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2일 금요일

좋아요

그는 자꾸만 물었다. "좋아요?" 그럴 때마다 에스엔에스가 언어 현상, 나아가 의식 전반에 끼친 영향에 대해 생각했다. 실명을 건다고는 하지만 워낙 규모가 크고 다중이 참여하는 까닭에 역설적으로 익명성이 보장되는 가상 공간의 언어가 이렇게 가장 내밀한 대화에까지 파고드는 순간. 

거기에 아니라 답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나는 마치 그런 법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답하곤 했다. "좋아요." 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저 상대방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거나 메아리로 되돌렸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좋아요? 좋아요. 질문도 바보 같지만, 답은 더 바보 같은데,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답이라 생각하면 더더욱 맥이 빠지곤 했다. 질문을 던진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건대 그것은 딱히 다른 한 말이 없으니 유일하게 가능한 질문, 아니 말이었겠고, 일단 그런 생각이 든 상태에서 답을 하자니 더더욱 맥이 빠졌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나 역시 상대방에게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었겠으나, 또다시 의미 없는 "좋아요"의 연쇄로 그 바보 같고 맥 빠진 질문과 답변이 이어질 것이 두려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진짜로 답에 조금만 관심이 있고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최소한 이렇게 되묻지 않았겠는가. 어디가 어떻게 무엇이 왜 얼마나 좋은가 하고.

이 정도면 별점 체제는 양반이다. 세상의 모든 가치 판단과 미적 평가가 이토록 단순한 좋다/싫다는 이분법적 잣대로 귀결된다. 단순하기도 하고 원초적이기도 하다. 좋으면 웃고 싫으면 우는 신생아의 감정 표현. 가장 근본에 가까운 정서라고도 하겠다. 스피노자의 감응론도 결국은 이에 가깝다. 제법 복잡미묘해 보이는 정서들도 결국은 내 존재 역량을 상승시키는 정서와 하강시키는 정서, 이 둘의 변용에 불과하다. 거꾸로는 온갖 종류의 복잡다단하고 미묘하지만 분명한 차이를 갖는 것으로 여겨지는, 오욕칠정은 물론이요 그를 넘어 화, 울화, 분노, 한, 원한 등등 세밀화하자면 정말이지 무한히 가능할 모든 인간의 정서가 고도로 농축된 표현이 바로 "좋아요" 혹은 "싫어요"라 보는 것도 가능하겠다. 

말로는 이렇게 하지만 나도 요새는 이모티콘과 초성체를 자주 쓴다. ㅎㅎ ㅋㅋ ㅇㅇ ㅜㅜ 등등. 그런데 ㅎㅎ와 ㅎㅎㅎ 사이에 또 미묘한 차이가 느껴지는 까닭에 늘 ㅎㅎ와 ㅎㅎㅎ 중 어느 것을 쓸 것인가 고민하곤 한다. 이모티콘 또한. 씨익 하는 웃음인 😏 이나 유쾌하고 화통한 웃음인 😁, 그리고 약간 부끄러운 듯 뺨을 붉힌 웃음인 ☺️ 의 차이. 어쩌면 감정에 관한 한 이모티콘이야말로 그 어느 언어보다 더 직접적이고 확실하며 무엇보다 접근 가능하며 심지어 보편적인 표현을 가능케 하는지도 모르겠다. 괜히 emotion+icon 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좋아요"와 "I like"와 "J'aime" 가 치켜든 엄지손가락 형상의 기호인  👍 아래에 통일되는, 이것이야말로 보편 언어 이념의 실현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지 않는가. 여전히 모국어와 제2 언어 양쪽과의 불화와 소외, 그로 인한 분열로부터 헤어날 길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러한 원초적 언어의 부흥은 해방구이자 편법의 수단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남용은 해로울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