 맥락을 벗어나긴 하지만 그저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두자. 며칠 전 ㅈ 및 ㅅ 언니와의 토론 중. 모든 지각 및 인식에서 이미지의 근본성에 대한 베르그손의 주장에 대해. 베르그손은 원자나  톰슨의 소용돌이 모델(modèle si cher à Bergson, peut-être même plus qu'à Thomson lui-même ! Même si, apparemment, il n'en parlera plus autant après *Matière et mémoire*) 같은 과학의 개념들이 결국은 이미지로 표상됨을 역설하는데, 이에 대해 나는 그건 개념이고 이미지는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표상이며, 결코 개념에 대해 원초적이고 선험적으로 있거나 심지어 작용하지는 않는다고, 그리고 이미지는 오히려 인식론적 장애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바슐라르를 언급하며 반박했는데, 이에 대해 또 다시 드는 두 가지 생각. 이른바 이론적 존재자(theoritical entity)들. 원자도 원자지만 초끈이나 멀티버스, 그래 우주도 어쩌면, 그런 종류. 이런 것들은 굳이 이미지로 표상되지는 않고 되기 어렵다 하더라도 정신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며 관념과 실재 그 중간 사이의 어떤 것이라는 베르그손이 의미하는 바에서의 이미지의 존재 양태 혹은 존재론적 위치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하나의 생각은 모델. 그러고 보니 모델 이론, 수리논리학적 모델 말고, 보다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기계론의 당구공 모델이나 우주 팽창의 건포도빵 은유등은 베르그손의 입장과 통하는 바가 있겠다는 생각이. 그러나, 계속해서 ㅈ과 ㅅ 언니가 내게 지적하는 것처럼, 베르그손이 이미지과 지각의 근본성을 주장할 때 그 주장이 인식론적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인 것이라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 누구도 원자가 *실제로* 당구공 같은 것이고 우주가 *건포도빵*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인데.   

이렇게 오만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니 그 중에서 쓸 만한 걸 솎아내서 다듬고 논증, 무엇보다 논증을 하는 게 쉽지 않은 것이다. 

나는 어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인츠만을 정리하고서 다른 노트들을 보다가, 아마도 같은 콜로크에서의 자크 라스카르의 발표 기록으로 넘어갔었나 보다. 태양계 안정성 문제. 그는 그가 으레히 하듯, 최소한 지금까지 여러 번 그랬듯, 역사적 고찰에서부터 출발했다. 그가 이미 다른 논문에서 다루었던 바라 노트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고 그냥 발표를 따라가던 중, 그래도 메모할 만한 것이라 판단했는지 기록한 것이 하나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발표자가 뉴턴을 인용하는 부분이었다. 태양계의 안정성이라는 문제가 처음 문제로서 설정된 순간. 그런데 그게 내가 주로 참고하던 <프린키피아>의 최종 주석이 아니라 <광학>의 "문제들"에서 나온 것이어서 나중에 찾아봐야겠단 심산으로 적어둔 모양인데... 그 '나중'이 거의 3년이 지난 지금이 될 줄이야. "이 책의 결론을 대신하는 질문들"이라는 제하의 가장 마지막 장. 논문에서 "문제" 개념을 "문제삼고" 있고 그 때문에 여전히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나로서는 흥미롭지 않을 수 없는 대목. 그 내용 또한 몹시 흥미롭다.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최초의 원인은 역학적인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신이다.  다른 종류의 세계의 기원을 찾는 일은 반철학적(unphilosophical)이다. 혼돈으로부터 오로지 법칙만으로 이 세계의 질서와 조화가 나왔다고 본 데카르트 기계론도 뉴턴이 보기에 반철학적이기는 마찬가지. 

그렇게 해서 나는 또 뉴턴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확실히 지금은 뉴턴을 들이팔 때가 아니긴 하다. 그러나... "If not now then when / If now today then" (Tracy Chapman)...
  

괴팅겐의 추억 혹은 또 다른 나태의 증거

"푸앵카레의 괴팅엔 강연을 읽다. 아, 괴팅엔! 20세기 초 학이란 학은 다 거기에서 나왔다"고 일기에 적던 오륙년 전의 나와, 괴팅엔행 기차에서 "괴팅엔, 괴팅엔이라, 많이 들어봤는데, 어디에서 들었더라?"며 머리를 긁적였다가 도착해서야 비로소 무지/망각을 깨달은 두 해 전의 나, 그리고 이 두 일화를 떠올릴 때마다 부끄러움에 몸둘 바를 몰라 하며 스스로의 과학사가로서의, 아니 학자로서의 자질을 의심하는 요즈음의 나. "잘 잊는 사람은 복되다, 자신의 허물까지 덮어버리는즉" (니체, 선악을 넘어서). 기억력이 지금보다 좋았던 시절엔 하루에도 몇번 씩 부끄런 기억을 끄집어 내고는 몸서리치곤 했다. 심지어 허물이 될 만한 걸 행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기의식이나 의지조차 없었거나 있었다 해도 그 효력이 지극히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아주 어린 시절조차도, 그보다는 조금 덜 어린 시절의 내겐 받아들이기 힘든 수치스런 기억이렀다.
...라고 적은 것이 2010년이니 이도 벌써 자그마치 5년 전의 일이다. "푸앵카레의 괴팅엔 강연"을 읽은 것은 2005년이고, 괴팅겐행 기차를 탔던 것은 2008년. 그리고 저 두 일화를 떠올리며 몸둘 바를 몰라했던 것은 2010년. 후자의 상황은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즉 괴팅겐이라는 이름을 접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두 일화가 떠오르고 또 부끄러움에 몸서리쳤다는 얘긴데, 문제는 저 이름이 내 전공과 주제의 특성상 도대체 피해 가기 힘들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럴 것 같다는 사실이다. 망각의 교설보다는 자의든 타의든 영원회귀 모델을 따라야 할 상황.

괴팅겐이 다시 떠오른 것은 어제 참관한 한 학술행사 덕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전파 및 해석이 주제였으니 말 다했다. 괴팅겐을 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가우스, 그리고 가우스의 제자 리만이 다 괴팅겐에 있지 않았는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포문을 실질적으로 연 리만의 1854년 교수자격논문, <기하학의 기초를 이루는 가설에 관하여>는 리만이 가우스의 주문에 따라 쓰고 실제로 괴팅겐 대학의 청중 앞에서 읽은 것이었다. 이 강연에는 수학과보다는 타 학과에서 많이 왔다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많이"라는 부사는 아주 상대화해서 이해해야겠으나. 이후 20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 괴팅겐은 영화계의 헐리웃처럼 과학계의 많은 스타들을 배출하고 또 끌어들였다. 당장 떠오르는 이름만 기억에 의존해서 열거해 보면, 프레게, 힐베르트, 민코브스키... 그리고 아마도 플랑크도? 그리고 이번 강연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슈바르츠쉴트도 1901년에서 1909년까지 괴팅겐에 머물고, 체류 과정에서 우주론적 사변에 관심을 가졌다 한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푸앵카레의 1909년 괴팅겐 강연이 힐베르트의 초청에 따른 것이었다는 것. 이들은 힐베르트의 <기하학의 기초> 출간 후 벌어진 논쟁으로 다소 의가 상한 상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좁힐 수 없는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었던 차였다. 그래도 힐베르트가 가우스를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하면서 푸앵카레를 초청하면서 둘 사이에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으나, 그러나 모르는 일, 이라 발표자는 덧붙였다. 그 행사란 다름이 아니라 가우스가 삼각형의 합이 실제로 180도인지 아니라면 얼마나 어긋나는지를 경험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괴팅겐 인근의 산 꼭대기 세 개를 골라 그 사이각들을 실제로 측정한 실험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우스의 기하학적 경험론의 증거이자, 혹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경험적 반증이라 평가되는 바로 그 전설적 측정이다 (그저 전설이라는 견해도 있다. 갈릴레오의 사탑 실험처럼 말이다). 힐베르트는 초청장에서 일종의 소풍격으로 가우스가 실험 대상으로 삼은 산을 직접 탐방하는 프로그램도 마련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실제로 성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는 것이 발표자의 전언.

이 모든 것과 별개로, 이제는 괴팅겐을 생각하면 저 유수한 과학자, 수학자, 철학자들의 이름만큼이나 바르바라가 떠오르는 것 또한 사실이니.



바르바라의 "괴팅겐"은 당시 괴팅겐 대학에 다니던 한 팬의 초청으로 괴팅겐에 가서 보고 느낀 내용을 담은 노래다. 아름다운 노래. 그러나 나에게는 또 하나의 나태의 증거이자 분열의 상징. 반성. 또 반성.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민망한 제목이지만 어쩌겠는가. 자꾸 이 말이 머릿속에 맴도는 것을. 이어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내 평생 그토록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네라" 등등의 문구들도. 이 모두를 쫓아내기 위해서라도, 이를 둘러싼 모든 생각을 비워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써야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비교적 최근 기형도를 다시 떠올린 계기가 있었다. 최근이라 해봤자 기록을 보니 1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규명되어질 필요가 있다"에 관해 ㅅ 언니와 얘기하면서. 당시에 기쁨, 슬픔, 노여움, 즐거움, 요컨대 희로애락의 정서(affect) 혹은 정념(passion)에 관해 얘기를 나누던 중 문득 떠오른 시가 바로 그것이었다. 도대체 이 정서나 정념이라는 것이 내게는 도통 개념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어서 당시에 조금 공부를 해보다가 관두었지만, 그리고 그 이후로도 가끔씩 생각해 보지만,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그중 단연 흥미로웠던 것은 스피노자의 정서(affectus) 개념. 정서보다는 감응 혹은 감응소라는 말을 나는 더 좋아하고 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에티카> 3부는 이런 종류의 감응을 그야말로 "논리적으로 규명"하는 기획이다. 이를 모든 정신과 합리적 이성에 반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그리하여 대개는 배척의 대상으로 보았던 다른 합리론자들과는 달리, 스피노자는 부적합한 관념이 아니라 적합한 관념, 즉 원인을 알고 원인을 내부에 포함하는 관념일 수 있다고 본다. 감응은 정신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신체와 유기/조직적이고 평행한 관계를 맺은 결과로서 나오는, 혹은 그러한 관계의 증거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순수 관념과 다르다. 단지 외부 자극이나 정신의 상태에 대응하는 신체적 혹은 신체상의 반응이거나 반작용이 아니라, 정신과 신체가 감응/변용(affectio)의 원인이거나 결과로서 함께 참여해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감응은 능동적/적극적인 것과 수동적/부정적인 것의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내가 내 변용의 원인에 대한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을 갖지 못할 때 그것은 수동적인 감응, 즉 정념이 된다. 즉 외부의 어떤 것에 영향을 받을 때. 정확히는 그렇다고 생각, 아니 실은 착각할 때. 실은 외부의 자극-나의 반응이라는 과정이 일방향적이지 않고 그 자극을 감각하고 인지함에서부터 이미 나 자신 그 변용 과정에 참여하고 기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모르기 때문에 내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감응 발생의 또 다른, 좀더 근본적인 원리는 일종의 관성 원리. 모든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완전해지기 위한 경향성을 지니는데, 원인에 따라서, 변용에 따라서, 그 존재가 가진 역량 혹은 행위 능력은 증감된다. 어떤 원인으로 인해 내 존재가 감소/위축되면 이것이 내게는 슬픔이 되고, 슬픔은 다시 증오, 분노, 질투 등등 다른 모든 부정적인 감응들의 토대가 된다. 반면에 이 변용의 양태에 따라  내 존재의 역량이 상승하여, 내가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나는 기쁨을, 그 기쁨의 원인을 제공하는 대상에 대해서 나는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그 대상 또한 나와 같은 방식으로 감응하기를 갈구한다.

그러면 그 사랑을 잃었을 때에는? 내가 느꼈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사실은 원인(을) 제공(했다 생각했던) 자에 대한 그릇된 관념으로 인한 부적합한 관념의 소산이었다면? 답 : 그건 사랑이 아니었던 게다. 정념이었던 게다. 완전성은커녕 내 이 한 줌의 존재조차 가누지 못하게 만든. 그래서 더 무서운. 그런만큼 단연코 벗어나야 할.

두 가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내 앞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궁금해서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 왜들 저리 날을 세우는지 알 수 없었다. 다들 마그네슘 결핍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고, 저들도 많이들 지쳤나 보다, 힘든가 보다, 그래서 예민해졌나보다, 하고 생각도 해보았다. 발밑은 가시밭길인데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가시나무나 고슴도치뿐인 세상. 하루빨리 그 모든 가시가 거두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깨달았다. 하필이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들 삶에 지치고 나약해진 게 아니라, 나를 만나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 보는 편이 설명으로서는 훨씬 간명하고 개연성이 있음을. 칸트는 인식의 형식과 원리들을 대상이 아닌 주관에 근거하도록 함으로써 대상적/객관적 인식의 문제를 (잠정적으로나마) 해결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상대적으로) 간소화하고, 이를 스스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부른 바 있다. 과연, 온 천상계가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보면, 천문학의 많은 난문이 해결되거나 간소화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 앞에서 유독 과민하게 반응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반응을 자극하고 촉진하는 무언가가 내게 있다는 얘기. 요전에 말한 가해망상의 징후인지도 모르겠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질문이라고 다 순수한 게 아니고 (그 유명한 유도질문, loaded question!) 내가 던지는 질문이야말로 그 전적인 예일 수 있다는 얘기다.

내가 가졌던 또 하나의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왜 내가 마음을 둔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주지 않을까. 내게 그렇게 매력이 없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이, 내게 마음을 준 사람도 없지 않았으니까.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건 그 사람들에게 실례가 되는 거니까. 혹시 너무 쉽게 마음을 주는 것이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마음 주는 일이 실제로 "쉽"기라도 한 양. 그러나 마음이 오간다는 것은 쉽고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그저 어쩔 수 없는 일. 합리적 사고나 의지와 무관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음"에 관한 이러한 소박하고 단순한 낭만주의-신비주의가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태도는 아닐 것이다. 또 하나의 가설은 이런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끌리게 되면, 그 누군가 앞에서는 긴장을 해선지 아니면 마음을 숨기려는 의도에선지, 엉뚱한 방향으로 행동하게 되어 그나마 있던 매력마저 스스로 손상시키는 결과를 낳곤 한다는 것.

그러다 깨달았다. 하필이면 내가 마음을 둔 사람들이 나를 맘에 들어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나를 맘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주로 끌린다는 것이다. 나야말로 내게 마음을 주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내 마음이란 것이 작동하는 원리는 매우 범속한 욕망의 메커니즘에 가깝다. 욕망의 대상이라는 것은 단지 충족되지 않음으로써만 비로소 유효하고 충족되는 순간 무화되는, 일종의 맥거핀이고, 실제 대상은 욕망 그 자체라는 것. <스완의 사랑>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 처음에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오데트에게 안색이 창백하다느니 광대뼈가 도드라졌다느니 하는 이유를 들어 다소 시큰둥하던 스완. 그러던 그가 오데트의 마음을 갈구하게 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떠나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다. 그러나 그녀를 품에 정작 안는 순간, 스완은 깨닫는다. 그녀가 심지어 자신의 "타입"마저도 아니었음을. "그 많은 세월을 허비하고, 죽고 싶어지기까지 하고, 더없이 큰 사랑을 했구나. 내게는 매력도 없고 내 타입도 아닌 여인 때문에."† "타입"에 속한다 해도 마음에 들까말까인데 그 타입의 조건에마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사실 나는 이런 종류의 타입-토큰 이론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런 깨달음은 늘 뒤늦게서야 온다. 요전에 말한 "계단생각"을 변주해서 말하자면 계단전회 (révolution de l'escalier). 모든, 최소한 많은, 전회/혁명이 그렇듯.§



* 사실 전회의 방향은 반대. 코페르니쿠스의 경우 천구 운동의 중심을 지구에서 세계-태양-으로 돌렸다면, 칸트는 역으로 인식의 근원을 세계에서 자아로 돌렸기 때문이다.

† « Dire que j'ai gâché des années de ma vie, que j'ai voulu mourir, que j'ai eu mon plus grand amour, pour une femme qui ne me plaisait pas, qui n'était pas mon genre! » -- Extrait de: Marcel Proust. « Du Côté de Chez Swann. » iBooks. https://itun.es/fr/pNCUD.l

§ 벤야민? Référence à venir.

이게 다 볼테르와 루소 탓

집중력, 이해력, 논리력, 한 마디로 지적 능력 일반의 감퇴. 대신에 감성적인 것에 대한 감응력은 인플레이션 단계. 그러나 이 부문의 성장은 그저 상대적일 뿐이다. 즉 지성의 자리를 감성이 대신하게 된 것일 뿐이다. 에너지 보존 법칙과의 유비로 이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 정신 능력의 총량이 일정하다면 지적 능력의 부분이 감성적 능력으로 변환한 것이다... 총량이 일정하다는 전제 하에. 그리고 감성에 있어 "능력"을 논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그렇다고 미적 판단력이 나아졌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판단력 일반은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나 능력으로서의 취미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계발되었다 볼 수 있겠다. 특히 청각과 미각에 관한 한.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순간적인데, 특히 청각과 미각이 그렇다. 덧없는 것들. 그렇다고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의미가 있는 것들인데. 단지 순간적으로만 현전함으로써 오히려 영원할 수 있는. 아니면 이렇게 말해보자. 다른 종류의 시간성을 지녔다고. 측정가능한 물리적 시간과도 다르고,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넘어서 있는, 즉 탈시간적(atemporel)인 논리 및 이데아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닌. 심리적 시간? 아니면, 아인슈타인이 베르그손을 겨냥해서 말한, "물리학자의 시간"과 구분되는, "철학자"의 시간? 프루스트의 마들렌느와 성당 종소리, 기차소리, 스푼으로 찻잔을 두드리는 소리, 뱅퇴이 소나타 등등의 시간. 흔히 베르그손의 지속과 비교되는 그 시간 말이다. 그 유명한 커피 속 설탕의 시간. 커피에 설탕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프루스트나 베르그손에게 특권적인 예가 청각과 미각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생각보다 크다. 영화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다는 사실도. 왜? 로고스가, 즉 언어가, 즉 이성이 개입하므로. 베르그손에게는 지성. 베르그손은 아예 지성을 영화적이라 특징 짓는다. 끊임없이 생성하고 유동하는 실재-지속을 지성화하고 박제화하는 것이 바로 로고스-이성이다. 

이게 다 지난 12년 간의 감성교육 탓이다. 데카르트적 합리주의 및 계몽주의의 현현인 동시에, 그것이 그에 대한 반작용인 낭만주의의 계보와 늘 긴장 관계를 유지해 온 나라에서 오래 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게 다 볼테르와 루소 탓*이다.


*« On est laid à Nanterre,
C'est la faute à Voltaire,
et bête à Palaiseau,
C'est la faute à Rousseau.

Je ne suis pas notaire,
C'est la faute à Voltaire,
Je suis petit oiseau,
C'est la faute à Rousseau.

Joie est mon caractère,
C'est la faute à Voltaire,
Misère est mon trousseau
C'est la faute à Rousseau.

Je suis tombé par terre,
C'est la faute à Voltaire,
Le nez dans le ruisseau,
C'est la faute à....  »

Extrait de: Victor Hugo. « Les misérables Tome V. » iBooks.

피해망상도 무섭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

가해망상. 타인의 비난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경우에 보이기 쉬운 증상. 쉽게 자책하는 경향이 있다. "내 탓이오(mea culpa),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사도신경)로 요약되는 죄의식과 죄책감이라는 기독교 정신을 스스로 육화하기라도 한 양(실제로 기독교 정신을 체화하고 내면화한 데에서 비롯된 경향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개인사의 궤적을 볼 때 내 존재 자체를 부채로서 인식하고 모든 크고 작은 불행을 내 자신의 탓으로 돌리게 된 것은 기독교에 입문 이전의 기원적 사건이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특별히 도덕감이 투철하거나 도덕주의자여서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순전히 그리고 단순히 타인으로부터 받을지 모를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 누구보다도 먼저 스스로를 비난함으로써 타인으로부터 비난할 기회를 차단하거나 아니면 타인의 비난을 무력화하기 위해서다. 그 유명한 방어기제. 그런데 이것이 과도해지면 과대망상(megalomania)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세상의 모든 불행과 악이 심지어 자신에게 비롯된 것인 양. 내가 무슨 결정권이라도 쥐고 대단한 영향력이라도 있는 사람인 양. "내탓이오" 신드롬의 징후가 보이거들랑 즉시 다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내가 나약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미천한 존재임을. 사람들이 나 때문에 불행해지거나 불편해지거나 아니면 아주 사소하게는 불쾌해진다고 보기에 그들은 훨씬 건강하고 강건한 자아를 가졌거나 관대하거나 아니면 대부분의 경우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꿈의 해석

보통 chauffe-plat 라 불리는 작고 둥글고 납작한 초. 실제로 상 위에서 음식을 살짝 데우는 데에 쓰이지만, 나는 주로 향유를 피울 때 쓴다. 겨울이라 환기가 녹록치 않은 요새 특히 자주 켜곤 했다. 

꿈에서 같은 초를 켰다. 그것도 침대 위에서. 그것도 침대 위에다가. 게다가 이불이 초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언제라도, 당장이라도 불이 옮겨붙을 수 있는 상황. 아니나 다를까. 초 하나가 이불에 옮겨 붙었다. 다행히 이 불은 다른 이불(불-이불!)로 덮어 끌 수 있었다. 그렇잖아도 처음에 켤 때부터 불안했던 마음이 극도로 초조해져 다른 초도 서둘러 입김으로 끄기 시작했다. 그런데 꺼도 꺼도 켜진 초가 계속 나왔다. 언제 켰고 또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직은 드문 드문 보이는 정도지만 그렇게 언제까지고 계속 나올 것 같았다. 입김이 모자라고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른 초 하나가 이불로 타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 불도 요행히 끄긴 했다. 그러나 얼마나 더 끌 수 있을까. 언제까지 시간을 끌 수 있을까. 

깨고 나서 생각했다. 현 상황에 대한 암시인가? 아니면 예지몽인가? 초를 하나둘 씩 끄는 것도 한계가 있다. 불길이 번지고 정말 위험한 지경에 이르기 전에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만이라도 보지하는 편이 옳지 않겠는가. 분명한 것은 초를 켠, 그리하여 상황을 자초한 장본인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초 한두 개까지만 해도 좋았다. 그랬다면 얼른 훅 하고 불어서 끄면 됐을 테니까. 그러나 나도 모르는 새 초는 계속해서 켜지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이제는 입김만으로는 모자랄 뿐 아니라 자칫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위험 속에 구원은 자라나니"라는 싯구로 자조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하고 위태로운 상황. 정말 모든 것을 버리고 과감히 떨치고 이불 속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것일까? 왜 그러지 못하는가? 왜 이불 밖으로 나가질 못하는가? 이제는 이불 속이 아늑하기만 한 것도 아닌데. 이불 밖 세상, 그 세상에서 헐벗은 나를 마주하고 헐벗은 그대로의 나를 내보일 것이 두려워서?

그리고 나서 다시 생각했다. 완전히 상반된 해석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약간의 낙관주의와 희망적 사고를 첨가하면. 희망의 불씨가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다 꺼져 들었나 싶으면 또 어디선가 나타나 이불 밑 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밝히는 촛불. 그 불에 타들어가도 좋겠다. 그리하여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다면. 실은 기만이요 허상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당신에게는 사소한, 나에게는 크나큰, 위로

단지 귀찮아서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잊어버렸던 것일 수도 있다. 나에 대한 실낱같은 기대에서였을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좋다.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당신은 아시는지? 당신의 페이지에서 "sur la cosmologie de Poincaré, 100%"를 본 순간, 당신의 지평에 나의 존재가 희미한 흔적으로나마 남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내 심장이 얼마나 요동했는지? 어느새 나는 "걱정 말라, 잘 될거다 (Ne vous inquiétez pas, on y parviendra)"라는 당신의 사소한 그 한 마디에 전율했던 지금으로부터 구년 전의 그 순간으로 돌아가 있었다. 말 그대로 transportée. 줄타기-줄다리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신이 무심코 남겨둔 동아줄, 그 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실올을 나는 힘껏 당기고 오르리라.



... 언제쯤이면 지도교수와의 애간장 타는 "밀당"에서 벗어나는 날이 올까.

미룰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유

혹은, 논문과 건축 II



과학철학 및 과학사 분야 유수 학술지인 Studies in History and Philosophy of Modern Physics 의 올해 두 특집호.  하나는 우주론 특집으로 5월에 나왔고, 푸앵카레 특집인 다른 하나는 8월에 나왔다. 전자는 2011년에 우주론의 철학을 주제로 열린 학술행사에서 발표된 논문들이 출발점이 되었고, 후자는 2012년 100주기에 발표되었으며 푸앵카레 연구의 새로운 경향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논문들을 선별한 것이다. 이 두 주제가 이렇게 한 호 차이로 이렇게 나란히 다루어졌다는 사실은 하필이면 바로 그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는 내게는 남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다. 일단 당장 논문에 도움이 많이 될 거고, 여기저기 기웃거릴 거 없이 저기에 실린 논문들로만 레퍼런스를 제한하면 시간과 노력도 많이 절약할 수 있을 거고, 제한의 명분도 그럴 듯하고.

거기까진 좋다. 그런데 나는 꼭, 고질적인 해석광(délire d'interprétation, exactement comme Jean-Jacques !) 성향 때문에, 거기에서 더 나가서, 거기에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식의 막무가내 목적론까지 덧붙여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 저 특집호를 참고하기 위해 나는 지금껏 논문을 미뤄왔던 것이다. 거기에 과대망상과 자아도취적 정취를 곁들이면 이렇게 말하고픈 지경에 이르게 된다 :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를 그것도 두 개씩이나 다룬 이 논문의 완성은 시대적 사명이다 ; 보라, 우주의 모든 사물과 사태가 한 데 어울려(agencer) 내 논문의 완성을 위해 공조(concourir)하고 있지 않는가.

어쨌든 논문을 미룰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내세우려면 내세울 수도 있을 핑계가 하나 있었던 셈이다. 동시에, 특집호가 출간된 이상, 바로 핑계-이유가 또 하나 줄어들었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문제는 그 이유란 게 사실 무한생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미룰 수밖에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미룰 수 없는 이유도. 2012년, 그 해 안에 반드시 끝내야 할 수많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푸앵카레 100주기를 기념하자는 취지였다. 목표에 다다르지 못하자 이 취지는 그 해를 넘겨야 할 이유로 쉽게 전환되었다. 100주기를 기념해서 열린 많은 행사들과 이를 계기로 나온 성과들을 반영하고자 한다면 그럴 수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제법 그럴싸한 핑계. 앞서 언급한 SHPMP 편집진도 2012년 이런 공고를 냈던 바 있다.
One hundred years ago, the towering figure of Henri Poincaré passed away. Poincaré workshops and conferences are accordingly being held all over the world, and it is only fitting that we at Studies in History and Philosophy of Modern Physics also devote attention to Poincaré’s path-breaking work in theoretical physics and the philosophy of science. 
We therefore plan to publish a special Poincaré issue. Given that the majority of the papers in this special issue will originate from meetings taking place in 2012, however, its publication can only take place in 2013. So as a taste of what is in store, and as a timely homage to Poincaré, we are publishing the first English translation of a 1912 essay by Poincaré about atomism.
결국 출판은 예정된 2013년이 아닌 2014년에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이유들은 많다. 미뤄야 했던 이유만큼이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유도. 영구적으로, 그리고 무한정하게 연장가능한 이 합리화의 연쇄를 끊는 유일한 방법은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하나, 꼭 하나만 덧붙이고픈, 실제로 최근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기도 했던,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르 코르뷔지에.


코르뷔지에와는 남다른, 뭐랄까, 가족적인 인연이 있다. 2006년 여름, 남불을 여행하던 엄마와 나. 우리는 다른 프로방스와는 사뭇 다른, 지중해 메트로폴로서의 매력이 없지 않은, 마르세이유의 정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인상은 코르뷔지에의 씨떼 라디외즈-유니테 다비타시옹에서 절정에 달했다. 눈부신 채광, 알록달록한 타일, 곳곳에 숨은 아기자기한 붙박이 장이나 의자들. 그리고 옥상의 터키색 수조와, 아, 탁 트인 하늘. 내부 거주공간을 볼 수 있었음 더 좋았을 것을,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다음에 들르게 되면 꼭 거기 있는 호텔에 묵어야겠다 생각했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07년 초. 파리에 오신 부모님을 모시고 내가 사는 동네 근처에 있는 코르뷔지에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그가 직접 설계하고 말년을 보낸 아파트다. 동네 근처 또 다른 곳에는 코르뷔지에 재단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공사중이었다. "제가 논문 마칠 무렵엔 재개장해 있을 테니 그때 가시면 되겠네요" 하고 호기있게 장담했었다.

그로부터 다시 1년 후인 2008년 여름. 당시 파리에 머물고 있던 동생 가족, 그리고 우리를 보러 파리를 재방문한 부모님과 더불어, 디종을 거쳐 샤모니까지 사부아 지방을 자동차로 여행했다. 돌아오는 길에 롱샹에 들러 코르뷔지에의 이 전설적 성당을 방문하려던 계획을 세웠으나, 이런 저런 조건이 맞지 않아 결국 실패했다. 못내 섭섭해 하시던 아빠께 나는 위로차 "저 논문 마칠 때 다시 오셔서 그때 가요" 하고 또 호기있는 장담을.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또 흐르고 흘러, 코르뷔지에 재단은 공사를 끝내고 재개장했고, 무엇보다 롱샹의 노트르담뒤오 성당 언덕에도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가 생겼으니,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게이트하우스 및 수녀원이 개장된 것.



우연히 이 소식을 접하고는 당연히 부모님 생각이 났다. 그리고 강한 "방문"에의 의지가 생겼다. 나 때문에 가우디의 바르셀로나로의 휴가 계획을 벌써 몇 해씩이나 미루고 계신 두 분. 바르셀로나도 바르셀로나지만 두 분과 더불어 이번에는 꼭 롱샹을 방문해야겠다, 방문하고야 말리라는 강한 열망이 생겼다. 누가 알랴, 훗날, 바로 이 열망이, 거의 꺼져가던 의지의 불씨를 다시 살려 나를 논문 쓰게 했다, 고 술회하게 될지. 아니, 실제로, 이 열망이 하나의 "원인"이 되어 논문의 완성이라는 "결과"를 생산하게 될지. 인생사에는 일방향적이고 선형적인 인과관계가 전도되는 일이 흔하디 흔하잖은가. 그리하여 예측불가능한 것, 그래서 사는 맛이 나는 것, 그게 또 인생 아닌가.

일차소스와 이차문헌

그 사람이 일차소스인 건 알겠지만 어떻게 그것만 보고 논문을 쓰냐, 이차문헌도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하려다, 문득, 아, 나는 이차문헌으로 남을 운명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아무리 탁월한 주석이라 봤자 원본만 못하고 어디까지나 원본의 그림자로 남아있을, 기껏해야 사본으로만 존재해야 할. 그렇잖아도 전에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욕망의 직접 대상이 되지 못하고 늘 간접 보격 (complément d'objet indirect)일 뿐인, 욕망의 "이차적" 대상 (objet "secondaire" du désir)이거나 오직 이차적으로만 욕망의 대상(only secondly desirable), 내 존재 양태는 이렇게 규정되는 것이 아닐까. 참으로 비참한 존재 조건이 아닐 수 없는데, 그런데도 나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유아론, 나르시시즘, 내향성 등등의 내 주어진 소질을 고려할 때 오히려 적절한 방식이라고도 생각했던 것이다. 소유와 독점 같은 방식의 관계에서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고, 내가 상대방에게 스스로를 전적으로 투자하고 그와의 관계에 전력 투구할 자신이 없는 만큼 상대방도 나에게 같은 태도인 편이 낫지 않은가 했던 것이다. 이는 윤리적 문제와는 무관한, 거의 전적으로 에너지의 문제였다. 심적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데, 그 중 상당 부분은 내 자신에게 투자해야 하고, 그러기에도 빠듯한 마당에, 그걸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기란 상당히 벅찬 일인데, 그 이상을 요구하는 사람이나 심지어 복수의 요구자와의 관계란 불가능하다, 등으로 요약되는 추론. 반면 상대방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일차소스가 아니어도 좋았다. 전공자 그 중에서도 그 주제로 박사논문 쓰는 사람이나 겨우 들여다볼까 말까 한 가장 주변적이고 사소하며 비밀스러운 문헌으로 남아 있어도 좋았다. 아니 차라리 그게 나았다. 어차피 내게도 영원한 제일의 소스인 내가 있고, 상대방은 다만 이차문헌이었을 따름이니까. 그러나 그것도 내가 상대방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을 때나 비로소 유효하고 타당한 추론이었음을 이제 알겠다. 내 안에 비축해 놓은 에너지가 그래도 제법 있어서 굳이 다른 에너지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에서나 가능한. 지금처럼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된 상황에서는, 그렇다고 대체 에너지원을 개발할 여유도 없는 상황에서는... 오로지 자립과 절약만이 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