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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9일 화요일

루시드폴 풍의 시작

blogin.com · 2010-11-09

때아닌 루시드폴 풍의 습작. 푸훗.

난 믿어요 은밀하고 조심스레

당신과 나 좋은 친구가 될 거라고

당신은 눈으로 말하죠

"당신도 나와 같은 아픔을 가졌군요

당신의 아픔 알아요 이해해요 당신을

이해하고 싶어요 어슴푸레하게나마"

입술로는 차마 못한 그 말이 눈빛으로 전해질 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따스해지는 걸요

그걸로 족해요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

혹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고 싶더라도 

그냥 지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세요

나도 제자리 걸음 하며 여기 가만히 있을게요

한걸음에 달아 당신 품에 안기고픈 맘 꾹 참으면서

대신 당신의 그 따슨 눈빛 가슴에 푹 새기면서

—박쥐

2010년 11월 3일 수요일

마녀들은 사바스를 준비하고 나는 잃은 것을 찾아 제자리 걸음을

blogin.com · 2010-11-03

>무의식에서 아니 손끝에서 나오는대로. 게다가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상황. 배터리는 20%밖에 남아 있지 않고, 아이팟은 10초 간격으로 그 사실을 전하는 중이며, 게다가 이 무선 인터넷 네트워크는 불안정하기로 이름이 높고 또 명성을 확인이라도 하라는양 역 4분 간격으로 접속을 끊어놓는다. 자동 기술을 (참, 잊을 뻔했다. 아이팟의 자동 입력 기능을. 방금만 해도 자동기술을 자동차극장으로 바꿔 놓았다) 실천하기에는 최적의 조건. 도전에 취미가 있고 도전이 극한의 경험에 접근할수록 쾌를 느끼는 경우라면 더더욱.

만성절이 지난 지금 마녀들에게 진짜 악몽은 이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최소한 성탄까지는.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 아님 최소한 움직이거나.

—박쥐

2010년 9월 14일 화요일

교회에 나갈까 고민하는 친구에게

blogin.com · 2010-09-14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 는 말이 make sense 하는 건지, 한다 해도 정말 위로가 되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정말 누구나 다 그럴 때가 있는 것 같아. 의지할 대상을 구하고 싶고, 기왕 의지할 거면 그 대상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완벽한, 그리하여 이 세상을 초월해 있는 존재였으면 좋겠는, 그런 때 말야.

나도 그랬고, 그럴 때 성당에 간 적도 있지. 일요일마다 가끔, 심지어 이번 일요일에도 그럴 하는 생각을 했었어. 가서 그냥 앉아 있는 것만으로, 눈으로 꽤 볼 만한 성당 건축물이나 장식물을 즐기고, 또 귀로는 꽤 들을 만한 음악을 생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안정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기도 하더라고. 쉽게 오는 만큼 쉽게 사라지기도 해서 문제지만.

안정의 수단을 꼭 종교에서 찾을 필요는, 또 그 종교가 기독교만큼 "초월적"일 필요는 없는 것 같아. 나한테 성당은 미술관이나 영화관 가는 일이랑 똑같거든. 이렇게 심미적인 쾌를 제공하고, 이것을 다시 "전통"으로 남기는 것만으로 기독교, 적어도 천주교는 자신의 사명을 충분히 한 것이고, 적어도 이것만으로도 내겐 존재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어. 이건 순전히 기독교가 이곳에서 오랜 역사와 권력을 유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과정이 어땠는지와는 별개로, 결과적으로 나는 어쨌든 그 덕에 위안을 얻고 있는 셈이야.

그렇지만 종교에서 그 이상을 구할 수 있을까? 삶의 지침이나, 살아갈 이유, 심지어 원동력이나 동기 같은 것까지. 나 역시, 착한 행동이나 가상한 노력 등등은 언젠가 보상을 받고, 나쁜 행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대가를 치루게 된다, 등의 비합리적인 믿음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게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알다시피 신이나 혹은 다른 자연 법칙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정말 각 인간들에게 고유한 '자유의지'란 게 있는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철학적 문제 중 하난데, 이건 도대체 판결이 날 수 없는 문제라는 게 내 생각이야. 각자가 가진 신념에 따라, 혹은 입맛에 따라, 맞는 걸 선택하고 그걸 "믿고" 사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오히려 아까 말한 지침, 이유, 원동력, 동기 등등은, 내 경우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 같아. 내가 의지로 부른 것이든 아니든 간에. 참 이상한 일이지? 이번에 내게 이 모든 걸 선사한 건 너였어. 지난 토요일 너와의 통화 이후, 정말 거짓말처럼, 정신과 열정을 되찾았어. 내가 네게 비슷한 선물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마도 지금쯤이면 넌, 발표 준비에 본격적으로 돌입해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성공적인 발표라는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지 않을까.

내 보잘 것 없는 믿음이 "마법" 가루가 되어 대서양을 건너 네게 뿌려지기를.

파리에서 지선.

—박쥐

2009년 4월 24일 금요일

물속으로 잠겨드는 너

blogin.com · 2009-04-24

http://www.ina.fr/divertiss ... .html> name="allowFullScreen" value="true">http://www.ina.fr/divertiss ... urg-la-noyee.fr.html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always" allowfullscreen="true" width="425" height="344">

"너는 추억의 강으로 떠나가고,
나는 돌아오라 외치며 강기슭을 달려가네

너는 그저 느리게 멀어져 가고,
네가 아무리 애써 달려도
나는 조금씩 네게로 다가가네

물 속에서 가까스로 떠오를 때마다
너는 망설이네 그리고 나를 기다리네
치마자락을 걷어올려 얼굴을 감추며
얼굴이 상할까 하는 두려움에,
그리고 부끄러움과 후회로

너는 이제 그저 길잃은 배
물에 빠진 개일뿐이지
그래도 난 여전히 너의 노예
물속에 몸을 담그네

추억이 멈출 때 우리는
망각의 망망대해 속에서
가슴이 그리고 머리가 찢어진들
결코 맺어지지 못하리"

이 노래를 처음 접한 것은 카를라 브뤼니의 첫 번째 앨범을 통해서였다. 다른 노래들도 나쁘지 않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세르주 갱스부르가 작곡한 바로 이 곳, "La noyée"다. 브뤼니의 작곡 솜씨도 나름 훌륭하지만, 그래도 명실공히 천재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갱스부르만 하랴. 물론, 브뤼니가 이 노래에 대한 나의 인상에 있어 작지 않은 부분을 차지함은 분명하다. 내게 이 노래의 존재를 알려준 것은 그녀니까. 또 하나 덧붙이자면, 편곡은 둘째치더라도, 적어도 그녀의 우수어린 목소리 만큼은 이 노래와 아주 잘 어울린다. 이를테면 안나 카리나(그녀도 자신이 만든 영화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보다는 훨씬 낫다는 말이다.

이렇게 시간을 거꾸로 거스르고 길을 굽이굽이 돌아 발견한 갱스부르의 이 '정격' 연주. 그런만큼 내겐 매우 값지게 느껴진다(고맙다, 유튜브!). 그 어느 노래가 예외가 되겠냐만, 갱스부르의 곡들은 특히 연주자/해석자/편곡자를 아주 많이 '타는' 것 같다. 같은 "Je t'aime moi non plus"도 제인 버킨과 부른 버전과 브리지트 바르도와 부른 버전이 상당히 다르다.

다음은 마구잡이 인상 비평 :

물속으로 잠겨드는 여인(오필리어), 아니, 물의 여인(운디네), 물에 감겨 올라간 치맛자락. 공무도하가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물론 공무도하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상세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수면, 즉 '네'가 떠올랐다 잠겼다 하는 그 표면 또한 지배적인 인상 중 하나다.

이별 멀어지는, 잡힐 듯하지만 끝내 잡히지 않는(아킬레스와 거북이? 무릇 시간과 운동의 속성이란 그런 것이겠다), 떠나는 자의 뒷모습... 떠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이 아름답다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아무리 끝까지,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감추면서"까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고자 한들, 마지막은 기억 속에서 변형되거나 무화될 뿐이다...  

이번에도 역시...

용두사미가 돼버렸다. 사실 시를 평하듯 가사 비평을 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일부러 번역까지 했거늘...

손을 놓은지 오래여서일까, 문장력이나 필체에 슨 녹이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 또 다른 문제는, 핵심을 피해서 끝없이 우회하는 고질병이다. 어릴 적부터 난 늘, 정면돌파할 방법을 충분히 알면서도, 목표물을 빙 둘러 내 스스로 미로를 쌓아 일을 어렵게 만들곤 했다. 논술을 공부해야 했던 시절에는, 매뉴얼대로 글쓰는 일이 너무 괴로운 나머지 이 버릇을 글쓰기에도 적용시키기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확장된 글버릇은 학부 시절 시험을 치를 때나 명색이 철학도가 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진지하게 글을 써야할 때조차 위력을 발했고, 또 여전히 발하는 중이다.

어쨌든 이번에는 그저 "이전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들을 일 없을" 이 갱스부르의 노래를 듣는 일에 만족하기로 하고... 그래도 여전히 가슴 속에 어떤 아쉬움 같은 감정이 남는다면, 별 수 있으랴, 달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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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2008년 11월 10일 월요일

집단장

blogin.com · 2008-11-10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나?

지금의 집, 뒤프렌느 빌라에 살기 시작한지도 이제 3년이 다 되어 간다. 매혹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집에 대한 첫인상에 대해. 누군가 은근히 가꾼 듯한 정원, 빨간 색깔의 현관문, 옛 벽난로의 흔적, 그 위의 낡은 거울, 창가로 손에 닿을 듯한, 파란 잎새들과 빨간 열매. 그래서, 설치된 난방 기기가 아예 부재하다는 치명적인 결점에도 불구하고, 다른 집들을 더 찾아보지도 않은 채로, 결정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다 작년부터 이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틈이 날 때마다 집 방문 약속을 잡았고, 인터넷에 접속할라치면 부동산 사이트부터 챙겨 보았으며, 길을 걸을 때면 부동산을 기웃거렸다. 집 건너편에서 공사를 시작한 것이 그 발단이 되었는데, 그 이후로, 정을 떼려고 그랬는지, 자꾸 이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윗집에 한 가족이 이사왔는데 그 집 아들이 공차기를 좋아한다든지, 알레르기 증상이 심해졌다든지, 허리가 아파졌다든지, 갑자기 추위를 타게 되었다든지, 도서관 및 학교와 집 사이의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든지 하는.

그러다 얼마 전, 결심을 했다. 환율이 극히 불안정하게 된 것이 결심의 가장 큰 이유겠으나, 다른 한편으로 1년 가까이 찾았으니 찾을 만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잃었던 정을 다시 찾아가는 중이다. 침대를 들이고, 몇 가지 가구들을 손보면서. 다행히 앞건물 공사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

그런데

왜 우울할까?

자가진단 : 주부우울증. 다 큰 아이들과 남편이 바깥으로 나간 뒤, 인테리어가 완벽할 뿐 아니라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집안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는 주부를 상상해 보라. 목표하던 바가 너무 싱겁게 달성되거나, 아니면, 나의 경우처럼, 수정된 상태로 달성되는 경우, 목표를 위해 돌진하던 에너지가 순식간에 소진되면서 혼돈에 빠진다. 혹은, 뭔가 더 덧붙일 것이 없나 고민하는 등, 달성되었는지의 여부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며 심지어 실존적인 고민에 빠진다.

그렇다. 사실 12 혹은 13구에 위치한, 중앙 난방에다가 30미터제곱에 600유로 이하인 집도, 지금의 집을 좀더 살기 좋게 만드는 것도, 진정한 목표는 아니었을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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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바리즘에 대하여 (시바에게의 답변을 대신하여, 일주일 후에 덧붙임)

우울을 떨치기 위해, 예전에 읽다가 그만두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던 보바리 부인을 다시 펼쳐든 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나쁘지는 않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왜"에 대한 답을 부분적으로나마 찾았으니까. 아니, 되찾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적어도 예전에는, 이 문제에 대해 지금만큼 무감하지는 않았으니까. '이 세상에서 여성으로서 산다는 것', 그것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난 그렇게 에마를 만났다. 그러면서, 그녀를 만나는 거의 모든 여성들이 그렇겠듯이, 그녀 속의 나와 재회했다. 계속해서 에마 주위를 드리우고 있는 플로베르의 그림자도, 그가 남성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마담 보바리는 내 자신이다"라고.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가 보바리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전형적인 '전지적 작가 시점'을 취할 때도 그 세밀하고 치밀한, 그리고 때로는 영화적인 상황 및 심리 묘사에 그저 탄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플로베르의 치밀함이 발자크의 그것과 다르다면, 그것은 전자의 '전지성'이 후자처럼 '거시적 관점'--그리하여 '사회학'을 가능케 하는--에서가 아니라 주인공 및 각 등장 인물의 내면에 침잠한 데에서 나오는, 미시적이고 내밀한 시선에서 비롯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 있어, 이렇게 제 3자로서,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독자로서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적다. 에마 보바리를 비극으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여성의 조건'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그녀로서 다른 누구보다 통렬히 절감할 수밖에 없었던. 이것이 '시골 의사의 부인이 삶에 염증을 느끼고 바람을 피우다가 재산을 날리고 자살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 통속적인 이야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보바리즘'은 '실제의 자신'과 다른, 이상화된 이미지를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한마디로 '주제 파악'을 못하는 과대망상증으로 정의된다. 맞는 말이다. 여성에게 있어 과대망상 및 자아도취는 자신에게 절대로 우호적이지 않은 세상에서 필요불가결한 생존전략이다. 때로 치명적 결과를 가져오기는 할지언정...

—박쥐

2006년 3월 12일 일요일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소

blogin.com · 2006-03-12

지금 동네 앞 맥도날드에서 무선 인터넷을 하고 있는 중. 예전에 그토록 경멸하거나 경원시했던 맥도날드가 내 살아있음을 증거케 해주는 몇 안 되는 장소로 변하다니.

이사한 지 한 달. 새 동네에도 서서히 정이 붙어 간다. 어떤 관광 책자에 '아니, 여기도 파리야?'하고 묻게 만든다는 곳으로 설명된, 도시 외곽의 한적한(그렇지만 부유해 보이지는 않는) 주택가를 연상케 하는, 낡고 삐걱대지만, 인터넷도 전화도 쓸 수 없지만, 내게는 한없이 아늑한, 이 곳.

그렇게 살고 있다. 이제 봄만 오면 된다.

—박쥐

2006년 1월 2일 월요일

약속, 부질없는

blogin.com · 2006-01-02



2006년이다. 이렇게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해가 오는데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날짜나 시간 가는 데에 무심한 것과 무감한 것의 차이. 난 대체로 무감하나(워낙 둔하므로) 무심하지는 않다(둔한 주제에 소심하므로). 중요한 것은 오직 지금/여기hic et nunc 뿐이라고 주장하는, 일종의 세월아내월아주의자라고나 할까.

새해를 맞으러 남불의 리옹에 갔다가 1일 아침에 돌아왔다. 그곳에 사는 이들에게 파리는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며 툴툴거렸는데, 참 이상도 하지, 그곳서 머물던, 그리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심각하게 나쁘진 않은 호텔의 침대보다, 돌아와 누운 내 작은 다락방 매트리스가 더 편하고 아늑하다. 잠자리의 질이나 취침 시간의 양으로만 본다면 당연히 전자에서의 잠이 후자의 그것을 앞섰어야 했거늘. 

둘째날엔 눈이 많이 왔다. 영하 6도의 날씨에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고도의 르네상스풍 돌길을 활보하는 일은 추위를 좀처럼 타지 않는 내게도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눈' 덕분에 눈이 배로 즐거워졌으므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라며 내민 누군가의 손에 마음은 그 어디에도 비할 바 없도록 포근해졌다.

몇 가지 다짐을 주고 또 스스로도 했다. 나쁜 습관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 그리고, 대부분의 나쁜 습관들이 그렇듯, 끊기 어려운 것들. 그런 종류의 습관을 끊겠다는, 실현하기가 불가능하진 않지만 결코 쉽진 않은 다짐은 애초부터 하지 않는 게 낫다. 시나브로 줄여가겠다는 것, 그것이 나의 다짐이다.

그 중 하나는 이 블로그에 관한 것으로, 포스팅의 불규칙성, 특정 카테고리에의 편중, 뭐 이런 것들을 줄이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더불어 '것'이라는 의존 명사의 사용도 줄여야겠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포스팅을 하겠다"라는 게 '다짐'의 범주에 집어넣기에는 너무 손쉬운 일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쉽지만은 않은 일일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독백의 형식이나 내용도 줄여야 할 듯하다. 어쨌든 이곳은 소통을 위한 공간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다소 뜬금없고 생뚱맞긴 하지만 이 멘트로 지금의 이 포스트를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 2006년 올해, 이 블로그를 찾는 이들에게도 좋은 한 해가 되길 빈다.

—박쥐

2005년 2월 6일 일요일

또, 다시, 이제는, 더 이상

blogin.com · 2005-02-06



또. 또 다시. 그러면서도 원망하고, 또 후회하고.

이제는, 정말로 내 삶을 찾아야 할 때.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더 이상은.

—박쥐

2004년 9월 19일 일요일

불로뉴 숲 산책

blogin.com · 2004-09-19


<사진 설명 :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1. 이걸 찍는 동안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지나가던 남자가 큰 소리로 "쟤는 뭘 찍는 거지?" 하고 말했다. 그 말 뒤에는 아마도 "뭐 찍을 게 있다고..."가 생략돼 있었을 것이다. 확실히 그가 옳았다. 피사체들은 그다지 포토제닉하지 않았다. 가을이 깊으려면 아직 멀었다.  

2. 마르셀 프루스트는 3살 때 이 숲을 산책하다가 돌아오던 길에 처음으로 천식 발작을 일으켰다.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3. 올여름 바다 한 번 가보지 못한 설움을 달래기에 호수는 역부족이었다.

4. 열매를 찍고 싶었는데, 찍힌 것은 바람이었다.

—박쥐

2004년 9월 12일 일요일

또 하나의 세대론 : 요약

blogin.com · 2004-09-12

대학생들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도덕을 위해서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않았으면서,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도덕적이고 순수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분방하면서도 확신에 찬 거대한 동맹의식이었다. 그들이 순수하고 도덕적인 것만큼 그들에게는 가차없는 비판의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다. [...] 학내 이기주의자들에 대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젊은이였고 대학생이었으니까. 유감이지만 그들은 대다수가 이십 년 후에는 자신의 부모와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리라는 것을,--최소한 오직 욕망에 천착하리라는 점에서-- 내면으로는 잘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을 받아들이고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젊은이고 대학생이므로, 적어도 지금은 누구에게도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 천진난만한 어린이처럼 무죄이며, 나아가서는 미래지향적이고 혁명적이며 도덕적이고 순수한 것이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무지하다고는 할 수 있어도 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어린아이는 도덕을 위해서 어떠한 노정도 밟지 않았고 어떤 수고도 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위한 조그만 고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단지 부도덕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어린아이와 마찬가지로 그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오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다. 편리하게도 그들의 이 (일시적인) 행위에 명분을 부여하고 이름을 붙여주는 존재는 언제나 그들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마치 신문이 그들을 '신인류'라고 부르고 그런 이름에 으쓱해지지만, 실상은 무엇이 새롭다는 것인지 그들 자신도 잘 알지 못하면서, 그들의 새로움이란 것이 부모세대의 경제적 성과를 너무나 당연한 선물인 것처럼 꼭 움켜쥐고 소비문화에 충실한 결과 자연스럽게 발생한 취미의 다양성이나 욕구분출의 자유로움에 따른 정신적 여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진화의 덕택으로 좀더 창의적인 두뇌를 타고났기 때문이며, 게다가 그들은 뭔가 운명적으로 비교할 수도 없이 우월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풍요한 문물이 넘치는 80년대에 젊은이로 살 수 있다는 것을 기껏 68세대 혹은 4.19 세대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 더구나 젊고 신선한 외모를 가졌기 때문에 그런 호칭을 부여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기 좋아할 뿐이다. 대학의 상부가 독재적인 정부와 마찬가지로 권위로 가득 찬 관료의 세계라면, 대학의 학생들 또한 거기에 충분히 걸맞게 충실한 군중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온갖 명분을 획득했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매달려 호흡하고 양분을 빨아먹고 있으며 오직 그것의 명령과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군중의 맹종이라는 것의 실체를 볼 줄도 모르고 믿지도 않으며, 그들 대부분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유는 그들 중 아무도 자신이 '군중'에 속해 있다고는 감히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쿨!


--배수아, <독학자>, 31~33쪽 (열림원, 2004)


이번에 떠나오기 전 선물로 받은 소설. 내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바가, 그리 정확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압축적인 방법으로 나타나 있다. 

—박쥐

2004년 9월 5일 일요일

꿈인지 현실인지

blogin.com · 2004-09-05

꼬박 나흘 동안,

<데이 에프터 투마로우>, <브리짓 존스의 일기>, <스텐 바이 미>, <슈렉2>, <엘리펀트>, <브링 잇 온>, <거미숲>, <러브 엑추얼리>, <로스트 인 트렌스레이션>, <팻 걸>, <결혼은, 미친 짓이다> 등의 영화와 <아일랜드> 같은 드라마를 보다 보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현실이 뭐고 꿈이 뭔지 모르게 되더란 말이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엘리펀트>를 보면서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속에 품은 <러브 엑추얼리>와 같은 실현 불가능한(!) 꿈을 잃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살다보면, 비행기를 놓쳐 예상치 못했던 일정이 잡히는 바람에 <아일랜드> 같은 드라마를 내 집 TV로 보게 되거나, 대한민국 대통령 입에서 "국보법은 잘못됐으니 폐지돼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일도 생기니까.

—박쥐

2004년 8월 26일 목요일

오늘의 일기

blogin.com · 2004-08-26

하늘이 파랗길래 늘색 바지에 하늘색 윗도리를 걸치고 내친 김에 속옷까지 하늘색으로 바꿔 입고는 집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짙은 구름이 깔리고 장대비가 내리치는 바람에 하늘빛 우산을 집어 들고 망설이다가 그만 털썩 주저앉아 버린 오늘은 파리 해방 60주년 기념일.

—박쥐

2004년 8월 20일 금요일

또 하나의 세대론을 위한 시론

blogin.com · 2004-08-20

그냥 문득 떠오른, 아직까지 희미하디 희미하기만 한 생각.

사실 아주 뜬금없지는 않지, 거의 모든 "그냥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이 그러하듯이. 얼마 전에 한 선배와 송경아 얘기를 하다가 놀란 적이 있었거든. 난 그녀가 당연히 90년대 이후 학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글쎄 89학번인 그 선배의 동기라지 뭐야? 읽은지 오래 돼서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송경아 소설을 읽으면서 최루탄과 땀이 뒤범벅된 티셔츠와 청바지를 연상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또 하나의 계기가 있었구나. 알라딘에서 책을 찾다가 우연히 최근에 소설집으로 나온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조금 읽었거든. 극히 일부만을 읽었지만, 딱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내 또래들 얘기가 드디어 나왔구나, 내 또래들이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구나 하는. 물론 반가웠다는 얘긴 절대로 아냐. 거기에 비춰진 '나'는 더없이 세속적이고 자본의 논리를 거리낌없이 받아들인 데다가 거기에 대해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저항감을 느끼지 못하거든. 물론 어느 정도 사실이야. 어느 정도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고. 문제는 이제 그게 진짜 '사실'이 돼가는 낌새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야.

2002년쯤이었나. 91학번들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어. "강경대", "이한열"이나 "박종철"이라는 이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여러 번 들은 탓에 어느 정도 귀에 익은 그 "열사"의 이름을 그냥 "경대"라고 부르던 그들에 대한 얘기를. 뭐, 그다지 많은 얘기를 하진 못했지, 당연히. 근데 그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 그래도 자기들이 몸소 살아낸 이야기들을 "역사화"하려는 그들의 몸짓을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는 있었어.

"그들" 이후의 "우리"에 대해서도 맘만 먹으면 꽤 재밌는 얘길 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물론 맘 먹는다고 되는 일은 아니지. 우선은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여야만 하겠지. 그치만 지금의 딱 이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얘기들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딱 지금의 이 상태에서밖에 하지 못할, 다른 때나 다른 곳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얘기들도 있지 않을까?

그냥 떠오르는대로 말해 볼게.
 
변희재. 알고 보니 이 사람 아주 새파랗게 젊더군. 94학번이더라구. 그가 <내사랑 콩깍지>라는 드라마 얘길 쓴 걸 본 적이 있어. 지금의 (인터넷, 휴대폰)의 자리를 (PC 통신, 삐삐)가 차지하던 "그때 그 시절"의 얘기였다지. 사실 둘은 단절돼 있지 않아. 그보다 둘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하지. 토익+토플, 어학 연수, 영화, 하루키, 학점, 취업 준비 등등이 그러하듯이.

에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네. 역시 시간이 필요한 일인가? 근데 시간이 해결해 줄까? 시간이 지난 뒤에도 뭐라 하나로 규정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개성"들을 지닌 세대라고들 하잖아. 근데 진짜 그런가?

—박쥐

2004년 8월 18일 수요일

빗소리를 듣는 밤

blogin.com · 2004-08-18

후훗. 웬 센티멘탈리즘? 어울리지도 않는데. 거 봐, 안 어울리는 짓 하니까 비도 그쳤잖아.

그래도, 이맘 때면, 특히 이렇게 비오는 여름밤이면 여지 없이 생각나는 노래를 듣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이 노래라도 듣지 않으면 밖으로 뛰쳐나가 정처없이 헤맬 것만 같은 밤.


조국과' target='_son'>mms://211.215.17.148/song/ ... ng_5_usan.asf>조국과 청춘, 우산 (조국과 청춘 5집, 1996)
출처: 노동의' target='_son'>http://www.nodong.com>노동의 소리

—박쥐

2004년 8월 8일 일요일

술 마시고 맑은 기운이 돌 때

blogin.com · 2004-08-08

게다가 잠까지 안 올 때, 무슨 일을 하는 게 좋을까?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하지 못했을 혹은 일부러 하지 않았을 일을 하는 게 좋겠지.

1. 시를 쓴다 →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시한테, 시인들에게,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냐?
2. 산더미같이 쌓인 읽거리를 해치운다 → 하, 참 읽기도 하겠다.
3. 옛 애인에게 국제 전화를 한다 → 근데 전화 번호도 모르잖아.
4. 지하철에서 만난 낯선 이에게 전화를 한다 → 아, 그가 그렇게 끈적끈적하게 굴지만 않았어도.
5. 청소를 한다 → 그렇지만 청소는 이미 했는걸. 청소하느라 오후 한나절을 고스란히 날려 버렸단 말이지.
6. 설거지를 한다 → 그런데 그러다 또 그릇 깨면 어쩌려고?
7. 블로깅을 한다 → 이것이 정답일세. 지금 하고 있잖아.
8. 잠을 부르기 위해 한 잔 더 한다 → 그런데 술이 없는걸. 그리고 정답이 이미 나왔는데 왜 계속 이러고 있는 거니?
9. 읽어야 할 것들 말고, 읽고 싶었으나 이런 저런 이유들 때문에 읽지 못했던 것들을 읽는다. 이를테면 스포츠신문 연재 소설이나 아나이스 닌의 準포르노급 로맨스 소설 같은 것들 → 근데 스포츠신문 읽으려면 로그인을 해야 하잖아. 아이디도 기억 못하면서.
10. 지금 하고 있는 이 짓을,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하고 세듯이, 잠 올 때까지 한다 → 그러다 날 새겠다. 그리고 지금 이 답안은 7. 이랑 중복되는데?
11. 지금까지 이 블로그에 털어놓지 못한 얘기를 한다. 이를테면, 이제 만으로도 스물 일곱 살이 돼버렸다는 얘기라든지, 아니면 바보같은 짓--서연 언니의 말마따나 "철학도가 아니라면 하지 못했을"--을 하는 바람에 9월에 한국에 또 갈 수밖에 없는 바보같은 상황에 처했다는 얘기라든지 → 이런! 벌써 몇 번째 중복 답안인 거야?

—박쥐

2004년 7월 21일 수요일

몽실에게

blogin.com · 2004-07-21

그래, 걱정해 준 덕분에 잘 왔다. 비행기도 안 놓치고 말이야. 전날 짐을 싸느라 한숨도 못 잔 탓에 오는 내내 꿈과 현실 사이를 헤매긴 했지만. 꿈속에서 미소를 지었는데 실제로 내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지고 또 그런 나를 바라보는 옆사람의 시선이 피부로 느껴지는 상태. 아마도 그 상태에서 헛소리까지 해대지 않았나 싶어. 옆사람들과 승무원들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더군. 

도착해서는 온 시내가 무섭도록 조용해서 좀 놀랐다. 다들 휴가를 간 모양이야. 택시 기사에게 철학을 공부한다고 했더니 그가 택시와 철학을 같이 언급하면서 무슨 농담--아마도 고급한, 철학적인 것이었을--을 했는데 못 알아들었다. "프랑스에서는 택시 기사도 플라톤을 논한다고 내나라 사람들은 말한다"고 응수할까 했지만 관뒀어. '도'라는 조사를 표현하기 위해 가져다 붙여야 할 부사 même(even에 해당하는)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고 예의에도 어긋나므로. 내릴 땐 그에게 15%에 달하는 팁을 주었어. 내 한끼 식사값에 해당하는. 그가 "남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말한 것에 대한 알량한 복수심/자존심에서였던 듯.

집에 와보니 냉장고 속에 곰팡이가 피었더군. 그리고 디카와 노트북을 연결할 잭을 두고 온 것을 깨달았어. 그리고... 기대했던 한 과목마저 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결국 역사 하나만 턱걸이로 붙은 셈이야.

근데 무슨 일인 게냐? 혹시 이번에 만났을 적에 너도 명랑한 척 했던 게냐? 옛 애인에게 결혼할 새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는 일이 네게 일어났을 리는 없고. 그래. 사실 우리(함부로 "우리"란 말 썼다고 너무 기분 나빠하지는 말길)같은 사람들에게 "왜 우울하냐?"는 물음만큼 우문이 어딨겠냐. 차라리 "오늘은 웬일로 우울해 보이지 않네"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지.

혹시 요즘 비트겐슈타인이랑 니체를 한꺼번에 공부 하냐?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

"하고 싶은 말은 혀끝을 맴돌뿐
튀어나오지 않는다.



하고 픈 말도
사실은 그림자다.



무형의 것을 가지겠노라...
뒤섞여 가는 문자들"



사실 맞는 말이다. 그치만 그 "하고 싶은 말"이, 비록 네말처럼 "혀끝을 맴돌뿐 튀어나오지 않"을지라도, 설령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맘에서 맘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밥 잘 먹고, 멍들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네 말, 그게 곧 내가 네게 하고픈 말이다.

—박쥐

2004년 7월 20일 화요일

시내 서점 유람기

blogin.com · 2004-07-20

이 짧은 여정의 마지막을 서점 나들이로 장식했던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비록 구하려던 책을 하나도 못 찾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당수의 계간지들이 여전히 계절이 변하는 속도와는 무관한 발간 행태(!)를 보이고 있다든지(7월 중순이 다 돼가는 마당에 여름호 찾기가 그렇게 힘들다니!!) 여러가지 반가운 번역서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는 등등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무엇보다도 날 기쁘게 했던 것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 김선우의 새 시집이었다.

그 밖에 책에 관한한 유난히 사소한 것들에 집착하는 나를 열광시키는 것들이 몇몇 있었다. 우선 창비시선의 북커버 디자인이 바뀌었다. 몹시도 깔끔하다. 경쟁사(?)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이라는 이름으로 수십 년째 같은 디자인을 고수해 오고 있었던 데 반해, 창비의 <시선>은 그만하면 꽤나 자주 갈린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문지의 시집들에 그려진 시인들의 인물컷과 뒷표지에 실리는 시인의 말을 좋아하지만.

<살림지식총서>도 무척 반가웠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으려는 것이 이 총서의 기획 의도라는데, 거기에서의 "지식"이 얕거나 편협한 수준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UFO에서부터 마피아나 조폭 등 참신한 주제들도 많고. 저자들이 모두 국내 학자들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비슷한 컨셉을 갖춘 책세상의 <우리시대문고>에 비하면 분량도 짧고 가격도 싸다.

사실 오늘의 나들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교보와 영풍 두 "문고"들의 "변신"이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영풍의 약진과 교보의 몰락이었다. 교보의 분류 체계는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이번에 보니 "남성소설"이라는 코너가 생겼다. "인터넷소설" 코너 옆이다. 시집을 위한 진열장과 진열대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반면에 영풍은 예전에 비해 형편이 아주 많이 나아진 듯했다. 한결 차분해진 느낌. 심지어 교보보다 넓어 보였다. 다갈색 목조 서가들도 눈에 들었다. 

추가 사항. 생각나는 대로.

1.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실린 박남철의 시는 정말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다. 젠장. 난 <세계의 문학>을 좋아했었다구.

2. 오늘 드디어 수중에 넣은 김광석 <다시부르기2> 중 "불행아. 그리고' target='_son'>http://www.gaseum.co.kr/300 ... 宣�. 그리고 작곡자 김의철의 목소리로 들어보는 "불행아.' target='_son'>mms://wm-001.cafe24.com/ba ... _kec.wma>불행아. 말하자면 이 노래의 오리지널 버전인데, 1974년 "저 하늘의 구름따라"라는 제목으로 발표됐었단다. 그리고 결국 코스모스의 앨범은 구하지 못했다.

3. 오늘 대학로에서 청계천을 거쳐 을지로로 진입하려다가 그만... 시장이 바뀌거나 시장의 에코파시스트 이데올로기가 바뀌기 전까지 다시는 서울 땅을 밟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4. 살림지식총서로 나온 이기상 선생의 <이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는 약간 실망이다. 선생 특유의 언어에 대한 세심한 감각을 제외하면. 물론 동양의 고전들에 뒤늦게 눈을 떠 새삼스레 "우리 철학"을 강조하는 서양철학 전공자들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고, 그들의 그러한 고충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서양은 이러한데 동양은 저러하며, 현대의 모든 병리 현상은 서양의 이러함 때문이니 동양의 저러함에 호소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식의 이분화나 단순화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게다.

5. 서광사의 플라톤 전집 출간이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못 본 새에 <크리톤...>도 나왔다. 근데 계속 하드 커버로만 낼 셈인가? 박종현 선생의 역주도 부담스러워 죽겠는데.

6. 계간 <문화과학>의 표지도 바뀌었다. 근데 제호의 글씨체가 좀 이상하다. 안 어울린다.

—박쥐

2004년 7월 17일 토요일

내 남동생의 결혼식

blogin.com · 2004-07-17

1. 비오는 날의 결혼식,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빗소리--겁나게 세찬--와 성가와 희뿌옇게 빛나는 스테인드 글라스와 비에 젖은 연미복. 난 이런 식의 조화를 좋아한다. 

2. 앞으로 얄미운 시누이 대신 무서운 누나의 역할을 하게 될 것 같다. 올케가 너무 예쁜지라.
3. 결혼과 관련한 이런 저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인상 찌푸리지 않고 "쿨"하게 응대하는 내 자신이 무척 대견스러웠다. 아예 내쪽에서 먼저 저들의 방식대로 말한 적도 있다. "오늘의 컨셉이 '귀여움'이냐?"라는 질문에 "신랑의 누나가 아니라 신랑의 여동생처럼 보이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젠장.

4. "따까리" 노릇을 계속 해서인지, 몹시 피곤하다. 동생 부부(아, 이 두 단어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쓰일 수 있는 말이었다니!)는 별로 그렇지 않은 듯했다. 그렇게 좋을까?

—박쥐

2004년 7월 13일 화요일

돌아온 탕아

blogin.com · 2004-07-13

늙은 농부가 자신의 곁에서 부지런히 일했던 작은 아들보다 몇 년 동안 집을 비우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재산만 축냈던 큰 아들이 집에 돌아온 것을 반겼던 까닭은 무엇일까?

난 나의 9개월 간의 부재를 증명할 변화의 징후/증거를 찾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렇지만 아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변화의 속도는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그만큼 내 눈이 깊어지지도 넓어지지도 않았다는 얘기.

옛 애인을 만나보고 싶은 열망은 이 땅에 발을 다시금 내딛은 순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산에는 가고 싶었는데. 팔공산. 그런데 북한산, 아니 남산조차 오르기 힘들 것 같다. 즐겨 다니던 집앞 한강변에 나가볼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다. 그곳에 가끔씩 들러 휴식을 취하던 백로 역시 보지 못할 것임에 분명하다. 사진으로 만족해야겠지.

—박쥐

2004년 7월 9일 금요일

변한 것과 변치 않은 것

blogin.com · 2004-07-09

변한 게 있다면 할머니가 많이 늙으셨다는 것과 우리집 현관문에 <스타워즈>에 나오는 것 같은 출입 통제 장치가 설치됐다는 것과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는, 아니 이미 생겼다는  것.

변치 않은 게 있다면 내 방이 여전히 읽(었)어야 할, 그러나 읽지 않은 책들로 가득하다는 것.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