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공부를 하던 중, 올해가 푸코가 죽은 지 20년이 되는 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 내가 공부하는 방식은 왜 이다지도 하이퍼텍스트적이란 말인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 깡길렘 → 깡길렘에 관한 푸코의 글 → 푸코 → 푸코에 관한 글들과 웹사이트들. 그러다가 급기야는 푸코에게서 영감을 받은 노래를 발견하는 데에 이르렀다. 미국의 대학 교수들이 모여 만든 아마추어 밴드 The Professors(이름도 참...) 가 부른 "Foucault' target='_son'>http://acjournal.org/holdin ... ult-low.mp3>Foucault Funk: The Michel Foucault Postmodern Blues (low-fi version) "가 그것이다.
사운드는 조악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래도 "인간은 언젠가 바닷가의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지워질 것이다"와 같은 푸코의 명구를 그런 방식으로 듣고 있자니 기분이 다 유쾌해진다. 포스트모더니즘 ABC song 내지는 선전가로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고 말하면 혼나거나 비웃음 당하겠지? 그들은 "예술"을 단지 사상을 선전하거나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걸 계몽적이고 (전)근대적이라며, 달리 말해 촌스럽다며 비웃을 테니까.
한편으로 사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심미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를 최소화해야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같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노래 가사에 "discourse"나 "foundation"이나 "민중"이나 "해방"이 들어가는 노래가 사람 맘을 움직이는 방식과 그 효과는 완곡한 어법으로 표현한 노래의 그것과는 달라진다는 것이다. 존 레논의 "Imagine"과 "Power to the People"의 차이 혹은 "아침 이슬"과 "님을 위한 행진곡"의 차이. 전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그 맥락을 고려했을 때 또 다른 미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경우. 후자는 "美"의 범주 하에서라기보다는 그 외의 맥락 안에서 감상하는 편이 보다 적절한 경우.
어쨌든(아, 하이퍼텍스추얼리티는 내 블로깅의 주된 특성이기도 하다. "어쨌든"이 유난히 많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이 노래는 맥락과 가사를 고려하고 들을 때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종류에 속한다.
There aint no truth anymore
I can't find no foundations
There aint no truth anymore
I'm caught in multiple perspectives
I can't think straight anymore
Man will be erased
Like a face drawn in sand
Man will be erased
Like a face drawn in sand
Like a face drawn in sand
At the edge of the sea
Do not ask me who I am
Do not ask me to remain the same
Do not ask me who I am
Do not ask me to remain the same
I am not the only one
Who writes to have no face
Discourse is not life
Its time is not your time
Discourse is not life
Its time is not your time
In discourse you have no survival
You only establish your death
바탕을 찾을 수 없어
진리는 더 이상 그 어디에도 없어
바탕을 찾을 수 없어
진리는 더 이상 그 어디에도 없어
난 여러 개의 관점에 사로잡혀 있어
난 이제 똑바로 사고할 수 없어
인간은 지워질 거야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인간은 지워질 거야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바닷가 모래 위의 그림처럼
내가 누구냐고 묻지마
내게 늘 그대로 있으라 하지도 마
내게 누구냐고 묻지마
내게 늘 그대로 있으라 하지도 마
얼굴을 지우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단지 나뿐은 아니니까
말은 삶이 아니야
말에 주어진 시간은 네 것이 아니야
말은 삶이 아니야
말에 주어진 시간은 네 것이 아니야
말 속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어
단지 죽음에 다가갈 수 있을 뿐이야
The Professors, "Foucault' target='_son'>http://acjournal.org/holdin ... ult-low.mp3>Foucault Funk: The Michel
Foucault Postmodern Blues"(full version)
Lyrics by Gary Radford, Marie Radford,
and Michel Foucault
Music by Stephen Cooper and Gary Radford
◈ 출처와 가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보려면 클릭하면' target='_son'>http://acjournal.org/holdin ... lt.html>클릭하면 됨.
◈ 번역은 내가 했는데, "토대"나 "담론" 같은 학적 용어/번역어들을 그대로 가져다 붙이는 게 해당 용어에 관해 원문이 주는 묘미를 살리는 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그래도 부족하게나마 시적 완성도를 살려보고 싶은 마음에 약간 무리수를 두어가면서까지 의역했음. 그러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원문의 내용이나 푸코의 사상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큼. 특히 <지식의 고고학>을 모티브로 한 네 번째 연의 경우가 그러함. "삶"이라고 할지 "생명"이라고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삶"이 더 시적인 것 같아서 그걸로 택했음.
◈ 사진 출처 : http://www.nexo.org/revisiones06.htm target=_top>www.nexo.org/ revisiones06.htm.
—박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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