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31일 목요일

길 위에서


승객이라고는 나 하나뿐인 새벽버스에 앉아 있다... 있었다. 이미 수개월 전에 끝냈어야 했거늘 계속해서 끝내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는 정말로 끝내야 할 것 같아 붙들긴 했는데 여전히 진전이 안 되고 있는 일을 좀 해보려 철야작업을 감행했으나, 다른 일에 너무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고는 진이 빠져 집으로 향하는 길.


이 글만 해도 그렇다. 마치지 못할 걸 알면서 시작했다.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은 정오를 향해 가는 시간, 그리고 다시 버스에 올라 있다. 집에 와서 아침만 먹고서 다시 온다는 게 늑장을 부린 것이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지나고 또 공간도 바뀌어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은 지하철 안. 어제 밤까지 새면서 준비했거늘, 준비한 내용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토론에서 제대로 의견을 개진하지도 못했으며 발제문은 또 군데군데 오류와 오해와 오역으로 점철되어 있었음을 아프게 확인하고 돌아가는 길. 아무리 수년 만의 세미나 발제요 또 토론도 오랜 만이라고는 하지만, 명색이 철학박사가 그 정도라니, 부끄럽기가 한량 없다. 어떻게 논문을 완성하고 제출하고 또 심사까지 받았는지, 게다가 좋은 평가까지 받았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도대체 어떻게? 논문을 쓰기는커녕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 하다 못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집중하고 적당한 반응을 보이는 일조차 힘겨워했던 내가?


심사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고국으로 돌아와 생활이 안정되면 심리적 안정도 찾고 우울증도 나아지고, 그리하여 연구, 아니 삶 전반에 대한 의욕과 활기를 되찾으리라 기대했건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적어도 나 같이 나약한 인간에게 주저앉을 핑계로 삼기에는 충분히 높았다. 물론 현실을 탓할 수는 없고 탓해야 할 것은 오직 내 자신이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개중에는 다소 불편한 자리들도 있었건만 그래도 제법 무탈히 끝냈고, 바라던 제주도나 부산이나 일본이나 홍콩이나 포르투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춘천과 강릉도 다녀오고, 운동도 하고, 그러는 동안에 틈틈이 몇 가지 일을 가까스로나마 마쳤다. 

이렇게 말하면 무척 많은 일을 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기록 가치가 있는 사건은 아주 가끔씩 일어났을 뿐, 대부분의 시간은 기다림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전에 이미, 아주 오랜 시간 기간 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러는 동안에 다시 아침. 다시 지하철을 타고 와서 고속터미널에 도착한 끝에,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은 10시에 출발하는 세종행 버스 안이다. 터미널로 오는 중에 몇 문장을 이어갔거늘, 버스를 타서 다시 보니 온데 간데 없다. 어쩐지, 글이 간만에 막힘 없이 술술 풀린다 했다.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역사로도 그 무엇으로도 남지 않을 문장들. 그리고 그 시간들.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말과 시간은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또 지배하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세종으로 가는 이 버스 안에서 조금 전 깜빡 잠이 들고 깨던 그 찰나까지도, 지난 5년 내내 나를 괴롭힌 그 말들과 시간을 되살고 또 그것들이 지금까지도 이어질 것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창밖으로는 아파트, 산, 공장, 논밭이 펼쳐진다. 얼어붙은 강물이 잠깐 보인 걸 제외하면 대부분은 다소 지루한 풍경의 연속이다. 돌아온 후 처음에는 산이 많은 게 그렇게 좋았다. 가도가도 평원이 펼쳐지는 서유럽의 정경에 질려 있던 터일까. 그런데 지금은 산을 봐도 별 감흥이 없다. 그렇다고 유럽이 그리운 것은 아니다. 경이와 찬탄과 호기심 등 세상에 대해, 세상을 향해 가졌던 감응이 사라지고 감성 능력 일반이 퇴화된 상태인 것이다. 예전에 생각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했던 것들, 이를테면, 백석, 윤동주, 루시드 폴, 고다르, 특히 <미치광이 피에로>, 크리스 마커, 특히 <활주로(La jetée)>, 우디 앨런의 <맨해튼>(지금의 이 열거도 이 영화에서의 "이 시궁창 같은 세상을 살아가야 할, 살아내어야 할 이유"를 줄줄이 나열하는 대목에 대한 참조요 오마주다), 베토벤 현악 4중주, 특히 15번과 16번, 세자르 프랑크의 바이올린 혹은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2번, 특히 재클린 뒤프레와 다니엘 바렘보임의 마지막 녹음, 바흐와 쿠프랭의 하프시코드 곡들, <마술피리>와 <피가로의 결혼>... 철학은? 가슴을 뛰게 했던 철학이 있었던가? 이를테면 20대에 멋도 모르고 읽고 배운 니체. 바슐라르. 푸앵카레 <생성론 강의>의 첫 문장 ("세계의 기원은 온 인류가 태고부터 물어 온 질문이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지 않기란 사유하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이 말고도 분명히 있었는데. 심지어 여럿이었는데. 스카프(SCARPH), 즉 과학(SCience), 예술(ARt) 그리고 철학(PHilosophie), 이 세 가지가 없는 삶은 오류일 뿐 아니라 아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던, 이 세 가지를 존재의 근거요 이유로 삼던 시절이.

다시 두 번의 아침이 지났다. 그러는 동안에 시간뿐 아니라 공간도 몇 차례 바뀌었다. 세종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서울로, 서울 안에서도 관악으로 또 신촌으로 등등. 버스를 몇 번 더 탔고, 터널을 한 번은 버스로, 다른 한 번은 도보로 건넜다. 터널에 들어선 전후로는 눈도 맞았다.그리고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은... 집이다. 그 어느 곳도 아니며 동시에 모든 곳이기도 한 바로 그 장소. 굳이 집이 아니더라도 그렇지 않은 장소가 어디 있으랴. 내가 있고 싶은 곳은 그 어디에도 없고, 그 어디든 있고 싶지 않기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 이 세상 밖이 아닌 이상("n'importe où hors de ce monde").

덕수궁 돌담길. 2018년 초.
ㅅ에게 감사.

그러니까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 아니,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에 있든, 나는 여전히 길 위에 있는 것이다. 내 가는 곳이라면, 발길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길이 아니더냐. 도착하면 그곳은 곧 떠날 곳이 되곤 하지 않더냐. 그러니 떠나라. 일어나서 걸어라. 뼈는 여전히 부러지지 않았다. 아직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