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3일 화요일
일차소스와 이차문헌
그 사람이 일차소스인 건 알겠지만 어떻게 그것만 보고 논문을 쓰냐, 이차문헌도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하려다, 문득, 아, 나는 이차문헌으로 남을 운명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아무리 탁월한 주석이라 봤자 원본만 못하고 어디까지나 원본의 그림자로 남아있을, 기껏해야 사본으로만 존재해야 할. 그렇잖아도 전에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욕망의 직접 대상이 되지 못하고 늘 간접 보격 (complément d'objet indirect)일 뿐인, 욕망의 "이차적" 대상 (objet "secondaire" du désir)이거나 오직 이차적으로만 욕망의 대상(only secondly desirable), 내 존재 양태는 이렇게 규정되는 것이 아닐까. 참으로 비참한 존재 조건이 아닐 수 없는데, 그런데도 나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유아론, 나르시시즘, 내향성 등등의 내 주어진 소질을 고려할 때 오히려 적절한 방식이라고도 생각했던 것이다. 소유와 독점 같은 방식의 관계에서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고, 내가 상대방에게 스스로를 전적으로 투자하고 그와의 관계에 전력 투구할 자신이 없는 만큼 상대방도 나에게 같은 태도인 편이 낫지 않은가 했던 것이다. 이는 윤리적 문제와는 무관한, 거의 전적으로 에너지의 문제였다. 심적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데, 그 중 상당 부분은 내 자신에게 투자해야 하고, 그러기에도 빠듯한 마당에, 그걸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기란 상당히 벅찬 일인데, 그 이상을 요구하는 사람이나 심지어 복수의 요구자와의 관계란 불가능하다, 등으로 요약되는 추론. 반면 상대방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일차소스가 아니어도 좋았다. 전공자 그 중에서도 그 주제로 박사논문 쓰는 사람이나 겨우 들여다볼까 말까 한 가장 주변적이고 사소하며 비밀스러운 문헌으로 남아 있어도 좋았다. 아니 차라리 그게 나았다. 어차피 내게도 영원한 제일의 소스인 내가 있고, 상대방은 다만 이차문헌이었을 따름이니까. 그러나 그것도 내가 상대방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을 때나 비로소 유효하고 타당한 추론이었음을 이제 알겠다. 내 안에 비축해 놓은 에너지가 그래도 제법 있어서 굳이 다른 에너지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에서나 가능한. 지금처럼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된 상황에서는, 그렇다고 대체 에너지원을 개발할 여유도 없는 상황에서는... 오로지 자립과 절약만이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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