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5일 금요일

Fell in Love with My Parents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 부모님과!

부모님의 결혼 45주년에 부쳐


귀국 후 4년 남짓한 시간의 대부분을 부모님과 보냈다. 타지에서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생활을 오래 지속해 오다 고향 서울로 돌아와 말 그대로 “이동의 자유”를 얻었건만, 이 자유를 만끽하자니 또 사정이 여의치 않고, 오랜 독신 생활에 지쳐 이제는 혼자 노는 일을 더 이상 예전처럼 좋아하지 않게 되었으나 불행히도 같이 놀아줄 사람이 없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내게 손을 내밀어 주신 것은 부모님이 거의 유일했던 것이다. 때로는 사위는 언제 데려올 거냐고 혀를 끌끌 차시거나 당신들과 노느라 사람을 못 만나는 게 아니냐고 안타까워도 하셨지만. 부모님이 아니면 놀아줄 친구도 없고 “사위”는 더더욱 찾기가 불가능한 것이 또한 현실이었으니. 

하여간 그렇게 해서 우리 셋은 여느 젊은 연인들이나 친구들 부럽지 않게 서울, 그리고 때로는 춘천의 곳곳을 누비고 맛집을 찾아 다녔다. 

같이 다니면 두 분이 앞서고 나는 뒤쳐지는 일이 잦다 (또 다른 에우뤼디케 상황? 에우리디케 상황은 나의 운명인 것인가?) 그렇게 두 분을 따라 갈 때면 어릴 적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던 기억을 떠올린다. 

동생과 뒷좌석에 앉은 나는 잎좌석의 두 분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늘 긴장하곤 했다. 다른 부부도 그리 다르지는 않거나 부모님이 유난한 사례는 아니라 생각되지만 두 분은 자주 다투는 편이었다. 특히 할머니댁이나 외가로 향하는 길이면 영락 없었다. 

다행히도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건축공학과 출신 엔지니어인 아빠와 가정관리학과 출신으로 인테리어를 공부하고 싶어했지만 결국 전공에 충실(?)하게 남은 엄마의 공통 관심사는 건축이었다. 아빠야 전공이니 그렇다 치지만 엄마도 못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지나가다 특기할 만한 건축물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마리오 보타, 페이, 가우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코르뷔지에, 김수근, 김석철, 김중업 (아래 사진의 붉은 벽돌 건물은 얼마 전 연희동을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한 김중업 작품이다) 등 유명한 건축가 이름도 자주 오르내렸다. 

두 분의 대화가 이런 식으로 흐를 때면 나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우선은 분쟁이 아니라는 사실에 긴장을 풀고 안도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런 대화를 나누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하고 뿌듯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부모님은 전부터 나의 자랑이었다. 부모님이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이상으로 나는 부모님이 자랑스러웠다. 독립 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을 하시거나, 부나 명예나 권력 등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시거나, 세속적 기준에서 “성공”을 하신 건 아니다. 만약 그러셨더라도 그걸 그리 자랑스런 일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내게 자랑스러웠던 것은 부모님의 젊은 감각과 풍부한 교양과 넘치는 활력이었다. 그리고 두 분 사이의 금실. 가끔, 아니 자주, 아슬아슬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유지되어 왔다. 무려 45년 동안이나.

그런 두 분과 15년을 떨어져 지낸 뒤 다시 같이 살게 된지 4년. 그 사이에 두 분은 연로해지고, 나는 나대로 중년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렇지만 내게 두 분은 여전히 자랑스럽다. 그런데 이제는 그저 자랑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다. 자랑스러움을 넘어서 한없이 사랑스럽다.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보며 타박하기는 해도 실은 그마저도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커플의 삶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은 물론이다.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두 분은 “커플룩” 차림일 때가 많다. 주로 아빠가 엄마 옷차림을 보고 그에 맞춰 입으시는 편. 엄마는 질색을 하고 심지어 외출 직전에 옷을 갈아 입으시기도 한다. 그래도 체구가 작은 두 노인이 옷을 맞춰 입고 나란히 걷는 뒷모습을 보면서 그야말로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장면이란 생각을 한다. 오래도록, 언제까지나 보고 싶은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