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전 생산으로의 회복을 거부하기 위한 철벽 행동의 상상 (브뤼노 라투르)

* 번역의 변 : 브뤼노 라투르가 작년 코로나19 팬데믹이 본격화하던 시점에서 쓴 글로, 이후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한글본이 없길래 임시로 해보았다. 수정 후 2월말 정도에 페이스북에 올려 의견을 수렴할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라투르측에 요청해서 원문 게시글에 추가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 원문 출처 : Où atterrir après la pandémie? ; Where to land after the pandemic?



위기 전 생산으로의 회복을 거부하기 위한 철벽 행동의 상상

 

브뤼노 라투르 

AOC 2020년 3월 20일

 

의료진이 “현장에” 있고,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으며, 또 많은 유가족들이 고인을 묻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위기 이후에 대한 상상은 아마도 부적절할 것이다. 그렇지만 투쟁은 바로 지금이다. 구 기후 체제는 지금까지 다소 공허한 투쟁의 대상이었다. 일단 위기가 지나고 경제가 회복된 후에도 구 기후 체제로 되돌아가지 않으려면 바로 지금 맞서 싸워야 한다. 실제로 현재의 보건 위기는 위기라기보다는 (위기는 언제나 일시적이게 마련이다) 지속적이고 불가역적인 생태적 변이에 각인되어 있다. 우리가 운이 좋다면 전자[보건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몰라도 후자[생태적 변이]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두 상황이 같은 수준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양자의 관계를 잘 살피는 것은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어쨌든 이 보건 위기를 수단으로 삼아 생태 변이를 맹목적이 아닌 다르게 맞이할 기회로 삼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망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가장 먼저 배운 것은 가장 황당한 것이기도 하다. 단 몇 주일만에 전 세계가 동시에 경제 체제를 중단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모두가 속도를 늦추거나 방향을 돌리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바로 그 경제 체제 말이다. 생활 양식의 전환에 대한 생태주의자들의 논증은 “진보라는 기관 열차”의 비가역적인 힘에 대한 논증으로 반박되어 왔다. 즉 “세계화 때문에” 열차는 선로에서 이탈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지구화라는 특성 때문에 그 유명한 진보도 흔들리게 되었다. 단번에 제동이 걸리고 멈출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사실 지구의 세계화는 다국적 기업이나 상업 협약이나 인터넷이나 “관광 해설사/가이드”만의 소관은 아니다. 이 행성 위의 각 존재자들은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필요한 순간에는 다른 요소들과 결합해서 집합적인 것을 구성한다. 공기 중으로 확산되어 지구의 대기를 높이는 이산화탄소가 그러하고, 신형 독감을 옮기는 철새도 그러하다. 코로나바이러스도 마찬가지임을 우리는 고통스럽게 되새기고 있다. “모든 인간”을 잇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역량은 겉으로 보이게는 무방비한 우리의 비말이라는 수단으로 전달된다. 마치 미생물들이 수십 억 인간들을 어느 정도까지는 재사회화할 사명을 띠고 세계화 혹은 반()세계화의 주역을 맡기라도 한 듯이 보인다.

이로부터 믿기 어려운 사실이 확인된다. 세계 경제 체제가 적색 경보를 모두에게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게다가 이 체제는 커다란 금속 손잡이도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가 지도자들이 그 손잡이를 당기는 즉시 “진보의 기관 열차” 또한 요란한 제동 소리를 내며 멈출 수 있다는 것이다. 착륙[지구로의 귀환]을 위해 90도 각도로 선회하라는 요구는 지난 1월[2020년 1월]까지만 해도 달콤한 환상이었지만 이제는 현실에 훨씬 가까워졌다. 모든 운전자들은 안다. 도로를 이탈해서 벽을 들이받는 일이 없도록 구원의 손길을 바란다면 속도를 낮춰야 한다는 사실을.

세계화된 생산 체계가 갑작스럽게 멈추면서 지구 귀환 프로그램을 추진할 더 없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불행히도 생태주의자들만의 일은 아니다. 20세기 중반부터 행성의 구속을 벗어난다는 생각을 발명한 세계화의 주역들 또한 그들을 세계 밖으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로부터 급진적으로 단절할 더 없는 기회라 여긴다. 그들에게는 복지 국가, 가난한 자들의 안전망, 오염 방지를 위한 규제책 등을 해체하고, 또, 보다 냉소적으로 말한다면, 이 행성에 짐이 되는 모든 초과 인원을 제거하기 위한 너무나도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1]

이 세계화주의자들이 생태적 변이를 의식하면서도 기후 변화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한편, 지난 50년간 그 결과를 피하고 특권으로 무장한 요새를 건설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요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진보의 열매”에 대한 보편적 분배라는 근대인의 위대한 꿈을 믿을 만큼 소박하지 않다. 그러한 환영마저 남기지 않을만큼 솔직하다는 점에서 그들은 새롭다.[2] 매일같이 폭스 뉴스에서 발언하고 또 모스크바, 브라질리아, 뉴델리, 워싱튼, 그리고 런던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모든 기후 회의주의 국가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현재의 상황을 그토록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매일 같이 늘어나는 사망자들이 아니다. 경제 체제의 전반적인 중단은 특히 세계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재고”할 경이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세계화주의자들이 패배했음을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것, 기후 변화의 부정이 무한정하게 지속될 수는 없다는 것, 지구상의 다양한 지층들과 그들의 “개발” 사이에서 화해할 기회는 더 이상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경제도 예외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무든 수를 써서라도 좀더 지속가능하고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보호할 수단을 강구하는 것은 태세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세계의 멈춤”이라는 제동, 이 예견되지 않은 휴식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더 빨리 그리고 더 멀리 달아날 기회를 제공한다.[3] 이 순간, 그들이야말로 혁명가다.

우리가 행동해야 하는 것은 바로 거기에서다. 그들에게 기회가 열린다면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열린다. 모든 것이 멈춘다면 모든 것이 재고되고, 변경되고, 선택되고, 분류되고, 중단되거나 반대로 가속될 수 있다. 바로 지금 전수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가능한 빨리 생산을 재가동하자”는 양식의 요구에 “그렇게는 안 된다”는 일성으로 답해야 한다. 무엇보다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우리가 이전에 했던 것과 똑같이 회복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보자. 텔레비전에 눈물을 머금은 한 네덜란드 화훼업자가 나왔다. 그는 고객이 없어 비행기로 전 세계에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던 수톤의 튤립을 폐기해야 했다. 불평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가 피해 보상을 받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카메라는 곧바로 뒤로 물러나는데 그때 그의 튤립이 인공 조명에서 자란 뒤 바다에 석유를 뿌려대는 쉬폴이라는 화물선으로 이송될 것임을 보여준다. 거기에서 의심이 싹튼다. “그런 종류의 꽃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그러한 방식을 연장하는 일이 과연 유용한가?”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 각자가 우리 생산 체계의 모든 면에 대해 그러한 질문을 던진다면, 우리는 효과적인 세계화 방해꾼이 된다. 우리는, 비록 수백만에 불과하기는 해도, 지구의 세계화에 있어서는 나름의 방식으로 지구를 세계화시킨 저 유명한 코로나바이러스만큼 효과적일 수 있다. 바이러스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미미한 비말로써 세계 경제의 멈춤을 이루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무의미한 작은 행동으로써, 행동에서 행동으로 전함으로써 생산 체계의 멈춤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각자 질문을 던지면서 거부 행동을 상상한다. 이것은 바이러스에 대한 대항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복구하지 않기를 바라는 생산 양식에 대한 대항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단지 생산 체계를 회복하고 변경할 것이 아니라 생산을 세계와 관계를 맺는 유일한 원리로 간주하는 데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4] 이것은 혁명이 아니다. 픽셀(화소) 단위로의 분해다. 피에르 샤르보니에가 보인 것처럼, 경제에서 이윤의 재분배에만 치중한 지난 100년 간의 사회주의 이후, 어쩌면 이제는 “생산 자체”에 반기를 드는 사회주의를 발명할 때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5] 불의는 진보의 열매를 재분배하는 방식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풍요롭게 만드는 방식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생산을 축소하고 사랑과 신선한 물로만 살자는 것이 아니다. 소위 비가역적이라는 체계의 각 부분들을 선택하고, 소위 필요불가결한 연결들을 재고하며, 무엇이 바람직하고 무엇이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은지 검토해 보자는 것이다.

이 부과된 시간을 우선적으로는 각자가, 그리고는 춤, 기술하는 데에 사용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어디로부터 벗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다시 꿰거나 아니면 행동을 통해 끊겠다고 결심한 사슬은 무엇인지. 세계화주의자들은 재개 이후 그들이 무엇을 재생하고자 하는지 매우 분명히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못지 않게 분명하되 더 나쁜 것은 석유 산업과 고급 유람선이다. 그들에게 반대의 목록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한두 달 안에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새로운 “사회적 거리”를 배우고, 보다 연대하기 위해 거리를 두고, 병원이 과부하되지 않도록 집에 머물 수 있다면, 이 새로운 철벽 행동의 변화에 대한 잠재력을 상상할 수 있다. 동일한 것의 재개에 대항하기 위해서. 또는 그보다 나쁘게는, 지구 중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새로운 완충 장치에 대항하기 위해서.


철벽 행동을 위한 길잡이


주장은 실천적 수행과 연결하는 것이 좋다. 독자에게 이 간단한 설문을 제안한다. 설문은 직접 체험된 개인적인 경험을 반영할수록 더더욱 유용할 것이다. 관건은 당신의 머리에 와닿은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황을 기술하고 나아가 또 다른 설문으로 확장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여러 기술들을 중첩해서 풍경이 생성되도록 답변을 한다면, 당신은 구체화되고 자세한 정치적 표현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는 불가능하다.


주의할 것은 이것이 질의서도 설문 조사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자기 기술을 위한 길잡이이다.[6]


이제 할 일은 현재의 위기에서 어떤 활동으로 인해 당신이 박탈감을 가지고 당신의 삶에 본질적인 조건에 위협을 느끼는지 알아보고 그러한 활동의 목록을 만드는 것이다. 각각 활동에 대해서 당신이 (예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재개하고 싶은지, 더 하고 싶은지, 아니면 전혀 재개하고 싶지 않은지 선택할 수 있다. 다음의 질문에 답해 보라.

 

1.     지금 멈춘 활동 중 당신이 재개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2.     다음을 기술하라. ㄱ) 왜 그 활동이 당신에게 해로워/불필요해/위험해/비일관적으로 보이는가? ㄴ) 그 활동의 종식/일시 중지/대체가 당신이 선호하는 다른 활동을 보다 용이하게/더 일관적으로 만들었다면 어떤 점에서인가? (질문 1.에 대한 답변에서 열거된 각 항목에 대해 별도로 답변할 것)

3.     당신이 멈춘 활동을 계속할 수 없는 노동자/직장인/수행원/기업가들이 다른 활동으로의 전환을 용이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려면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하는가?

4.     현재 멈춘 활동 중 당신이 발전되거나 재개되기를 바라는 것은? 혹은 어떤 활동이 대안으로 발명되어야 하는가?

5.     다음을 기술하라. ㄱ) 왜 그 활동이 당신에게 긍정적으로 보이는가? ㄴ) 그 활동은 어떻게 당신이 선호하는 다른 활동을 보다 쉽게/조화롭게/일관적으로 만드는가? ㄷ) 또 당신이 비호감을 표시한 활동에 맞서 저항하도록 만드는가? (질문 4.에 대한 답변에서 열거된 각 항목에 대해 별도로 답할 것)

6.     노동자/직장인/수행원/기업가들이 그 활동을 재개/발전/창조할 역량/수단/도입/소득/도구를 취득하도록 하기 위한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다음으로는 당신의 기술과 다른 참여자들의 기술을 비교할 방법을 모색하라. 답변을 모으고 겹쳐서 보면 충돌, 연합, 논쟁, 대립의 선들로 이루어진 풍경이 서서히 그려질 것이다.)


[1] 미국의 고삐 풀린 로비스트들에 관한 마크 스톨러의 기사를 보라 : 우리가 주의하지 않는다면 코로나 바이러스 구체책은 기업들의 한 탕이 될 것이다. 『가디언』, 2020년 3월 24일,

[2] 우리는 더 이상 같은 행성에 살지 않는다, AOC 2019년 12월 18일.

[3] Danowski, Deborah, and Eduardo Viveiros de Castro. Larrêt de monde. De lunivers clos au monde infini (textes réunis et présentés). Ed. Hache, Emilie. Paris: Editions Dehors, 2014. 221-339. [드보라 대노프스키, 에두아르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세계의 멈춤」, 『닫힌 우주에서 무한 세계로』, 에밀리 아슈 편, 2014]

[4] Dusan Kazic, Plantes animées- de la production aux relations avec les plantes, thèse Agroparitech, 2019. [『살아 있는 작물 : 작물의 생산에서 작물과의 관계로』. 파리농업공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5] Pierre Charbonnier, Abondance et liberté. Une histoire environnementale des idées politiques. Paris: La Découverte, 2020. [피에르 샤르보니에, 『풍요와 자유 : 정치 사상의 환경사, 2020』

[6] 자기 기술은 『어디에 착륙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정치적 방향성을 잡을 것인가』에서 제안되었으며 이후 일련의 예술가, 연구자들에 의해 발전된 새로운 진정서(cahier de doléance)의 절차를 복구한 결과물이다.

전설의 수련, 수련의 전설

https://drive.google.com/uc?export=view&id=1lUByXVkjX1CFv5MTAacfBioC_4n-5ykNhttps://drive.google.com/uc?export=view&id=1NgwDYs0tPDrWAeHNBrBvDHpAuKf4z-FLhttps://drive.google.com/uc?export=view&id=1o5abjE0SvX-_o56h8g1YhdJu6i7wg0nbhttps://drive.google.com/uc?export=view&id=1Tadgx6jWgTMI1m1Fpul1DHrFAp8Vuhechttps://drive.google.com/uc?export=view&id=1YPV04wZQIVfK1e9BXZBGZKbkpKiCQQf5
춘천, 강원대 연적지
iPhone SE

지베르니 모네의 집에서도 저렇게 연못 한가득인 수련을 본 기억이 없다. 아니 수련 자체의 기억이 모네의 그림으로 본 것 말고는 없다. 시뮬라크르로 대체되었던 실재와의 조우. 그런데 조우한 실재는 다시 시뮬라크르로(위의 사진).

에드워드 윌슨은 1993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인류는 자살 성향을 띠는가?”에서 프랑스에서 전해 내려온다는 수수께끼를 언급한다. 연못가의 수련이 한 번 피어나기 시작하면 하루에 두 배씩 늘어난다. 30일 후 연못이 연꽃으로 가득 찬다면 연못의 절반이 채워지는 것은 언제인가? 정답은 당연히 29일째. 환경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든 예다.

이렇게 급수적인 전개는 많은 종류의 위기와 재난에 적용될 수 있겠으나, 또 적잖은 위기와 재난이 돌발적으로 발생하며 그 전개 양상도 변칙적이어서 (가령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31번 환자의 등장과 더불어 확진자 수가 급증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늘 긴장과 경계를 늦출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느라 힘이 빠져 정작 위기가 닥쳤을 땐 대처 능력이 없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해마다 아니 날마다 반복되는 이 순환을 어떻게 끊을 것인가? 나도 좀 사는 것처럼 살고 싶단 말이다.


얼떨결에 취직해서 얼떨떨한 기분, 계절은 어느새




춘천, 2019년 11월
iPhone 6


봄꿈 (feat. Aselm Kiefer & 김종학)


Anselm Kiefer, Dormeur du val (extrait)
Anselm Kiefer, Dormeur du val (extrait)
Anselm Kiefer, Dormeur du val (extrait)
빌헬름 뮐러의 시에 프란츠 슈베르트가 곡을 붙여 만든 <겨울나그네>. 흔히 <겨울나그네>를 두고 멜로디가 낭만과 서정의 극치인 데 반해 가사를 들어보면 "찌질"하다고들 한다. 실연의 아픔을 호소하는 청년의 자기 연민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꿈꾸고 그 꿈을 집요하다 싶게 좇는 사람은 타인의 눈에는 그렇게 비칠 법도 하다. 게다가 그 꿈이 가망도 없고 그럴 만한 가치도 없어 보이는 것이라면.

그중에서 11번째 곡 "봄꿈(Frühlingstraum)"은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자주 생각나고 또 자주 듣던 곡이다. 일종의 봄타령처럼. 5월에 화사하게 피어오른 듯한 찬란한 꽃들, 새들이 지저귀는 푸른 들을 꿈꾸던 몽상가. 새벽에 수탉이 울어 눈을 뜨니 세상은 여전히 춥고 어둡고 게다가 까마귀까지 울어대고. 유리창에 낀 성에도 마치 누군가 꽃을 그려놓고서 한겨울에 꽃타령하는 몽상가를 비웃는 것만 같다. 그래도 몽상가는 여전히 꿈꾼다. 사랑을 위한 사랑을. 어여쁜 소녀를. (아마도 소녀의?) 마음과 입맞춤을. 다시 수탉이 울고 마음이 깨어난 몽상가는 홀로 앉아서 꿈을 되새기며 눈을 감는다. 그의 가슴이 뛴다. 언제쯤이면 창가에 푸른 잎이 돋을 것인가? 언제쯤이면 사랑하는 이를 품에 안을 수 있을 것인가?*

안젤름 키퍼는 내가 제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현대 작가다. "좋아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은"이 좀 더 정확하겠다. 지난 20여 년 동안 두어 번 전시를 가본 것이 고작이니까. 세간의 팬덤 문화나, 꼭 대중문화가 아니더라도, 문화 및 예술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바, 그 표현과 방식에 있어 무섭도록 가속화되고 다각화된 수용 패턴에 비추어 볼 때, 나는 그의 편입을 자처하기엔 너무도 게으른 관객인 것이다. 꼭 전시 현장을 방문하지 않더라도 다른 매체를 통한 접근도 충분히 가능하고 오히려 그 가능성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는 변명의 여지는 있다. 키퍼는 규모와 재료/질료와 재질과 장소적 맥락을 중시하는 구상을 추구하고, 그러한 작품의 속성상 감상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작과의 직접적 접촉을 필요로 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인 것이다.

2015년 말에서 2016년 초까지 파리는 키퍼의 세상이었다. 작가는 콜레주드프랑스에서 강연을 했고, 라디오 프랑스퀼튀르에 여러 번 출연했으며, 국립도서관과 퐁피두센터에서 동시에 특별전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출연한 라디오 방송을 열심히 들었고, 국립도서관 전시는 틈만 나면 갔고, 퐁피두 전시에도, 언제나처럼 ㄴ 언니 덕분으로, 여러 번 갈 수 있었다. 2015년 11월 13일에 일어난 테러 때문에 모든 파리가 충격에 빠져 있었고 나 역시 그러했지만, 아니 내게 그 충격과 그 뒤로 이어진 불안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지만, 키퍼는 버틸 수 있었던 여러 이유 중 하나였다. "내가 논문이 늦어지는 바람에 급기야는 이런 일마저 겪는구나"라고 나약하고 비겁한 생각에 빠지는 대신에, "내가 키퍼를 보려고 논문을 늦췄다"라고 공언할 정도의 긍정과 낙관을 확보할 수 있었고, 덕분에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절박하고 절망적이기까지 당시의 상황을 버틸 수 있었다. 기나긴 겨울을 버티게 해주는 봄의 꿈이었달까. 

사실 키퍼를 "꿈"으로 "엮"기에는 좀 무리...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꿈은 곧 신화이고 이상이고 관념이기도 한데 이는 독일 민족의 신화, 탈무드 신화, 연금술 등등 그의 라이트모티프요 그의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김종학, <잡초> (1987)

원래는 키퍼의 작품론을 이렇듯 장황하고 어설프게 개진하려던 건 아니었다. 오래 소재로 묵혀둔 화두 중 하나가 "봄꿈" 덕분에 소환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덩달아 김종학의 작품도. 지난겨울 서소문 시립미술관에서 김종학의 <잡초>를 보고서는 키퍼의 바로 저 작품을 떠올렸었다. 김종학은 저런 "꽃그림"을 많이 그린 반면에, 키퍼의 저 작품은 그의 세계에서 예외적으로 밝고 화사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그림의 제목은 "무도회에서 잠든 자 (Dormeur du val)", 랭보의 시**에서 따왔다. 랭보의 시는 비극이다. 햇빛이 찬란한 푸른 들판에 젊은 병사가 하나 평화롭게 누워 있는 풍경인데 알고 보니 병사는 숨을 쉬지 않고 붉은 상처 구멍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병사 또한 꿈을 꾸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역시 봄을 꿈꾸며 기다리는, "겨울나그네"의 그 마음이지 않았을까.



* 여기에서 따온 가사의 (구글 번역을 초역으로 한) 의역이자 자유로운/창조적인 해석. 가사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

Ich träumte von bunten Blumen,
So wie sie wohl blühen im Mai,
Ich träumte von grünen Wiesen,
Von lustigem Vogelgeschrei.


Und als die Hähne krähten,
Da ward mein Auge wach;
Da war es kalt und finster,
Es schrieen die Raben vom Dach.


Doch an den Fensterscheiben,
Wer mahlte die Blätter da?
Ihr lacht wohl über den Träumer,
Der Blumen im Winter sah?


Ich träumte von Lieb' um Liebe,
Von einer schönen Maid,
Von Herzen und von Küssen,
Von Wonn' und Seligkeit.


Und als die Hähne krähten,
Da ward mein Herze wach;
Nun sitz' ich hier alleine
Und denke dem Traume nach.


Die Augen schließ' ich wieder,
Noch schlägt das Herz so warm.
Wann grünt ihr Blätter am Fenster? 

Wann halt' ich dich, Liebchen, im Arm?

** C’est un trou de verdure où chante une rivière
Accrochant follement aux herbes des haillons
D’argent ; où le soleil, de la montagne fière,
Luit : c’est un petit val qui mousse de rayons.

Un soldat jeune, bouche ouverte, tête nue,
Et la nuque baignant dans le frais cresson bleu,
Dort ; il est étendu dans l’herbe, sous la nue,
Pâle dans son lit vert où la lumière pleut.

Les pieds dans les glaïeuls, il dort. Souriant comme
Souriait un enfant malade, il fait un somme :
Nature, berce-le chaudement : il a froid.

Les parfums ne font pas frissonner sa narine ;
Il dort dans le soleil, la main sur sa poitrine
Tranquille. Il a deux trous rouges au côté droit.

길 위에서


승객이라고는 나 하나뿐인 새벽버스에 앉아 있다... 있었다. 이미 수개월 전에 끝냈어야 했거늘 계속해서 끝내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는 정말로 끝내야 할 것 같아 붙들긴 했는데 여전히 진전이 안 되고 있는 일을 좀 해보려 철야작업을 감행했으나, 다른 일에 너무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고는 진이 빠져 집으로 향하는 길.


이 글만 해도 그렇다. 마치지 못할 걸 알면서 시작했다.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은 정오를 향해 가는 시간, 그리고 다시 버스에 올라 있다. 집에 와서 아침만 먹고서 다시 온다는 게 늑장을 부린 것이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지나고 또 공간도 바뀌어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은 지하철 안. 어제 밤까지 새면서 준비했거늘, 준비한 내용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토론에서 제대로 의견을 개진하지도 못했으며 발제문은 또 군데군데 오류와 오해와 오역으로 점철되어 있었음을 아프게 확인하고 돌아가는 길. 아무리 수년 만의 세미나 발제요 또 토론도 오랜 만이라고는 하지만, 명색이 철학박사가 그 정도라니, 부끄럽기가 한량 없다. 어떻게 논문을 완성하고 제출하고 또 심사까지 받았는지, 게다가 좋은 평가까지 받았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도대체 어떻게? 논문을 쓰기는커녕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 하다 못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집중하고 적당한 반응을 보이는 일조차 힘겨워했던 내가?


심사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고국으로 돌아와 생활이 안정되면 심리적 안정도 찾고 우울증도 나아지고, 그리하여 연구, 아니 삶 전반에 대한 의욕과 활기를 되찾으리라 기대했건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적어도 나 같이 나약한 인간에게 주저앉을 핑계로 삼기에는 충분히 높았다. 물론 현실을 탓할 수는 없고 탓해야 할 것은 오직 내 자신이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개중에는 다소 불편한 자리들도 있었건만 그래도 제법 무탈히 끝냈고, 바라던 제주도나 부산이나 일본이나 홍콩이나 포르투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춘천과 강릉도 다녀오고, 운동도 하고, 그러는 동안에 틈틈이 몇 가지 일을 가까스로나마 마쳤다. 

이렇게 말하면 무척 많은 일을 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기록 가치가 있는 사건은 아주 가끔씩 일어났을 뿐, 대부분의 시간은 기다림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전에 이미, 아주 오랜 시간 기간 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러는 동안에 다시 아침. 다시 지하철을 타고 와서 고속터미널에 도착한 끝에,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은 10시에 출발하는 세종행 버스 안이다. 터미널로 오는 중에 몇 문장을 이어갔거늘, 버스를 타서 다시 보니 온데 간데 없다. 어쩐지, 글이 간만에 막힘 없이 술술 풀린다 했다.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역사로도 그 무엇으로도 남지 않을 문장들. 그리고 그 시간들.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말과 시간은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또 지배하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세종으로 가는 이 버스 안에서 조금 전 깜빡 잠이 들고 깨던 그 찰나까지도, 지난 5년 내내 나를 괴롭힌 그 말들과 시간을 되살고 또 그것들이 지금까지도 이어질 것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창밖으로는 아파트, 산, 공장, 논밭이 펼쳐진다. 얼어붙은 강물이 잠깐 보인 걸 제외하면 대부분은 다소 지루한 풍경의 연속이다. 돌아온 후 처음에는 산이 많은 게 그렇게 좋았다. 가도가도 평원이 펼쳐지는 서유럽의 정경에 질려 있던 터일까. 그런데 지금은 산을 봐도 별 감흥이 없다. 그렇다고 유럽이 그리운 것은 아니다. 경이와 찬탄과 호기심 등 세상에 대해, 세상을 향해 가졌던 감응이 사라지고 감성 능력 일반이 퇴화된 상태인 것이다. 예전에 생각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했던 것들, 이를테면, 백석, 윤동주, 루시드 폴, 고다르, 특히 <미치광이 피에로>, 크리스 마커, 특히 <활주로(La jetée)>, 우디 앨런의 <맨해튼>(지금의 이 열거도 이 영화에서의 "이 시궁창 같은 세상을 살아가야 할, 살아내어야 할 이유"를 줄줄이 나열하는 대목에 대한 참조요 오마주다), 베토벤 현악 4중주, 특히 15번과 16번, 세자르 프랑크의 바이올린 혹은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2번, 특히 재클린 뒤프레와 다니엘 바렘보임의 마지막 녹음, 바흐와 쿠프랭의 하프시코드 곡들, <마술피리>와 <피가로의 결혼>... 철학은? 가슴을 뛰게 했던 철학이 있었던가? 이를테면 20대에 멋도 모르고 읽고 배운 니체. 바슐라르. 푸앵카레 <생성론 강의>의 첫 문장 ("세계의 기원은 온 인류가 태고부터 물어 온 질문이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지 않기란 사유하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이 말고도 분명히 있었는데. 심지어 여럿이었는데. 스카프(SCARPH), 즉 과학(SCience), 예술(ARt) 그리고 철학(PHilosophie), 이 세 가지가 없는 삶은 오류일 뿐 아니라 아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던, 이 세 가지를 존재의 근거요 이유로 삼던 시절이.

다시 두 번의 아침이 지났다. 그러는 동안에 시간뿐 아니라 공간도 몇 차례 바뀌었다. 세종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서울로, 서울 안에서도 관악으로 또 신촌으로 등등. 버스를 몇 번 더 탔고, 터널을 한 번은 버스로, 다른 한 번은 도보로 건넜다. 터널에 들어선 전후로는 눈도 맞았다.그리고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은... 집이다. 그 어느 곳도 아니며 동시에 모든 곳이기도 한 바로 그 장소. 굳이 집이 아니더라도 그렇지 않은 장소가 어디 있으랴. 내가 있고 싶은 곳은 그 어디에도 없고, 그 어디든 있고 싶지 않기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 이 세상 밖이 아닌 이상("n'importe où hors de ce monde").

덕수궁 돌담길. 2018년 초.
ㅅ에게 감사.

그러니까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 아니,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에 있든, 나는 여전히 길 위에 있는 것이다. 내 가는 곳이라면, 발길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길이 아니더냐. 도착하면 그곳은 곧 떠날 곳이 되곤 하지 않더냐. 그러니 떠나라. 일어나서 걸어라. 뼈는 여전히 부러지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블루 자스민, 혹은 우디 앨런의 미소

 최근 몇년 새 우디 앨런이 유럽과 영국을 방랑하며 찍은 작품들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매치 포인트>와 <미드나잇 인 패리스> 정도를 제외하면. <매치 포인트>가 뛰어난 스릴러 감각에 영국 계급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 돋보이는 수작이라면, <패리스>는, 작가로서의 욕심과 역량을 드러내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 취향을 여과없이 담는 데에 주력, 비슷한 취향을 소유한 나같은 관객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어느 작품도 내가 앨런에게서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켜주진 않았다.

내가 앨런에게서 기대하는 바란 이런 것이다. 불평불만 가득하고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도 인간과 관계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하고 그런 가운데 자아와 세계를 성찰하고 나아가 새로운 자아상 및 세계관을 확립할 가능성. 인간주의적 냉소랄까, 냉소적 인간주의랄까. 영화 내내 곤두서 있던 신경을 누그러뜨리며 아주 잠깐, 아주 살짝 미소짓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맨해튼>의 마지막 컷이 엘런 세계의 이러한 근본 이념을 집약해서 보여준 바 있다.

뉴욕은 단순한 로케이션을 넘어 그러한 이념을, 더불어 그 이념을 말하자면 극복할 계기를 보여주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장치였다. 그리고 앨런의 작품들은 뉴요커로서의 존재 증명이었다. 뉴욕에서 찍지 않은 작품들마저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그가 뉴욕만 벗어나면 힘을 잃는다고 단언하는 한편, 어서 외유를 접고 그만의 도시로 돌아가길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블루 자스민> (2013)의 배경은, 애석케도, 뉴욕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다. 주인공은 부유층에서 하루 아침에 빈털터리로 전락한 중년 여성. 영화는 뉴욕에서 최상류층의 삶을 구가하던 그녀의 과거와, 샌프란의 동생네 집에 얹혀 살며 새 인생을 시작하려 애쓰는 현재를 교차하면서 보여준다. 플래시백에서 등장하는 뉴욕은 이전까지 앨런이 그려왔던 뉴욕과는 다르다. 허위와 과시욕과 위선으로 가득한 부자들의 삶. 샌프란의 프롤레타리아 "루저"들의 그것과 대비되지만 둘다 공허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이 같고도 다른 사회에 대한 시선에서 계급 사회 및 현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풍자를 읽을 수 없는 바는 아니나, 전반적으로는 희화화와 진지한 비판이 무질서하게 섞여 블랙유머도 아니고 페이소스도 없는 어정쩡한 코미디가 되어 버렸다.

특히 주인공 케이트 블랜챗은 배우 개인으로서나 앨런 영화의 여주인공으로서나 낯설었다. 정확히는 불편했다.

영화는 그녀가 어떻게 "하락"한 "신분"으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치과병원 접수원이라는 "모욕적"인 직장에서 피곤한 환자들을 상대하는 걸로도 모자라 의사의 성희롱까지 겪는다든지. 그러나 그저 달리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일 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새 삶을 개척하려는 의지는 결여돼 보인다. 계속해서 과거를 복기하며 바로 그 과거로 복귀하길 꿈꿀 뿐이다. 그것도, 과거와 꼭 같이, 돈 많은 남자를 만나는 방식으로.

여기까진 클리셰다. 얼마든지 풍자하고 조롱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그런 그녀의 내면을  관찰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울분을 터뜨리고 마스카라가 범벅된 눈물을 시도때도 없이 흘리거나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신경안정제를 상습적으로 복용하는 등, 그녀의 행태는 희화화 대상으로 삼기엔 심각한 수준의 병리적 상태로 보인다. 이러한 묘사와 관점이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함을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해당 분야 전문가의 몫이겠다. 나는 그저, 인물에 대한 타자화 혹은 소외 혹은 몰이해 혹은 공감부족으로 점철된 시선이 영화의 내적 완성도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앨런은 이전에도 말많고 신경쇠약 직전에 항우울제를 달고 사는 여자들을 즐겨 그려왔다. 그녀들은 대상화되었다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투사, 말하자면 여성적 페르소나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녀들에 대한 묘사는 특별히 친여성적이거나 여성주의적이지는 않았다 해도 적어도 반여성적이진 않았다. 이것은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작가의 대상과의 동일시와 공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로서의 앨런이 단순히 여성관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펠리니의 이탈리아나나 누벨바그 감독들의 파리지엔느처럼 여성 이미지의 창조는 앨런의 작가적 스타일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였다.

다이앤 키튼으로 대표되는 앨런 영화의 뉴욕 여성들은 거개가 전문직에 종사하는 인텔리 계급에 속한다. 거기에 자스민과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자스민은 엑스 뉴요커이긴 해도 신흥 부르주아에 가깝다. 그것도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투자 사업으로 쌓았고, 그마저도 사기 행각으로 점철된 부다. 내가 아는 한 이 시대 최고의 스노브이자 모랄리스트 중 하나인 앨런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부류인 것이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남편의 재산에 의존해 안일한 삶을 구가한 원죄가 있고 따라서 인텔리 여성 동지들이 혐오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췄다. 앨런으로서는 대상을 얼마든지 대상화하고 타자화할 안전 거리를 확보한 셈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획득된 관점이 내 눈엔 의뭉스럽게 보인다. 한 부르주아의 경제적이고 도덕적인 몰락에 안도하는... 또 다른 부르주아의 타락한 도덕과 허위의식을 보는 것만 같다. 

샤워를 마친 뒤 거리에 나와서는 젖은 머리 그대로에 화장기가 전혀 없이 늙고 지친 모습으로 공중 벤치에 앉아 혼잣말을 중얼대는 자스민의 얼굴을 화면 가득 비추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마지막 장면을 다시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맨해튼>의 그 마지막 미소가 더욱 그리워진다.

- 2013년 10월 작성한 글을
2018년 8월 복원하여 게재하다

Retour à Paris en plein mai (68)















일요일 늦은 오후, 72번 버스

1. 
일요일 늦은 오후. 이 시간대 72번 버스는 늘 붐빈다. 센느 강변을 따라 시내 중심 관광 요지를 지나는 덕에 관광객들도 많고, 휴일을 맞아 나들이를 다녀오는 16구의 부유한 노인들이나 (이들은 일반적으로 지하철보단 버스를 선호하는 편), 유모차를 앞세운 가족들도 많다 (이들에게도 역시 버스가 더 편할 터). 자리가 없어 뒷문 쪽에 서 있자니 앞으로는 노약자석, 뒤로는 유모차 전용 공간이어서 그야말로 2세대 사이에 낀 꼴이었다.   
그러나 이 사이의 공간은 얼마나 아늑하며 편안한가. 혼자 외출했다 귀가하는 듯한 할머니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고, 집채 만한 유모차를 끄는 엄마는 힘겨워 보였다. 나는 과연 기력이 쇠해 버스에서 서 있는 게 힘들어져 염치고 자존심이고 따질 새 없이 자리가 날라치면 재빨리 가서 앉게 되는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내 아기를 위해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배려받기보다는 배려를 하는 일이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지는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 이라 적으려다, 문득, 나 또한 많은 배려를 받고 살아온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아기였을 때 엄마도 그렇게 낯선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아가며 나와 동생을 이리저리 실어 날랐겠지. 단지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을 남이 내게 베푼 것보다 오래 그리고 많이 기억하고 있을 뿐.
 ...이라고 6년 전의 나는 적었다. 그 사이에도 같은 장면은 여러 번 반복됐고, 나는 여전히 2세대 사이에 낀 채 그대로...인가, 과연? 휴일에 혼자 외출했다 쓸쓸하게 귀가하는 할머니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어쩌면 누군가는 바로 나를 보면서 나이와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했는지도 모른다. 

2.

그런가 하면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짐을 한껏 지고서 같은 버스를 타려 국영 라디오 방송국 앞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중. 마침 방송국에서 공연이 끝났는지 관객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내가 선 정류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머리가 하얀 어르신들. 공연을 관람한 뒤 아마도 16구나 교외 주택가이자 역시나 부촌에 속하는 불론뉴-비양쿠르로 귀가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날따라 하필 꽉꽉 채운 배낭에 카트까지 들고 있던 나. 머리는 복잡해지고 가슴은 쿵쾅대기 시작했다. 과연 탈 수 있을 것인가, 탄다고 하더라도 저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거북이등 효과를 피하기 위해 최소한 배낭은 벗어야 할 텐데, 그러면 카트랑 다른 가방은 또 어떻게 매니지할 것인가... 등등을 생각하다, 문득, 내게도 최소한 이동의 자유와 대중 교통을 이용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심지어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내겐 우선권이 있지 않은가, 언제까지 이렇게 배려와 양보만 할 것인가... 등등의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본성을 거슬러 도전해 보기로 마음을 먹고, 사람들이 모여든 버스 입구 앞에 줄을 섰다. 내 차례가 오자 우선 한 마담에게 양보를 했다. 그 뒤의 다른 마담이 내게 양보를 하여 안심하고 스텝을 밟으려는 찰나, 아무래도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게 양보를 한 마담에게 양해를 구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그곳에서부터 집앞 정류장까지는 대여섯 정거장 정도. 다른 옵션을 몇 가지 생각하다가 그냥 집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자전거 타고 다니거나 조깅할 경우에는 단숨에 뛰기도 할 만큼 가까운 거리지만, 그때는 짐 때문에 걸음 속도도 나지 않고 얼마 가지 않아 지쳐가던 차. 한 정거장 지났을까. 뒷차 도착까지 불과 1-2여분이 남아 있었다. 한번 기다려 보기로 했다. 기다리고 있자니 우아하고 지적인 풍모의 두 마담이 다가왔다. 역시 공연을 마치고 나온 기색이었다. 예정된 시간에 버스는 도착했고, 나는 한결 여유로운 버스 안 풍경에 안도하며 티켓을 수리했다. 그런데 나와 같이 탄 두 마담은 지갑을 뒤지는가 싶더니 그냥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 버스 안이나 동네 수퍼마켓에서 저런 뭐랄까, 얌체에서부터 안하무인까지의 모습들을 가끔 보는데, 그럴 때마다 생경하다. 나라고 무임승차를 전혀 안해 본 건 아니지만, 그리 붐비지도 않는 버스에 기사가 엄연히 감시하고 있는 조건에서라면, 나같은 소심한 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배짱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실천하기 힘든 행동을 저렇게 고상해 보이는 분들이 하다니. 한편으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나 시민의식 운운할 것도 없이, 국적, 출신, 성별, 주거지 등등 이른바 사회적 지표라는 것의 지표로서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3.

일요일인 오늘 오후. 자전거를 타고 어딘가에 가려 했으나, 옷을 얇게 입고 나온 데다 비도 한두 방울 떨어지고 해서, 일정을 급히 변경, 동네를 한 바퀴 도는 산책을 하게 되었다. 날이 궂은 탓에 보통 때보다는 덜했지만 그래도 가족 단위의 산보객들이 제법 보였고, 그 중에서도 유독 아이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이는, 재생산 욕구가 채 걷히지 않은 내 의식이 지각에 미친 효과도 없지 않겠지만, 프랑스에서 그만큼 아이들을 확실히 많이들 낳았고 또 여전히 낳고 있다는 사실을 일정 부분 반영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공원마다 거리마다 아이들이 바글바글한 걸 볼 때면, 저출산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한국의 사례를 생각한다. 인구정책은 근대 국가의 대표적인 생정치 장치 중 하나다. 가장 원초적인 동시에 가장 치밀한 진단과 예측, 동시에 기존의 윤리학과 가치 기준을 끊임없이 재고하고 경계하는, 늘 깨어있는 사유를 요하는 부문. 그 뿐인가. 프랑스의 경우 국가 차원에서 장기간에 걸쳐 다양하고 체계적인 시책을 펼쳐 오늘의 눈부신 성공을 이루었다지만, 이것이 단지 행정적으로 정책적 차원으로만 설명될 것은 아니겠다. 사회 전반의 망딸리떼, 즉 심성 혹은 의식의 수준, 즉 정책이나 그 밖의 사회적 규범 수준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지는 않으면서 그에 완전히 환원되지도 않는 사회심리학적 심급이 있고, 이것이 유의미한 차이를 만드는 주요한 인자 중 하나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비슷한 수준의 선진국이면서 경제 사정에서는 오히려 좀더 나은 편인 데다,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을 일찍이 인지하고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인 장려책을 실시해 왔음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독일의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4.

아이들을 지나치자 이번에는 마주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를 들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져 마침내 스쳐 지날 찰나, 그녀의 말소리가 들렸다. Vive la République, 즉 공화국 만세. 집에 와서 뉴스를 보고야 알았다. 오늘 트로카데로에서 우파 정당인 Les Républicains, 즉 공화(국)당의 대선 후보 프랑수아 피용을 지지하는 집회가 열렸다는 사실을.

피용은 극우인 마린 르펜에 대적할 사실상 유일한 대항마로 거의 당선이 확실시까지 되던 후보다. 그런데 최근 부인인 페넬로프--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에서 온 이름!--에게 보좌관 업무를 맡기고 보수를 그것도 꽤 고액으로 지급했으나 사실 그녀의 업무는 허구였다는 의혹이 제기돼 법정 출두 명령까지 받은 상태. 이러한 이른바 "페넬로프게이트"로 참모들도 떠나고 사퇴 압력이 거세지는 가운데, 그가 주중에 갑자기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긴급 기자 회견을 열자 모두 사퇴 발표를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후보로서의 행보를 끝까지 할 것이며 법은 거스를지언정 민중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등의 발언으로 모두를 아연실색케 했다. 그런가 하면 침묵하던 페넬로페는, 일종의 "일요신문"인 Journal du dimanche 오늘자 인터뷰에서, "남편을 위해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고 밝히면서, 그 예로, 남편이 참석하는 행사에 동행하고, 연설문을 읽고 코멘트하는 등등을 들었다. 그야말로 비선 비서이자 참모의 역할을 했다는 것인데. 여성들이 담당해 온 가사 노동--페넬로페의 바느질!--의 가치화 및 경제 기여도 재평가와 유사한 맥락에서, 배우자로서 관행적으로 비서나 참모의 역할을 대신함에도 보수는 물론이거니와 상징적 가치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차원--
--말하자면 페넬로페가 바느질이나 충절로써 오딧세우스 신화에 기여한 바를 인정하자는 취지?--이었다는 해석으로 쉴드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기도 했으나, 이는 아무래도 과도한 해석이겠다. 설령 이 해석을 따른다 해도, 더욱이 실제로도 정치인 중에 배우자를 그런 명목으로 채용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고도 하니, 정식으로 절차를 거쳐 비서나 참모로 채용하고 규정에 따라 보수를 지급하지 않은 책임은 물을 수밖에 없다.  

트로카데로 집회 사진을 보니, 모두가 단체로 맞춘 꼭 같은 규격의 삼색기를 들고 일제히 흔드는 모양이, 요새 서울시청앞에서 열린다는 태극기 집회의 그것을 빼다 박았다. 심지어 참가 인원을 제멋대로 부풀리는 것도 닮았다.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아니 세태 판단이나 대세론까지 갈 것도 없이, 합리적 동물로서 최소한의 사고력과 판단력만 발휘해도 답이 나오는 문제에, 오답을 답이라 우기면서 정신승리하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프랑스혁명이나 68혁명, 그리고 광주나 87년 항쟁 같은 역사가 결국 이걸 위한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결국 역사는 현재에서 성찰하고 긴장하고 노력하면서 끊임없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는, 또 하나의 역사의 교훈.

A une passante

Vous traversiez la rue, Madame. Il y avait, devant vous, des voitures qui attendaient que vous passiez, comme moi, de l'autre côté, en vélo. Vous avez jeté un regard aux voitures à votre gauche, puis à moi, à votre droite, puis vous vous êtes tournée vers moi pour me dire : "C'est interdit !" J'allais dire : crier. Oui, Madame, je suis désolée, mais moi qui n'ai pas l'habitude de parler de tonne aussi agressive avec des gens de la rue, comme la plupart des gens d'ailleurs je crois, vous m'a bien étonnée.

En effet, c'était une route "sens unique" et j'allais rouler mon vélo dans le contresens. Mais, Madame, le saviez-vous ? Paris serait peut-être une ville de cauchemar pour les conducteurs, avec ses routes étroites et de sens unique, mais il n'en est pas de même pour les cyclistes. Dans certaines routes, déjà nombreuses et de plus en plus nombreuses, il est permis aux vélos de conduire contre les sens uniques. J'ignore si tel était le cas de la rue où nous nous sommes croisées, mais, même s'il n'y a pas de signe "sauf vélo" qui garantit que telle exception est tout à fait légale, il y a souvent une complicité entre conducteurs et cyclistes pour que ceux-là laissent passer ceux-ci.

De tout cela, je ne vous ai rien dit. La route en question me paraissait assez étroite et montante, j'aillais plutôt marcher sur le trottoir, et ce, après être descendue du vélo. Quand je vous l'ai dit, vous avez répété : "Non, c'est interdit le vélo sur le trottoir !" Vous croyiez que j'allais passer en montée sur mon vélo. J’avoue que cela m'arrive de ne pas descendre du vélo au trottoir, mais ceci uniquement quand il n'y a personne ou peu et il y a suffisamment de place pour que je ne dérange personne avec mon cheval. Evidemment vous ne me connaissez pas, je ne peux vous demander de me connaitre à ce point-là pour vous renseigner sur mes règles de conduite cycliste. Mais qu'est-ce qui vous dit que je ne sois une assez bonne citoyenne, quelqu'un qui a l'horreur d'être impoli et fait tout ce qu'il faut pour ne gêner personne ? Sur quoi fonde votre raisonnement ? 

Je ne veux pas vous prendre pour une raciste ou une xénophobe. Peut-être vous aviez simplement une mauvaise humeur et vous vous sentiez irritée par rien. Cela arrive à tout le monde, m'arrive à moi aussi, peut-être plus que quiconque. Mais je crains que, vu la situation, vous risquiez de vous faire prendre pour une telle : une dame assez âgée parle de manière aussi hostile et austère à une fille asiatique plus jeune qui a du mal à se défendre, qu'inspirerait une telle situation ? J'exagère peut-être. Mais pas tellement, vu ce qui se passe en ce moment. Je sens que ce genre de tragédie n'est plus réservée aux banlieues. On dit que c'est la face sombre de la mondialisation, ce repli sur soi et ce rejet de l'autre ou d'autrui, et c'est un phénomène de plus en plus mondialisé. A quoi, hélas, Paris n'échappe pas, en tout cas semble avoir de plus en plus mal à y résister. Excusez-moi de vous le dire, vous êtes vous-même un un symptôme de ce phénomène et vous m'en avez donné une preuve.

Cela m'attriste plus que quiconque parce que, Parisienne adoptée, j'aime profondément cette ville, surtout pour son cosmopolitisme et son ouverture vers autrui. Les gens comme vous laissent quitter même les francophiles dans le fond de leur âme comme moi. Ne gâchez pas Paris. Paris n'est pas seulement à vous. Elle nous appartient, à vous et à moi, à tout le monde.

파리에의 헌사. 진부하지만 진정을 담아

파리에서 산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정확히는 12년 1개월 반. 이곳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날의 삼 분의 일을 보낸 것이다. 그것도 한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절, 삼십 대를 온전히. 물론 힘들고 아프고 방황하고 절망하고 좌절한 나날이 더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는 않았지만. 인생이란 게 그렇듯.  

한 도시에 이 만큼 살았으면 어디든 최소한 한 번쯤은 흔적을 남겼음은 당연하다. 대부분은 파리 서부에 있는 16구에서 살았다. 흔히 부르주아 동네라 불리는. 산 햇수가 햇수이니만큼 이제는 고향 같이 느껴지지만, 개인적으로 농담 삼아 "파리 텍사스"라 부를 정도로 이념적으로는 보수적이고 문화적으로는 불모지다. 그런 만큼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 나아가 내 "젊음"의 상당 부분을 보내고, 파리에서의 삶을 만끽할 수 있었던 곳은 학교와 도서관이 있는 남동쪽, 그리고 미술관과 영화관이 몰려 있는 중심부였다.

오자마자 처음으로 둥지를 틀었던 곳은 지난 11월 13일 바타클랑과 더불어 테러 공격을 당한 카페와 식당이 있던 페데브르와 볼테르 가 등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바타클랑. 아, 바라클랑.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이맘 때. 박사논문을 제출하고 심사를 기다리고 있던 ㅅ 언니와 욜라텡고 콘서트를 보러 간 곳이 바로 바타클랑이었다. 스탠딩 콘서트는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일찍 가서 외투를 무대 가장자리에 걸쳐 놓고 연주자들 얼굴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가까운 자리에서 공연을 본 것도.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한국에서 ㅅ 언니가 보낸 안부 메시지를 보니 서서히 기억이 되살아났다. 들어가기 전에 근처 빨래방에 들어가 몸을 녹이며 샌드위치를 먹었던 것, 입구에서 들어서니 바로 객석이 눈앞에 펼쳐졌던 것, 뒤편에 바가 하나 있던 것, 나와서 레퓌블리크 광장까지 밤거리를 걸어가 지하철을 탔던 것 등등. 


이번에 테러 사건이 일어난 곳은 파리 중동부에 위치한 10~11구. 부유한 은퇴자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은 서부의 전통적 부르주아 동네와는 달리, 자유로운 영혼과 의식을 가진 젊은층이 많이 살아 흔히 보보, 즉 부르주아 보헤미안 동네라 불린다. 전통적 구분에 따르자면 부르주아 지식인 정도에 가깝겠지만, 좌파 성향이되 극좌를 지지하지는 않고, 현 자본주의 체제에서 누리는 혜택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즉 급진적 "혁명"을 부르짖지는 않아도 그 대안이나 차선책에 관심을 기울이고, 경제 사회적 불평등 해소, 우호적이고 개방적인 이민 정책 등의 좌파적 의제들에 호응하는 면모들을 볼 때, 예전 파리 좌안의 이른바 샴페인 좌파와는 계급적으로 혹은 세대적으로 다르다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인구조사에서 드러나는 인구사회학적 사실 못잖게 중요하고 흥미로운 것은 이 공간이 갖는 역사적 지정학적 문화적 상징성이다. 이곳 주민과 더불어 이곳에서 일하거나 이곳을 거쳐가는 이들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내는 활기찬 거리의 풍경은 파리 텍사스 주민의 눈에는 다소 경이롭게 느껴질 정도다. 다양한 문화와 취향과 출신 지역 및 배경 등등이 자유로이 공존하는, 21세기 파리가 가진 고유한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곳. 파리 시장인 안느 이달고가 사건 직후 바타클랑에서 말했듯 우리가 좋아하는 파리. 

현재도 현재지만 역사 또한 남다르다. 파리가 워낙 오래 된 도시인 데다가, 그야말로 국민/국가 차원에서 역사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프랑스의 수도인만큼, 도대체 "역사적"이지 않은 곳이 있겠냐만, 이 공간의 역사는 확실히 남다르다. 바스티유, 레퓌블리크, 불르바르 볼테르에서 생마르탱 운하, 나시옹, 그리고 좀더 북쪽으로는 벨빌에서 페르라쉐즈로 이어지는 지선은, 한때 혁명을 꿈꾼 적 없는 사람도 꿈을 꾸게 한다. 게다가 그 사이에는 테러 이전의 <샤를리 엡도> 사옥 또한 자리하고 있으니. 계속해서 새로 쓰여지는 역사. 그리고 새로 쓰인지 불과 1년도 채 안 돼 다시 쓰여진 역사. 바타클랑, 크리옹, 콩투아 볼테르 같은 이름과 더불어.

이렇게 오래 살고 구석구석 안 다닌 데가 없어도 아직껏 "파리지엔느"라 자칭하자면 머뭇거리게 된다. 이 도시에 대한 애정에서만큼은, 이 도시가 일군 역사와 예술과 학문과 삶의 양식 및 태도에 대해서도 그렇고,  뭇 파리지앵 못지 지지 않을 자신이 있건만, "토착민"들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하고 은밀한 경계심, 거기에서 느껴지는 소외감과 위축감, 이런 것들은 참 아무리 오래 살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이는 파리의 문제라기보단 내 문제에 기인한 바 크겠다. 어디 파리에서뿐이겠는가. 타자의식과 주변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익숙한 것이었다. 심지어 나고 자란 땅에서도 그리했으니, 어딜 가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일 터.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거기에 파리가 갖는 특수성이 있다. 고향에 왔는데 모든 것이 낯선 기분, 익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낯섦, Unheimlichkeit를 느끼게 해주는 도시로 파리만한 한 데가 또 있을까. 물론 파리가 내게 주는 정서는 프로이트가 이탈리아 어느 도시에서 느낀 것과 달라도 한참 다를 것이다. 20~30년대 헤밍웨이나 피츠제럴드 같은 "파리의 미국인"들이 느낀 것과도 다르고. 나름 파리지앵인 한 친구는 내게 말했었다. 너나 나 같은 외계인이 살기에 파리만큼 적당한 도시가 없다고. 크리스테바의 말마따나 "프랑스만큼 외국인이 철저한 이방인으로 머물 수 있는 곳도 없다"(« nulle part on n’est plus étranger qu’en France », Etrangers à nous-même, 1988)면, 그러한 프랑스의 중심은 단연 파리가 아니겠는가. 실제로, 동양인 여성이라는 영원한 타자로서 수많은 익명적 군중의 하나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특권이다. 타자에게 대체로 개방적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자"(요새는 "관광객")로서일 뿐, "동일자"로의 진입에 있어서는 사뭇 폐쇄적인 프랑스 공화국에서, 파리의 그 수많은 좁은 길들--오, 내가 더없이 사랑하는--, 그리고 그 길들을 가득 채운 군중의 물결은 이방인에게는 공화국의 저 신성한 "공적 공간" 내부에 놓인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이자 은신처다. 어쩔 수 없이 소외감이 든다 해도 그것이 실존적 위협이 되지는 않고, 오히려 그 위치를 생산적으로 이용해서, 이를테면 벤야민의 산보객처럼, 성찰적이고 비판적 사유를 가능케 하는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조건을 이 도시는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번 테러 사건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충격을 안겼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익명적 군중을 향한 무차별적 공격이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나일 수 있었다(Ça aurait pu être moi)"라는 말로 집약되는. 파리가 익명적 개인에게 제공해 온 군중 내의 그 아늑한 은신처가 위협당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야말로 이 "초현실적 상황"은 출신, 종교, 계급 등등의 갈등과 현실 사회의 모순이 무화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낳았다. 모두가 잠정적 공격의 대상일 가능성,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공포, 폭력에 대한 분노 앞에서 평등해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물론, 파리. 우리가 좋아하는 파리. 그리하여 모두가 파리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도 이제, 이제서야 비로소, "파리지엔느"임을 자각하고 또 자부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일요일, 꽃과 등을 들고 길을 나섰다. 지난번 샤를리 추모집회 때처럼 혼자서. 마침 집에 있는 소국 화분에 꽃이 피어 몇 송이를 따다가 조그만 부케를 만들 수 있었다. 가는 길에 초도 샀다. 그리고는 바스티유로 갔다. 원래는 리샤르 르누아르 가를 지나 바타클랑까지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가는 길목 어딘가 초와 꽃과 쪽지가 소규모로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희생자 중 누군가의 흔적이 얽힌 곳일까. 그건 그리 중요치 않았다. 거기에다 꽃을 놓고 초에 불을 붙였다.

속(俗) 가족, 한없이 성스러운 Une famille profane, pourtant sainte

버스 정류장. 그 옆에 오도카니 떨어져 있는 공중벤치. 여자는 벤치에 앉았고 남자는 서 있다. 여자는 여자가 몸을 숙이고 남자 바지 뒤춤을 봐주고 있다. 바지 끝자락이 길어 신발 뒤로 내려와 밟혔는지 여자에게 걷어달라 한 모양이다. 아니 자기는 손이 없나, 애도 아니고, 저런 건장한 풍채의 사나이가, 하고 속으로 흉을 보다, 그의 우람한 어깨에 드리워진 멜빵에 시선이 갔는데, 아, 순간 더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그 남자는 아기를 앞으로 둘러메고 있었던 것이다. 오른쪽 팔에는 코끼리가 그려진 기저귀 가방을 멘 채로. 그래서 제 스스로 바지 뒷단을 손볼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더운 날에. 그러다 기저귀 가방을 걸친 팔에 시선이 이동하게 되었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역시나 단단해 보이는 팔뚝은 온갖 종류의 문신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팔 전체가 시퍼렇게 보일 정도로. 파르라니 깎은 머리는 또 어떤가.

바지춤이 정리가 되자 아기와 오롯이 남겨진 남자. 그러자 그는 그 문신으로 빼곡한 양팔로 아기 어깨를 감싸쥐고는 아이와 둘만의 대화를 시작한다. 한없이 익살스럽고 다정스럽고 온화한 표정으로. 아기가 사랑스러워서 못견디겠는, 그리고 행복에 겨운 것이 멀찍이 떨어진 내게도 확연히 느껴진다.

사실 남자는 그냥 봤더라면 스킨헤드와 문신 때문에 나로서는 사실 좀 무섭고, 더구나 아이들이 보면 더더욱 무서워할 것 같은 외모. 그런 외모의 소유자가 아기를 업느라 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나머지 동반자에게 아이같이 의존해야 하는 상황, 이것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아이러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판 성(聖)가족, 아니 (세)속(俗)가족의 초상이기도 하다. 아기 예수를 몸소 업고 어르고 달래는 요셉과 육아의 짐을 덜은 대신에 "가장"의 몫을 대신하거나 최소한 공유하는 마리아. 백년 전, 아니 한 오십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낡고 고정된 성역할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상당수의 사회에서는 여전히 상상가능은 해도 실제로 보기는 드문 장면일 것이다. 이런 장면이 상상가능하고 또 실제로 실현가능한 시대와 공간에 사는 것이 참 다행스러운, 그리고 어쩌면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거기에 어쩔 수 없는 박탈감과 자조감이 동반되는 것이 사실이긴 해도.

이게 다 볼테르와 루소 탓

집중력, 이해력, 논리력, 한 마디로 지적 능력 일반의 감퇴. 대신에 감성적인 것에 대한 감응력은 인플레이션 단계. 그러나 이 부문의 성장은 그저 상대적일 뿐이다. 즉 지성의 자리를 감성이 대신하게 된 것일 뿐이다. 에너지 보존 법칙과의 유비로 이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 정신 능력의 총량이 일정하다면 지적 능력의 부분이 감성적 능력으로 변환한 것이다... 총량이 일정하다는 전제 하에. 그리고 감성에 있어 "능력"을 논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그렇다고 미적 판단력이 나아졌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판단력 일반은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나 능력으로서의 취미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계발되었다 볼 수 있겠다. 특히 청각과 미각에 관한 한.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순간적인데, 특히 청각과 미각이 그렇다. 덧없는 것들. 그렇다고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의미가 있는 것들인데. 단지 순간적으로만 현전함으로써 오히려 영원할 수 있는. 아니면 이렇게 말해보자. 다른 종류의 시간성을 지녔다고. 측정가능한 물리적 시간과도 다르고,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넘어서 있는, 즉 탈시간적(atemporel)인 논리 및 이데아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닌. 심리적 시간? 아니면, 아인슈타인이 베르그손을 겨냥해서 말한, "물리학자의 시간"과 구분되는, "철학자"의 시간? 프루스트의 마들렌느와 성당 종소리, 기차소리, 스푼으로 찻잔을 두드리는 소리, 뱅퇴이 소나타 등등의 시간. 흔히 베르그손의 지속과 비교되는 그 시간 말이다. 그 유명한 커피 속 설탕의 시간. 커피에 설탕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프루스트나 베르그손에게 특권적인 예가 청각과 미각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생각보다 크다. 영화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다는 사실도. 왜? 로고스가, 즉 언어가, 즉 이성이 개입하므로. 베르그손에게는 지성. 베르그손은 아예 지성을 영화적이라 특징 짓는다. 끊임없이 생성하고 유동하는 실재-지속을 지성화하고 박제화하는 것이 바로 로고스-이성이다. 

이게 다 지난 12년 간의 감성교육 탓이다. 데카르트적 합리주의 및 계몽주의의 현현인 동시에, 그것이 그에 대한 반작용인 낭만주의의 계보와 늘 긴장 관계를 유지해 온 나라에서 오래 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게 다 볼테르와 루소 탓*이다.


*« On est laid à Nanterre,
C'est la faute à Voltaire,
et bête à Palaiseau,
C'est la faute à Rousseau.

Je ne suis pas notaire,
C'est la faute à Voltaire,
Je suis petit oiseau,
C'est la faute à Rousseau.

Joie est mon caractère,
C'est la faute à Voltaire,
Misère est mon trousseau
C'est la faute à Rousseau.

Je suis tombé par terre,
C'est la faute à Voltaire,
Le nez dans le ruisseau,
C'est la faute à....  »

Extrait de: Victor Hugo. « Les misérables Tome V. » iBooks.

나도야 샤를리

오후 2시. 일요일 아침 장이 파하는 자리를 지나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한 상인이 상을 거두다 말고 동료에게 "나는 샤를리"를 펼쳐 보인다. 일요일인데 웬일로 역앞 키오스크가 열려있다. 그리고 <리베라시옹> 특별판이 나와 있다. 1면에는 전날 집회에서 한 참여자가 하늘 높이 올려든 "나는 샤를리" 팻말 사진이 전면으로 실려 있다. 주인이 손님에게 말한다. "이럴 때일수록 일해야죠." 주인에게 1유로를 건네고 돌아서는데 벌써부터 특별한 일요일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역 안에서부터 분위기가 심상찮다. 다들 가방도 없이 간편한 차림. 가족 단위도 많다. 사람이 많을 거라, 더구나 레퓌블리크 역을 지나는 이 9호선은 특히 붐빌거라, 예상은 했지만, 서쪽 끝 종점에 가까운 역에서 타서 안전한 자리를 확보하면 동서를 횡단해서 목적지까지 가는 데에는 무리가 없으리라는 판단은 착오였다. 일종의 도착적 효과랄까. 모두가 나와 똑같은 과정의 추론을 거쳐 똑같은 결론에 이르고 이에 따라 행동한 결과, 각각의 행동이 합해진 전체가 개별 수준과는 반대의 결과를 낳은 경우.

얼마 후 도착한 차는 이미 절반이 승객들로 들어차 있다. 포기할까 하다 겨우 들어선다. 다음 역부터는 출구가 반대편에서 열리므로 일단 안심. 그렇게 해서 원하던 "자리"를 잡기는 했지만, 몸을 돌리는 것은 물론이고 아까 사든 <리베라시옹>을 펼쳐서, 아니 접은 상태에서 보기도 어려울 정도다. 그 와중에도 바로 옆자리 승객은 문고판 책을 꺼내들어 읽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주로 동행인과 얘기를 나누거나 가끔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트기도 한다. 옆의 젊은이들이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며 실실 웃다가 말한다. "시덥잖은 농담으로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나이 지긋한 여자분, 쾌활한 말투로 괜찮다고 말하고 이어 묻는다. "그런데 툴루즈에서 왔다고요? 오직 집회 때문에? 거기에서도 하지 않나요?" "그렇죠. 그런데 아무래도 파리만큼의 열기는 없어서요."

평소 같으면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느라 놓쳤을 이런 대화들. 귀를 열어두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반대편을 향한다. 무척 한산하다. 어쩌다 눈에 띄는 사람들은 아마도 틀림없이 관광객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들은 안도와 경이가 뒤섞인 표정으로 이쪽 지하철 안을 바라본다. 9호선은 관광 중심지를 고루 지나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평소에는 관광객 비율이 높은 편. 그런 9호선이 이렇게 "현지인"들로 가득한 광경은 나로서도 실로 경이롭다. 평소에 이렇게 붐비는 지하철을 탔더라면 반대편의 한가한 풍경에 머피의 법칙을 떠올리며 하필 이 시간대에 지하철을 타기로 결심한 스스로를 탓했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쪽에 탄 사실이 뿌듯하다. 그리고 이쪽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 저들이 안타깝다. 저들은 꼭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여 서쪽으로 향하는 차를 타야 했을까. 각자 일정이 있겠지만, 이런 이례적인, 어쩌면 역사에 남을지도 모를 이 순간, 하다못해 구경거리로서도 유례가 없을 이 사건을 눈앞에서 놓치다니, 안타까운 일이지 않은가.

그러다 문득, 내 위치를 생각한다. 이 간신한 자리야말로 그 위치에 대한 강력한 상징이요 은유다. 저쪽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관광객과 이쪽에서 현지인들, 딱 그 사이의 경계인이자 이방인. 비록 최소한 물리적으로는 분명히 이쪽에 속해 있긴 해도, 기껏해야 그 경계에 머물 뿐이고, 경계에 머문다고 해봤자 시선은 여전히 제한돼 있고, 그저 드문드문 들려오는 말들과 이래저래 조합해서 그저 추측하는 정도가 전부. 그렇게 해서 구축한 관점을 통해 창문 바깥 저쪽을 바라본다.

바로 눈앞에 창문이 펼쳐져 있고, 창문 밖 저쪽은 분명히 보일만한 거리임에도, 시선을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사실 저쪽이야말로 내가 "원래" 속해 있었던, 지금도 속해 있어야 할, 아마도 앞으로도 속해 있을 곳. 그러나 이제는 한없이 멀고 낯설게만 보인다. 이쪽에서 인생의 1/3 가량을 이쪽에서 보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네들의 세계관과 삶의 양식 같은 것들을 완전히 체화하고 내면화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무조건적인 동경과 모방의 시기는 지났다. 이쪽에 동화되려는 의지보다는 그보다는 계속해서 나를 내 출신/근본(오리진)인 저쪽으로 귀환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반발심이 컸다. 거기에서 전제되는 선입견, 그에 의존해서 추론을 전개하는 반사적이고 관성적 태도가 싫었다. 나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출신과는 무관한 독립적인 한 인격체이거나 궁극적으로는 세계시민이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는 이쪽에서는 이쪽대로의, 저쪽에서는 저쪽대로의, 이중소외. 그러면서 창없는 모나드에 가까워졌다. 이쪽에 서서 저쪽을 바라본다 해봤자 결국에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자신의 이미지의 투영에 불과한.

역을 하나둘 지날 때마다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사람들이 내리지는 않고 계속 타기만 하는 까닭이다. 독서광 승객도 어느새 책을 내려놓았다. 현재 9호선 승차율이 급격히 상승한 상태이니 승차시 불편하더라도 양해해 달라는 운전사의 안내 방송. 정차할 때마다 입구쪽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고 ("실례합니다. 좀 들어갑시다." "자리 없어요. 다음 차 타세요. 몇 분 뒤면 올 겁니다.") 운전사는 또 안내 방송을 하고 입구에 자리잡은 사람들은 운전사의 방송 내용을 그대로 전한다. 파리 중심가로 접근하면서부터는 지하철공사 직원이 나와 사람들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생라자르를 지나 그랑 불르바르에 가까워지자 다시 방송이 나온다. 레퓌블리크부터 나시옹까지는 안전상의 이유로 역이 폐쇄되었으니 그 전에 내려야 하고, 집회에 가려면 본느누벨 역에서부터 내리기 시작하면 된단다. 내 머릿속 지도상으로 본느누벨에서 레퓌블리크까지는 거리가 상당하지만, "좋은 소식"이라는 예쁜 이름 때문에 좋아하는 역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하여, 내렸으면 싶지만, 반대편 출구까지 돌파구를 만들어서 나갈 자신이 없다. 그런데 마침 이웃 아주머니 중 한 분이 동행에게 숨통을 트기 위해서라도 이번에 내리자는 제안을 해서 옳다구나 한다. 이들이 터놓은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되겠다.

내리니 역사도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지상에 닿는 순간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두근두근하다. 가로수가 보이고, 가로수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이어서, 아, 사람들로 가득 들어찬 거리. 그랑 불르바르, 그 큰 차도를 사람들이 뒤덮고 있다. 그들을 따라 나도 거리로 들어선다. 이제서야 <리베라시옹>을 펼친다. 그리고 1면을 앞세우고 걷기 시작한다. 나도야 샤를리.

2015년 1월 11일 

텍사스 대디

Zoom Japon 이라는 프랑코자포네 월간 소식지가 있다. 한국 혹은 일본 식료품점에 갈 때마다 들고와서 보곤 한다. 프랑스 독자들을 대상으로 일본문화를 불어로 소개하는 기사들이 대부분이고, 비교하자면 비행기 회사에서 만든 사보 혹은 홍보지와 유사하다. 그래도 기획, 편집, 기사의 수준이 상당하여 볼 때마다 감탄한다. 가끔 제법 진지한 주제도 다루어진다. 일본의 역사 인식 문제를 다룬 이번 5월호가 그 예다.

거기에서 다소 충격적이고 희극적인 사실을 발견. "텍사스 대디"라는 미국의 정치평론가. "정치평론가"라기보다 논객이라는 칭호가 더 어울릴 법한 인물. 은퇴 후 정치 및 시사 문제에 대한 지극히 보수적인 논평을 실은 유튭 개인채널로 유명세를 탔다. 그러던 중 2008년, 어업권을 둘러싸고 국제적 분쟁이 벌어졌을 때 일본 고래잡이 어부들을 옹호해서 일부 일본 네티즌들의 호감을 샀고, 이후 "친일파" 성향이 다분한 논평들로 미국보다는 일본에서 더 많은 팬을 거느리기에 이른다. 일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정치와 역사와 사회와 문화 등등을 학습하기 시작한지 불과 몇 년만에 전문가 못잖은 입지를 차지, 식민지 과거사 같은 외교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매우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에 관해 그가 피력한 견해를 도리어 일본의 극보수 네티즌들이 인용할 정도.

내가 본 건 프랑스 기자와의 아주 짧은 인터뷰 하나지만, 인터뷰 하나로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되겠지만... 그 인터뷰가 아주 가관이다. 예를 들어 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그의 입장은 이러하다 : 1965년 한일협정에서 과거사 문제 종결 짓기로 해놓고 남한 정부는 왜 자꾸 번복하느냐, 일본 정부는 군위안부 배상금을 지급했는데 박정희가 이를 받아 남한의 경제 발전을 위해 썼다, 설사 일본군이 강제 연행했다 해도 전쟁중 민간인 성폭행을 방지하기 위해 군부대 옆에 공창을 두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히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강제성이 있었는지의 여부도 불투명하다, 실제로 강제적이었다면 아녀자들이 강제로 끌려가는 동안 한국 남자들은 뭘 하고 있었다는 말이냐, 사실은 자원이었는데 전쟁 이후 후환이 두려워서 강제되었다고 거짓 증언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2차대전 후 독일군과 관계를 맺었던 프랑스 여성들이 어떤 결과를 맞았는지를 생각해 보라... 이 정도 가관이면 다른 글을 본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싶다.

이처럼 근거없는 사실들을 끌어들이거나 사실과 가치 판단을 혼동하는 일이야 흔하지만, 이 경우는, 중립성과 객관성을 표방하거나 하다못해 가장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하겠다. 이 단계에 이르려면 어느 정도의 반성과 문제 자각의 과정이 선행해야 할 것인데, 이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상대방은 전의를 상실하고 만다. 이것이 상대의 전략이고 따라서 거기에 넘어가거나 뒤로 물러서면 안 된다 해도, 안 된다 한들, 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란 말인가, 이렇게 대책없고 대화불가능한 경우에는. 아무리 사료와 증언을 제시해도 음모이론이나 역사조작을 운운하며 믿지 못하겠다는데.

어딜 가나 이런 "*통"은 있게 마련이고, 그 존재가 심정적으로는 한탄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어쩌겠는가, 이들에게도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을. 그래서 이들이 권리를 주장하면 굳이 막지는 않되 그저 귀를 기울이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정작 텍사스 대디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한 외국인의 자국에 대한 시선에 열광하는 일본인들의 태도다. 그가 자국 문제에 관한 전문가인 것도 아니니 한국에서 브루스 커밍스에 주목하는 것과도 다른 양상이다. 외부, 특히 서구 언론의 시선에 대한 관심과 갈증을 사대주의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나 쉽고 환원적이다. 설사 그런 측면이 없지 않을지라도 어쨌든 설명으로는 충분치 않다. 

여전히 쉽고 거칠기는 마찬가지만 일단 떠오르는 설명적 요인들을 열거해 보면 이러하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회학적으로 보자면 인터넷이 등장한 20세기 후반에서 지금의 세기에 고유하게 나타난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미디어의 세계화 및 상대화, 개인화(혹은 민주화?), 그리고/또는 소셜네트워크 환경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확장 등등. 천하의 노암 촘스키도 트위터 없이는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또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세상이니. (사회)심리학적으로 보자면 외부의 시선을 통한 자기 정체성 확인에의 욕구이고, 이는 결국 허약한 자아상의 반영이자 반향이겠다. 아무리 나르시시스트라도, 아니 어쩌면 나르시시스트일수록 더더욱, 타인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는. 타자의 개입은 나의 나에 대한 애정을 중화시키기도 한편으로 객관화하기도 한다.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됐든 조국이 됐든 간에. 

물론 자기애와 조국애라는 두 심적 상태 사이에 필연적 상관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가장 비근하고 극단적인(!) 예가 있다. 바로 나다. 나는 자기애 성향이 무척 강한 사람인 반면, 이른바 "애국심"이라는 개념이 표상하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그것이 갖는 전체주의적 위험을 경계한다... 고 예전에는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고국을 떠나 유목적 삶을 지속하다 보니 생각을 달리하게 된 모양이다. 관념상으로는 여전히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지향하려 애쓰는데도 심정적으로는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불안정한 이주상태가 주는 불안에서 벗어난 토착민의 삶을 꿈꾸다 보니, 토착민 혹은 원주민(autochtone) 특유의 정서, 이를테면 타자에 대한 공포와 경계, 그리고 전통과 소유에 대한 집착 같은 것도 이해가 간다. 우연히 한 세기 이전의 Le temps 이나 Revue scientifique  같은 잡지를 뒤적이다, "동방의 아침 나라" 탐방기를 접한 적이 몇 번 있는데, 그때마다 그 관찰의 소박함에 조소를 금치 못하는 동시에 바로 거기에서 내게 모종의 "민족적 자존심"이 작동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나도 조만간 광신적 민족주의자로 변모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민족적 자존심이란 얼마나 가볍고 알량한가. 저 탐방기가 갖는 하나의 역사적 증언으로서 갖는 무게를 생각하면. 비록 온갖 무지와 몰이해와 턱없는 환상, 요컨대 오리엔탈리즘으로 점철된 시선이었을지언정, 바로 그 시선으로 남겨진 선조들의 삶. 나와 같은 공간을 점유했으되 시간대를 달리했던 그들을, 그들과 공간을 달리 했으되 시간을 공유한 한 이방인을 통해 만난 것이다. 바로 그 이방인의 공간에서, 나 자신 한 이방인으로서. 이것은 얼마나 생생한 역사 교육이고 얼마나 경이로운 시공간적 체험인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의 시간이 흐른 후 텍사스 대디의 인터뷰를 우연히 접할 누군가를 생각한다. 역사의 진보가능성 논제를 최소치만 받아들여 이렇게 말해보자. 그가 사는 시대에는 최소한 광신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비상식이라는 것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길. 내가 그래도 최소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반성은 가능한 시대에 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