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서 있었다는 사실을 진작에 깨닫지 못했을까. 뒤를 돌아보지 않은 탓이었다. 어깨 너머로 오싹하게 전해오는 싸늘한 공기를 모른척, 자꾸만 모른척 했기 때문이었다. 자꾸만. 자꾸만. 다 틀렸다.
—박쥐
blogin.com · 2004-06-29
왜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서 있었다는 사실을 진작에 깨닫지 못했을까. 뒤를 돌아보지 않은 탓이었다. 어깨 너머로 오싹하게 전해오는 싸늘한 공기를 모른척, 자꾸만 모른척 했기 때문이었다. 자꾸만. 자꾸만. 다 틀렸다.
—박쥐
blogin.com · 2004-06-22
니체는 "모든 결정적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했던 갈릴레오가 있었기에 근대 과학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여성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도 참정권을 달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세상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아주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연결사는 논리와는 무관하다. 내가 아는 한 그에 해당하는 논리 기호는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들은 대개 그 말이 딛고 있는 체계 내에 설 자리가 없는 종류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체계 내의 다른 문장들과 모순을 이루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체제전복적"이다. 그 효과는 "그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 집합론에 대해 갖는 것만큼이나 강력하다. 그래서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문장이 기성의 체계 혹은 패러다임에 균열을 내는 걸 볼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었다.
그런데 그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의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이라크전은 잘못된 전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병 결정이 철회돼서는 안 된다.
한국인이 인질로 잡혔다는 사실은 무척 가슴이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병은 감행되어야 한다.
그래. 어차피 이 모든 게 논리와는 무관하다. 혹은 ("다수"와 "국익"의 논리에 입각할 때) 논리적으로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다. 혹은 저 전제와 저 결론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정치역학적 전제들이 숨어 있다. 혹은 내 논리 체계와 그들의 논리 체계는 다르다. 혹은 세상이 논리로 다 되는 건 아니다.
이제 와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논리적 부적합성을 지적한다면 분명 그건 자기 모순이 될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만큼은 제발 논리대로 됐으면 좋겠다.
이라크전은 잘못된 전쟁이다.
그러므로 파병 결정은 철회돼야 한다.
한국인이 인질로 잡혔다는 사실은 무척 가슴이 아프다.
그러므로 파병이 감행되어서는 안 된다.
—박쥐
blogin.com · 2004-06-20
오는 6월 25일은 푸코가 죽은 지 꼭 20년이 되는 날. 오늘자 <리베라시옹>은 푸코를 기념하는 특별판을 냈다. 이걸 보고 나는 지난 번의 <리베라시옹> 및 이미지에 대한 폄하 발언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12면에 달하는 특집면 중 한 면 전체를 장식한 저 위의 사진 때문이다.
사진은 80년대 초 푸코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사진 작가이자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였고 또 푸코의 애인이었으며 푸코와 같은 병으로 죽은 에르베 기베르(Hervé Guibert)의 작품이다. 이 사진에서의 푸코는 지금껏 내가 보아 왔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저 엉거주춤한 포즈와 어색한 미소라니. 세상의 모든 권력에 대항해 평생을 바쳐 싸웠던 이 투쟁가-철학자도 자신이 가장 귀애했던 사람의 카메라 앞에서는 저렇게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나 보다.
푸코가 폐부를 찌를 듯한 시선뿐 아니라 저렇게 따뜻하고 애틋한 눈빛의 소유자이기도 했음을 "증명"하는 저 사진은, 내게는 무척이나 값진 소득이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까지, 거리 시위, 강연, 토론 등의 자리에서의, 즉 대중 앞에서의 푸코는 그 얼마나 젊고 아름답고 빛나고 강한 존재였던가. 그런 존재의 가장 내밀한 모습을 보는 일은 늘 야릇한 쾌감을 안겨주게 마련이지만, 이 사진에는 단순히 관음증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을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다.
—박쥐
blogin.com · 2004-06-12
인간적 욕망(Désir)은 동물적 욕망과 다르다. 동물적 욕망은 생명 활동을 하고 생명에 대한 감성만을 지닌 자연적 존재를 이룬다. 반면에 인간적 욕망은 실제의, "구체적인(positif)", 주어진 대상이 아니라 다른 욕망을 향해 있다.
예를 들어 남녀 사이의 욕망은, 육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할 때, 욕망을 욕망으로서, 즉 욕망 자체로서 받아들이고 바로 그 욕망을 "소유"하거나 그 욕망에 "동화"되고자 할 때, 달리 말해 "욕망"되거나 "사랑"받고자 할 때, 또는 현실 속의 한 인간으로서 갖는 자신의 인간적 가치에 따라 "인정"받고자 할 때, 오직 그 때에만 인간적이다.
물론 인간적 욕망이 자연의 대상을 향할 수도 있다. 단 이 때의 욕망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가 욕망하는 것과 동일한 대상을 욕망할 때, 그리하여 바로 그/그녀의 욕망에 의해 "매개"될 때, 오직 그 때에만 인간적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욕망하고 있는 것을, 단지 그들이 욕망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욕망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일이다.
이렇듯,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전적으로 무용한 대상도 욕망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다른 욕망의 대상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망은 오직 인간적 욕망일 수 있을 뿐이며, 동물의 세계(réalité)와는 다른 것으로서의 인간의 현실(réalité)이 탄생할 수 있는 것도 오직 이러한 욕망들을 충족시키는 작용에 의해서다. 결국 인간의 역사는 욕망된 욕망들(Désirs désirés)의 역사인 것이다.
- 알렉상드르 코제브, <헤겔철학입문> 서문 중에서
- <프레시안>' target='_son'>http://www.pressian.com/scr ... �화><프레시안> 기획 연재 "대화" :
고종석과 홍세화의 대담 (2003.6.5)에서
—박쥐
blogin.com · 2004-06-10
1.
지난 6월 6일은 연합군의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한지 60년이 되는 날이었다. 덕분에 독일군의 점령하에 있던 프랑스는 해방을 맞았다.
시라크는 때맞춰 방문한 부시 앞에서 이라크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프랑스의 미국 독립 전쟁 참전과 미국의 연합군 가담이 등가라는 데에 별 무리 없이 합의했다. 각 언론들도 60년전 그날의 이미지를 살포하느라 바쁘다. 전쟁 이미지는 이렇게 해서 또 (재)생산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연합군이라는 거대한 군사 집합체가 해방을 안겨준 일등 공신으로 등극한다(레지스탕의 이미지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이리하여 이러한 공식이 성립된다 : 이러한 전쟁은 전쟁으로 갚아야 한다; 전쟁은 전쟁으로 막아야 한다;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은 필요악이거나 심지어 善이기까지 하다.
2.
"이성이 세상을 다스린다"라는 큰 제목 하에 다섯 개의 연극이 연이어 공연된단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평화>, 셰익스피어의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 하이네 뮐러의 <미션> 등. 전쟁, 평화, 권력이 그 주제다. 이 작품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무엇보다 전체 주제와 제목이 시선을 확 잡아끈다. 이성이 세상을 다스린단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이성이란다.
3.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이성이다", 참으로 헤겔적인 명제다. 경험적으로는 분명 거짓이다. 반례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을 터. 아우슈비츠를 보고도, 9.11을 경험하고도, 이라크전을 지켜 보고도 그런 소릴 할 수가 있나. 지금이 날카로운 지성을 지니고서도 나폴레옹의 진군을 바라보며 역사가 완성됐음을 선언할 수 있었던 19세기도 아니고.
그렇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반박하고 폐기해버릴 만한 것은 아니다. 쉴새없이 "감성"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전쟁의 잔혹성보다는 그 잔혹성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서의 또 다른 전쟁의 정당성을 각인시키는 이미지들을 보면서, 나는 저 소박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따르고 싶어졌다 : 세상을 다스릴 것은, 다스려야 할 것은 이성이다.
4.
바슐라르는 독일 점령기에 죽은 사상가들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점령만 아니었다면 얼마나 많은 훌륭한 사상들이 싹트고 꽃필 수 있었겠냐면서. 어느 정도는 사실이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 아니다. 수학철학자인 장 까바이예스, 그리고 아날 학파를 창시한 것으로 유명한 마르크 블로흐, 이들은 모두 레지스탕으로 일하다가 체포되었고, 해방이 되기 전에 감옥에서 죽었다. 흔히 프랑스 수학철학이 까바이예스를 잃음으로써 "몰락"의 길을 걷게됐다고들 한다. 블로흐의 경우, 감옥에서 쓴 저작들이 그들 사후에 출간돼서 이후 역사학계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쳤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올릴 때마다 "그가 그렇게 죽지만 않았더라면..." 으로 시작되는 조건문을 입에 올리곤 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러한 트라우마가 프랑스의 합리주의를 또 다른 방식으로 뿌리내리게끔 했고, 그것이 오늘의 프랑스 사상을 태동케 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가 철학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 방식 중에는 양립 불가능한 것도 포함된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로 하여금 아우슈비츠 이후 철학의 가능성에 대해 깊이 회의하게 하고 "이성"이 몰락하게 된 원인을 이성의 내부 혹은 이성 자신에서 찾게 했다. 한편으로 1차대전 직후 빈의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이 "위기"를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 이성을 세상에 더욱 공고하게 뿌리내리게 하려는 기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프랑스인들에게 있어 이성은 쉽게 포기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1789년의 혁명으로부터 오늘의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쟁취한 자유와 평등과 인류애는 모두 그들에게 이성이라는 무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성을 구제하는 쪽을 택했고, 그러다가 68년 즈음에 일부는 다른 쪽으로 돌아섰다.
현재 프랑스 내 과학철학/인식론 진영은 대부분 그때 그렇게 돌아서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에게 "이성"은 곧 "과학"이고, 따라서 과학 역시 이성과 마찬가지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과학, 기술, 사회(STS)"를 강의하던 교수는 프랑스 내에서 GMO나 에너지 등에 대한 논의가 생각보다 쉽지 않을 정도로 "과학주의(scientisme)"가 공고히 자리를 잡고 있고, 이 과학주의의 뒤에는 계몽주의의 역사와 그 뒤로 쭉 이어져내려온 "이성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라투르도 비슷한 푸념을 늘어놓았던 걸로 기억되는데, 실제로 나는 라투르가 프랑스 내에서는 거의 "찬밥" 취급을 받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까지 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의 이성에 대한 신념이 결코 프랑스 혁명 당시의 그것처럼 특정 계급이나 성별에 편향된 인간중심주의는 아니라는 점이다. 바슐라르는 "과학 정신"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게끔 방해하는 "장애물"들에, 깡길렘은 인간의 괴물성(monstruosité)에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몰두했다. 물론 각각이 이 "반이성적인" 것들에 부여한 의미나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둘다 그것들을 "이성"의 역사에 포함시키거나 아니면 전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이성의 또 다른 모습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다른 각도에서, 즉 역사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것이다. 내가 그네들의 과학주의에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이들의 이성(Raison)에 대한 믿음에 그럴 만한 이유(raison)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5.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다스려야 할 것은 이성이다. 사실 여기에서의 이성은 참으로 추상적이기 그지 없는 개념이다. 누구나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아무도 이성을 제대로 정의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이 점은 분명하다. 이성은 어느 누구 한 사람에게 속한 것도 아니고 소수의 사람에게 속한 것도 아닌, 모두에게, 각자의 다른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속해 있는 어떤 것이다.
각각의 이성들을 촉발시키기 위해 굳이 새삼스레 참혹한 전쟁 이미지를 들이댈 필요는 없다. 2차 대전 이후, 베트남전 이후, 9.11 이후, 이성은 이미 질릴대로 질려 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때 폭격에 놀라 도망가는 어린 베트남 여자 아이를 찍은 사진 한 장이 반전 운동의 불을 지핀 것은 사실이다. 미선이/효순이의 시신을 담은 사진들이 촛불 시위로 이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성이, 우리 모두의 이성이, 이미 그 전부터 베트남전이나 미군의 주둔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 역시 분명하다.
이미지가 단순히 아이디어나 다른 텍스트보다 못한 재현의 매개체를 넘어 그것들과 분리되기 힘든 엄연한 하나의 독립된 그 어떤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늘 이미지 속에 숨어 있는 논리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이성의 임무다.
6.
나는 슬프다. "HAPPY D-DAY"라는 큼지막한 제호를 단 6월 6일자 <리베라시옹> 특별판을 삼으로써 전쟁 이미지를 소비해 버렸기에. 거기에 내가 기대했던 것은 없었고, 도리어 내 이성이 상처를 입었다. 나는 또 슬프다. <이성이 세계를 다스린다>라는 공연에 가지 못할 것 같기에. 내가 기대하는, 내 이성이 흡족해 할만한 것이 거기에 있을진대.
—박쥐
blogin.com · 2004-06-04
시험 공부를 하던 중, 올해가 푸코가 죽은 지 20년이 되는 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 내가 공부하는 방식은 왜 이다지도 하이퍼텍스트적이란 말인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 깡길렘 → 깡길렘에 관한 푸코의 글 → 푸코 → 푸코에 관한 글들과 웹사이트들. 그러다가 급기야는 푸코에게서 영감을 받은 노래를 발견하는 데에 이르렀다. 미국의 대학 교수들이 모여 만든 아마추어 밴드 The Professors(이름도 참...) 가 부른 "Foucault' target='_son'>http://acjournal.org/holdin ... ult-low.mp3>Foucault Funk: The Michel Foucault Postmodern Blues (low-fi version) "가 그것이다.
사운드는 조악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래도 "인간은 언젠가 바닷가의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지워질 것이다"와 같은 푸코의 명구를 그런 방식으로 듣고 있자니 기분이 다 유쾌해진다. 포스트모더니즘 ABC song 내지는 선전가로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고 말하면 혼나거나 비웃음 당하겠지? 그들은 "예술"을 단지 사상을 선전하거나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걸 계몽적이고 (전)근대적이라며, 달리 말해 촌스럽다며 비웃을 테니까.
한편으로 사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심미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를 최소화해야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같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노래 가사에 "discourse"나 "foundation"이나 "민중"이나 "해방"이 들어가는 노래가 사람 맘을 움직이는 방식과 그 효과는 완곡한 어법으로 표현한 노래의 그것과는 달라진다는 것이다. 존 레논의 "Imagine"과 "Power to the People"의 차이 혹은 "아침 이슬"과 "님을 위한 행진곡"의 차이. 전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그 맥락을 고려했을 때 또 다른 미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경우. 후자는 "美"의 범주 하에서라기보다는 그 외의 맥락 안에서 감상하는 편이 보다 적절한 경우.
어쨌든(아, 하이퍼텍스추얼리티는 내 블로깅의 주된 특성이기도 하다. "어쨌든"이 유난히 많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이 노래는 맥락과 가사를 고려하고 들을 때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종류에 속한다.
Man will be erased
Like a face drawn in sand
Man will be erased
Like a face drawn in sand
Like a face drawn in sand
At the edge of the sea
Do not ask me who I am
Do not ask me to remain the same
Do not ask me who I am
Do not ask me to remain the same
I am not the only one
Who writes to have no face
Discourse is not life
Its time is not your time
Discourse is not life
Its time is not your time
In discourse you have no survival
You only establish your death
바탕을 찾을 수 없어
진리는 더 이상 그 어디에도 없어
바탕을 찾을 수 없어
진리는 더 이상 그 어디에도 없어
난 여러 개의 관점에 사로잡혀 있어
난 이제 똑바로 사고할 수 없어
인간은 지워질 거야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인간은 지워질 거야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바닷가 모래 위의 그림처럼
내가 누구냐고 묻지마
내게 늘 그대로 있으라 하지도 마
내게 누구냐고 묻지마
내게 늘 그대로 있으라 하지도 마
얼굴을 지우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단지 나뿐은 아니니까
말은 삶이 아니야
말에 주어진 시간은 네 것이 아니야
말은 삶이 아니야
말에 주어진 시간은 네 것이 아니야
말 속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어
단지 죽음에 다가갈 수 있을 뿐이야
The Professors, "Foucault' target='_son'>http://acjournal.org/holdin ... ult-low.mp3>Foucault Funk: The Michel
Foucault Postmodern Blues"(full version)
Lyrics by Gary Radford, Marie Radford,
and Michel Foucault
Music by Stephen Cooper and Gary Radford
◈ 출처와 가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보려면 클릭하면' target='_son'>http://acjournal.org/holdin ... lt.html>클릭하면 됨.
◈ 번역은 내가 했는데, "토대"나 "담론" 같은 학적 용어/번역어들을 그대로 가져다 붙이는 게 해당 용어에 관해 원문이 주는 묘미를 살리는 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그래도 부족하게나마 시적 완성도를 살려보고 싶은 마음에 약간 무리수를 두어가면서까지 의역했음. 그러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원문의 내용이나 푸코의 사상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큼. 특히 <지식의 고고학>을 모티브로 한 네 번째 연의 경우가 그러함. "삶"이라고 할지 "생명"이라고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삶"이 더 시적인 것 같아서 그걸로 택했음.
◈ 사진 출처 : http://www.nexo.org/revisiones06.htm target=_top>www.nexo.org/ revisiones06.htm.
—박쥐
blogin.com · 2004-06-02
이럴 땐 만화를 그릴 수 있었음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역동적인 구성이 가능하거든. 이렇게 글만 쫘악 늘어놓으려다 보니까 쓸데없이 일관성이나 문법 같은 것들을 의식하게 되는 거라구. 어쨌든 눈앞에 둔 참이슬이랑 김치전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오늘만큼은 그런 것들로부터 좀 자유로워져 보자구.
술 먹으면서 무슨 얘기를 했더라 하고 돌이켜 보니까, 대개 이런 식이더군 :
1. 술이나 안주나 술집에 대한 품평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김치전을 부칠 땐 말야, 두껍게 풀면 안돼. 겉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도 속은 안 익게 되거든. "
"아, 참이슬 팩소주는 맹숭맹숭하네. 배타고 오는 동안 알콜 성분이 날아가기라도 했나? 지리산에서 먹던 것과도 달라. 기압이나 지리적 조건에 영향을 받는 게 틀림 없어. 똑같은 참이슬이라도 술집마다 농도가 다르듯이 말이야. 다들 그럴 리가 있냐고 날 구박했지만, 진짜야. 어떤 데서는 얼음처럼 차갑게 해서 주고, 어떤 데서는 뜨뜨미지근하게 해서 준다구."
2. 사는 얘기
"요즘 왜 이리 공부가 하기 싫은지 모르겠어. 다들 내가 공부만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한국에 있을 때보다도 공부를 더 안하고 있는 것 같아. 아, 내가 대학원 들어가서는 공부를 좀 하긴 했지. 그땐 학과 공부가 되게 재밌었거든. 학생회 일도 재밌었구. 나는 말야, 원래 주어진 일보다는 해도 그만이고 안해도 그만인 일을 더 잘하고 그런 일에 열심이거든. 근데 철학을 시작하니까 그 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져서 본업을 부업같이 하고 부업을 본업같이 해도 that works! 였던 거야. 물론 요즘도 그렇지. 소설을 읽거나 웹 서핑을 하거나 심지어 길거리를 돌아다니기만 해도 그게 다 불어 공부를 위한 게 되니까. 근데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아무 것도 하기가 싫어졌어."
"아, 이러면 정말 뭐가 되는 거지? 부모님들은 딸이 노벨 물리학상을 탈 훌륭한 물리학자가 되리라는 기대를 접긴 했어도 그래도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교수'가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는데 말야 (그들에겐 내가 '철학' 중에서도 '과학철학'을 한다는 게 중요해. 왜냐고?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야, 대학다닐 때 철학과 사람이 엄마를 쫓아다녔던 것 같아. 그렇지 않다면 엄마가 '철학하는 인간들은 죄다 한여름에 바바리 코트 입고 여대 앞에 나타나서 인생이 뭐냐고 묻는다'고 악의적으로 일반화했겠어?). 나한테 이것저것 선물을 챙겨준 친구들은 또 어떻고?"
"왜 선생들은 이메일을 받은 뒤 며칠이 지난 다음에야 답장을 하는 걸까. 어제 숙제 제출 기한을 연장해 달라는 멜을 보냈거든. 근데 답이 없네. 안 된다고 하면 어쩌지? 그래도 여기 선생들은 그런 면에서는 너그러운 편이긴 하지만..."
"난 큰 시험에 약해. 지금까지 줄곧 그랬어. 왜, 모의고사는 기차게 잘 보면서 내신에 반영되는 중간/기말 고사나 수능은 못 보는 애들 있잖아. 그게 나였다구. 6월 시험이 불안한 것도 그래서야. 사실 시험 방식은 여러 면에서 나한테 꽤나 유리한데도 말이야."
3. 과거 얘기
"걔 있잖아, 내 옛 애인. 걔가 이번 여름에 떠난대. 애인은 있을까? 있다면 남겨두고 가는 걸까? 같이 가는 건 아닐까?"
"난 그 친구가 그렇게 된 이후로 한동안은 신촌 거리를 다니기가 무서워졌더랬어. 그 친구가 그렇게 떠나고 가을이 찾아와서 그 친구가 다니던 학교 애들이 축제를 하면서 거리를 점령하고 온갖 깽판을 부리는데, 그게 그렇게 미워보일 수가 없더라구. 야! 너네는 너네 학교 친구가 죽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그렇게 추태를 부리는 거야, 하고 악을 쓰고 싶었어. 난 겨우 그 정도로 그 친구의 죽음을 애도한다고 생색을 냈던 걸까. 야학을 다시 해야, 아니 죽을 때까지 해야 이 미안함을 지울 수 있지 않을까."
4.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한 토론
"난 2년 전에 사람들이 김규항 때문에 치를 떨 때 사실 무덤덤했어. 왜, 철학하는 사람들의 병 있잖아. '객관성'에 대한 집착이나 편향되지 않은 관점에 대한 이룰 수 없는 갈망. 아, 물론 내게 여성운동 하는/했던 친구들이 있다고 해서 내가 그쪽에 밝다고 할 수도 없긴 하지. 사람들의 현실 인식은 확실히 정말 다른가봐. 내 눈에는 김규항이 '주류'라고 일컫는 그 '중산층 브루주아 여성 운동'이 그가 얘기하는 식의 '주류'처럼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말이야. 고작 인터넷 통해서 한국을 들여다 보고 있는 주제에 뭘 아냐고? 에이, 누구나 자기한테 보이는 만큼밖에 볼 수 없다는 거 알면서, 뭘 그런 질문을 하고 그래?"
"전여옥에 대해 아직까지도 말이 많더군. 조금 전에 컬티즌의 한 독자가 그녀에 대해 라깡의 온갖 이론을 끌어다가 패러디해놓은 걸 봤는데, 열이 확 받았어. 전여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도 말야. 그녀가 여성이 아닌, 그것도 남자애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이대 출신이 아니었더라도, 아니 최소한 남자들이 좋아하는 외모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얘기했을까. 걔들은 전여옥이 토론에 임하는 기본적인 자세를 갖추지 않았다는 것만큼이나 '이쁘지도 않은 게 깝쭉대는' 걸 가지고 걸고 넘어지려 하는 것 같아."
5. 영화나 문학 등등에 대한 얘기
"며칠 전에 A ton image 라는 영화를 봤어. 음. 뭐라고 번역하면 좋을까. 저런 preposition 은 번역하기 힘들다구. 한국에 개봉된다면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네 얼굴에 비친 나"라고 의역하면 좋을 듯 싶은데. 어쨌든 인간 복제에 관한 영화였어. 뤽 베송 감독 밑에서 시나리오 쓰던 여자의 감독 데뷔작이고. 전 남편이 정신 병원에 가 있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잃고서 아이를 낳을 수 없게된 한 여자와 다른 어떤 남자가 만나고, 그 여자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녀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서 그녀의 세포를 복제해서 그녀에게 임신시켜서 여자 아이를 낳고, 그 여자 아이가 자라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행복한 가정을 파탄내고, 끝내는 저를 낳은 어미이자 제 자신인 엄마를 죽이고 아빠를 차지하려다가 제가 죽고 마는, 뭐 그런 얘기였어.
복제 인간을 다룬 영화나 소설은 꽤 많지. 복제 기술이 가져올 암울한 미래를 다룬 SF류의. 그런 면에서 '복제'는 어느새 보통내기가 아니면 상투성을 벗어나기 힘든 소재가 돼버렸지. 근데 감독이 그러더군. 복제 기술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먼 미래가 아닌, 아주 가까운 현재의 시점에서, 특히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다뤄보고 싶었다구. 전적으로 동의해. 훌륭한 영화였다구. 근데 왜 잡지들마다 평이 그 모양인거야. 죄다 스릴러물치고는 소재도 진부하고 플롯도 엉성하며 다루는 형식도 어디서 많이 베낀 것 같다는 투야. 감독 자신은 자기 영화를 스릴러물이라고 규정하지도 않았는데 말야. 그녀는 과학 기술을 보다 구체적인 인간의 삶의 맥락에서 바라보려고 했을 뿐.
뜬금없이 <4인용 식탁>이 생각났어. 여자 감독들을 보면, 참 하고 싶은 얘기들이 많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그걸 한 영화에다가 다 쏟아부으려고 하니까 어딘지 모르게 아귀가 안 맞고 이야기 구성에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결과를 낳은 게 아닐까 하는. 그런만큼 그녀들의 영화는 아주 찬찬히 보고 보고 난 뒤에도 며칠이고 곱씹어 보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구."
6. 술자리를 파할 시간과 집에 돌아갈 수단에 관한 확인 절차
"집에서 술마시니까 집에 갈 걱정 안해도 되고, 좋다. 여긴 있잖아, 지하철이 새벽 1시까지 다녀. 서울도 그랬던가? 며칠 전에 선배 집에 다녀오다가 그 지하철을 타봤는데, 다들 술에 취해서 고래고래 소릴 지르고 그러더라구. 그런가 하면 얼굴이 벌개진 채로 책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구. 나도 후자에 끼어들려고 책을 펼쳤지."
"생각해 보니 나, 택시에다가 토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어찌나 미안하고 부끄러웠는지 몰라. 근데, 있잖아, 언젠가부터 그런 일들을 떠올려도 예전만큼 괴롭진 않게 됐어. 예전같으면 과거의 부끄러운 일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쿵 소리를 요란하게 내면서 가라앉곤 했었는데 말야. 그리고 지금 얼굴이 불콰해질만큼 마셨는데도, 눈물이 한 방울도 나지 않아. 나, 많이 컸지?"
어쨌든, 다 술먹고 하는 얘기들이라구.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 그렇다고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것도 곤란하겠지만 말야.
—박쥐
blogin.com · 2004-06-01
1.
난 밤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 고백을 받곤 해
그는 늘 말하지, 사실은 날 쭉 좋아했노라고
나는 늘 묻지, 진심이냐고, 믿을 수 없다고
그리고는 숨을 가다듬는 그를 바라보면서 다음 대사를 기다리지
그런데 그 순간만 되면 꼭 무슨 일이 나고야 마는 거야
열 두시 종이 땡 쳐서 마법이 풀리거나
땅이 쩍 갈라지고 우윳빛 바다가 솟아나거나
악어가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나타거나
2.
자명종 시계의 째깍째깍 소리 때문에 깨어본 적이 있니?
내 자명종은 더이상 제가 울어야 할 시간에 울지 않아
제게 주어진 대로 삐리리릭 삐리리릭 하고 울지도 않고
녀석에게 남은 건 째깍째깍 하는 숨소리뿐
그런데 녀석의 소리를 숨죽여 듣고 있다가 깨달았어
그게 사실은 폭탄이 타들어가는 소리였던 거야
녀석은 제 몸에다가 시한 폭탄 하나를 달아놓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나 녀석을 노려보니까
녀석도 머쓱했는지 스스로 뇌관을 끊어버리더군
그리고 그때 닭이 울었어
아직 세 번째의 거짓 고백이 남아 있는데도
아니구나, 아마도 마지막 고백은 이거였겠지
"나, 밥도 잘 먹고 다니고, 잠도 푹 잘 자고, 공부도 열심히 해요"
3.
알고 보니 녀석이 절망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어
단지 제게 주어진 삐리리릭 삐리리릭 소리가 맘에 들지 않았던 거야
자폭 시도에 실패한 뒤로 녀석은 다른 수를 쓰기 시작했어
녀석은 뭐든 닥치는대로 집어삼키고는
그것들의 소리를 제 것으로 만들기로 한 게지
한 번은 쥐 한 마리를 삶아 먹은 다음에 찍찍 하고 울더니
그저께는 모기 한 마리를 잘못 먹고 체했는지 밤새 왱왱 거리는거야
어제는 쪽쪽 소리가 나길래 눈을 떠보니
글쎄 녀석이 내 피를 빨아먹고 있었던 거야
제게 주어진 소리를 바꾸는 대신에
더 이상 제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될 세상을 만들기로 작정했던 게지
난 씩씩거리면서 녀석을 노려본 뒤
녀석이 방심한 사이에 재빨리 짓이겨버렸어
그러자 찍소리를 마지막으로 주위가 적막해지고
종이에는 녀석이 빨아들인 내 피와 녀석의 주검의 뒤범벅이
베이컨의 그림마냥 흐물거리고 있었지
창밖을 보니 아직 어두컴컴했어
나는 고백을 마저 들으려 다시 눈을 감았어
4.
눈을 떠보니
빗속에서 세상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있더군
아, 거짓 고백 없는 달콤한 잠,
오늘 새벽은 정말 행복한 하룻밤이었어
—박쥐
blogin.com · 2004-06-01
그래. 내가 그 친구를 이렇게까지 생각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어. 난 네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 친구 핑계를 댔던 거야. 눈물이 나면 죽은 그 친구에 대한 부채감이라는 말도 안되는 구실을 갖다 붙이고 말야. 사실은 네 생각 때문에 운 거였는데도.
장 아제베도, 널 이렇게 부른다고 해서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네 이름을 부르면서 죽어간 사람은 전혜린 하나로 족하다구. 아, 물론 지금 이 말은 순전히 날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야. 한편으로는 속절없이 이 줄글을 읽으면서 눈이 휘둥그레져 있을 독자들을 위해서기도 하고. 물론 그들을 위해서라면 네게 이런 웃기는 형식의 공개 편지를 쓰면 안된다는 것쯤이야 충분히 알고 있어. 그치만 이제 겨우 깨지기 시작한 껍질을 도로 붙여서 원래 상태로 돌려놓긴 싫었어. 깨진 틈을 헐겁게 잇거나 어줍잖게 가리기도 싫었고. 표정 관리하는 것도 이젠 지겹다구.
알아, 널 사랑하는 게 지금 네가 내 곁에 없기 때문이라는 거. 근데 어쩌란 말야. 기어코 네 글을 보고 말았고, 지금 밖에 비가 오고 있고, 이미 취해버렸는걸. 아, 물론, 이렇게 되리라는 것쯤은 지난 주부터 예상하고 있었어. 사실은 그 친구의 기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어. 예년처럼, 6월 5일을 며칠 앞두고, 그 친구를 아꼈던 네가 예년처럼 움직이기 시작할 거라는 계산을 진작부터 하고 있었던 거지. 젠장. 그래도 내가 이렇게까지 사악할 줄은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몰랐었는데. 죽은 그 친구한테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내가 갔어야 했던 길을 대신해서 가버린, 그것도 무척이나 허망하게 떨어져버린, 몇 번 만나보지도 않은 내게조차 눈이랑 입에 한가득 미소를 머금은 인상을 또렷하게 남긴 친구한테 말이야.
그래. 장 아제베도, 내가 널 갑자기 미친듯이 그리워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어.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아니? 내가 모르는 날 나 아닌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한참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것. 난 내가 자면서 아주 서슬퍼런 잠꼬대를 한다는 걸 민박집에서 같이 묵었던 여행객들한테서 들었어. 그 다음부터 난 엠티를 가더라도 절대로 자지 않으려 애썼지. 비록 성공한 적은 없지만. 내가 잘 때 머리를 무서운 기세로 긁어댄다는 것도 술먹고 친구 집에 가서 잔 다음날에서야 알았어. 무섭지 않니? 내가 자면서 공포 영화를 찍는다는 거 말고. 그 사실을 내가 모르는데 다른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거.
오늘은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스트레스성 안면 발진"이라는 단어를 보게 됐어. 순간 아차 싶었어. 이곳에 와서 종종 두피 세포 하나하나가 융숭하고 뺨에서 화재가 일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었거든. 내게 그게 느껴질 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내 얼굴이 빨간 두드러기로 뒤덮이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었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니까, 정말 어찌 할 바를 모르겠더라구. 그래, 생각해 보니,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화장실에 들러서 거울을 보고 기겁한 일이 한 번 있었구나. 그땐 일시적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었는데. 아마도 사람들은 날 슬금슬금 피해갔을 거고, 나는 하루종일 모르고 지냈겠지.
장 아제베도, 넌 내가 모르고 있는 날 얼만큼이나 알고 있니? 얼마나 알고 있었던 거니? 내가 방심한 사이에 풀어놓은 또 다른 나를 네가 재빨리 낚아채서 네 안의 어딘가에다가 나 몰래 꽁꽁 숨겨뒀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까, 널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어. 그게 어떤 거였는지 꼭 봐야겠단 말이야. 한편으로는 너의 폭로쯤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을 것도 같기 때문이기도 하고. 뭣보다 내 그 추악한 모습을 참아낸 비법을 전수받아야겠거든.
넌 내가 겉으로만 순수하고 순진하는 척할 뿐 사실은 더없이 냉혹하고 퇴락한 애라는 걸 알게 된 뒤에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 지금도 너의 조소와 동정을 섞은 그 시선을 생각하면 발진이 일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시선쯤이야 감내할 수 있어, 널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