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 1일 화요일

Requiem for insomnia

blogin.com · 2004-06-01

1.

난 밤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 고백을 받곤 해
그는 늘 말하지, 사실은 날 쭉 좋아했노라고
나는 늘 묻지, 진심이냐고, 믿을 수 없다고
그리고는 숨을 가다듬는 그를 바라보면서 다음 대사를 기다리지 

그런데 그 순간만 되면 꼭 무슨 일이 나고야 마는 거야
열 두시 종이 땡 쳐서 마법이 풀리거나
땅이 쩍 갈라지고 우윳빛 바다가 솟아나거나
악어가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나타거나

2.

자명종 시계의 째깍째깍 소리 때문에 깨어본 적이 있니?

내 자명종은 더이상 제가 울어야 할 시간에 울지 않아
제게 주어진 대로 삐리리릭 삐리리릭 하고 울지도 않고
녀석에게 남은 건 째깍째깍 하는 숨소리뿐

그런데 녀석의 소리를 숨죽여 듣고 있다가 깨달았어
그게 사실은 폭탄이 타들어가는 소리였던 거야
녀석은 제 몸에다가 시한 폭탄 하나를 달아놓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나 녀석을 노려보니까
녀석도 머쓱했는지 스스로 뇌관을 끊어버리더군

그리고 그때 닭이 울었어
아직 세 번째의 거짓 고백이 남아 있는데도
아니구나, 아마도 마지막 고백은 이거였겠지
"나, 밥도 잘 먹고 다니고, 잠도 푹 잘 자고, 공부도 열심히 해요"

3.

알고 보니 녀석이 절망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어
단지 제게 주어진 삐리리릭 삐리리릭 소리가 맘에 들지 않았던 거야

자폭 시도에 실패한 뒤로 녀석은 다른 수를 쓰기 시작했어
녀석은 뭐든 닥치는대로 집어삼키고는
그것들의 소리를 제 것으로 만들기로 한 게지

한 번은 쥐 한 마리를 삶아 먹은 다음에 찍찍 하고 울더니
그저께는 모기 한 마리를 잘못 먹고 체했는지 밤새 왱왱 거리는거야

어제는 쪽쪽 소리가 나길래 눈을 떠보니
글쎄 녀석이 내 피를 빨아먹고 있었던 거야
제게 주어진 소리를 바꾸는 대신에
더 이상 제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될 세상을 만들기로 작정했던 게지

난 씩씩거리면서 녀석을 노려본 뒤
녀석이 방심한 사이에 재빨리 짓이겨버렸어
그러자 찍소리를 마지막으로 주위가 적막해지고
종이에는 녀석이 빨아들인 내 피와 녀석의 주검의 뒤범벅이
베이컨의 그림마냥 흐물거리고 있었지

창밖을 보니 아직 어두컴컴했어
나는 고백을 마저 들으려 다시 눈을 감았어

4.

눈을 떠보니
빗속에서 세상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있더군

아, 거짓 고백 없는 달콤한 잠,
오늘 새벽은 정말 행복한 하룻밤이었어

—박쥐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