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 1일 화요일

돌아와줘, 장 아제베도!

blogin.com · 2004-06-01

그래. 내가 그 친구를 이렇게까지 생각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어. 난 네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 친구 핑계를 댔던 거야. 눈물이 나면 죽은 그 친구에 대한 부채감이라는 말도 안되는 구실을 갖다 붙이고 말야. 사실은 네 생각 때문에 운 거였는데도.

장 아제베도, 널 이렇게 부른다고 해서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네 이름을 부르면서 죽어간 사람은 전혜린 하나로 족하다구. 아, 물론 지금 이 말은 순전히 날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야. 한편으로는 속절없이 이 줄글을 읽으면서 눈이 휘둥그레져 있을 독자들을 위해서기도 하고. 물론 그들을 위해서라면 네게 이런 웃기는 형식의 공개 편지를 쓰면 안된다는 것쯤이야 충분히 알고 있어. 그치만 이제 겨우 깨지기 시작한 껍질을 도로 붙여서 원래 상태로 돌려놓긴 싫었어. 깨진 틈을 헐겁게 잇거나 어줍잖게 가리기도 싫었고. 표정 관리하는 것도 이젠 지겹다구.

알아, 널 사랑하는 게 지금 네가 내 곁에 없기 때문이라는 거. 근데 어쩌란 말야. 기어코 네 글을 보고 말았고, 지금 밖에 비가 오고 있고, 이미 취해버렸는걸. 아, 물론, 이렇게 되리라는 것쯤은 지난 주부터 예상하고 있었어. 사실은 그 친구의 기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어. 예년처럼, 6월 5일을 며칠 앞두고, 그 친구를 아꼈던 네가 예년처럼 움직이기 시작할 거라는 계산을 진작부터 하고 있었던 거지. 젠장. 그래도 내가 이렇게까지 사악할 줄은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몰랐었는데. 죽은 그 친구한테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내가 갔어야 했던 길을 대신해서 가버린, 그것도 무척이나 허망하게 떨어져버린, 몇 번 만나보지도 않은 내게조차 눈이랑 입에 한가득 미소를 머금은 인상을 또렷하게 남긴 친구한테 말이야.

그래. 장 아제베도, 내가 널 갑자기 미친듯이 그리워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어.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아니? 내가 모르는 날 나 아닌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한참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것. 난 내가 자면서 아주 서슬퍼런 잠꼬대를 한다는 걸 민박집에서 같이 묵었던 여행객들한테서 들었어. 그 다음부터 난 엠티를 가더라도 절대로 자지 않으려 애썼지. 비록 성공한 적은 없지만. 내가 잘 때 머리를 무서운 기세로 긁어댄다는 것도 술먹고 친구 집에 가서 잔 다음날에서야 알았어. 무섭지 않니? 내가 자면서 공포 영화를 찍는다는 거 말고. 그 사실을 내가 모르는데 다른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거.

오늘은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스트레스성 안면 발진"이라는 단어를 보게 됐어. 순간 아차 싶었어. 이곳에 와서 종종 두피 세포 하나하나가 융숭하고 뺨에서 화재가 일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었거든. 내게 그게 느껴질 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내 얼굴이 빨간 두드러기로 뒤덮이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었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니까, 정말 어찌 할 바를 모르겠더라구. 그래, 생각해 보니,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화장실에 들러서 거울을 보고 기겁한 일이 한 번 있었구나. 그땐 일시적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었는데. 아마도 사람들은 날 슬금슬금 피해갔을 거고, 나는 하루종일 모르고 지냈겠지.

장 아제베도, 넌 내가 모르고 있는 날 얼만큼이나 알고 있니? 얼마나 알고 있었던 거니? 내가 방심한 사이에 풀어놓은 또 다른 나를 네가 재빨리 낚아채서 네 안의 어딘가에다가 나 몰래 꽁꽁 숨겨뒀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까, 널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어. 그게 어떤 거였는지 꼭 봐야겠단 말이야. 한편으로는 너의 폭로쯤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을 것도 같기 때문이기도 하고. 뭣보다 내 그 추악한 모습을 참아낸 비법을 전수받아야겠거든.
 
넌 내가 겉으로만 순수하고 순진하는 척할 뿐 사실은 더없이 냉혹하고 퇴락한 애라는 걸 알게 된 뒤에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 지금도 너의 조소와 동정을 섞은 그 시선을 생각하면 발진이 일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시선쯤이야 감내할 수 있어, 널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박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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