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가렐(Philippe Garrel)의 Les amants réguliers (영어로 하면 Regular Lovers 쯤 될까? 우리말로는 뭐라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는 68세대의, 68세대에 대한, 68세대에 의한 영화다. 68에 대해, 그때/거기에 있었던 이들에 대해 지금/여기에서 과연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감독은 지난 40년 동안 끊임없이 이런 의문을 던져왔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시대를 산 젊은이였던,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젊지 않은 감독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젊디 젊은 아들(루이 가렐, 〈몽상가들〉에 나온 그 미소년)과 그 또래 친구들의 입을 빌려 '그' 시대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 시대란, ''혁명''의 빛나는 순간에서부터 그것이 끝난 후 다시 돌아온 남루한 일상, 이전에 비해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는 삶까지를 포함한다. 사실 혁명의 현장, 그러니까 바리케이드 안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와중이라 해서 대단할 것은 없다. 물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비장한 각오로 무장하고 있었겠지만, 한편으로 언제 끝날 지 모를 대치 상태는 아직 어린 그들에게 긴장뿐 아니라 지루함의 연속이기도 했으리라. 경찰에 쫓겨 숨이 턱에 닿도록 달아나고, 모르는 사람 집의 문을 두드리며 도와달라고 외치는 그들에게서 '전사'로서의 면모보다는 한 나약한 인간, 아니, 겁에 질린 어린 아이의 모습이 엿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혁명'이 끝난 후, 그들에게는 채 이루지 못한 신념에 대한 어떤 미련도 남아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다른 위안 거리를 찾는다. 아편이라든지, 애인이라든지. 그렇지만 그러한 것들이 위안이 될 리 만무하다. 주인공인 프랑수아는 혁명에 가담했다가, 혁명 후에는 다시 '시인'으로 돌아가서 유산 상속자로 친구들을 먹여 살리다시피하는 앙투안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해서 살다가, 그러면서 아편과 여자 친구인 릴리에게서 정신적 위안을 찾다가, 릴리가 미국으로 떠난 뒤 쓸쓸히 죽는다(사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내게는 그 모든 것이 68에 대한 감독 자신의 자기 고백인 한편으로 동시에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젊음'에 대한 예찬으로 읽혔다. 그가 아들과 아들 또래들에게 보내는 시선에는 확실히 경이감이 어려 있다. 두려울 것이 없는,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든 것이 두렵기만 한 젊음. 세상을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념과 그 신념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용기가 젊음의 특권이라면,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욕구나 끝없는 방황 같은 것들은 젊음의 천형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젊지 않은 가렐에게는, 젊음의 그 천형마저도 부러움의 대상이다.
어쩌면 이 68세대 감독은 그러한 '젊음'을 통해 실패한, 혹은 미완의 혁명에 대한 하나의 해명을 제공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실패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 자신이고 스스로 진 책임을 버거워 하는 것 역시 그들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아닌 우리는 죄를 덮어 씌우거나 면하거나 할 이유도, 자격도 없다. 그래도 당시에 너무 어렸거나 철이 없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며 그 때 가졌던 이상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땐 그랬지"라는 후렴구를 포함하는, 진지한 성찰이 결여된 "후일담"으로 일관하는 이들에 비하면 가렐은 얼마나 솔직하고 순수한가. 그의 변명은 고귀하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듣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었다.
보너스 혹은 사족
- 영화를 보는 내내 장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를 떠올렸다. 전자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외모가 후자의 주인공과 너무 닮아서였다. 두 사람이 동일한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 모두 각각 3시간, 4시간이라는 긴 러닝 타임을 자랑한다는 점도 비슷하다면 비슷할 수 있겠다. 아, 물론,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내가 2003년 여름인가, 당시 아트선재에서 열렸던 으스타슈&가렐 특별전에서 두 감독의 영화를 마구 섞어서 본 후로, 아직까지도 두 사람을 헷갈려 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집에 와서 가렐의 베니스 영화제 기자 회견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감독 본인이 〈엄마와 창녀〉를 "본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두 영화 사이에 다른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 사실 내가 〈엄마와 창녀〉를 연상했던 가장 중요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을 보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영화의 시놉이나 배우, 특히 루이 가렐만으로 충분히 〈몽상가들〉을 연상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하거늘. 감독 자신이 자신의 영화에 대해 베르톨루치의 작년작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라는 얘기까지 한 만큼. 실제로 영화 안에서 여자 주인공이 69년 당시에 나온 베르톨루치의 영화 하나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기도 한다. 심지어 68 시위를 재현하기 위해 경찰 제복이나 경찰차 등등의 도구들도 〈몽상가들〉의 것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고 하니, 말 다했다.
- 영화를 보고 난 뒤 예고편을 접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공인 두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영화에서의 주연과 조연의 관계와 비중이 완전히 역전된 예고편이라니. 위의 동영상을 보면 카메라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젊은 남자가 주인공일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저 4분짜리 예고편은, 비록 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긴 것이긴 하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있다고, 다시 말해 예고편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관객을 동원하려는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저런 불친절한 예고편은 절대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불평할 이유는 없다. 덕분에 썩 괜찮은 뮤직 비디오 한 편을 덤으로 얻게 된 셈이니까. 리듬에 몸을 온전히 맡긴 채 즐거워 하고 있는 저들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만감이 교차한다. 입으로는 한숨이 나오는데 어깨가 절로 들썩인달까. 이런 식의 "작가적 고집"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 이 영화에는 "시의성" 있는 장면 하나가 등장한다. 경찰에게 쫓기다 한 건물로 들어가 어떤 집의 현관문을 두드린 프랑수아. 집주인은 프랑수아에게 자동차들에 불을 지른 사람들과 한패냐고 묻는다. 프랑수아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집주인이 말한다. "숨겨 달라고 할 것 같았으면 불은 지르지 말았어야지요."
그렇긴 해도 68년 당시에는 "긴급 사태"가 선포되는 일은 없었는데, 40년 전도 아닌 50년 전의 "전시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감각이라니.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