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3일 화요일

과학철학 및 과학사 개론서에 관해 답함

저도 무척 반가웠어요. 질문도 무척 반갑네요. 전공자로서 인정받은 일은 실로 오랜만이어서. 그것도 전도유망한 동학에게.

더구나 개론서 혹은 입문서는 제 오랜 관심사 중 하나이기도 해요. 개론서라는 것을 단지 초심자를 위해 접근성과 대중성, 나아가 상업성을 추구하는 일종의 하위장르라 볼 게 아니라 생각하거든요. 한 분야 전공하다 보면 대개는 세부전공에만 주력하느라 거시적이고 개괄적 관점을 놓치기 쉬운데, 그리고 그것이 특히 철학도에게는 때로 치명적 결함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점을 보완하도록, 최소한 그에 대한 주의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개괄서랄까요. 전공자라면 아무래도 자기 분야 개설서에는 비판적 시각에서 접근할 거고, 유사 혹은 근접 학문 전공자--이를테면 현대 프랑스 철학 전공자에게 과학철학이 그렇듯--라면 비판적 시각에 참신함을 더할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래서 틈만 나면 제 분야 및 유사 분야에 새로 나온 개론서 없나 확인하고 또 가능하면 수집도 하는 것이 제 취미랍니다.

그런데 철학사적으로 다룬 과학철학 및 과학사 개론서라. 의외로 어렵네요. 게다가 방법론에 참고가 될만한 것으로. 흔히 프랑스 인식론이라 하는 프랑스 과학철학을 말하는 건가요, 아님 영미권 포함한 전반? 들뢰지엔느에겐 아무래도 전자가 맞을 것 같으니 그렇게 가정하고 답을 해보면. 일단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이미 알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바, 프랑수아 샤틀레 François Châtelet 가 편집한 Histoire de la philosophie 에 4권에 실린 글이에요. 알다시피 들뢰즈가 구조주의 관련 글을 맡아 썼고 이것이 마지막 권인 현대 편에 실렸는데, 같은 책에 미셸 피샹 Michel Fichant이 인식론을 개관하는 글을 실었죠. 옛날 글이긴 한데, 책 전체의 기조나 필진 면면을 볼 때 추구하는 방향성과 맞을 것 같고, 또 글 자체도 바슐라르, 캉기옘, 까바이예스 등등 이쪽 계보에 관해 간명하게 정리한 글로는 제가 본 중 손에 꼽을 정도이기도 하고.

좀더 일반적이고 무난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준은 아닌 입문서로 저도 아직까지 즐겨 찾는 책으로는 끄세주 Que sais-je 총서의 Épistémologie 가 있어요. 이게 있고 또 같은 총서로 나온 Philosophie des sciences 가 있는데, 저는 좀더 프랑스 인식론 계보를 따르는 전자를 선호해요. 후자는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라는 책 저자로도 유명한 도미니크 르쿠르가 썼는데 좀더 스탠더드한, 영미권 과학철학까지 포괄하는 좀더 균형 잡힌 접근을 보려면 이 책이 더 나을 수도.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과학철학/사를 철학사적으로 접근하는 시도에 대해 생각을 해봤어요. 앞서 언급한 피샹은 과학사와 철학사의 접목을 시도한 모범적이면서 또 전형적 사례라 하겠는데, 이는 이분 주전공인 라이프니츠라는 인물의 과학자인 동시에 철학자인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17세기, 나아가 최소한 19세까지 철학자와 과학자 진영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생각하면 그리 특별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어요. 이 전통을 이어, 그리하여 역사성을 담보하는, 여기에서 역사라 해서 헤겔이나 하이데거의 사례에서 보듯  독일 철학의 어떤 관념론적 전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아니라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정신의 흐름에 주목해 온 것이 프랑스 철학의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게루, 뷔유맹 같이 걸출한 철학사가인 동시에 과학사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고. 

좀 다르지만 들뢰즈도 이 전통으로부터 멀지 않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요? <차이와 반복>의 다종다양한 참고문헌 목록에서 이미 드러나듯. 철학사가로서의 하물며 과학사가로서의 들뢰즈에 대한 평가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으나, 철학사와 과학사를 사상의 재료로 삼는 방식만큼은 모범적이었고 또 전형적이기도 했다고 볼 수도. 물론 그런 의미에서 훨씬 더 전형적이면서 모범적인 사례로는 단연코 푸코를 꼽아야겠지만요.

그냥 생각나는대로 썼더니 정작 도움이 될 얘기는 없는지도. 다음에 만나면 또 얘기해요. 그런데 생각나면 또 쓸 수도. 제가 워낙 계단생각 esprit de l'escalier 에 익숙한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