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꾸만 물었다. "좋아요?" 그럴 때마다 에스엔에스가 언어 현상, 나아가 의식 전반에 끼친 영향에 대해 생각했다. 실명을 건다고는 하지만 워낙 규모가 크고 다중이 참여하는 까닭에 역설적으로 익명성이 보장되는 가상 공간의 언어가 이렇게 가장 내밀한 대화에까지 파고드는 순간.
거기에 아니라 답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나는 마치 그런 법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답하곤 했다. "좋아요." 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저 상대방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거나 메아리로 되돌렸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좋아요? 좋아요. 질문도 바보 같지만, 답은 더 바보 같은데,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답이라 생각하면 더더욱 맥이 빠지곤 했다. 질문을 던진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건대 그것은 딱히 다른 한 말이 없으니 유일하게 가능한 질문, 아니 말이었겠고, 일단 그런 생각이 든 상태에서 답을 하자니 더더욱 맥이 빠졌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나 역시 상대방에게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었겠으나, 또다시 의미 없는 "좋아요"의 연쇄로 그 바보 같고 맥 빠진 질문과 답변이 이어질 것이 두려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진짜로 답에 조금만 관심이 있고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최소한 이렇게 되묻지 않았겠는가. 어디가 어떻게 무엇이 왜 얼마나 좋은가 하고.
이 정도면 별점 체제는 양반이다. 세상의 모든 가치 판단과 미적 평가가 이토록 단순한 좋다/싫다는 이분법적 잣대로 귀결된다. 단순하기도 하고 원초적이기도 하다. 좋으면 웃고 싫으면 우는 신생아의 감정 표현. 가장 근본에 가까운 정서라고도 하겠다. 스피노자의 감응론도 결국은 이에 가깝다. 제법 복잡미묘해 보이는 정서들도 결국은 내 존재 역량을 상승시키는 정서와 하강시키는 정서, 이 둘의 변용에 불과하다. 거꾸로는 온갖 종류의 복잡다단하고 미묘하지만 분명한 차이를 갖는 것으로 여겨지는, 오욕칠정은 물론이요 그를 넘어 화, 울화, 분노, 한, 원한 등등 세밀화하자면 정말이지 무한히 가능할 모든 인간의 정서가 고도로 농축된 표현이 바로 "좋아요" 혹은 "싫어요"라 보는 것도 가능하겠다.
말로는 이렇게 하지만 나도 요새는 이모티콘과 초성체를 자주 쓴다. ㅎㅎ ㅋㅋ ㅇㅇ ㅜㅜ 등등. 그런데 ㅎㅎ와 ㅎㅎㅎ 사이에 또 미묘한 차이가 느껴지는 까닭에 늘 ㅎㅎ와 ㅎㅎㅎ 중 어느 것을 쓸 것인가 고민하곤 한다. 이모티콘 또한. 씨익 하는 웃음인 😏 이나 유쾌하고 화통한 웃음인 😁, 그리고 약간 부끄러운 듯 뺨을 붉힌 웃음인 ☺️ 의 차이. 어쩌면 감정에 관한 한 이모티콘이야말로 그 어느 언어보다 더 직접적이고 확실하며 무엇보다 접근 가능하며 심지어 보편적인 표현을 가능케 하는지도 모르겠다. 괜히 emotion+icon 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좋아요"와 "I like"와 "J'aime" 가 치켜든 엄지손가락 형상의 기호인 👍 아래에 통일되는, 이것이야말로 보편 언어 이념의 실현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지 않는가. 여전히 모국어와 제2 언어 양쪽과의 불화와 소외, 그로 인한 분열로부터 헤어날 길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러한 원초적 언어의 부흥은 해방구이자 편법의 수단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남용은 해로울 터다.
"예술작품으로서의 제목"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쓰던 ㅅ. 그에게 "제목이 소재나 주제나 형식이나 질료 등등과 마찬가지로 한 예술작품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라는 주장은 알겠다. 그러나 제목이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의 위상을 갖는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나 <LHOQ> 은 각각이 지시하는 작품이 존재할 때 비로소 '제목'으로서 성립한다. 작품과 독립된 상태에서 그것은 단지 평범한 문장 혹은 단어일 뿐,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다. 제목은 작품과 분리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으나 작품은 제목에 대해 독립적이며 무엇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성을 갖는다. 작품과 제목을 동일시하게 되면 범주적 혼동을 범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라는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불쾌해 했고, 나는 뜻밖의 반응에 몹시 당황했다. 이 말을 그다지 정연하지 않게 해서였을까. 아니면 둘다 불콰한 상태여서였을까. 나중에 그는 피곤하고 지친 상태여서 그랬노라며 사과했는데, 그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이후 경험한 몇 가지 유사한 사례들에 비추어 보자면 나의 토론 태도, 아니 대화상대자로서의 태도 일반에 문제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 당시에는 관심이 있는 주제여서 더 그랬으리라. 어쨌든 그 이후로 ㅅ과는 제법 좋은 관계로 남아 가끔 소식을 주고받곤 했는데, 그러는 동안에 그는 논문을 마쳤고, 좋은 평가를 받아 소속 대학에서 주는 "올해의 논문"상까지 받았다. 물론 같은 주장과 제목으로.
아는 사람은 안다. 내가 제목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그렇다고 제목이 유일한 것은 물론 아니고 수많은 강박의 대상 중 하나라는 것. 그러한 대상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사소하고 부질없는. 그러나 제목에 한해서만큼은 꼭 그렇게 사소하고 부질없기만 한 것도 아닌 것이, 무규칙적이고 감각적/직관적인 글쓰기 스타일상, 그 뒤에 나올 내용 및 본문을 전개하는 데 있어 중요하기도 한 것이 바로 제목 선정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유가 제멋대로 뻗지 않도록 단속하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과정이기도 하고.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본말이 전도되어 제목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기도 한다. 본문을 쓰다가 보면 논의가 처음 생각대로 전개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난관이 심각한 나머지 전면 수정하거나 아예 폐기해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이거늘, 처음의 그 생각, 아니 제목을 버리기 아깝다는 이유 하나로 어떻게든 무리수를 두고 오기를 부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논문도 예외가 아니다. 논문 전체의 제목이야 그렇다 치자. 그리고 각 장과 절에서부터 단락까지 제목을 세세하게 정해두고, 즉 목차를 세세히 짜두고, 그에 맞추어 글을 전개하는 방식이야 오히려 가장 교과서적인, 즉 가장 바람직하고 효율적인, 논문작성법에 가깝다 하겠다. 그러나 그 목차는 어디까지나 지침서로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내용(matière)이 채워지고 완성이 된 후에야 비로소 확정될 목차(table des matières)를 가늠토록 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할 것인데, 내게는 이 예상목차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안에 들어가는 본문의 실질적인 내용은 대부분이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 도무지 꼭 맞지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웠다 다시 쓰고, 이리 넣었다 저리 넣어도 보다가, 그러다 보면 또 내용이 안 맞아서 다시 지우고, 또 쓰고. 몇 년째 같은 상태인 이런 나를 두고 지인이 페넬로페에 비유한 적이 있데, 정말 그렇다. 베를 짜다가 다시 전부 풀었다가 다시 짜고 풀고 하기만 벌써 몇 번째 반복인지. 차이라면 페넬로페의 베짜기 놀이는 끝이 정해져 있지만, 나의 경우는 끝을 내가 내지 않는 한 정말 영원히 무한반복될 위험이 있다는 점.
내게 제목과 목차는 칸트의 초월적 이념과 유사한 일면이 있다. 우주에 관한 그 어느 언명도 이념의 기준에서는 너무 작거나 너무 크다(<순수이성비판>의 초월적 변증론의 이율배반편). 우주에 한계가 있다고 하면 거기에서 설정되는 한계는 내가 가진 우주의 한계에 대한 이념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 시작이 있다고 하면 나는 반드시 그 시작의 이전을, 경계가 있다고 하면 그 경계의 바깥을, 물을 것이다. 반면에 한계가 없고 무한하다고 하면 그것은 무한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영원히 불가해한 영역으로 남는다. 내가 내 경험과 한계에 도무지 맞지 않는 이상을 세우고 그 이상에 내 경험을 꿰맞추려 한다는 사실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 이를 그저 규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칸트는 가르치고 있거늘. 그런데 내 경우에는 이 이념들이 실제로 구성적이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작동한 사실이 있기에 과거와 같은 효과를 기대하는 심정...이라기보다는 그저 습관화되고 체질화된 글쓰기 방식 때문에 제목에 대한 이 교조적이고 독단적인 태도, 말하자면 제목중심주의/만능주의/물신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인데.
지금의 이 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원래는 "제목"이라는 간명한 '제목'을 붙였으나, 불현듯 어릴 적에 읽은 <이 책의 제목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제목'이 떠올라 이를 패러디를 하고픈 의지가 생겼고, 이로써 이 글 또한 저 책에 이은 자기지시, 자기모순의 사례로 추가하고 이 주제에 대해 약술하려던 것이 원래의 의도였으나... 여기에서 멈추도록 한다. 그리하여 이 글이 그야말로 제목과는 무관한 사례로 남는 한이 있더라도.
권연(眷然). 명사. 사모하여 뒤돌아보는 것. 파생어로는 동사 "권연하다"가 있다.
애플에서 제공하는 사전을 찾다 우연히 닿게 된 말. 예뻐서 자꾸 읊조리고 또 뜻을 생각해 보게 되는 말. 불어로는 뭐라 번역하면 좋을까 궁리하다 문득, 혹은 또 다시, 생각난 것이 오르페우스. 그렇담 faire comme Orphée ? 이건 좀 심심하니 좀더 용기를 내서, orphéer 는 어떨까. J'orphée, tu orphées, il/elle orphée, nous orphéons, vous orphéez, ils/elles orphéent...
그런데 그러고 보니 오르페(Orphée)는 푸앵카레(Poincaré)와 각운이 얼추. 이를테면
Arrête avec ton Orphée,
Reprends ton Poincaré !
그건 그런데 권연의 역어는 좀더 생각해 보기로 한다.
수년 전, 영화학 하는 ㅇ 선배가 내게 농담으로 "아인슈타인? 에이젠슈쩨인은 알아도..." 해서 웃은 일이 있다. 한 분야에 오래 있다 보면 이런 직업병 증세야 흔한 일이고, 아니 병적이라 할 것도 없는 것이, 이런 경우를 두고 상아탑이니 우물 안 개구리니 하며 비난하고 스스로도 부끄러워하던 시대는 지났고, 오히려 선택과 집중이야말로 학자로서 가질 의무이자 갖춰야 할 덕목이기도 한 전문화 시대를 살고 있는 걸 생각하면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전공은 뒷전이고 다른 쪽에 곁눈질 하느라 얼마나 나태했고 해이해져 있었는지, 느끼고 뉘우친 계기가 몇 있었으니.
수학철학자 알베르 로트만(Albert Lautman)의 책을 오랜 만에 펼쳤는데, 순간적으로 그 이름이 "로버트 알트만(Robert Altman)"으로 읽히는 것이 아닌가. 사실 알트만은 그리 좋아하는 작가도 아닐 뿐더러 제대로 본 작품도 없는데. 반면 로트만은 워낙 난해해서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나 그래도 동경하는 철학자 중 하난데. 변명을 하자면 이름이 좀 비슷하긴 하다. 여차하면 아나그람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보니 그건 아니겠다. Lau와 Ro 때문에 교환불가능.
벼룩시장에서 광물(심지어 운석 조각도 있었다)과 고고학 유물 같은 것들을 전시해 놓은 노점상을 지나는데, "pointe de flèche"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말뜻을 모르겠어서 같이 있던 ㅇ 언니에게 "flèche"의 뜻을 물었다. "화살. 그러니까 화살촉들이네." 답을 듣는 순간 아찔. 어떻게 그걸 모르고 물어볼 수가. "시간의 화살(flèche du temps)"의 그 "화살"인데 말이다. 당연히 아는 단어였다. 아니 모를 수가 없는, 몰라서는 안 될. 논문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열역학 2원리를 논하는 이상 피해갈 수 없을 뿐더러 그 자체로도 매우 중요한 개념. 물론, 자주 보던, 특히 책에서나 보고 일상적 대화에서는 거의 쓸 일이 없는 이런 개념어들은, 그런 개념어들일수록 더더욱, 다른 맥락에서 접하게 되면 순간 낯설게 느껴질 수는 있다. 그래도 한 개념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다면 그것이 어느 맥락에 놓이든 바로 그 익숙한 의미가 거의 반사적으로 떠오름이 마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만큼 익숙해져 있지 않았다는 얘기다. 반성, 또 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