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30일 금요일

발자국




선명하게 찍혔다가도 바로 지워지고 또 다른 이의 것과 뒤섞여 구분되지 않고 그러다 또 새로 나고 그리고 나서 또 새로 지워질진대, 어찌 지나온 것에 매이고 또 새로 만들어갈 것을 두려워 하랴.

-- 서울 종로구, 2018년 11월 첫눈 오던 날






2018년 11월 26일 월요일

보티첼리 비너스와 카카오 어피치


- ㅁ 에게

기억하는지? 2012년 너랑 같이 피렌체에 갔을 때였어. 휴대용 클리넥스를 네가 내게 사주었어.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새겨진. 내가 이걸로 코를 풀지는 못하겠다고 하니 네가 그랬어. 심사 받는 날까지 아껴 두었다가 끝난 후 감격의 눈물을 닦으라고. 그때만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루어질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6년도 훨씬 넘게 걸릴 줄이야. 

그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러 번 꺼내 봤어. 그때마다 생각했어. 빨리 감격의 눈물을 그 휴지로 닦을 날이 왔으면 하는 희망, 아니, 단지 왔으면 하는 희망과 기대에 머물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오도록 해야겠다는 의지를 되새기곤 했지. 그래서 작년 겨울 짐 정리해서 귀국할 때도 잊지 않고 챙겨 왔고, 또 지난 초여름에 파리로 다시 갈 때도 챙겨갔어. 이걸 이번 여름에 쓸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정작 심사장에는 잊고 갔지 뭐야? 고대하던 그 순간을 놓쳤단 사실을 나중에 알고는 얼마나 애석했는지. 

사실 이제 그 휴지는 원래의 기능을 잃어버렸을 가능성이 커. 이후 이걸 어쩌면 좋을까 볼 때마다 고민했어. 그러다가, 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널 보러 춘천에 오면서 가방에 넣어 가지고 왔어. 적절한 활용 방안에 대해 너와 얘기해 보고도 싶었겠지.

그러다가 마지막날인 오늘, 들고 다니던 휴지가 똑 떨어졌어.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콧물을 자주 흘려서 휴지나 손수건 없이는 외출하지 못하는지라 곤란하던 차, 네가 내어준 방에 놓인 휴대용/여행용 휴지가 눈에 들어왔어. 네 동생이나 조카가 두고 갔겠지, 아마도? 카카오 프렌즈의 어피치가 그려져 있는. 불현듯, 역시 왠지는 모르겠지만,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카카오 어피치 사이의 교환이라, 기발하고 재미있는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어. 

어떻게 사소한 과거 사실들을 그렇게 잘 기억하느냐고 너는 물었지. 사실 내가 그럴 수 있는 건 결코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야. 미래에 대한 불투명하고 암울한 전망이나 무겁기만 한 현재 상태를 직시하기보다는 안온한 과거로 회귀, 아니 도피하려 하기 때문이야.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었든 아니면 불운 혹은 행운이 겹쳤기 때문이든 간에, 주어진 매 순간에 충실하게 임하다 보니 지금의 네가 되었더란 네 말이 특히 큰 울림으로 다가왔어.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느 철학자의 말보다도.

이렇게, 피렌체에서 파리, 그리고 춘천까지의 긴 여정을 함께 하면서, 인생에서 가장 음울한 시기를 보내던 나를 지켜본, 그리고 어쩌면 지켜준, 그 휴지(!)를 네게 남긴다. 지켜보거나 지켜줄 그 어느 존재 없이 혼자서 너무도 많은 걸 잘 해왔던 너란 걸 알지만, 그와는 별개로, 네가 지켜보고 또 지켜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만큼 네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기억했으면 하는 내 작은 소망을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