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서가 숲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짤막한) 가이드...는 좀 진부하고,
혹은, 어느 도서관 유랑객의 일기...도 진부하네. 자타가 공인하던 타이틀링 센스도 이젠 다 옛날 얘기. 흑.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줄기차게 드나들던 지난 해 말, 그곳의 전자 카탈로그를 검색하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Enrico Castelli Gattinara 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출신 저자의 Les inquiétudes de la raison 이란 책을 찾고 있었는데, ' target='_son'>http://catalogue.bnf.fr/ark ... /cb37033779w/PUBLIC> 카탈로그 상 에는 이 책이 가티나라가 아닌 Enrico Castelli (1900--1977)으로 표기돼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이 저자가 1990년대 파리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 제출한 박사논문을 출판한 거라고 알고 있었던 나는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국립도서관의 서지사항에 오류가 있거나 아니면 내가 박사 심사 년도를 잘못 기억했거나, 둘 중 하나일 터. 두 가설 중 유력한 것은 그간의 경험에 근거할 때 당연히 후자였다. 프랑스 최고이며 아마도 세계에서도 내로라 할 국립도서관의 데이터 베이스와, 지극히 제한적이고 선택적이며 최근에는 기형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는 내 기억력을 비교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다시 보니, 문제의 책의 저자명에 "가티나라" 라는 성이 아니라 "엔리코 카스텔리"라는 이름만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엔리코(이름) 카스텔리(성) 이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아니 1900년부터 1977년까지 존재했고, 이 인물은 가티나라보다 인지도가 높으며 또 여러 권을 남긴 저자라는 사실이었다. 마치 "이지선"이라는 저자명을 검색했는데 지선 스님과 동일인으로 처리되어, 무명에 가까운 전자가 하루아침에 벌써 몇 권의 책을 낸 후자로 둔갑해 버린 형국.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참으로 미묘하게 동명인 사례.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내 기억이 맞았고, 국립도서관측의 착오였던 것이다.
몇 번 확인을 거듭한 끝에 오류의 사실에서부터 오류의 원인에까지 확신이 들었고, 그래서 책을 반납하면서 도서관 사서에게 잘못을 지적했다. "여기 오류가 있어요. (책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랑 (서지 사항 기록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랑 다른 사람이에요. 엔리코 카스텔리란 사람도 있긴 한데. 이름 때문에 혼동이 있었나 봐요." 그리고는 매우 흡족했다. 다음에 이 책을 볼 사람의 수고를 덜지 않았는가. 그 뿐인가. 만일 저자가 자신의 이름이 오기되어 있었단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을 터. 문헌학이나 고문서학 및 서지학(!) 등등에 밝고 또 그런만큼 이러한 종류의 오류에 민감한 이탈리아 학자인만큼 더더욱 (움베르토 에코도 그렇지만, 예전에 카를로 진즈부르그가 파리 강연에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사료들을 찾는데 완전히 재앙이었다"라고 말하는 걸 들으며, 저 정도가 엉망이면 이탈리아는 어떻길래, 하며 놀란 적이 있다). 그로 인한 사소한 개인적 마찰에서부터 나아가 국제적 분쟁의 불씨가 될 수도 있었을 사태를 내가 사전에 방지한 것이다.
그런데 내 논증이 그다지 설득력 있지 않아서였을까? 몇 달 후에 다시 검색을 했는데도 여전히 그대로다. 아니면 사서간의 위계 혹은 분업체계, 좀더 일반적으로는 프랑스 공공기관 특유의 관료제의 특성을 고려할 때, 몇 달은 더 걸릴 일일지도. 하긴, 하루에 들어오는 신간이며 처리해야 할 정보만 해도 엄청날 텐데.
그래도, 여전히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이긴 하지만, 카탈로그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가티나라는 이탈리아 철학자요 로마 대학교 교수로, 출생연도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알기로는, 현재에도 활동중입니다. 처음에 오류를 보고 놀랐어요. 그 동안에는 이런 일이 잘 없었고 귀관의 정보를 신용하고 있었으니까요. 혹시 저자가 놀라는 일이 없도록 신속한 교정을 바랍니다."
나로서는 꽤 수고를 요하는 일이었음에도 이 정도까지 한 것은, 책과 저자에 대한 경의 때문이기도 했다. 이성의 우려 (' target='_son'>http://www.vrin.fr/html/mai ... ook&isbn=2711613194> 출판사 브랭의 책 소개 와 ' target='_son'>http://books.google.fr/book ... v=onepage&q&f=false> 구글 북스 페이지 )는 부제가 시사하는대로 간전기, 즉 양차대전 사이의 시기인 1920-30년대 프랑스의 역사학과 인식론의 흐름과 그 흐름을 주도한 인물들을 되짚는 책이다. 그 흐름과 인물이라 함은, 당대 과학 지식에의 천착 및 반성을 바탕으로 20세기초 프랑스 인문학 특유의 합리론 전통을 만든 브룅슈빅, 베르그손, 메예르손에서부터, (어떤 의미에서 이들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는) 아날 학파와 프랑스 역사적 인식론, 그리고 이를 주도한 블로크, 르페브르, 바슐라르, 코이레를 일컫는다.
이들에게는 공통적으로 합리적 이성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고, 과학은 이 믿음의 증거인 동시에 징표였다. 그러나 이들은 과학을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대신, 비판적이고 (칸트적 의미에서) 초월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과학주의도, 반과학주의도 아닌, 친과학주의랄까? 1차대전의 상흔 속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반감, 나아가 적대감이 생겼을 법도 하지만 2차대전의 핵공포에 비할 바는 아니었겠고 (물론 당시로서는 사상 최고의 참상이었겠으나), 당대의 과학 또한 격변을 겪고 있었는데 (상대성이론에 이어 양자역학), 이들은 오히려 그 지점을, 즉 과학이 가져온 사유의 변화를 높이 사고 그 가능성을 믿었던 것 같다...는 것이 내 평소의 지론이고, 책을 훑으며 이를 재확인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무엇보다 아날과 역사적 인식론의 계보를 엮다니, 흥미로운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이탈리아인인 저자가 외부자로서 신선한 시선을 제공한 사례. (오류 수정에 몰두하느라) 책을 대출해 놓고도 꼼꼼하게 읽진 않았지만, 분명한 건 나도 언젠가 이런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결과가 어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꽤 즐거운 모험이었다. 이런 모험을 너무 즐기는 게 탈이긴 하지만.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도서관에서의 모험 중 최고는...
위고 카브레에서의 저 소년 소녀들처럼, 책들을 이리저리 뒤지며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일.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장면 중 하나인데, 아마도 내가 파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도서관 중 하나인 주느비에브가 배경이 된 때문이리라. 영화 속 20세기초의 풍경과는 달리 지금은 개가식 도서 진열은 층 하나로 한정돼 있고, 열람석은 시험 공부하거나 숙제하는 어린 학생들로 북적대지만.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