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블로그인 아카이브 (2004-2013)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블로그인 아카이브 (2004-2013)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2년 9월 9일 일요일

역사가를 향한 고다르 옹의 일침

blogin.com · 2012-09-09


Rien n'est aussi commode qu'un texte
Rien n'est aussi commode qu'un mot dans un texte
Nous n'avions que du livre, à mettre dans du livre
Que serait-ce, quand il faut, dans un livre, dans du livre, mettre de la réalité ?
Et, au deuxième degré, quand il faut, dans la réalité, mettre de la réalité ?

Qu'arrive-t-il toujours, mon ami ?
Le soir tombe, les vacances finissent
Il me faut une journée pour faire l'histoire d'une seconde
Il me faut une année pour faire l'histoire d'une minute
Il me faut une vie pour faire l'histoire d'une heure
Il me faut une éternité pour faire l'histoire d'un jour
On peut tout faire excepté l'histoire de ce que l'on fait

한 편의 글보다 편리한 것은 없다
한 편의 글 안의 한 마디 말보다 편리한 것은 없다
우리에겐 단지 책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책 안의 책, 책들의 책들, 책 안에 담을 책들만이
한 권의 책에, 책들 안에 실재를 담는다면, 그래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두 번째 단계로서, 실재를 실재 안에 담는다면, 그래야 한다면?

친구여, 반드시 일어나고 마는 일은 무엇인가?
저녁은 오고 휴가는 끝나게 마련이다
1초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하루가
1분의 역사는 1년이 필요하며
한 시간의 역사에는 한 생애가
단 하루의 역사를 위해서는 영원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의 역사를 쓰는 일을 제외한다면


고다르, 영화의 역사(들)

일침이라기보단...

사실, 자기 반성에 가깝다 해야 할 것이다. 본인이 직접 하나의 역사 서술을 시도(아니, 차라리 기도?)한 경험을 토대로 한 통찰이기도 하고. 이 시도란 물론 영화의 역사(들)이라는 거대한 기획을 가리킨다. 영국에서 출시된 디븨디를 구해서 가끔 들여다 보는데 (고도의 소장가치를 지닌 대표적인 경우다. 전에도 얘기했듯, 보부르에서 연속상영 할 때 몇 번 가서 보고, 축소판으로도 봤으며, 심지어 나중에 고다르가 책으로 편집해서 낸 판본도 봤지만, 디븨디 버전으로 봤을 때에서야 비로소 이 작품의 진가를 확인하고 제대로 음미할 수 있었다. 원래 극장이 아니라 텔레비전 상영을 위해 6부작인가로 만들어지기도 했었고. 근데, 그러고 보니 하품이 생각나네. 잘 살고 있나? 다음에 보면 이 디븨디를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볼 때마다 찬탄하고 또 숙연해진다. 그런 한편으로, 참으로, 불경하고 발칙하게도, 모종의 동병상련이 느껴지기도 한다. 직업 역사가가 아니면서 역사를 쓰겠다고 애쓴 흔적이 보이는 듯해서. 영화는 또 얼마나 돌려봤고, 음악은 또 얼마나 찾아 들었으며, 그림들은 또 얼마나 들여다 봤을까. 그 방대한 "사료"들을 놓고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에 대해 또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을까. 그 고민의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만큼은 전문 역사가 못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책까지. 워낙 박학다식하고 굉장한 독서가인 거야 다른 작품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바지만, 영화의 역사(들)에서는, 직업 영화사가나 영화학자들의 기존의 영화사 서술, 나아가 역사학 일반에 뭔가 경종을 울리기라도 하듯, 역사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출간한 책에 실린 비블리오그래피에 의하면 수학사까지 읽었다 (작품 중, 고다르는 매체로서의 영화의 선구자-개척자에 속하는 인물로 고다르는 기하학자 가스파르 몽주를 꼽으며 그에게 르네상스 원근법의 창시자들에 걸맞는 타이틀을 부여한다. 몽주가 혁명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투옥 상태에서 발명한 사영기하학 géométrie projective, 이것이 현실-실재의 투영projection을 본질로 하는 영화의 기원 중 하나라는 것이 그의 요지였던 듯. 다시 보고 확인해야 할 것 같다).

이 결과물을 또 자신의 고유한 몽타주 이론에 걸맞게 드러러내도록 또 얼마나 오리고 붙이기는 또 얼만큼 반복했을 것인가 (내가 요새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어서 이렇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결과물은 물론 몽타주의 거장의 이름값에 전혀 손색이 없다 (위의 두 샷은 절묘한 몽타주 기법의 실례를 보여준다. 앞의 것은 한 만화에서 따온 장면인 듯한데, 이것을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겹쳐놓을 생각을 누가 했겠는가). 그리고 장대하다. 말이 영화사지 사실 인류보편사라 해도 좋을.

그런데 그러고서 내린 결론이, 결국, 역사 서술의 불가능성이다. 최소한 "우리가 하는 일"에 한에서는.

역사가들도 비슷한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으리라. 역사가뿐이랴.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그것이 고다르에게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영화-에 대한 역사를 쓰는 것"이었겠다)에 대해서 시간과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 그런데 그 한계를 가장 잘 알고 또 뼈저리 느끼면서도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게 또 인간의 숙명 아닌가 (칸트, 순수이성비판 서문). 역사가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완벽한 재현의 불가능성을 부정할 순 없다. 그래도 가능한 모든 방법과 능력과 사고를 총동원해서 끝까지 가본 뒤, 그 뒤에는, 오직 그 뒤에만 비로소, 깨끗이 한계를 인정하고 체념해야 한다 (블로크, 역사가를 위한 변명). 고다르는 어쩜 바로 그 체념의 단계에서 말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코 쉽게 다다른 단계는 아닐 것이다.

요 사이, "저녁은 오고 휴가는 끝난다"라는 구절이 자꾸 귓가를 맴돈다. 작중 이 대목을 낭송하는, 나직하고 침착한 여배우 (누굴까? 나는 베르나데트 라퐁을 의심하고 있다)의 바로 그 목소리로. 이건 전적으로 현재의 내 특수한 상황 때문이겠다. 저녁이 오고, 바캉스에서 사람들이 돌아오는 중, 어느새 여름을 훌쩍 보낸 시간이 원망스럽기만 한. 그런데, 바로, 그 상황 때문에, 역사 재현의 불가능성 테제에 복무하려는, 그러니까 너무도 쉽게 체념의 단계로 넘어가려는 유혹도 생긴다. 그러고보니 일침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역사가도 아닌 주제에.

—박쥐

2012년 8월 29일 수요일

Mary Cassatt au Louvre

blogin.com · 2012-08-29

... par Edgar Degas (ca. 1880)



난 이 버전이 더 좋더라.

[원본 이미지 링크 소실]

' target='_son'>http://cdn2.brooklynmuseum. ... 1.jpg?lightboxed=1/>

며칠 전 페레(Féret)라는 프랑스 감독의 마담 솔라리오를 보고는 문득, 그때 그 시절, 벨에포크 생각이 나서.
그런데 실은



[원본 이미지 링크 소실]

' target='_son'>http://upload.wikimedia.org ... uard_Manet_040.jpg/>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베르트 모리조, 정확하게는 마네가 1872년에 그린 모리조였다. 여배우가 모리조를 너무 닮아 있어서.

[원본 이미지 링크 소실]

' target='_son'>http://images.allocine.fr/r ... 23/99/20136062.jpg/>

치렁치렁한 갈색머리에, 새하얀 얼굴에, 깊은 눈동자에, 호리호리하면서도 적당히 육감적인 몸매에.. 그렇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벨에포크적인 외모라 생각했다. 부족한 연기력-거의 국어책 읽는 수준-을 보완한, 아니 그 자체로서 하나의 연기라고 봐도 좋았던, 배경과 역할에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미모. "그녀는 그저 가만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라는 문장에 완벽히 어울리는.

그런데, 아뿔싸, 감독의 딸래미였다지. 그래도, 최소한 외양 면에서는, 그다지 편파적인 선택은 아니었다고 해주고 싶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게다가 극중 마담 솔라리오는, 비록 친아비는 아니긴 하나, 어쨌든 의붓아버지인 사람의 폭력에 희생되고, 그로 인해 온갖 가족사적 개인사적 비극을 겪지 않는가. 게다가 친동생과... 코폴라 부녀는 건설적이기라도 하지, 이 부녀관계는 좀 걱정된다. 작가-여배우도 참 복잡한 관계도식이거늘.

—박쥐

2012년 7월 17일 화요일

Hommage, quand même

blogin.com · 2012-07-17



과학사, 철학사, 아니 한 사상가와 그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연구들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편의상 각각을 내재론과 외재론으로 부르자. 내재론은 한 사상가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유일한 것은 오직 그가 남긴 텍스트 뿐이며, 전기적 요소는 불필요하거나 기껏해야 부차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 강의의 초두를 "옛날에 아리스토텔레스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다. 인물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두고, 이제 그가 남긴 텍스트에 집중하자"라는 말로 연 바 있다.

전혀 맥락은 다르지만, 지금의 이 구분법을 따른다면, 구조주의나 바슐라르의 비평이나 푸코의 고고학 기획도 이에 속한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슐라르는 로트레아몽 에서, 로트레아몽이 한때 수학에 취미를 가진 적이 있다는 사소한 전기적 사실을 작품 분석에 반영하려는 일부 주석가들을 거의 조롱조로 비판한 바 있다. 이는, "작품"이 됐든 "책"이 됐든 텍스트가 담은 모든 의미의 담지체이나 수렴점으로서 하나의 "저자"를 상정하고, 모든 의미 분석을 저자의 "의도"와 그가 말하고자 한 "의미"에 대한 그것으로 환원하는, 전기적 비평에서부터 정신분석 비평에 이르는 방법론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분석의 대상이자 수단으로 남는 것은 텍스트 뿐이요, 진정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각각, 구조주의와 바슐라르의 경우,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여 나타난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의 어떤 공통의 지반(구조 혹은 근원적 이미지)이, 푸코의 경우, 특정한 한 시대, 특정한 공간에 나타난 텍스트들이 구성하는 "담론의 장", 그리고 그로부터 하나의 지식의 구축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된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중에서 "누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

외재론은 바로 그 "누구"를 묻는다. 그 어느 텍스트도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남긴 것인만큼 그 저자가 누구였는지는 중요하고, 또 어느 저자고 그의 개인사에서부터 역사적이고 시대적 맥락의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므로, 그러한 맥락을 고려할 때에서야 제대로 이해할 있다는 입장. 저자가 누구이고, 어느 시대에 나서 어떻게 살았고, 누구에게 배웠고, 누구를 가르쳤고, 누구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묻자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를 좀더 철학사적으로, 혹은 사상사적으로 연구하려면, 그의 사상적 배경(이를테면 당시의 지적 환경, 보다 직접적으로는 스승 플라톤의 영향)이나 심지어 개인의 출신 배경과 사회경제적 입지, 나아가 아테네 사회의 물적 토대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사를 철학사로서가 아니라, 이를테면 "존재망각의 역사"로 보는 등의 독창적인 해석,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을 정립하거나 그 수단으로 삼지 않는 한에서는 말이다.

...

여기까지 쓰고 보니 벌써부터 자신이 없다. 특히 구조주의나 바슐라르 문예이론, 거의 아는 바가 없는데 저렇게 써놔도 되나 싶고. 외재론과 내재론이 적절한 명명인지도 의심스럽고. 과학을 순수하고 무사심한 지적 활동으로 보는 내재론과, 과학 역시 인간의 다른 활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활동으로 보는 외재론으로 나누는 과학사에서의 일반적 구분법을 염두에 두었던 것인데... 일단 나부터 헷갈린다.

그래도 일단은 용기를 내어 말해 보자. 그 동안 너무 말을 안 하고 살았다. 이제는 말할 때도 되었다. 아니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시인의 말을 빌어, 아니 시인을 인용한 철학자의 말을 빌어서라도 : "말하라, 그 순간 그대는 더 이상 무지하지 않을지니. 일단 가 닿아라. 다가가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러니." (앙리 미쇼. 바슐라르의 응용 합리론 에서 재인용)

원래 이 글은...


푸앵카레 기일에 쓴 글이다. 더 정확하게는,

쥘 앙리 푸앵카레 (Jules Henri Poincaré).
프랑스의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1854년 4월 29일 낭시에서 태어나 1912년 7월 17일 파리에서 죽었다.
자, 이제 남은 것은 그의 텍스트에 집중하는 일 뿐...


이라는 말을 일종의 석문(아니, 차라리 비문?)으로 삼아, "내재론"의 입장을 취한 뒤 그 입장에 의거한 분석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담기 위해 썼던 글. 그런데 그 이후 1개월도 더 넘은 지금-8월 말-의 시점에서 보건대 아직까지도 외재론적 접근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 글을 보다 보면 글쓴 사람이 누군지가 궁금해지는 것은 아무래도 인지상정이겠고, 그리고 외재론이라 해서 내재론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적합한 맥락들이 제대로 참조되는 경우 텍스트에 대한 이해에 바람직한 역할을 할 수도 있겠으나... 날 자꾸 붙잡는 건 아주 사소하고 미미한 사실들. 잘만 하면 긴즈부르그식 미시사를 과학사에 응용한 꽤 참신한 사례로 기록될 수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오, 너무 부족하다.

그렇게 미소한 단서들의 늪에서 헤매고 헤매다가 지쳐 텍스트로 돌아갔을 때의 그 익숙함과 안도감. 그리하여 한동안은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행복감에 젖어 있다가, 그러다가는 또 이내 지겨워지고, 다시 텍스트 바깥 세상이 궁금해지고, 그 세상에서 새로운 사실을 이래저래 조합해 가설을 세우는 탐정놀이가 그리워지고, 그래서 다시 한 눈 팔고. 그러기를 벌써... 몇 년째. 이제는 멈춰야 한다.

—박쥐

2012년 6월 26일 화요일

그리고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blogin.com · 2012-06-26


[원본 이미지 링크 소실]

http://www.cineol.net/galer ... austo-2011_60583.jpg width="450" height="640"/>

[원본 이미지 링크 소실]

http://3.bp.blogspot.com/-h ... Faust_FilmPoster.jpg width="450" height="640"/>

[원본 이미지 링크 소실]

http://www.filmofilia.com/w ... 2/Faust_poster_3.jpg width="450" height="640"/>

[원본 이미지 링크 소실]

http://www.filmofilia.com/w ... /12/faust_poster.jpg width="450" height="640"/>

[원본 이미지 링크 소실]

http://www.filmofilia.com/w ... 2/Faust_poster_5.jpg width="450" height="640"/>

나의 첫 소쿠로프였는데, 보는 내내 아찔하고 중간 중간에는 숨이 멎는 듯했다. 이 작품 자체가 원작도 그렇지만 뭔가 걸출하고 거창한 것이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고, 스타일도 그의 스승 타르코프스키에 대해서도 그렇게 열광했던 기억이 없는데, 모든 취미와 맥락과 무지한 관객 특유의 치기와 자격지심 등등을 넘어, 대가란, 대작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심지어 무릎 꿇게 만드는 무언가가 이 영화에 있더란 말이다.   

영화 속 장면들을 찾아보다 건진 포스터들 (프랑스판은 제외했다. 요샌 어째 프랑스 배급사들이 포스터에 예전만큼 공들이지 않는 것 같다. Encore un effort, distributeurs français !). 결말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면 (영화가 선형적이거나 인과 관계 분명한 이야기 전개 방식을 구사하는 것도 아닌 만큼 더더욱), 이 영화의 가장 강렬한 메세지를 원작 파우스트의 유명한 마지막 대사에서 찾는 것도 가능하다 : "그리고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그리고 그 메세지를 전하는 것은 후반부 무렵에 등장하는 마르게레테의 클로즈업이다. 위의 맨 마지막 포스터가 바로 이 샷에서 따온 것이다. 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클로즈업으로 기록되어도 좋을 이 샷의 공은, 물론 감독과 촬영감독에게도 있지만, 무엇보다 베르메르 그림에서 뚝 떼다놓은 듯한 외모의 저 여배우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이 내 개인적 생각이다.

포스터 열전의 기세를 몰아, 또 하나의 인상적인 최근작 포스터


[원본 이미지 링크 소실]

' target='_son'>http://images.allocine.fr/r ... 20/53/20089569.jpg/>

영화관에 걸린 커다란 포스터를 보는데 참 예쁘더라. 송선미도 예쁘고. 초점이 김상중에게 맞추어진 버전도 지나가다 언뜻 본 것 같다. 영화 속에서 두 인물 다 큰 비중이 있지 않고, 또, 뭐랄까, 겉돌거나 소외된 느낌이 들었는데, 이를 포스터가 보상하는 듯해서 또 좋았다.

—박쥐

2012년 6월 10일 일요일

오랜 만에, 책읽는 여인상

blogin.com · 2012-06-10


조엘 피터 위트킨의 2011년 作. 이 사람의 회고전이 파리 국립도서관의 리슐리외 분관에서 3월부터 열리고 있다. 7월까지. 국립도서관 소식지에 실린 이 작품이 맘에 꽤나 들어 가봐야겠다 생각하고 있는 중. 그렇게 생각만 하다 놓친 전시가 올해 들어서만 벌써 몇 개째 되지만. 그리고 짧고 부족하게나마 감상도 써보리라. 하이브리드를 키워드로 해서. 이렇게 생각만 하다 실행에 옮기지 않은 계획이 벌써 몇 개째인지 모르겠으나.

가능하면 화질이 좀더 좋은 사본을 다시 올려 보리라던 약속은 그래도 어떻게 지켰네. 사진은 위트킨의 또 다른 전시가 열린 ' target='_son'>http://www.baudoin-lebon.co ... 7/joel-peter-witkin> 갈레리 보두앙 르봉 에서.

' target='_son'>http://estampe.hypotheses.org/387> 여기 에 가면 더 좋은 사진 열람 가능. 판화 전문 블로그라 그런지 웹에 올린 사진인데도 확실히 질이 다르다.

more...

이 작품의 제목은 Interrupted Reading. 1999년 작.

흠. 요샌 어째 노쇠한 육체에 자꾸 눈이 가고, 볼 때마다 눈물이 핑 돈다.

문득 든 생각 (어휘 및 개념 사용에 문제가 있으나 양해를). 위트킨의 작품들은 오로지 단 하나의 판본으로만 존재한다 한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사진이나 판화임을 감안하면 의외다. 그의 작업이 사진이든 판화든 단순히 "찍어내는" 데에 머물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판화는, 시대가 기술적 복제를 허용하는지의 여부와 무관하게, 복제를 본성, 최소한 매체/매질 차원의 본질적 요소로 가져 오지 않았는가. 장르를 막론하고, 기술 복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작품, 그러니까 "원본" 제작에 있어서 복제 기술에 대한 의존도마저도 나날이 높아져 가는 이 시대에, 오로지 하나의 판본으로만 존재하는 판화. 하이브리드보다 이 지점을 좀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듯.

—박쥐

2010년 11월 9일 화요일

루시드폴 풍의 시작

blogin.com · 2010-11-09

때아닌 루시드폴 풍의 습작. 푸훗.

난 믿어요 은밀하고 조심스레

당신과 나 좋은 친구가 될 거라고

당신은 눈으로 말하죠

"당신도 나와 같은 아픔을 가졌군요

당신의 아픔 알아요 이해해요 당신을

이해하고 싶어요 어슴푸레하게나마"

입술로는 차마 못한 그 말이 눈빛으로 전해질 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따스해지는 걸요

그걸로 족해요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

혹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고 싶더라도 

그냥 지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세요

나도 제자리 걸음 하며 여기 가만히 있을게요

한걸음에 달아 당신 품에 안기고픈 맘 꾹 참으면서

대신 당신의 그 따슨 눈빛 가슴에 푹 새기면서

—박쥐

2010년 11월 3일 수요일

마녀들은 사바스를 준비하고 나는 잃은 것을 찾아 제자리 걸음을

blogin.com · 2010-11-03

>무의식에서 아니 손끝에서 나오는대로. 게다가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상황. 배터리는 20%밖에 남아 있지 않고, 아이팟은 10초 간격으로 그 사실을 전하는 중이며, 게다가 이 무선 인터넷 네트워크는 불안정하기로 이름이 높고 또 명성을 확인이라도 하라는양 역 4분 간격으로 접속을 끊어놓는다. 자동 기술을 (참, 잊을 뻔했다. 아이팟의 자동 입력 기능을. 방금만 해도 자동기술을 자동차극장으로 바꿔 놓았다) 실천하기에는 최적의 조건. 도전에 취미가 있고 도전이 극한의 경험에 접근할수록 쾌를 느끼는 경우라면 더더욱.

만성절이 지난 지금 마녀들에게 진짜 악몽은 이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최소한 성탄까지는.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 아님 최소한 움직이거나.

—박쥐

2010년 10월 29일 금요일

2년 전 이맘 때

blogin.com · 2010-10-29



꼭 2년 전, 10월의 마지막 사흘 동안이었다. 스위스 베른과 로잔으로 혼자 떠난 것은. 베른은 아인슈타인이 밀레바와 결혼해서 애를 키우고 특허청에서 일하면서 솔로빈, 베소 등의 친구들과 "올림피아"라는 이름의 서클을 만들어 세미나를 하면서 살던 중, 마침내 물리학을 뒤흔든 논문을 발표하기까지, 가장 젊고 빛나는 시절을 보낸 바로 그 도시. 로잔은... 부끄럼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당시 그곳서 유학하고 있던 루시드폴의 "발자취"를 느껴보겠다는 명목으로 무작정 목적지로 집어넣었으나, 그보다 내 인상에 깊이 각인된 것은, 드넓은 호수, 그 뒤로 펼쳐진 알프스 산, 호숫가에서 갈매기와 오리와 백조가 한 데 어울린 광경, 생각보다 큰--이 표현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만-- 도시 규모, 말끔하고 안정돼 보이는 공원이며 주택가, 중심의 교회를 빙 둘러싸고 골목마다 가게들이 언덕을 덮은 도심, 무엇보다, 개관 70주년을 맞아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의 Top Hat 을 무료 상영하던 영화관, 상영 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며 수줍게 인사했던 영화관 주인 할머니 등등이었다.

충동적이요 즉흥적으로 감행한 여행. 이런 여행을 그 이후로는 해 본 기억이 없다. 충동적이거나 즉흥적이되 사람들과 함께였거나, 아님 홀로이되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떠났거나. 그러고 보니 스위스 때도 나름 이것저것 계획을 많이 세우긴 한 것 같은데... 아무리 해도 좀처럼 늘지 않는 여행 실력과 도대체 발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삶 전반에 관한 내 특유의 어리어리함 덕분(?)에, 유럽의 고도들은 모름지기 복잡하고 좁은 옛 골목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녀야 제맛, 이라는 내 원칙은 충분히 고수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어떨까? 그동안 얼마나 발전했는지 시험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면서, 갑자기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해야 할--정확하게는 해놨어야 할-- 일들을, 미루고 미뤄둔 것도 모자라 닥치기로 하면서도 전혀 능률 없이 하고 있는 통에, 하루에도 몇 번씩, 백석의 "북관의 계집"이 떠오를 만큼 절망스러운 이 상황에.

—박쥐

2010년 9월 14일 화요일

교회에 나갈까 고민하는 친구에게

blogin.com · 2010-09-14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 는 말이 make sense 하는 건지, 한다 해도 정말 위로가 되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정말 누구나 다 그럴 때가 있는 것 같아. 의지할 대상을 구하고 싶고, 기왕 의지할 거면 그 대상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완벽한, 그리하여 이 세상을 초월해 있는 존재였으면 좋겠는, 그런 때 말야.

나도 그랬고, 그럴 때 성당에 간 적도 있지. 일요일마다 가끔, 심지어 이번 일요일에도 그럴 하는 생각을 했었어. 가서 그냥 앉아 있는 것만으로, 눈으로 꽤 볼 만한 성당 건축물이나 장식물을 즐기고, 또 귀로는 꽤 들을 만한 음악을 생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안정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기도 하더라고. 쉽게 오는 만큼 쉽게 사라지기도 해서 문제지만.

안정의 수단을 꼭 종교에서 찾을 필요는, 또 그 종교가 기독교만큼 "초월적"일 필요는 없는 것 같아. 나한테 성당은 미술관이나 영화관 가는 일이랑 똑같거든. 이렇게 심미적인 쾌를 제공하고, 이것을 다시 "전통"으로 남기는 것만으로 기독교, 적어도 천주교는 자신의 사명을 충분히 한 것이고, 적어도 이것만으로도 내겐 존재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어. 이건 순전히 기독교가 이곳에서 오랜 역사와 권력을 유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과정이 어땠는지와는 별개로, 결과적으로 나는 어쨌든 그 덕에 위안을 얻고 있는 셈이야.

그렇지만 종교에서 그 이상을 구할 수 있을까? 삶의 지침이나, 살아갈 이유, 심지어 원동력이나 동기 같은 것까지. 나 역시, 착한 행동이나 가상한 노력 등등은 언젠가 보상을 받고, 나쁜 행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대가를 치루게 된다, 등의 비합리적인 믿음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게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알다시피 신이나 혹은 다른 자연 법칙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정말 각 인간들에게 고유한 '자유의지'란 게 있는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철학적 문제 중 하난데, 이건 도대체 판결이 날 수 없는 문제라는 게 내 생각이야. 각자가 가진 신념에 따라, 혹은 입맛에 따라, 맞는 걸 선택하고 그걸 "믿고" 사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오히려 아까 말한 지침, 이유, 원동력, 동기 등등은, 내 경우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 같아. 내가 의지로 부른 것이든 아니든 간에. 참 이상한 일이지? 이번에 내게 이 모든 걸 선사한 건 너였어. 지난 토요일 너와의 통화 이후, 정말 거짓말처럼, 정신과 열정을 되찾았어. 내가 네게 비슷한 선물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마도 지금쯤이면 넌, 발표 준비에 본격적으로 돌입해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성공적인 발표라는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지 않을까.

내 보잘 것 없는 믿음이 "마법" 가루가 되어 대서양을 건너 네게 뿌려지기를.

파리에서 지선.

—박쥐

2010년 8월 29일 일요일

로메르, 여름, 그리고 그의 여자들

blogin.com · 2010-08-29



바야흐로 여름. 바캉스를 맞은 파리는, 원래는 '공백'을 뜻했던 '바캉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지하철, 버스, 백화점, 거리, 까페, 그 어디고 할 것 없이 외지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들을 보면서, 아니, 정확하게는 그들의 틈 안에서 또는 그들과 시선을 나란히 하면서 (그들에 대해 뭇 파리지엥들마냥 철저히 "관찰자 시점"을 취하기란 내게 언제까지나 불가능한, 또는 경계해야 할 일이리라.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자각과, 이곳에서 7년째 살고 있는 이상 완전히 외지인인 그들과는 그래도 좀 다르리라는, 야릇하고 알량한 우월감이 내 안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부끄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가끔 로메르를 떠올리며 혼자 웃곤 한다.

이 모든 것이 아마도 로메르에게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풍경이었을 것이다. 여름의 파리는 미리 준비를 하지 못했거나 동행을 찾지 못해 휴가를 떠나지 못한 한심한 사람들이나 남아 있는 곳이 아니던가 (처음에 세웠던 휴가 계획이 좌절되자 망연자실해 하던 [녹색광선 Le rayon vert]의 델핀을 생각해 보라). 파리지엥이 아니라 해도 여름을 파리에서 보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해도 잘 들지 않는 데다가 툭하면 비가 오기 일쑤고, 바다나 그 밖의 "자연"을 만끽할 만한 공간이 거의 없거나 한없이 부족하고, 아무래도 도시적 일상으로부터 완전히 탈출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로메르가 여름을 사랑한 것은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 [녹색광선] 외에도 [남자 수집가(?) La collectionneuse], [클레르의 무릎 Le genou de Claire], [해변의 폴린 Pauline à la plage], [여름 이야기 Conte d'été] 등이 "피서지에서 생긴 일"을 그리고 있다. 여름 휴가 기간 동안 벌어진 사건이 주요한 모티브로 등장하는 [친구의 친구 L'ami de mon amie]나 [겨울 이야기 Conte d'hiver]도 빼놓을 수 없겠다.

왜 휴가지인가? 로메르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각자 고유한 삶의 원칙과 태도를 가지고 이를 완강히 고수하는 사람들이다.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답답해 할 정도로. [겨울 이야기]의 펠리시는 소식이 끊겼으며 재회 가능성이 그야말로 백만 분의 1인 옛 애인--이자 딸아이의 아빠--을 5년 째 기다리고 있고, [해변의 폴린]의 폴린은 주변 어른들의 애정 행각(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녹색광선]의 델핀은 자신이 바라는 "꿈의 휴가"를 위해 계속해서 떠나고 돌아오는 일을 반복한다. 자신의 운명을 틀어쥐고 그것을 스스로 개척해 가는 그들이 적어도 휴가지에서만큼은, 아니 오직 휴가지에서만, 운명(destin)의 힘이 아닌 우연(hasard)의 힘에 이끌린다. 평상시 그들의 삶에 우연의 여신이 개입할 여지는 극히 적다. 여신으로서는 그들이 낯선 곳에 떨어져서 잠시 긴장을 늦춘 사이, 바로 그 틈을 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단 한 번 잡은 이상 이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쉽지 않게 잡은 만큼 더더욱.

우연의 여신은 녹색광선으로 짠 옷을 입는다

http://www.dailymotion.com/ ... 13drj> name="allowFullScreen" value="true">http://www.dailymotion.com/swf/x13drj width="480" height="389" allowfullscreen="true" allowscriptaccess="always">
Eric' target='_son'>http://www.dailymotion.com/ ... the-dance-floor>Eric rohmer on the dance floor
envoyé par herve31.

' target='_son'>http://www.dailymotion.com/ ... herve31.



재미있는 것은 이 우연의 여신들이 대부분 선하며 늘 친절만을 베푼다는 사실이다. 펠리시는 옛 애인을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나고, 델핀은 마침내 '우연'히 맘에 드는 사람을 만나 최고의 휴가를 만끽한다. 너무 작위적이지 않냐고?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이 작위성은 적어도 로메르 세계 안에서는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그가 독실한 천주교도인 동시에 파스칼의 충실한 독자였다는 사실은 차치한다 하더라도 (사실 이 둘은 차치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그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특히 파스칼은 영화에서 두 번, 희곡에서 한 번 총 세 번씩이나 직접 인용된다), 나는 이것이 작가의 자의식이 근본적으로 허구라는 속성을 지닌 영화라는 장치 안에서 여러 겹에 걸쳐 투영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카이에 뒤 시네마](로메르 특집호)의 한 필자가 지적했듯, 작가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인물로는 [겨울 이야기]의 로익을 꼽을 수 있다. 로익은 철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사서로 근무 중인, 펠리시의 표현에 따르면 너무 "앵텔로"한, 즉 먹물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인물이다. 게다가 카톨릭.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나 영혼의 불멸/부활 등의 카톨릭 교리들을 "신화"로 치부하면서 믿지 않는다. 반면 펠리시는 기존의 종교가 아닌,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확고한 "믿음"(펠리시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내밀한 확신conviction intime")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로익은 말한다. "내가 신이라면 너를 특별히 귀애할 거야. 왜냐하면 너는 부당하게 [옛 애인의 소식두절이라는]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까." 바로 이거다. 그(로익-로메르)는 천주교도이나 그저 소박하게 믿음을 가지고 살기에는 너무 회의적이며 현실적이다. 그런 그에게, 비현실적으로 비칠지언정, 그 어느 종교적 또는 지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자기만의 고유한 확신을 가지고 사는 그녀(펠리시-다른 수많은 로메르 영화의 여주인공들)들은 경이의 대상이다. 만약 실재했더라면 그녀들 대부분이 현실 속에서 부당하게 고통을 당했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 그녀들에게, 그는 작품 내에서의 창조주라는 위치를 이용해 축복을 베푼다.

초기를 제외하고, 특히 여성이 로메르 세계의 중심에 서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주체/주관으로서의 '그'와 객체/대상으로서의 '그녀'의 분리가 두드러진다. 첫 장편 [사자 자리 Signe de lion]에서부터 [오후의 사랑 L'amour, l'après-midi] 까지) 까지의 '그'들도 고집스럽게 자신의 이념/이상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만큼은  '그녀'들 못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감독이 '그'들에게 보내는 시선이 그'녀'들에 대한 것만큼 애정에 넘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몹시 자조적이고 냉소적이다. 이들에 대한 우연의 여신의 역할 또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반면에 '그녀'들은 그런 '그'들에게서 속물의 탈을 걷어내고 남은, '순수'한 관념론자/이상주의자들의 현현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로메르가 되고 싶어했던 그 무엇이다.

위의 클립, "춤추는 로메르"에서 우리는 이상주의자로서의 그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누릴 수 있다(비단 이상주의자로서가 아니라 '인간' 로메르가 가시화된 드문 사례이기도 하다. 그는 카메라에 자신을 노출하는 일을 극도로 꺼렸다. 남아있는 그의 인터뷰는 서면이나 라디오 녹화가 대부분이다). [녹색광선]에서 그는 진짜 '녹색광선'을 찍고 싶어했고,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이 드문 현상을 카메라에 담는 데에 성공하지만, 필름에 찍혀 나온 결과를 보고 적잖이 실망한다. 그가 쓰던 "원시적"인 장비들과 좋지 않은 필름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일. 결국 그는 최종 편집본에 초록색을 덧칠하는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영화의 마지막 샷에서 다소 작위적인 초록빛 선을 보게 된 이유다.

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했던 로메르는 10년 후 [여름 이야기]를 찍으면서 다시 기회를 잡는다. 그러나 며칠의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최후의 시도를 마친 후, 포기를 선언한 날, 마침 있었던 나이트 클럽에서의 촬영을 마친 그는 무대에 올라 미친듯이 춤을 춘다. 젊은이들 틈에서, 젊은이들이 듣는 댄스 음악에 맞춰서. 그의 면면--지극히 고전적인 예술 취향, 수줍고 조심스러운 태도 등--을 아는 사람들은 이것이 얼마나 이례적인 일이었는지 알 것이다. 그리고 가늠해 보리라. 그에게 녹색광선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위의 [녹색광선] 포스터는 http://ia.media-imdb.com/im ... 1._SX354_SY500_.jpg> imdb 에서.

—박쥐

2009년 4월 24일 금요일

물속으로 잠겨드는 너

blogin.com · 2009-04-24

http://www.ina.fr/divertiss ... .html> name="allowFullScreen" value="true">http://www.ina.fr/divertiss ... urg-la-noyee.fr.html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always" allowfullscreen="true" width="425" height="344">

"너는 추억의 강으로 떠나가고,
나는 돌아오라 외치며 강기슭을 달려가네

너는 그저 느리게 멀어져 가고,
네가 아무리 애써 달려도
나는 조금씩 네게로 다가가네

물 속에서 가까스로 떠오를 때마다
너는 망설이네 그리고 나를 기다리네
치마자락을 걷어올려 얼굴을 감추며
얼굴이 상할까 하는 두려움에,
그리고 부끄러움과 후회로

너는 이제 그저 길잃은 배
물에 빠진 개일뿐이지
그래도 난 여전히 너의 노예
물속에 몸을 담그네

추억이 멈출 때 우리는
망각의 망망대해 속에서
가슴이 그리고 머리가 찢어진들
결코 맺어지지 못하리"

이 노래를 처음 접한 것은 카를라 브뤼니의 첫 번째 앨범을 통해서였다. 다른 노래들도 나쁘지 않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세르주 갱스부르가 작곡한 바로 이 곳, "La noyée"다. 브뤼니의 작곡 솜씨도 나름 훌륭하지만, 그래도 명실공히 천재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갱스부르만 하랴. 물론, 브뤼니가 이 노래에 대한 나의 인상에 있어 작지 않은 부분을 차지함은 분명하다. 내게 이 노래의 존재를 알려준 것은 그녀니까. 또 하나 덧붙이자면, 편곡은 둘째치더라도, 적어도 그녀의 우수어린 목소리 만큼은 이 노래와 아주 잘 어울린다. 이를테면 안나 카리나(그녀도 자신이 만든 영화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보다는 훨씬 낫다는 말이다.

이렇게 시간을 거꾸로 거스르고 길을 굽이굽이 돌아 발견한 갱스부르의 이 '정격' 연주. 그런만큼 내겐 매우 값지게 느껴진다(고맙다, 유튜브!). 그 어느 노래가 예외가 되겠냐만, 갱스부르의 곡들은 특히 연주자/해석자/편곡자를 아주 많이 '타는' 것 같다. 같은 "Je t'aime moi non plus"도 제인 버킨과 부른 버전과 브리지트 바르도와 부른 버전이 상당히 다르다.

다음은 마구잡이 인상 비평 :

물속으로 잠겨드는 여인(오필리어), 아니, 물의 여인(운디네), 물에 감겨 올라간 치맛자락. 공무도하가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물론 공무도하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상세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수면, 즉 '네'가 떠올랐다 잠겼다 하는 그 표면 또한 지배적인 인상 중 하나다.

이별 멀어지는, 잡힐 듯하지만 끝내 잡히지 않는(아킬레스와 거북이? 무릇 시간과 운동의 속성이란 그런 것이겠다), 떠나는 자의 뒷모습... 떠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이 아름답다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아무리 끝까지,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감추면서"까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고자 한들, 마지막은 기억 속에서 변형되거나 무화될 뿐이다...  

이번에도 역시...

용두사미가 돼버렸다. 사실 시를 평하듯 가사 비평을 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일부러 번역까지 했거늘...

손을 놓은지 오래여서일까, 문장력이나 필체에 슨 녹이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 또 다른 문제는, 핵심을 피해서 끝없이 우회하는 고질병이다. 어릴 적부터 난 늘, 정면돌파할 방법을 충분히 알면서도, 목표물을 빙 둘러 내 스스로 미로를 쌓아 일을 어렵게 만들곤 했다. 논술을 공부해야 했던 시절에는, 매뉴얼대로 글쓰는 일이 너무 괴로운 나머지 이 버릇을 글쓰기에도 적용시키기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확장된 글버릇은 학부 시절 시험을 치를 때나 명색이 철학도가 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진지하게 글을 써야할 때조차 위력을 발했고, 또 여전히 발하는 중이다.

어쨌든 이번에는 그저 "이전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들을 일 없을" 이 갱스부르의 노래를 듣는 일에 만족하기로 하고... 그래도 여전히 가슴 속에 어떤 아쉬움 같은 감정이 남는다면, 별 수 있으랴, 달리는 수밖에.

http://www.youtube.com/v/mj ... &fs=1> name="allowFullScreen" value="true">http://www.youtube.com/v/mjwCWSOp9DI&hl=fr&fs=1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always" allowfullscreen="true" width="425" height="344">

—박쥐

2009년 2월 14일 토요일

천문학의 해

blogin.com · 2009-02-14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발명, 처음으로 달의 표면과 목성의 위성, 토성의 고리 등등을 관찰하고, 케플러가 Astronomia nova 를 펴낸 지 400년이 지난 것을 기념해서 UNESCO는 올해를 천문학의 해로 지정했다. 천문학사가들 중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서구중심적 사관의 발로라 비판하지만, 뭐, 꼭 갈릴레오랑 케플러만 경배하라는 것이 유네스코의 뜻은 아닐 터. 어차피 이런 기념 의례라는 것이 천문학적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는 한갓 순간에 지나지 않는가. 다만, 천문학이 인류에 기여하는 바라고는 기껏해야 GPS 정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태반인 이 현실에서, 그것의 역사를 돌이켜 보는 일은 꽤나 의미있는 일일 듯하다. 가능하다면 GPS 외의 기여도를 추적할 수도 있겠다. 예를 들면, 나사와 거래하는 독일 Zeiss 사의 렌즈가 없었더라면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 에 등장하는 촛불 신--인공 조명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촛불의 빛으로만!--은 불가능했으리라는 사실이라든지.

나선 운하 사진은 나사의 천문학의 해 사이트(http://astronomy2009.nasa.gov/)에서 가져왔다.

—박쥐

2009년 1월 25일 일요일

푸앵카레

blogin.com · 2009-01-25


푸앵카레가 1909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던 날, 신문에 실렸던 사진이다.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가져왔다.

1854~1912. 프랑스 낭시 태생의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마지막 보편적 지식인. 프랑스 학술원(아카데미)과 과학 아카데미라는 양대 엘리트 기관에 선출된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 기하학의 공리와 역학의 원리들이 규약임을 주장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규약주의'의 창시자. 스웨덴 오스카 2세의 환갑을 기념한 콩쿠르에 "3체 문제와 동역학 방정식"이라는 논문을 제출, 1등을 수상하고, 이를 통해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이라는 구절로 유명한 카오스 이론의 서두를 장식한 장본인 (여기에는 아주 극적인 비화가 숨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논하기로 한다)... 그를 수식하는 말은 이밖에도 무수히 많다. 하나 덧붙이자면... 그를 알던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 "심성이 곱고 까다롭지 않다"고 평했다 한다.  

이곳에서 그에 대해 그리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늘 맘에 걸렸더랬다. 사실, 그와 만난 지 벌써 4년이 넘어가는데도, 그에 대해서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게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다. 배움과 독서가 짧은 탓이다.

최근에 그의 철학과 관련해서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길고 긴 밤 순간적으로 번쩍이는 번갯불" (푸앵카레 : "사유란 길고 긴 밤 순간적으로 번쩍 빛나는 번갯불과 같다. 그렇지만 그 번갯불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전부다") 같은... 가장 기초적인 부분을 이제서야 깨닫다니, 한심스럽다. 단지 언어나 수학적으로 테크니컬한 부분에 대한 무지에서 온 문제는 아니고, 이해를 가로막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논문 안팎의 삶에서 부딪치는 문제들 중 상당수도 그 "무언가"들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특별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는, 일단 없애고 난 뒤에는 별 일 아닌 것처럼 여겨질 것들. 변화를 두려워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을, 그런 것들.

  

그러니까 그 깨달음이 무엇인고 하니...


일단 그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문의 체계에 대한 선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수학에 관한 논의는 물리학이나 역학에 대한 그것과 다르고, 수학의 경우도 기하학, 수론(산술) 그리고 대수학에 대한 얘기가 각각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무체계성 혹은 비체계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철학자'로 분류함에 있어 주저하곤 한다. 실제로 그가 남긴 철학서들은 본격적인, 이를테면 칸트의 비판서들만큼의 논리정연한 체계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플라톤의 대화편들에 가깝달까. 공화국 안에 수학, 정치학, 윤리학, 과학, 인식 이론 일반 등 모든 이야기가 한꺼번에 펼쳐지듯이, 푸앵카레의 과학과 가설이나 과학의 가치 같은 저작들에는 이른바 엄밀과학(exact sciences) 각 분야에 대한 담론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다.

근대철학 이후 확립된 어떤 정형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다원적' 면모는 낯설게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면모가 체계의 부재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플라톤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더욱이, 19세기 이후 그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그러니까 더 세분화되고 정교화된 과학을 접한 사상가라면 '과학'을 대문자의, 일의적인 그것으로 취급하는 일에 몹시 부담을 느꼈을 것임에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각 과학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그것들을 통일하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원리--그것이 현상적인 차원에 머물든(콩트의 경우) 아니면 더 통일적이고 제일인 원리, 즉 칸트식으로 말하면 '자연과학의 형이상학 원리'가 되든 간에--를 반드시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종류의 '원리'가 반드시 한 사상가를 '어엿한' 혹은 '훌륭한' 철학자로 만드는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푸앵카레의 사유를 어느 정도 이해하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은, 기본적으로 내 이해력이 부족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를 어떤 정형화된 틀에 무리하게 끼워맞추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흔히 일컬어지듯이 직관주의자라면 무한을 인정하지 않거나 무한 중에서도 잠재적인 그것만을 받아들여야 할 듯한데, 왜 정신의 무한성, 특히 단 한 번에 무한히 진행되는 수열이나 추론의 계열을 직관하는 능력을 중시하는가? 이러한 직관주의가 규약주의와 양립가능한가? 언뜻 보면 푸앵카레는, 한편으로는 기하학의 공리나 역학의 원리들의 경우, 정신이 경험에 기대어 선택한 규약임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규약들의 임의성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는, 어떤 영원 진리로서의 '구조'가 실재함을 누누히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일관적이지 않다 보인다. 또 물리학의 경우, 그 법칙과 원리들을 규약주의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잠정적으로나마 내린 결론은, 각 분야들의 독자성을 우선적으로 인정해야 그의 철학적 논의들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니 나를 일여 년간 괴롭혔던 '상대성 원리'에 대한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다. 상대성 원리는 한편으로는 경험적으로 획득되며 또 경험을 통해 반증가능한 다른 물리학의 법칙들과 유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이 그 선택에 있어 경험을 참조하긴 하나 일단 한 번 선택된 이후에는 결코 반증될 수 없는 규약들과 유사한, 양가성을 지닌다.* 문제는, 아인슈타인의 경우 상대성 원리의 이러한 속성을 단번에 알아차린 반면, 푸앵카레는 계속해서 그 양가성에 대해서 숙고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당대의 모든 물리학 신보들에 통달해 있었고, 그 당대의 물리학이란 것이 다루던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상대성 원리의 실험적 검증이었던 때문으로 사료된다.**

------------------
* 여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후자의 측면이다. 거기에 우주론적 사유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왜 규약들은 정신의 발명품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성을 띠는가? 반증을 위해서는 모든 가능한 경험치들을 실험을 통해 조사해야 하는데, 우주는 그 자체로 실험불가능하며 경험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도 나중에 논하기로 한다.

** 참고로 이 글은, 파업으로 수업이 취소되어 이리저리 방황하던 중 발을 디딘, 내가 다니는 학교 컴퓨터실에서 쓴 것이다. 프랑스 기관 소속의 컴퓨터에서 한글을 입력한 것은 칸느 영화제 이후로 처음이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지난 목요일 대대적인 파업 이후, 그 후폭풍이 잔잔하지만 무시하지 못할 만큼 지속되고 있는 듯하다. 특히 강사-연구원들 사이에서. 이에 대해서도 나중에...

그림 : 폴 모니에(Paul Monnier)가 그린 푸앵카레의 초상. 1946년 스위스에서 출판된 과학의 가치(La valeur de la science) (초판은 파리, 1905년)에 실렸다.

—박쥐

2008년 11월 10일 월요일

집단장

blogin.com · 2008-11-10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나?

지금의 집, 뒤프렌느 빌라에 살기 시작한지도 이제 3년이 다 되어 간다. 매혹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집에 대한 첫인상에 대해. 누군가 은근히 가꾼 듯한 정원, 빨간 색깔의 현관문, 옛 벽난로의 흔적, 그 위의 낡은 거울, 창가로 손에 닿을 듯한, 파란 잎새들과 빨간 열매. 그래서, 설치된 난방 기기가 아예 부재하다는 치명적인 결점에도 불구하고, 다른 집들을 더 찾아보지도 않은 채로, 결정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다 작년부터 이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틈이 날 때마다 집 방문 약속을 잡았고, 인터넷에 접속할라치면 부동산 사이트부터 챙겨 보았으며, 길을 걸을 때면 부동산을 기웃거렸다. 집 건너편에서 공사를 시작한 것이 그 발단이 되었는데, 그 이후로, 정을 떼려고 그랬는지, 자꾸 이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윗집에 한 가족이 이사왔는데 그 집 아들이 공차기를 좋아한다든지, 알레르기 증상이 심해졌다든지, 허리가 아파졌다든지, 갑자기 추위를 타게 되었다든지, 도서관 및 학교와 집 사이의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든지 하는.

그러다 얼마 전, 결심을 했다. 환율이 극히 불안정하게 된 것이 결심의 가장 큰 이유겠으나, 다른 한편으로 1년 가까이 찾았으니 찾을 만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잃었던 정을 다시 찾아가는 중이다. 침대를 들이고, 몇 가지 가구들을 손보면서. 다행히 앞건물 공사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

그런데

왜 우울할까?

자가진단 : 주부우울증. 다 큰 아이들과 남편이 바깥으로 나간 뒤, 인테리어가 완벽할 뿐 아니라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집안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는 주부를 상상해 보라. 목표하던 바가 너무 싱겁게 달성되거나, 아니면, 나의 경우처럼, 수정된 상태로 달성되는 경우, 목표를 위해 돌진하던 에너지가 순식간에 소진되면서 혼돈에 빠진다. 혹은, 뭔가 더 덧붙일 것이 없나 고민하는 등, 달성되었는지의 여부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며 심지어 실존적인 고민에 빠진다.

그렇다. 사실 12 혹은 13구에 위치한, 중앙 난방에다가 30미터제곱에 600유로 이하인 집도, 지금의 집을 좀더 살기 좋게 만드는 것도, 진정한 목표는 아니었을진대...



---------------------------

보바리즘에 대하여 (시바에게의 답변을 대신하여, 일주일 후에 덧붙임)

우울을 떨치기 위해, 예전에 읽다가 그만두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던 보바리 부인을 다시 펼쳐든 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나쁘지는 않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왜"에 대한 답을 부분적으로나마 찾았으니까. 아니, 되찾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적어도 예전에는, 이 문제에 대해 지금만큼 무감하지는 않았으니까. '이 세상에서 여성으로서 산다는 것', 그것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난 그렇게 에마를 만났다. 그러면서, 그녀를 만나는 거의 모든 여성들이 그렇겠듯이, 그녀 속의 나와 재회했다. 계속해서 에마 주위를 드리우고 있는 플로베르의 그림자도, 그가 남성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마담 보바리는 내 자신이다"라고.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가 보바리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전형적인 '전지적 작가 시점'을 취할 때도 그 세밀하고 치밀한, 그리고 때로는 영화적인 상황 및 심리 묘사에 그저 탄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플로베르의 치밀함이 발자크의 그것과 다르다면, 그것은 전자의 '전지성'이 후자처럼 '거시적 관점'--그리하여 '사회학'을 가능케 하는--에서가 아니라 주인공 및 각 등장 인물의 내면에 침잠한 데에서 나오는, 미시적이고 내밀한 시선에서 비롯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 있어, 이렇게 제 3자로서,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독자로서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적다. 에마 보바리를 비극으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여성의 조건'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그녀로서 다른 누구보다 통렬히 절감할 수밖에 없었던. 이것이 '시골 의사의 부인이 삶에 염증을 느끼고 바람을 피우다가 재산을 날리고 자살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 통속적인 이야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보바리즘'은 '실제의 자신'과 다른, 이상화된 이미지를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한마디로 '주제 파악'을 못하는 과대망상증으로 정의된다. 맞는 말이다. 여성에게 있어 과대망상 및 자아도취는 자신에게 절대로 우호적이지 않은 세상에서 필요불가결한 생존전략이다. 때로 치명적 결과를 가져오기는 할지언정...

—박쥐

2008년 9월 20일 토요일

키제트

blogin.com · 2008-09-20

뜻하지 않게 스캐너가 생긴 기념으로...



올리려 했으나, 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구글링 검색 결과 나온 그림으로 대신해서 올린다.

검색 결과, 이 그림이 낭트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타마라 드 렘피카가 자신의 딸 키제트를 꽤 많이 그렸다는 사실도. 원래 그림이 내가 가진 정사각형 모양의 엽서와는 달리 길쭉한 직사각형의 판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 그림을 보면 정말 책 읽는 여자가 위험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저 꼬마 여자애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제목이 "핑크빛의 키제트"인데, 그림에서 핑크빛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어쩌면 원작에서는, 아니 좀 더 그럴듯한 복제판에서는 키제트의 옷이 분홍색을 띠고 있을지도). 작가가 이 색조를 즐겨 썼던 것 같긴 하나...(그렇지만 그녀는 더 밝은 그림들도 많이 그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책읽는 딸래미를 이토록 어둡게 그렸단 말인가.) 원경을 보면 더 암울해진다. 모나리자의 뒤태를 장식했던, 평화로운 목가 혹은 시골 풍경이 산업화된 도시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그것들을 저 꼬마 여자애가 감싸는 게 아니라 압도하고 있다. 역시 책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낭트

낭트에 발길을 디딘 것은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7년 전의 일.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한 화랑에서 자신이 그린 거라며 건넨 엽서 하나 뿐. 덕분에, 처음에는 분명 조용하고 깨끗하며 어느 정도 포근하기까지 한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건만, 지금은 뭔가 뿌옇고 아련한 이미지만 남아 있다. 안개에 싸인 도시에 대한 안개에 싸인 기억.

그러고 보니 작년에 본 에마뉴엘 무레의 영화 "제발 키스 한번만 해주세요 (Un baiser, s'il vous plaît)"에서 낭트가 등장했었다. 거기에서 업무차 낭트에 가게 된 여자 주인공은 우연히 만난 근사한 한 그 지역 남성과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다. 키스 한 번만 하면 안되냐고 묻는 남자에게 그녀는, 바로 그 단 한번의 키스로부터 시작된, 자신의 친구가 겪은 비극 하나를 길게 들려준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그와 작별의 키스를 나누게 된다.

영화를 볼 땐 그녀가 남편을 "배신"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건 그녀의 정조 관념 때문이라기보다는, 배경인 낭트라는 도시가 사람 하나 없고, 자못 경건해 보이며, 도대체 우환이라곤 겪어보지 않은 듯한 탓도 있을 거라고 추측하면서. 그 어떤 종류의 모험(aventure)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그 도시.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지금은 든다. 작별의 키스 이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영화가 단지 침묵하고 있었을 뿐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낯선 곳에서 사람은 때로 도덕적 가치나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가. 그곳이 안개에 싸여 있다면 더더욱 그럴 테다.

—박쥐

2006년 3월 12일 일요일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소

blogin.com · 2006-03-12

지금 동네 앞 맥도날드에서 무선 인터넷을 하고 있는 중. 예전에 그토록 경멸하거나 경원시했던 맥도날드가 내 살아있음을 증거케 해주는 몇 안 되는 장소로 변하다니.

이사한 지 한 달. 새 동네에도 서서히 정이 붙어 간다. 어떤 관광 책자에 '아니, 여기도 파리야?'하고 묻게 만든다는 곳으로 설명된, 도시 외곽의 한적한(그렇지만 부유해 보이지는 않는) 주택가를 연상케 하는, 낡고 삐걱대지만, 인터넷도 전화도 쓸 수 없지만, 내게는 한없이 아늑한, 이 곳.

그렇게 살고 있다. 이제 봄만 오면 된다.

—박쥐

2006년 1월 2일 월요일

약속, 부질없는

blogin.com · 2006-01-02



2006년이다. 이렇게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해가 오는데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날짜나 시간 가는 데에 무심한 것과 무감한 것의 차이. 난 대체로 무감하나(워낙 둔하므로) 무심하지는 않다(둔한 주제에 소심하므로). 중요한 것은 오직 지금/여기hic et nunc 뿐이라고 주장하는, 일종의 세월아내월아주의자라고나 할까.

새해를 맞으러 남불의 리옹에 갔다가 1일 아침에 돌아왔다. 그곳에 사는 이들에게 파리는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며 툴툴거렸는데, 참 이상도 하지, 그곳서 머물던, 그리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심각하게 나쁘진 않은 호텔의 침대보다, 돌아와 누운 내 작은 다락방 매트리스가 더 편하고 아늑하다. 잠자리의 질이나 취침 시간의 양으로만 본다면 당연히 전자에서의 잠이 후자의 그것을 앞섰어야 했거늘. 

둘째날엔 눈이 많이 왔다. 영하 6도의 날씨에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고도의 르네상스풍 돌길을 활보하는 일은 추위를 좀처럼 타지 않는 내게도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눈' 덕분에 눈이 배로 즐거워졌으므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라며 내민 누군가의 손에 마음은 그 어디에도 비할 바 없도록 포근해졌다.

몇 가지 다짐을 주고 또 스스로도 했다. 나쁜 습관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 그리고, 대부분의 나쁜 습관들이 그렇듯, 끊기 어려운 것들. 그런 종류의 습관을 끊겠다는, 실현하기가 불가능하진 않지만 결코 쉽진 않은 다짐은 애초부터 하지 않는 게 낫다. 시나브로 줄여가겠다는 것, 그것이 나의 다짐이다.

그 중 하나는 이 블로그에 관한 것으로, 포스팅의 불규칙성, 특정 카테고리에의 편중, 뭐 이런 것들을 줄이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더불어 '것'이라는 의존 명사의 사용도 줄여야겠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포스팅을 하겠다"라는 게 '다짐'의 범주에 집어넣기에는 너무 손쉬운 일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쉽지만은 않은 일일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독백의 형식이나 내용도 줄여야 할 듯하다. 어쨌든 이곳은 소통을 위한 공간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다소 뜬금없고 생뚱맞긴 하지만 이 멘트로 지금의 이 포스트를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 2006년 올해, 이 블로그를 찾는 이들에게도 좋은 한 해가 되길 빈다.

—박쥐

2005년 11월 25일 금요일

69년, 68의 그들은 젊었다

blogin.com · 2005-11-25



필립 가렐(Philippe Garrel)의 Les amants réguliers (영어로 하면 Regular Lovers 쯤 될까? 우리말로는 뭐라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는 68세대의, 68세대에 대한, 68세대에 의한 영화다. 68에 대해, 그때/거기에 있었던 이들에 대해 지금/여기에서 과연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감독은 지난 40년 동안 끊임없이 이런 의문을 던져왔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시대를 산 젊은이였던,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젊지 않은 감독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젊디 젊은 아들(루이 가렐, 〈몽상가들〉에 나온 그 미소년)과 그 또래 친구들의 입을 빌려 '그' 시대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 시대란, ''혁명''의 빛나는 순간에서부터 그것이 끝난 후 다시 돌아온 남루한 일상, 이전에 비해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는 삶까지를 포함한다. 사실 혁명의 현장, 그러니까 바리케이드 안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와중이라 해서 대단할 것은 없다. 물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비장한 각오로 무장하고 있었겠지만, 한편으로 언제 끝날 지 모를 대치 상태는 아직 어린 그들에게 긴장뿐 아니라 지루함의 연속이기도 했으리라. 경찰에 쫓겨 숨이 턱에 닿도록 달아나고, 모르는 사람 집의 문을 두드리며 도와달라고 외치는 그들에게서 '전사'로서의 면모보다는 한 나약한 인간, 아니, 겁에 질린 어린 아이의 모습이 엿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혁명'이 끝난 후, 그들에게는 채 이루지 못한 신념에 대한 어떤 미련도 남아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다른 위안 거리를 찾는다. 아편이라든지, 애인이라든지. 그렇지만 그러한 것들이 위안이 될 리 만무하다. 주인공인 프랑수아는 혁명에 가담했다가, 혁명 후에는 다시 '시인'으로 돌아가서 유산 상속자로 친구들을 먹여 살리다시피하는 앙투안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해서 살다가, 그러면서 아편과 여자 친구인 릴리에게서 정신적 위안을 찾다가, 릴리가 미국으로 떠난 뒤 쓸쓸히 죽는다(사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내게는 그 모든 것이 68에 대한 감독 자신의 자기 고백인 한편으로 동시에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젊음'에 대한 예찬으로 읽혔다. 그가 아들과 아들 또래들에게 보내는 시선에는 확실히 경이감이 어려 있다. 두려울 것이 없는,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든 것이 두렵기만 한 젊음. 세상을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념과 그 신념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용기가 젊음의 특권이라면,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욕구나 끝없는 방황 같은 것들은 젊음의 천형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젊지 않은 가렐에게는, 젊음의 그 천형마저도 부러움의 대상이다. 

어쩌면 이 68세대 감독은 그러한 '젊음'을 통해 실패한, 혹은 미완의 혁명에 대한 하나의 해명을 제공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실패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 자신이고 스스로 진 책임을 버거워 하는 것 역시 그들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아닌 우리는 죄를 덮어 씌우거나 면하거나 할 이유도, 자격도 없다. 그래도 당시에 너무 어렸거나 철이 없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며 그 때 가졌던 이상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땐 그랬지"라는 후렴구를 포함하는, 진지한 성찰이 결여된 "후일담"으로 일관하는 이들에 비하면 가렐은 얼마나 솔직하고 순수한가. 그의 변명은 고귀하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듣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었다. 

 

보너스 혹은 사족

http://www.cducinema.com/me ... eguliers_bavf_352.rm width=352 height=288 type=audio/x-pn-realaudio-plugin controls="ImageWindow" backgroundcolor="black" center="true" console="cons">
 http://www.cducinema.com/me ... eguliers_bavf_352.rm width=352 height=32 type=audio/x-pn-realaudio-plugin controls="ControlPanel" console="cons" autostart="false" prefecht="true"> 



- 영화를 보는 내내 장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를 떠올렸다. 전자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외모가 후자의 주인공과 너무 닮아서였다. 두 사람이 동일한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 모두 각각 3시간, 4시간이라는 긴 러닝 타임을 자랑한다는 점도 비슷하다면 비슷할 수 있겠다. 아, 물론,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내가 2003년 여름인가, 당시 아트선재에서 열렸던 으스타슈&가렐 특별전에서 두 감독의 영화를 마구 섞어서 본 후로, 아직까지도 두 사람을 헷갈려 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집에 와서 가렐의 베니스 영화제 기자 회견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감독 본인이 〈엄마와 창녀〉를 "본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두 영화 사이에 다른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 사실 내가 〈엄마와 창녀〉를 연상했던 가장 중요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을 보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영화의 시놉이나 배우, 특히 루이 가렐만으로 충분히 〈몽상가들〉을 연상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하거늘. 감독 자신이 자신의 영화에 대해 베르톨루치의 작년작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라는 얘기까지 한 만큼. 실제로 영화 안에서 여자 주인공이 69년 당시에 나온 베르톨루치의 영화 하나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기도 한다. 심지어 68 시위를 재현하기 위해 경찰 제복이나 경찰차 등등의 도구들도 〈몽상가들〉의 것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고 하니, 말 다했다.

- 영화를 보고 난 뒤 예고편을 접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공인 두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영화에서의 주연과 조연의 관계와 비중이 완전히 역전된 예고편이라니. 위의 동영상을 보면 카메라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젊은 남자가 주인공일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저 4분짜리 예고편은, 비록 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긴 것이긴 하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있다고, 다시 말해 예고편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관객을 동원하려는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저런 불친절한 예고편은 절대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불평할 이유는 없다. 덕분에 썩 괜찮은 뮤직 비디오 한 편을 덤으로 얻게 된 셈이니까. 리듬에 몸을 온전히 맡긴 채 즐거워 하고 있는 저들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만감이 교차한다. 입으로는 한숨이 나오는데 어깨가 절로 들썩인달까. 이런 식의 "작가적 고집"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 이 영화에는 "시의성" 있는 장면 하나가 등장한다. 경찰에게 쫓기다 한 건물로 들어가 어떤 집의 현관문을 두드린 프랑수아. 집주인은 프랑수아에게 자동차들에 불을 지른 사람들과 한패냐고 묻는다. 프랑수아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집주인이 말한다. "숨겨 달라고 할 것 같았으면 불은 지르지 말았어야지요."

그렇긴 해도 68년 당시에는 "긴급 사태"가 선포되는 일은 없었는데, 40년 전도 아닌 50년 전의 "전시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감각이라니.

—박쥐

2005년 11월 16일 수요일

서른 즈음

blogin.com · 2005-11-16

최근 이곳에서 일어난, 그리고 규모는 약해졌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끝나지는 않은, "소요" 사태는 내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고 있다. 나는 그렇게 멀리 있다. 그 동안은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이 거리가 날 힘들게 한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그 거리가 "안전 거리"의 역할을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논문 심사를 마친 지 한 달이 다 돼 간다. 아직 논문 등록이 남아 있다. 계획서를 본 교수는 "진지하다", 그리고 "하나의 베이스(une base)다" 하고 말했다. "더 깊게 공부하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베이스"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잠도 못 잤다. 너무 초보적이라는 뜻일까? 나름대로 기초나 근거를 갖추고 있다는 뜻일까? 다른 사람들의 말을 마디 마디 곱씹고 또 곱씹는 천형을 타고 난 나 같은 이에게 외국어는 형벌이다. 논문을 쓰면서 그들의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얼마나 웃고 울었던가. 그런 걸 보면 외국어가 축복이 되기도 하는구나. 사소한 말들이 기쁨을 주기도 하니까. 교수가 무심코 "다 잘 될 테니 걱정 말아라"라는 말을 던졌을 때 긴장이 해소되면서 몸이 한 순간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환희, 그러니까 카타르시스를 맛보기도 했었던 걸 보면.


어쨌든 이제 다시 시작이다. 그러고 보니, 한달 반만 지나면 우리 나이로 서른, 이 새로운 시작을 나이 서른에 맞게 되는 거구나. 늦었다거나 이르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그런 재미없는 생각들에 시간을 낭비할 틈 없이, 재미있게, 가수 아녜스 빌의 노래 제목(je n'ai pas le temps d'avoir 30 ans)처럼 "서른을 맞을 시간이 없이" 살고 싶을 뿐. 그렇게, 바쁘게. 

more...
... or less


대학 동기들과 꾸린 게시판에 올린 글 중 일부를 옮겨 왔다. 오랜 만에 적다 보니 자연스레 튀어 나오게 된 근황이나 그 밖의 다른 이야기들이 이곳의 독자들에게도 흥미를 주지 않을까 싶어서. "중복"이긴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친구는 없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오늘 이번 학기의 첫 수업을 들었다. 얼마 전 다녀 온 콜로키움을 빼면 정말 처음이다. 계절이 어느덧 겨울로 접어들었는데 이제서야 기지개를 켜고 있다니, 하고 한심해 하는 한편으로, 늦게 시작했다는 사실이 더 큰 동기를 부여할 지도 모른다고, 늘 그렇게 해오지 않았느냐고 자위하고 있다.

게다가 오귀스트 콩트가 살았던 집, 그가 썼던 서재에서 듣는 데카르트 기하학 강의라니, 동기가 유발되지 않을 리 없다. 교수, 그리고 세 명의 학생들과 한 테이블에서 얼굴을 맞대고 듣는 수업이 청강생인 데다가 그 학교 학생도 아닌 내게 심히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콩트의 서재에서라면야. 심지어 오늘은 일찍 도착한 나머지 서재에 꽂힌 그의 저서 초판본들까지 구경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난 촌스럽게도 이런 걸 좋아한다. 욘사마가 앉았던 까페 자리에 앉아 그가 마신 차를 주문해 들면서 행복해 한다는 일본 아줌마들을 난 이해할 수 있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콩트에 대해서도 이럴진대, 좋아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오죽하랴.

심사 위원이었던 교수가 "논문을 쓰기로 했다니 기쁘다"라는 메일을 보내왔다. 또 한 번의 카타르시스. 그녀가 심사 후 "박사 논문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니 들어가기 전에 잘 생각해 봐라" 하고 얘기했을 때 나는 또 그 말뜻을 헤아리느라 밤잠을 설쳤었다.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서른 타령은 이것으로 끝.

—박쥐

2005년 10월 21일 금요일

Me and you and...

blogin.com · 2005-10-21

난 포스팅을 할 때마다 글자 색깔을 고르는 일에 꽤 신경을 쓰곤 한다. 사진이나 글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색을 선별한답시고 나름대로 애를 쓴다는 게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워낙 감각이 없는 터라서 결과에 별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이번 포스트에서만큼은 선택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심지어 이렇게 말할 자신도 있다 : 분홍이 아닌 다른 색깔로 이 영화, Me and You and Everyone We Know (Miranda July, 2004)에 대해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다.

감독 자신이 분한 주인공 크리스틴은 비디오/퍼포먼스 아티스트다. 요양원 노인들을 위해 운전 봉사를 하기도 하는데, 그곳서 사귄 할아버지와 함께 백화점 구두 매장에 갔다가 매장 직원인 리처드를 만난다. 리처드는 한달 전부터 부인과 별거에 들어간 뒤 아들 둘과 살고 있는데, 왼손에 붕대를 감고 있다. 부인과의 "이별"을 "기념"한다는 명목 하에 자신의 왼손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던 탓이다. 그것도 아들들이 보는 앞에서. 크리스틴은 "발에 맞지 않는 구두 때문에 고생하기에 당신은 너무 고귀한 사람"이라며 혹하게 만들어 결국 예정에 없던 신발을 구매하게 만든 리처드에게 호감을 느껴 그 이후에도 계속 그가 있는 매장의 주변을 맴돈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했겠다시피, 해피엔드.

물론 두 주인공 간의 우연한 만남-갈등-갈등 해소가 전부는 아니다.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의 이야기들, 그러니까 리처드의 두 아들들, 리처드의 직장 동료, 리처드 아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10대 소녀들, 이웃집 소녀, 크리스틴의 친구인 할아버지와 그의 애인 등등. 심지어 이웃집 소녀가 어항 가게에서 산 금붕어까지. 크리스틴을 별 볼일 없는 풋내기 작가로 생각하고 냉대했던 미술관 큐레이터도 빼놓을 수 없겠다 (주인공이나 다른 등장인물들이 한결같이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이웃집 소녀와 더불어 내면의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녀를 포함, 이 모든 조연들은, 주인공들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바로 그 점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발한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외롭고 섬세하고 상처입기 쉬운 영혼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방법은? 상처가 생겨도 아무렇지 않도록 면역력을 키우는 것. 그렇지만 그들은 항체를 만들만한 힘조차 없이 한없이 약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서로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고 입은 상처는 서로서로 보듬는 것이다. ))〈〉((, 이렇게 말이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없이 따뜻하다. 거창한 인류애나 쓸데없는 동정이나 연민, 혹은 가족주의/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말끔하게 싹 걷어낸,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런데 그 시선은 무턱대고 따뜻하지 않다. 감독 역시 그런 그들을 냉정하거나 우월감 혹은 동정심에 젖어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여리고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 큰 매력이다. 그래서 소박하게 착하기만 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도 이 착하기 짝이 없는 영화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내 미적 감각을 신뢰할 수 없긴 하지만. 어여쁜 감독 언니로 인해 호감도가 상승했음을 부인하기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74년생(!)인 그녀는 팔방미인, 이 단어의 모든 내포/외연을 스스로 체현하고 있는 사람이다. 인정받는 퍼포먼스 아티스트이자 단편집 출간을 앞두고 있기도 한 소설가인가 하면, 영화는 또 영화대로, 이 첫 작품으로 꺈느, 선댄스를 비롯, 상도 여러 개 받았으니. 그 뿐인가? 그녀와 영화의 주인공 크리스틴 사이에는 한 치의 거리도 없을 것임에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녀는 성격마저 좋은 인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니, 세상이 불공평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인물 리스트에 그녀를 추가할 수밖에.

))<>((
forever



1. 음악도 좋다. 특히 코디 체스트넛의 노래. http://elginpark.com/meandy ... usite1.html>여기 에 가면 들을 수 있다.

2. 위의 그림은 영화 홈피에 소개된 공식 포스터 중 하난데, 최종적으로는 선택되지 않은 것 같다. 난 시중에 나와 있는 것보다는 이게 맘에 든다. 샛분홍에 딱 저 이모티콘과 "포에버"만 찍혀 있는 영화 포스터라니, 근사하지 않은가?

3. 줄라이의 http://meandyou.typepad.com/>블로그 에 가니 그녀가 시사회를 위해 파리에 왔을 때 찍은 사진이 있었다. 난 그 사진에서 배경으로 쓰인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다른 극장에서 볼까 하다가 그곳으로 간 거였는데. 그렇다. 이것은 자랑이다. 그 누구도 자랑이라고 생각지 않겠지만.

4. 줄라이가 시나리오를 쓴 다음 영화의 제목은 "Are You the Favorite Person of Anybody ?"란다. 긴 제목을 좋아하나 보다. 어쨌든 제목 예쁘다. 이번 것도 그랬고.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