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7일 토요일

텍사스 대디

Zoom Japon 이라는 프랑코자포네 월간 소식지가 있다. 한국 혹은 일본 식료품점에 갈 때마다 들고와서 보곤 한다. 프랑스 독자들을 대상으로 일본문화를 불어로 소개하는 기사들이 대부분이고, 비교하자면 비행기 회사에서 만든 사보 혹은 홍보지와 유사하다. 그래도 기획, 편집, 기사의 수준이 상당하여 볼 때마다 감탄한다. 가끔 제법 진지한 주제도 다루어진다. 일본의 역사 인식 문제를 다룬 이번 5월호가 그 예다.

거기에서 다소 충격적이고 희극적인 사실을 발견. "텍사스 대디"라는 미국의 정치평론가. "정치평론가"라기보다 논객이라는 칭호가 더 어울릴 법한 인물. 은퇴 후 정치 및 시사 문제에 대한 지극히 보수적인 논평을 실은 유튭 개인채널로 유명세를 탔다. 그러던 중 2008년, 어업권을 둘러싸고 국제적 분쟁이 벌어졌을 때 일본 고래잡이 어부들을 옹호해서 일부 일본 네티즌들의 호감을 샀고, 이후 "친일파" 성향이 다분한 논평들로 미국보다는 일본에서 더 많은 팬을 거느리기에 이른다. 일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정치와 역사와 사회와 문화 등등을 학습하기 시작한지 불과 몇 년만에 전문가 못잖은 입지를 차지, 식민지 과거사 같은 외교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매우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에 관해 그가 피력한 견해를 도리어 일본의 극보수 네티즌들이 인용할 정도.

내가 본 건 프랑스 기자와의 아주 짧은 인터뷰 하나지만, 인터뷰 하나로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되겠지만... 그 인터뷰가 아주 가관이다. 예를 들어 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그의 입장은 이러하다 : 1965년 한일협정에서 과거사 문제 종결 짓기로 해놓고 남한 정부는 왜 자꾸 번복하느냐, 일본 정부는 군위안부 배상금을 지급했는데 박정희가 이를 받아 남한의 경제 발전을 위해 썼다, 설사 일본군이 강제 연행했다 해도 전쟁중 민간인 성폭행을 방지하기 위해 군부대 옆에 공창을 두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히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강제성이 있었는지의 여부도 불투명하다, 실제로 강제적이었다면 아녀자들이 강제로 끌려가는 동안 한국 남자들은 뭘 하고 있었다는 말이냐, 사실은 자원이었는데 전쟁 이후 후환이 두려워서 강제되었다고 거짓 증언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2차대전 후 독일군과 관계를 맺었던 프랑스 여성들이 어떤 결과를 맞았는지를 생각해 보라... 이 정도 가관이면 다른 글을 본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싶다.

이처럼 근거없는 사실들을 끌어들이거나 사실과 가치 판단을 혼동하는 일이야 흔하지만, 이 경우는, 중립성과 객관성을 표방하거나 하다못해 가장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하겠다. 이 단계에 이르려면 어느 정도의 반성과 문제 자각의 과정이 선행해야 할 것인데, 이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상대방은 전의를 상실하고 만다. 이것이 상대의 전략이고 따라서 거기에 넘어가거나 뒤로 물러서면 안 된다 해도, 안 된다 한들, 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란 말인가, 이렇게 대책없고 대화불가능한 경우에는. 아무리 사료와 증언을 제시해도 음모이론이나 역사조작을 운운하며 믿지 못하겠다는데.

어딜 가나 이런 "*통"은 있게 마련이고, 그 존재가 심정적으로는 한탄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어쩌겠는가, 이들에게도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을. 그래서 이들이 권리를 주장하면 굳이 막지는 않되 그저 귀를 기울이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정작 텍사스 대디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한 외국인의 자국에 대한 시선에 열광하는 일본인들의 태도다. 그가 자국 문제에 관한 전문가인 것도 아니니 한국에서 브루스 커밍스에 주목하는 것과도 다른 양상이다. 외부, 특히 서구 언론의 시선에 대한 관심과 갈증을 사대주의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나 쉽고 환원적이다. 설사 그런 측면이 없지 않을지라도 어쨌든 설명으로는 충분치 않다. 

여전히 쉽고 거칠기는 마찬가지만 일단 떠오르는 설명적 요인들을 열거해 보면 이러하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회학적으로 보자면 인터넷이 등장한 20세기 후반에서 지금의 세기에 고유하게 나타난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미디어의 세계화 및 상대화, 개인화(혹은 민주화?), 그리고/또는 소셜네트워크 환경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확장 등등. 천하의 노암 촘스키도 트위터 없이는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또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세상이니. (사회)심리학적으로 보자면 외부의 시선을 통한 자기 정체성 확인에의 욕구이고, 이는 결국 허약한 자아상의 반영이자 반향이겠다. 아무리 나르시시스트라도, 아니 어쩌면 나르시시스트일수록 더더욱, 타인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는. 타자의 개입은 나의 나에 대한 애정을 중화시키기도 한편으로 객관화하기도 한다.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됐든 조국이 됐든 간에. 

물론 자기애와 조국애라는 두 심적 상태 사이에 필연적 상관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가장 비근하고 극단적인(!) 예가 있다. 바로 나다. 나는 자기애 성향이 무척 강한 사람인 반면, 이른바 "애국심"이라는 개념이 표상하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그것이 갖는 전체주의적 위험을 경계한다... 고 예전에는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고국을 떠나 유목적 삶을 지속하다 보니 생각을 달리하게 된 모양이다. 관념상으로는 여전히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지향하려 애쓰는데도 심정적으로는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불안정한 이주상태가 주는 불안에서 벗어난 토착민의 삶을 꿈꾸다 보니, 토착민 혹은 원주민(autochtone) 특유의 정서, 이를테면 타자에 대한 공포와 경계, 그리고 전통과 소유에 대한 집착 같은 것도 이해가 간다. 우연히 한 세기 이전의 Le temps 이나 Revue scientifique  같은 잡지를 뒤적이다, "동방의 아침 나라" 탐방기를 접한 적이 몇 번 있는데, 그때마다 그 관찰의 소박함에 조소를 금치 못하는 동시에 바로 거기에서 내게 모종의 "민족적 자존심"이 작동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나도 조만간 광신적 민족주의자로 변모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민족적 자존심이란 얼마나 가볍고 알량한가. 저 탐방기가 갖는 하나의 역사적 증언으로서 갖는 무게를 생각하면. 비록 온갖 무지와 몰이해와 턱없는 환상, 요컨대 오리엔탈리즘으로 점철된 시선이었을지언정, 바로 그 시선으로 남겨진 선조들의 삶. 나와 같은 공간을 점유했으되 시간대를 달리했던 그들을, 그들과 공간을 달리 했으되 시간을 공유한 한 이방인을 통해 만난 것이다. 바로 그 이방인의 공간에서, 나 자신 한 이방인으로서. 이것은 얼마나 생생한 역사 교육이고 얼마나 경이로운 시공간적 체험인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의 시간이 흐른 후 텍사스 대디의 인터뷰를 우연히 접할 누군가를 생각한다. 역사의 진보가능성 논제를 최소치만 받아들여 이렇게 말해보자. 그가 사는 시대에는 최소한 광신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비상식이라는 것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길. 내가 그래도 최소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반성은 가능한 시대에 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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