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7일 토요일

기억이 쓸어간 자리

기억이 쓸어간 자리는 요란하다
지나는 자리마다 일제히
가슴에 아문 상처들이 눈을 틔우고
멍울진 상처는 망울을 터뜨린다

기억이 쓸어간 자리는 소란하다
지나는 자리마다 가시가 돋혀
가슴 곳곳을 헤집고 후벼대고
덧난 상처는 흐드러지게 피어오른다

기억이 쓸어간 자리는 심란하다
지나는 자리마다 파문이 일어
가슴은 부끄러움과 후회로 넘실대고
출렁인 상처는 푸르고 깊어진다

기억이 쓸어간 자리는 혼란하다
지나는 자리마다 돌연히
가슴 곳곳을 휩쓸고 지나고 나면
찢긴 상처는 산산조각으로 흩어진다

그러나 기억이 쓸어간 자리는 찬란하다
한번 지난 자리마다 수차례
가슴이 미어지고 사무치고 흔들리고 나면
남겨진 상처는 추억으로 총총히 박힌다

2013년 7월 22일 월요일

10년, 반복과 차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이곳을 강타했다는 혹서가 다시 찾아온 듯하다. 당시에 나는 아직 이곳에 오기 전이었다. 아마도 가을학기 입학이 완전히 확정된 상태는 아니어서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불행히 여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가을이 다 되어서야 이곳에 왔는데,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해 여름의 기록적 더위를 언급하며 내게 운이 좋았다고들 했다.

도착한 것은 9월 말이었다. 모든 게 힘겹고, 지극히 사소하고 소소한 자극에도 실존의 위협을 느끼곤 하는 가운데서도, 파리의 가을은 이를 보상하기에 충분했다. 거리를 걷고 단풍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마침 10월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예외적인 달, 10월이었기에 ("L'octobre, un mois exceptionnel" : 보부아르의 Les belles images 중에서. 오자마자 산 책 중 하나인). 

그러다가 한참 지나서야 다른 계절을 즐기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특히 여름은 작년에서야 비로소 발견한 듯하다. 여전히 불규칙적이기는 할지언정 조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시트로앵 공원, 오퇴이 온실 공원, 시인의 정원 등등의 집 근처뿐 아니라 진출 영역을 넓혀 시외의 불로뉴 숲, 생클루 영지, 생제르맹 섬 등등까지. 작년 이맘 때는 그러다가 우연히 베르사이유에서 파리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투르 드 프랑스의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정확히는 사이클리스트들의 도착을 기다리는, 더 정확히는 그 전의 광고 차량 행렬을 기다리는 군중과 마주쳤다고 해야겠지만. 어제가 샹젤리제에서의 결승선 도착일이었으니 정확히 1년 전의 일이었다. 

10년을 채우지는 말아야지, 했는데, 이제 정말 얼마 안 있으면 10년이다. 이곳서 인생의 사반기가 넘는 세월을 보낸 것이다. 달라지기로 맘 먹었더라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을 시간. 그러나 여전히 같은 문제들을 안고 있고 또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물론 달라진 게 없지는 않을 거다. 그나마 배운 것이 있다면 그 중 하나는 이런 것일 것이다. 반복은 결코 동일한 것들의 그것일 수 없다. 동일성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차이이므로, 이 미세한/미분적 차이들이야말로 칸트가 발견한 "경이로운 초월성의 영역 (domaine prodigieux du transcendantal)"으로서 모든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기능하므로. 단 하루 동안에도 미세한 차이들이 산만큼 쌓일진대, 그게 10년이나 쌓였으면 분명히 내 경험의 지평을 바꿔도 한참 바꿔놓았을 것이다. 강산도 변한다는데 먼지같은 일개 인간이야 오죽할까. 유약하고 나약한 나같은 경우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하나 분명히 변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아래의 글에서도 말한 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는 것. 변했으면 좋겠는 것은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변하고. 그러나 또 한편으로 분명히 변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다리가 부러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아직도 한참은 더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일어나서 걸으라, 그대의 다리는 부러지지 않았으니" : 바흐만의 삽십세 중. 서른 즈음에 몇 번이고 읽었던).

2013년 7월 18일 목요일

변화

살아온 날이 많아질수록, 산 날이 살 날보다 많아질수록, 살면서 이미 적잖이 쌓아놓았다 생각할수록, 변화가 두려워진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긴 싫었는데. 그래봤자 살기는 또 얼마나 살았다고. "쌓아놓은" 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거의 제로에 가깝다. 변화는 물론이요, 모든 걸 초기화하고 새출발한다 해도 크게 손해볼 게 없을 정도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을, 오히려 변화없는 상태를 두려워야 할, 조건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