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25일 화요일

수정, 옥희, 해원, 선희... 홍상수 영화의 여성성과 시간성

홍상수는 제목에 대한 감각, 말하자면 타이틀링 센스가 뛰어난 작가 중 하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생활의 발견>, <북촌방향> 같은 제목들은 친숙하면서도 참신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돼지, 우물, 강원도, 생활 등등의 일상적인 단어들을 차용하되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아라공의 인용이고, 영화 내용과 무관하지만 (반어법이라면 모를까), 바로 저 어구를 제목에 가져다 붙인 감각만큼은 인정할 만하다. 영어제목들도 듣기에 제법 그럴싸하다.

그런 만큼 홍상수 영화에서 제목이 명목상에 지나지는 않으리라 믿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제목에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 그 자체만으로도 작품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하는 대부분, 아니 전부에서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쓰이고 있는 것은 우연일까? 우연이라 하더라도 이는 단순한 수사일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우연에 관해 명시적으로 천착한 <북촌방향> 외에도 작품 세계 전반에 걸쳐 우연을 라이트모티프로 쓰고 있는 작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이 지점에서만큼은 홍상수가 "우연이라 해서 요행한 것은 아니다(Le hasard n'est pas fortuit)"를 좌우명으로 삼은 로메르의 제자임은 확실하다. 우연이고 특별한 법칙이 없다 해서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렇담 저 여성형의 이름들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오! 수정>은 세기말적 퇴폐와 염세와 비관으로 가득했던 90년대 말의 첫 두 작품 이후 2000년대를 연 영화. 돌이켜보면 코미디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던 것이 바로 이 영화에서였던 것 같다. 장르적이라기보다는 정서적인 의미에서의 전환. 냉소와 자기조롱과 희화화로. 그러나 무엇보다 형식적인 면에서. 같은 사건과 역사를 세 인물들의 상이한 시점에서 전개하는 방식의 새로움에 경탄하던 내게 당시 사람들이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들며 그때부터 이미 진부함을 언급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제사 다시 생각해 보면 진부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다중시점이라는 하나의 틀로 다양한 해석가능성을 성급하게 봉합한 비평적 태도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더 주목해서 봐야 했던 것은 이러한 장치를 통해, 그 장치가 비록 진부하긴 했을지언정, 사건들과 시간이 새롭게 짜여지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홍상수 세계에서 이 영화가 하나의 사건이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수정"의 표제 등장에 있지 않았을까. 수정은 처음 두 남자 각각의 버전에서는 그저 새침하고 애태우는 처녀(!)이거나 흔들리는 갈대로 그려지는데, 이 버전들은 결국 마지막 수정 버전에서 최종적으로 종합된다. 그러나 수정은 셋 중 가능한 하나의 버전을 제시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 나아가 이후 역사의 전개에 있어 열쇠를 쥐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었기에. 그녀의 시선에서 사건이 재해석될 때, 아니 사실은 사건의 전말이 밝혀질 때, 우리는 그녀가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고, 아마도 그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부잣집 아들에게 전략적으로 접근했고, 우연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였던 사건이 실은 그녀에 의해 교묘하게 계획된 일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수정의 시선 및 역사 주체로서의 힘은 거의 전적으로 작가에게서 온다. 그녀는 사실 시선의 주체가 아니라, 작가의 대리물, 아니 그마저도 안되는, 여성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체화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뭐 이런 구조야 굳이 이 작품에, 아니 이 작가에게만 해당되겠냐마는... 어쨌든 이런 이유로 영화가 내겐 불편했고, 당시 같이 본 이들에게도 그러했고, 그들과 술 마시며 한탄했다 ("영화가 왜 이리 척척해" 하고 그 낭창한 목소리로 투덜거리던 ㅅ 언니의 기억이 문득). 그리고는 한동안은 홍상수 영화로부터 멀어졌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다시 그의 관객이 되었다. 언젠가부터라 했지만 그 시점은 정확히 꼽을 수 있다. <해변의 여인>부터였다. 작가의 페르소나와 그 남성적이고 독단적인 시선이 영화를 지배하던 경향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진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그래도 좀 생기와 존재이유가 느껴지는 여성 인물의 등장 (고현정). 그때가 홍상수 영화에서도 어떤 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최소한 관객으로서의 내게는 그랬다 (이는 또 로메르적 전환이라고도 하겠다. 실로 로메르에게서도 Contes moraux 연작에서 Comédies et proverbes 연작 사이에 유사한 종류의 전환이 있었다고 나는 본다). 좀더 밀고 나가면 일종의 타자의 발견이자 여성성의 (재)발견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하리니" 식의 무성의하고 무의미한 찬미이거나 변명은 아니고 (그렇다 해도 참기 힘든데 그러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마저도 포기한 것으로 보이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내겐 최악의 홍상수), 실제로 작가에게도 발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점에서 지금까지는 잘 몰랐거나 관심이 없던 신세계를 발견한 자의 경이 같은 것이 적어도 내겐 느껴졌던 것이다. 그 이후로는 영화마다 아주 미세하고 느릿한 변화가 감지되었고(이를테면 엄마라는 존재의 등장 같은 것), 그런 변화들을 추적하는 재미가 붙었다. 같은 이야기의 반복인 듯해도 그 반복의 대상이 동일한 것은 아니어서 겨우 식별가능한 정도의 차이를 담지하고 그러면서 점진적 변화를 이루는 생명체의 성장 및 진화 과정을 참관하는 느낌이랄까. 그러다 보니 홍상수는 신작이 나올 때마다 꼬박 챙겨보는 최근의 거의 유일한 감독이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신작이 나올 때마다 꼬박 챙겨서 개봉하는 유일한 한국 감독이라는 변인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수정 이후 다시 그야말로 타이틀 롤로 등장한 인물은 <옥희의 영화>의 옥희. 이 영화는 내겐 다소 충격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가슴이 찡해져왔던 것이다. 세상에, 홍상수 영화 보며 내가 가슴이 찡해오는 경험을 다 하다니.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옥희의 존재. 아니 옥희라는 행위. 배우이자 행위주체(acteur ou bien même actrice !)로서의. 영화는 이전까지 홍상수 영화에 숱하게 나왔으며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감독/교수/지식인 남성이 아니라 영화과 학생인 옥희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시점이라 하지만 그녀의 시점은 구심점 혹은 초점이라기보다 그녀가 영화 안에서 스스로 만드는 영화, 그리고 삶을 그리는 수많은 가능한 시선이 만나는 교차지점에 가깝다. 그 어느 전지적, 아니 하다못해 우월한 시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심 시선의 해체. 시선의 탈중심화. 이것이 <다른 나라에서>까지 이어진다. 비록 주인공 이름이 제목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구도나 구조 면에서는 옥희의 경우와 유사하다. 역시 영화과 여학생이 구상한 시나리오를 토대로 전개되고 게다가 이 전지적 작가의 역할은 같은 배우(정유미)가 맡았다. 그런데 이 작가의 페르소나는 또 이자벨 위페르가 맡은 프랑스 여성 안느이다. "시간을 때우고자 시나리오를 하나 쓰기로 한다. 주인공은 얼마 전 영화제에서 본 프랑스 여성 감독으로 한다." 이방인 여성의 시선. 그리하여 시점은 단지 한 평면에서 다중화될 뿐 아니라 다(차)원화된다.

그러나 정작 <누구의 딸도 아닌...>과 <우리선희>에서는 다소 주춤한 듯 보인다. 각각의 표제인물 해원과 선희는 사실 옥희보다는 수정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수정만큼 절망적이는 않았던 것은, 해원이나 선희나 수정만큼은 아니어도 어쨌든 꽤나 답답한 상황인데, 그래도 그나마, 어떤 여성적 계기(moment)들이 있어 뭐랄까, 숨통 장치 같은 역할을 해준 때문일 것이다. 제인 버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해원 엄마 역으로 등장한 김자옥. 이 역시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 홍상수 영화에, 윤여정까지야 그렇다 치는데, 김자옥을 보게될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캐나다로 이민 간다는, 최소한 홍상수의 작품 세계에서는 다소 생경한 인물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그녀와 해원이 만든 모녀 관계가 내겐 참 낯설고도 신선했다. 아무리 떨어져 산다 해도 모녀가 어쩜 저렇게 서로를 어쩜 저렇게 남 대하듯 할까. 엄마가 딸한테 "얘, 넌 어쩜 그렇게 예쁘니? 미스코리아 나가보는 건 어떠니?"라질 않나, 딸은 딸대로 "멀어져 가는 엄마의 뒤태가 처녀처럼 날씬했다" 라질 않나. 근데 그래서 오히려 해원이의 해맑은 얼굴이 안돼 보이진 않았는데, 그에 반해 선희에게선 다시 안타까움이. 세 남자에 둘러싸인 선희. 그래도 마지막에 그 세 남자들이 모인 자리. 저마다 선희를 만날 것을 기대하고서. 그러나 선희는 그 자리에 없다. 세 사람과의 관계와 시선에 얽매인 듯하지만 사실 생각보다 그녀는 자유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두 영화를 여성성-시간성을 두 축으로 하는 계보에 포함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최근작 <자유의 언덕>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일단 제목도 그러하고, 어쩌면 오히려 주인공이 시간에 관한 책을 읽으며 시간에 대한 사변을 늘어놓으면서도 가장 탈시간적이고 무시간적인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영화가 위의 시간성-여성성 계보에 속하며 그 정점을 이루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화자 모리는 읽고 있다는 시간에 관한 책에 관해 말한다. "결국 시간은 결국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경험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라는 것은 다 우리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영화는 이 이론에 대한 영화적 고찰이자 어쩌면 입증이다.

일본인 모리가 영어로 쓴 편지를 편지의 수신인인 권이 읽는다. 영화는 바로 권이 편지를 읽는 관점과 순서대로 진행된다. 그런데 권은 중간에 편지를 읽다가 떨어뜨리고 그 뒤로 편지의 순서는 마구 뒤섞이고 이에 따라 영화의 시간적 순서 및 서사도 뒤섞인다. 그에 따라 사건들은 반복해서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화자이자 작자는 이방인 남성 모리이지만 여기에서 서사의 열쇠를 쥔 것은 독자이자 수신인인 권이다.  
 
펠리니의 <사티리콘>도 그러했다. <사티리콘>은 남겨진 중 최고의, 즉 가장 오래된 라틴문학이자 말하자면 사상 최초의 소설인데, 완본은 없고 다만 단편만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남겨진 부분만 보면 이야기가 연결이 전혀 안 되고 뭐가 뭐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아니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포스트모던하다고도 헐 수 있는 것인데. 이를 펠리니는 있는 그대로, 즉 남아있는 판본 그대로 따다가 영화화했고, 그리하여 자연히 영화도 완전히 뒤죽박죽이다 (사실 펠리니의 다른 영화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나). 가장 오래된 예술형식인 문학과 가장 최근에 발명된 형식에 속하는 영화의 조우. 여기에서 양자를 가르는 역사의 차이, 그리고 영화 탄생 후 흐른 120년이라는 시간적 차이는 무화된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영화적 시간, 특히 현대영화에서의 시간, 이미지-시간과 (고전)문학적 혹은 서사적 시간성, 연대기적 시간(chronologie, chronos+logos)이 하나로 합쳐진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영화의 시간은 우리가 경험하는 심리적 시간, 온전히 경험하는 가장 순수 상태의 시간(프루스트), 말하자면 지속에 가깝게 표상된다. 요컨대 베르그손적 의미에서 가장 덜 영화적인(cinématographique) 방식으로. 과장하면 가장 베르그손적으로.

<자유의 언덕>은 결말 또한 충격이었다. 몹시 비현실적이고 더더군다나 홍상수의 세계에선 더더욱 그러한, 그야말로 동화적인 것이었기에. 그야말로 극적으로 해후하여 나란히 언덕길을 걷는 두 사람 뒤로 모리의 내레이션은 거의 "그리고 그들은 결혼하여 아이도 많이 낳아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 수준. 이십년 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하드코어 치정극 결말을 생각해 보면 정말 이것은 혁명적이다. 여성적인 것의 구원? 그보다는 시간의 힘. 

2015년 8월 22일 토요일

틴더 시대의 도서관 쪽지

얼마 전 도서관에 갔다가 집에 와서 짐을 푸는데 쪽지가 하나 떨어졌다. 아무 종이나 찢은 데에 연필로 쓴 쪽지.
Salut ! Je t'ai vu [sic] à la bibliothèque mais je suis trop timide pour venir te parler en face à face. J'ai flashé sur toi comme un radar, tu m'a ébloui comme les étoiles dans le ciel en Atlantique. J'espère te revoir. Je serais là à 10h à la même salle qu'aujourd'hui.
번역하면 "도서관에서 보았다, 너무 수줍어서 면전에서 말을 걸지는 못했다, 레이다처럼 주시했다, 대서양 하늘에 뜬 별처럼 눈이 부셨다, 다시 보고 싶다, 내일 10시에 와있겠다, 다시 보길 바라며..." 그리고 하트. 그리고 이니셜.

근 사십년 만에 처음으로 받아보는 도서관 쪽지. 처음에는 그저 재미있다 생각했다. -- 누군지 몰라도 나보다 스무살은 어릴 텐데. 머리를 잘랐더니 어려 보이나? 대서양 하늘의 별이라니, 이런 표현은 너무 진부하고 고리타분하기도 하고 요새는 거의 안 쓰일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신선하네, 그리고 내가 천문학적 비유에 약한 걸 어떻게 알았지? 등등. 그러다가 회의와 의심의 단계. -- 나한테 쓴 게 맞나? 잘못 넣은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내 옆에 여학생이 하나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 그런데, 그러고 보니, 수신인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 아닌가? 타동사의 복합과거 변형은 목적격 대명사의 성수에 맞춰야 하므로 목적어인 "너"가 나이고 나는 여성이니까 그에 따르면 Je t'ai vu*e*가 되어야 할텐데 Je t'ai vu 라 쓰여있지 않은가. 만약 문법적 오류라면 그것도 좀 실망스러운 일인데. 그러다가 다시 원래의 시선공포증과 병적인 수줍음 모드로 복귀. -- 아니, 그렇담 나를 계속 감시했단 말인가, 그야말로 레이다처럼? 그렇담 내가 앉아서 졸고 있는 것도 다 봤겠네. 내일 열시부터 와있겠다고? 그럼 난 내일은 다른 데로 가야겠네.

그런데 그 이후로, 틴더니 미틱 같은 비교적 건전하고 이미 보편화된 만남 사이트/앱에서부터 최근 에쉴리 매디슨 같은 문제적 경우와 관련한 사태들이 벌어지는 걸 보고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에서의 쪽지 전달이나 하다못해 "시간 있으시면 커피나 한잔", 이 모든 종류의 고전적인 접근은 이른바 "틴더 시대"에 역행하는 반시대적인 행위다. 저 쪽지의 발신인은 아무래도 20-30대 "틴더 세대"가 아닌 그 이전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속한다 해도(하다못해 나처럼 가까스로라도) 시대의 흐름에 맞추지 못하는, 즉 실질적으로는 구세대에 가까운 인물일 것이다. 바로 나처럼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그가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좀 궁금해지기도 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2015년 8월 9일 일요일

노란 장미



몇 년 전 수퍼마켓에서 산 작은 장미 화분. 내 손에 들어온 많은 식물들이 그랬듯이(식물 뿐이랴, 동물을 포함, 거의 모든 생명체들) 얼마 가지 않았는데... 그런 줄 알았는데, 용케 잎과 줄기는 살아남았는데... 그런 줄 알았는데, 그래도 꽃을 피워내기에는 부족한 모양인 줄 알았는데... 그런 줄 알았는데, 꽃이 피었다. 꽃망울이 무척 큰 데다 노랗기까지 하니 해바라기 부럽지 않다. 

노란 장미 하면 단연 <클레브 공작부인>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느무르 백작과의 남모르는 사랑에 애태우는 그녀. 궁중무도회에서도 그저 멀찍이서 바라봐야 하는 안타까운 처지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 꽂힌 노란 장미를 보는 순간 그녀의 안타까움은 보상되고도 남는다. 노랑은 금발인 그녀에게는 금지된 색깔. 금발이나 장미 둘 중 하나가 색이 죽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위해 백작이 대신 단 노란 장미는 그가 그녀에게 보내는, 오로지 그녀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은밀한 마음의 표시였던 것이다. 

다소 잊혀진 편에 속했던 이 작품이 새삼 상기된 일이 비교적 최근에 있었다. 그 계기를 제공한 것은 뜻밖에도 전대통령 사르코지. 참으로 뜻밖이기도 한 것이 사르코지는 프랑스 공화국의 전통이었던 말하자면 지식인 혹은 문인 대통령, 즉 문화 역사 예술 등에 조예가 깊은 역대 대통령의 계보를 깨뜨린 걸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지식인과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의 외면을 받은 걸로도.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인데, 그 내막인 즉슨, 그가 내무부 장관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2006년, 공무원 선발제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프랑스에선 전반적으로 일반 교양(culture générale)에 대한 요구가 지나치다, 아니 공무원 되는데 라파예트 부인 소설이 무슨 소용이냐, 공무원 구두시험에 <클레브 공작부인>을 출제하다니, 이 무슨 새디스틱하고 어리석은 일이냐, 라는 요지의 발언을 해서 엄청난 반발을 샀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지식인 및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감독 크리스토프 오노레는 항의의 표시로 바로 그 <클레브 공작부인>을 각색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덕분에, 역설적으로, 혹은 도착적으로, 이 작품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판매량이 폭증하고 새 판본도 여럿 출판되는 효과가 나왔다고. 내가 이 소설을 읽은 것도 아마 당시의 열풍에 가담하면서였던 것 같다.

"사르코지 효과" 중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례. 당시에는 대학 민영화에 반대하는 대학생 및 연구진들의 장기 파업이 한창이었는데, 소르본느 문과대학 학생들이 집회에 노란 장미를 한 송이씩 들고 나왔던 것이다. <클레브 공작부인>을 읽었거나, 꼭 읽지 않았더라도, 시장논리와 실용노선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론 뿐 아니라 실천까지도 포괄하는 영역이 존재하고 또 필요하다 생각하는 이들 사이의 은밀한 공모의식과 항거의 표시. 이래서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프랑코필로 남을 수밖에 없나 보다, 하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어쨌든 <클레브 공작부인>의 저 노란 장미 에피소드는 내가 참 좋아하는 대목 중 하나다. 얼마 전에 사람들과 모인 자리에서 이 얘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 누군가가 듣더니, 아니 노란 장미와 금발이 무슨 상관이냐,고 물어서, 위에서 말한 이유를 들어 설명을 해야 했는데, 그는 그걸로 그치지 않고, 아니, 그렇다 해도 그건 여주인공 시점에서 너무 자의적이고 과도하게 해석된 거 아니냐, 혼자 '소설 쓴' 거 아니냐(소설 속에서 쓰는 소설이라!), 그냥 우연찮게 장미를 달았고 또 우연찮게 그 장미가 노란색이었던 것일 뿐 아니냐, 고 반문하여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이 냉소적 반응의 주인공에겐 오래 연애했고 또 현재도 한참 진행중인 애인이 있다. 

결국 낭만의 이념을 실현하여 현실화된 낭만을 사는 자에게 낭만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니거나 불필요한 장치인 것인가. 모든 이상-이념들의 속성이란 그런 것인가. 지도원리로서, 아니면 현실화 과정에서 필요한 "사다리"로서 기능하고, 목적이 이루어지면 과감히 그리고 영구히 차버려야 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모든 종류의 이념에 적용되어야 할  결론 : 지나치면 오히려 본말이 전도되어 장애물로 기능한다.

2015년 8월 7일 금요일

지금은 뉴턴을 들이팔 때가 아니다

코이레의 뉴턴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 : 지금 뉴턴을 들이팔 때가 아니다. 

계획대로라면 어제까지만 해도 15장이 채워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혼돈의 상태. 생각은 생각대로, 본문은 본문대로.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서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 그것만 해도 그런데 하루는 꼬박 소일해야 할 것이다. 계획상으로라면 지금은 4장의 첫부분에 매진하고 있어야 하는데. 아침에 나오다가는 그런 생각도 했다. 도서관에서는 채워야 할 내용을 넣는 데에 주력하고, 그러니까 아직 쓰여지지 않은 4장과 6장을, 집에서는 뉴턴, 데카르트, 기타 등등, 이렇게 구분을 해서...? 그러나 지금은 현재 상태 점검도 안 돼있는 상태. 

어제는 무얼 했는가? 아침에는 또 돌발적으로 즉흥적으로 이전에 노트해 두었던 하인츠만의 2012 푸앵카레 100주기 콜로크 발표문을 정리. 푸앵카레 철학 전반에 관한. 관념론자인가 아닌가, 구조실재론자인가 아닌가 등등. 논리주의에 대한 푸앵카레의 반박.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국소적 인식론자. 따라서 구분해서 봐야 한다. 산술에 대해서는 직관주의자가 맞는데, 여기에서 직관은 매우 특수한 의미에서 쓰인다. 일종의 지적 직관. 수학적 귀납법. 그러고 보니 이거 참 재미있는 주제인데. 

여기에서 문득 스치는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 국어 선생이 연역-귀납 추론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p가 1에 대해 성립하고, n에 대해 성립하면 n+1 에 대해서도 성립한다고 했을 때, 나는 손을 들어 그거랑 이른바 경험적 귀납, 즉 어떤 집합 S의 모든 원소 S={s1, s2, s3...}가 모두 P이면 S는 P이다,라 추리하는 건 다른 것 같다, 라고... 정연하게 말하지는 물론 못했고 더구나 왜 그런지는 더더욱 설명하지 못한 채, 그냥 "그건 좀 다른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데서 그쳤는데, 생각해 보면 나는 당시에 무척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푸앵카레-러셀 논쟁의 핵심. 푸앵카레는 여기에서 1에서부터 n이 무한대로까지 가는 모든 경우를 단번에 포착하는 직관의 능력을 보고, 선험적 종합 판단의 전적인 예라 보는 반면, 러셀은 그러니까 수학적 귀납법이란 것은 사실 말이 귀납법이지 이미 대전제에 결론이 주어져 있는 것을 분석해서 나오는 연역의 다른 이름이며 말하자면 각 경우에 대한 소연역을 축약한 것일 뿐이라 본다. 고등학생인 내가 막연하게나마 감지하고 있었던 바는 러셀의 입장이었던 것 같다. 이와는 별개로 수학적 귀납과 경험적 귀납을 구분하는 문제 또한 중요하고, 푸앵카레도 이 차이를 강조한다. 경험적 귀납은 회귀 논리만으로 되는 게 아니고 경험 및 다른 원리, 이를테면 연속성 원리 같은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정확성 면에서 아무래도 떨어지고 등등. 

다시 돌아가서. 공간에 관하여. 아, 공간, 이것이야말로 푸앵카레의 철학소(philosophème)이자 그 철학의 핵심. 구조주의의 근본 문제, 즉 구조 및 구조 내 원소(?)들의 생성과 구조 자체의 보존 간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앞서 말한 회귀에 따라 군(groupe), 일종의 구조를 제공하는 것은 정신. 그렇게 주어지는 군은 무한하다. 그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가 문제. 이 선택에 있어 정신은 경험을 참조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공간이 *생성*된다. 푸앵카레에게서는 이러한 공간의 생성 과정에 대한 기술과 설명이 처음에는 다소 초보적인 수준의 생리-물리학(Fechner 류의) 참조에 머물다가, 갈수록 체계화되고 정교화된다. 그 정점을 이루는 논문이, 루지에 등등이 지적한 바, On the Foundations of Geometry (1898).  간단히 말하면 외부 물체의 운동에 대한 감각 지각을 통해 형성되는 지각 공간, 이것이 가장 원초적인 물리적 공간이다. 어떤 운동은 내 시각과 촉각 지각에 의존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내가 몸을 돌리거나 위치를 바꾸면 원래 상태로 돌릴 수 있다. 즉 위치 변환이 가능하다. 이로부터 무형(amorphe)의 외부 세계는 형태를 갖추고 물리적 공간이 된다. 이런 공간이 절대적 기준점을 가질 리 만무하다. 내 운동은 상대적이다. 상대운동의 원리에서 공간의 상대성 원리로. 그런데 이것과 기하학적 공간은 어떻게 관련을 맺게 되는가? 어떻게 이질적이고 유한하고 비대칭적인 물리적 공간이 무한하고 동질적이고 등방인 기하학적 공간과 동일시되는가? 이 모든 것을 좀더 명료하게 정리해서 상대성이론까지 나아가는 것을 보여야 하는 것이 내 논문 6장의 과제. 하인츠만이 보인 것처럼 문제의 핵심은 상대성원리의 애매성 혹은 이중성. 규약, 즉 선험적 *원리*인 동시에 경험적 *법칙*이기도 하다는 것. 물론 여기에서 푸앵카레적 의미에서 규약 개념을 잘 새겨야 한다. 규약은 원래는 경험적 법칙이다. 물리학에서는. 기하학에서 공리가 규약이라고 할 때는 또 다른 문제. 그러나 그 논리적 성격은 기본적으로 같다. 참 거짓임을 판명할 수 없는 명제, 그저 편리성만을 따질 수 있는 명제라는 것. 편리성의 기준 또한 잘 새겨야 한다. 빛이 직진한다는 명제를 유지하고 그에 의존하는 모든 광학 원리들을 보존하면서 유클리드 평행선 공리를 바꿀 것인가, 아니면 유클리드 기하학은 그대로 두는 대신에 광학을 뜯어 고칠 것인가. 이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답 : 빛이 측지선, 즉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를 따라 이동하는 것은 맞는데, 그 측지선이 직선이란 법은 없고 따라서 "직진"하리란 법은 없다. 곡률을 가진 공간에서 측지선 이동은 굴곡을 함축한다. 푸앵카레의 규약주의는 아인슈타인의 입장과 상충하지 않으며 오히려 포괄한다. 다만 그 기준이 되는 편리성에 대한 이념이 달랐을 뿐. 아인슈타인은 기존의 이론에서부터 기본 개념들을 다 뜯어 고치는 게 더 편리하다고 본 것이고, 푸앵카레는 아무래도 좀더 보수적인 입장에서, 어쩌면 좀더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다 고치는 건 어렵고 다 고치면 기존의 무수한 성과물까지 버려야 하는데, 목욕물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릴 순 없지 않겠는가, 하며 뉴턴 역학과 유클리드 기하학을 보존하자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 간과하지 말하야 할 것은, 하인츠만도 강조하고 있는 바, 편리성이 전체론(holistique)적 입장에서 고려되고 있다는 것. 역학, 물리학, 그리고 기하학을 오가거나 가로지르는. 어찌 보면 국소적 인식론과 모순된다 볼 수도 있겠는데.

쓰다가 또 갑자기 생각나는 것, 맥락을 벗어나긴 하지만 그저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두자. 며칠 전 ㅈ 및 ㅅ 언니와의 토론 중. 모든 지각 및 인식에서 이미지의 근본성에 대한 베르그손의 주장에 대해. 베르그손은 원자나  톰슨의 소용돌이 모델(modèle si cher à Bergson, peut-être même plus qu'à Thomson lui-même ! Même si, apparemment, il n'en parlera plus autant après *Matière et mémoire*) 같은 과학의 개념들이 결국은 이미지로 표상됨을 역설하는데, 이에 대해 나는 그건 개념이고 이미지는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표상이며, 결코 개념에 대해 원초적이고 선험적으로 있거나 심지어 작용하지는 않는다고, 그리고 이미지는 오히려 인식론적 장애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바슐라르를 언급하며 반박했는데, 이에 대해 또 다시 드는 두 가지 생각. 이른바 이론적 존재자(theoritical entity)들. 원자도 원자지만 초끈이나 멀티버스, 그래 우주도 어쩌면, 그런 종류. 이런 것들은 굳이 이미지로 표상되지는 않고 되기 어렵다 하더라도 정신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며 관념과 실재 그 중간 사이의 어떤 것이라는 베르그손이 의미하는 바에서의 이미지의 존재 양태 혹은 존재론적 위치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하나의 생각은 모델. 그러고 보니 모델 이론, 수리논리학적 모델 말고, 보다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기계론의 당구공 모델이나 우주 팽창의 건포도빵 은유등은 베르그손의 입장과 통하는 바가 있겠다는 생각이. 그러나, 계속해서 ㅈ과 ㅅ 언니가 내게 지적하는 것처럼, 베르그손이 이미지과 지각의 근본성을 주장할 때 그 주장이 인식론적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인 것이라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 누구도 원자가 *실제로* 당구공 같은 것이고 우주가 *건포도빵*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인데.   

이렇게 오만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니 그 중에서 쓸 만한 걸 솎아내서 다듬고 논증, 무엇보다 논증을 하는 게 쉽지 않은 것이다. 

나는 어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인츠만을 정리하고서 다른 노트들을 보다가, 아마도 같은 콜로크에서의 자크 라스카르의 발표 기록으로 넘어갔었나 보다. 태양계 안정성 문제. 그는 그가 으레히 하듯, 최소한 지금까지 여러 번 그랬듯, 역사적 고찰에서부터 출발했다. 그가 이미 다른 논문에서 다루었던 바라 노트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고 그냥 발표를 따라가던 중, 그래도 메모할 만한 것이라 판단했는지 기록한 것이 하나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발표자가 뉴턴을 인용하는 부분이었다. 태양계의 안정성이라는 문제가 처음 문제로서 설정된 순간. 그런데 그게 내가 주로 참고하던 <프린키피아>의 최종 주석이 아니라 <광학>의 "문제들"에서 나온 것이어서 나중에 찾아봐야겠단 심산으로 적어둔 모양인데... 그 '나중'이 거의 3년이 지난 지금이 될 줄이야. "이 책의 결론을 대신하는 질문들"이라는 제하의 가장 마지막 장. 논문에서 "문제" 개념을 "문제삼고" 있고 그 때문에 여전히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나로서는 흥미롭지 않을 수 없는 대목. 그 내용 또한 몹시 흥미롭다.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최초의 원인은 역학적인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신이다.  다른 종류의 세계의 기원을 찾는 일은 반철학적(unphilosophical)이다. 혼돈으로부터 오로지 법칙만으로 이 세계의 질서와 조화가 나왔다고 본 데카르트 기계론도 뉴턴이 보기에 반철학적이기는 마찬가지. 

그렇게 해서 나는 또 뉴턴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확실히 지금은 뉴턴을 들이팔 때가 아니긴 하다. 그러나... "If not now then when / If now today then" (Tracy Chap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