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를 시작으로 해서 정말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걸까? 적어도 "아랍 세계" 내에서? 현재 이집트에서는 벌써 몇 사람이 분신했고, 집회가 계속 이어지다가 오늘은 그 규모가 최대에 달한 상태라고 한다. 정부에서 시위의 파급을 저지하기 위해 며칠 째 전화와 인터넷을 끊어놓고 또 경찰은 진압의 강도를 점점 더 높이고 있는데도.
내 비록, 운동도 안 했고, 학부시절 그 흔했던 사회과학 학회 같은 것도 해본 적 없고, 그 이후로도 지금껏 정치에 무관심하게 지내왔지만, 그래도 "혁명"이란 말을 들으면 가슴이 뛰는 걸 느낀다. 게다가, "민중"이란 말이 붙으면 더더욱. 동구권 몰락 이후 혁명이 실패한 데다가 소위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는 더더욱 불가능해졌으며, "민중"이란 이름 하에 억압받는 자들이 한 목소리를 내서 다른 세상을 꿈꾸고 심지어 이뤄내기까지 하는 일은 그저 향수를 자극할 뿐이거나 너무도 요원해진 시대, "민중"의 아우라가 여전히, 아직도, 아니 한결 더 선연하고 강력한 어떤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저 두 나라의 사례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21세기적 혁명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얼마 간의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가장 중요한 동기가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것이었다기보다는 사회+경제적이었다는 점. 무엇보다 고학력 청년들의 심각한 실업률이 가장 큰 문제**였다. "먹고 사는 문제"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즉 정치적 문제의식으로 발전한 경우.
그런데 이것이 결국 넓은 의미에서의 자유에 대한 요구였다면, 그 중에는 (신)자유주의적인 것도 포함돼 있지 않았을까, 만일 튀니지의 독재자 벤 알리가 박정희식 개발 독재에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등등의 생각을 혼자 해봤었는데... 역시 나이브한 생각일 뿐. 그들이 시장에서의 "자유" 증대가 곧 자국 경제의 성장 및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것이라고 나이브하게 생각했을 리 만무하고, 70년대 한국과 지금의 튀니지 및 알제리의 상황은 달라도 한참 달라 비교가 불가능할 뿐더러 무의미한데, 이 차이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통신수단의 차이에 기반하는 바가 클 것 같다. 요즘 세상에서는 아무리 빅 브라더라 해도 그 많은 이동 통신 메세지-sms, twitter,...-들을 전부 감시하기란 불가능하겠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건 군대의 역할. 양쪽 나라 모두, 정권의 하수로 낙인찍인 경찰권력과 대조적으로 군부에 대한 민중들의 호감도가 높았다고 하니. 군부 세력이 독재 정권을 끌어내린 뒤 바로 권력을 민중에게 이양했다는, 모든 혁명 중 가장 평화적이었고, 그래서 가장 "시적"이었다는 포르투갈의 쿠데타 생각이 났다. 튀니지의 경우 군인의 역할이 그 정도로 컸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러한 경찰권력과 군대의 대조적인 면모는, 무수한 군부 쿠데타를 겪은 나라에서 자란 나로서는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역시, 포르투갈의 경우 예외가 되겠지만, 정치, 경제, 역사 등의 고전적 팩터 만큼이나 시대의 차이에 기반하는 바가 없지 않겠다. 냉전 시대 이후, 내전을 겪거나 남북한처럼 "휴전" 상태거나 미국(!)이 아닌 나라들에서는, 군대가 갖는 권력이 상징적으로나 적어도 표면상으로 약화됐을 거고, 또 다른 한편으로 "통치성", 통치 권력의 성격이 과거에 비해 보다 구체적이고, "미시적"이며, "삶-정치"적인 것으로 변했고.***
튀니지도 그렇고, 이집트 또한 앞으로 어찌될 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저 두 나라 민중들은 참으로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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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이슬람 또는 무슬림 국가로 치부돼서 나는 이들 국가도 중동만큼이나 정교가 통합돼 있거나 아니면 무슬림 세력이 판을 치는 나라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벤 알리는 종교의 자유도 억압했다고. 나 또한 이슬람=무슬림 독재=여성억압 을 한통속으로 몰아 버리는 이슬라모포비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듯하다.
**여기에서 나는 "문제(problème)"를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들뢰즈가 쓰는 적극적인, 특이성(singularité)을 함축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려 한다. 해결(solution)을 기다리는, 따라서 해결된 어떤 안정적 상태에 대해 소극적이고 후차적인 개념이 아니라, 해결-해소 상태로 이행하기 위한, 모든 변화가능성의 조건 같은 것으로서.
들뢰즈, 사실 잘 모른다. 그래도 그가 로트만과 시몽동에게서 발견한 뒤 칸트의 이념에 적용한 이 문제 개념만큼은 정말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한에서.
*** 푸코도 사실 잘 모른다. 특히 미시권력이니 비오폴리티크니 통치성(gouvermentalité) 등등의 후기 정치철학은 정말 모른다. 그렇지만 초기의 "인식론자(épistémologue)", 혹은 용감한 철학사가/사상사가/역사가 로서의 푸코는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이론가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인 실천가로서의 그도.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