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1일 화요일

무와 무한 (2) 유한의 무한 도전 : 세계와 정신의 한계에 관한 사유 (2019년 11월 16일)*

 서론 : 역설, 피조물의 창조적 역습 

무한 개념의 기원과 분류 : 물리적 무한과 수학적 무한, 가무한과 실무한

역설의 보고(寶庫)로서의 무한

물리적 무한과 그 역설

그리스의 유한 우주와 그 역설

근대 무한 우주의 도입

밤하늘은 왜 검은가? 올베르스의 역설 칸트의 이율배반

수학적 무한과 그 역설

연속과 무한 : 제논의 역설

무한은 얼마나 작은가? 미분의 도입과 무한소 무한을 셀 수 있는가? 힐베르트의 무한 호텔 무한은 얼마나 큰가? 칸토어의 역설

결론 : 무한과 한계, 그리고 역설의 가치


별첨(인용구)

1° 모순율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위배를 거두어야 할 필요가 우리로 하여금 수학적 연속을 발명하도록 강제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개념의 모든 것이 정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또 정신에 이러한 기회를 부여한 것이 경험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 앙리 푸앵카레,『과학과 가설』 (1902)

2° 잠재적 존재와 현실적 존재가 있으며, 추가에 의한 무한과 분할에 의한 무한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크기도 현실적으로 무한하지 않고 크기는 분할에 의해 무한하다고 말했다 (분할불가능한 선이 있다는 주장은 쉽게 반박된다). 그러므로 크기는 잠재적으로 무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크 기가 잠재적으로 무한하다는 말을, 잠재적인 조각 작품이 언젠가 현실적인 조각 작품이 되는 것처럼 크기가 언젠가 현실적으로 무한해지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존재는 여러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이 무한하다는 말은 특정한 날이나 경기가 있다는 말과 뜻이 같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잠재성과 현실성을 구별할 수 있다. 올림픽 경기는 거행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잠재적으로 있을 수도 있고 거행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현실적으로 있을 수도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3° 17세기 혁명에서 비롯된 변화는 코스모스의 해체와 공간의 기하학화라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 어졌다. a) 변화와 부패의 영역의 중심인 무겁고 불투명한 지구가 있고, 그 “윗편”에 무게도 없고 부패하지 않으면서 빛을 내는 별들이 위치한 천 상계가 “올라선” 것이 [코스모스의] 세계였다. 이 세계는 무제한의, 나아가 무한의 우주, 모든 부분 들을 [일괄적으로] 지배하는 법칙들, 그리고 같은 존재론적 수준에 위치한 요소들의 동일성에 의해 서만 통일된 우주가 그것이다. b) 아리스토텔레스 공간관, 즉 세계 안의 장소들의 차등화된 총체였 던 공간이 등질적이고 필연적으로 무한한 연장체 인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간으로 대체되었고, 이는 구조상 우주의 실제 공간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 될 것이었다. – 알렉상드르 코이레, 『닫힌 세계에 서 무한 우주로 (From Closed World to Infinite Universe)』 (1957)

4° 앞의 것들[무한한 선, 물체의 분할, 별들의 수...] 을 우리는 무한하다고 하기보다는 부정(不定)하다 고했다. 이는 무한이라는 용어를 단지 신에게만 쓰고자 하기 위함인데, 그 이유는 이렇다. 우리는 단지 신에게 있어서만 어떠한 한계도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떠한 한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인식한다. 반면에 우리는 다른 것들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와 같이 긍정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며, 그것들이 한계를 갖고 있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발견할 수는 없고 단지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 데카르트, 『철학원리』 (1644)

5°모든 사물들이 공유하는 성질들이 있고, 그 성질들에 대한 앎은 우리의 정신을 자연의 가장 큰 경이로움으로 이끈다. 그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경이로움은 모든 사물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 가지 무한, 즉 무한대와 무한소이다. 어떤 공간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우리는 더 큰 공간을 상상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것보다 더 큰 공간도 상상할 수 있다. 이 상상은 더 이상 확장할 수 없는 공간에 도달함 없이 무한히 계속된다. 반대로 어떤 공간이 아무리 작다 할지라도 우리는 더 작은 공간을 생각할 수 있고, 그 생각은 더 이상 분할불가능한 공간에 도달하지 않고 무한히 계속된다. 시간도 마찬 가지다. 우리의 한계를 깨닫자. 우리는 한 사물이지 모든 사물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는 무에서 발생하는 최초 원리에 대한 앎을 방해하고, 우리 존재의 작음은 우리의 눈앞에서 무한을 감춘다. [...] 이 무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 블레즈 파스칼, 『팡세』

6° 무한한 공간 전체에 정말로 태양들이 있다면, 그 태양들이 대략 같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분포 하든지 아니면 은하수-시스템들에 속해서 분포하든지 간에, 태양들의 개수는 무한대일 테고, 따라서 온 하늘이 태양에 못지 않게 많아야 할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에서 뻗어나간다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직선 각각이 반드시 어떤 항성과 만날 것이고, 따라서 하늘의 모든 지점이 우리를 향해 항성의빛,곧태양의빛을보낼것이기때문이다. – 하인리히 빌헬름 올베르스, 1832

7° 별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면, 밤하늘의 배경은 은하수처럼균일하게밝을 것이다.왜냐하면밤하 늘의배경전체에별이없는지점이단하나도없 을 터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망원경 들이 무수한 방향에서 포착하는 허공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보이지 않는 배경까지의 거리가 어 마어마하게 멀어서 거기에서 출발한 광선이 아직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일 성싶다 – 애드거 앨런 포, 『유레카 : 산문시』 (1848)

8° [모든 사물은] 분할가능하거나 분할가능하지 않 거나 둘 중 하나다. 분할가능한 것은 분할가능하지 않는 것으로 분할되거나 계속해서 분할되거나 둘 중하나다.마지막경우가연속에해당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9° 시간이 어떻게 영혼과 관계하는지, 왜 시간이 땅과 바다와 하늘에 있는 모든 것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 연구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만일 영혼이 없다면 시간이 존재할까, 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면, 어떤 것이 셀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어지는 것 혹은 셀 수 있는 것인 수도 명백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세는 능력을 가진 영혼이나 영혼 속의 정신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할 수 없다. 영혼 속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면 시간의 바탕만 존재할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10° 사유되지 않는 것은 순전한 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사유만을 사유할 수 있으며, 사물에 관해 말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언어란 오직 우리의 사유를 표현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사유 외에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생명은 죽음이라는 두 영원 사이의 짧은 일화에 지나지 않고 –시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모순으로 보이겠지만–, 이 일화에서조차 의식적 사유는 얼마 지속되지 않았으며 오직 한 순간만 지속할 뿐임을 지질학의 역사는 보여준다. 사유란 기나긴 밤의 한 가운데 내리치는 번개일 뿐이다. 그러나 이 번개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다. – 앙리푸앵카레, 『과학의 가치』 (1905)


참고문헌과 동영상

- 존 D. 배로 지음, 전대호 옮김, 『무한으로 가는 안내서 : 가없고 끝없고 영원한 것들에 관한 짧은 기록』, 해나무, 2011
-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전대호 옮김, 『밤을 가로질러 : 밤, 잠, 꿈, 욕망, 어둠에 대하여』, 해나무,  2015
- EBS 지식채널 e “왜 밤하늘은 어두울까”
- 제프 데코프스키 Jeff Dekofsky, “무한 호텔 역설The Infinite Hotel Paradox” on YouTube
- EBS 다큐프라임 “넘버스 2부 – 천국의 사다리,∞”
- 카오스재단, [카오스 술술과학] “도대체 무한이란 무엇일까” 1 & 2 (무한의 신비 & 무한을 세는 법)

Scarph : PauvRe, Haute, Solitaire et melAnColique: 무와 무한 : 피조물의 창조적 역습 (이화인문아카데미, 2019년 11월)*: 6강

무와 무한 (1) 무에서 유로 : 우주와 그 기원에 관한 사유 (2019년 11월 2일)*

서론 : 근본적 물음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는가?

우주생성론 (cosmogonie : cosmos+gonos) cf. as- tron+nomos, cosmos+logos, etc.

플라톤 : ‘그럼직한 설명(eikos logos)’으로서의 우 주(생성)론

우주론의 역사와 철학 

우주론의 특수성

우주론의발전단계 : 고대-고전-현대?과학적우 주론은 아인슈타인 이후?

A. 그륀바움 (Adolf Gru ̈nbaum, 1913-2018)

왜 무가 아니라 유인가? : 근원적 실존 문제 (Primordial Existential Question)

PEQ의원형:라이프니츠,자연과은총의원리 (1714)

베르그손의 비판 : 잘못 제기된 문제

그륀바움 : PEQ의 두 전제(무의 자발성과 우연성)

에 대한 비판 우주론적 신존재 증명

어떻게 무에서 유가 나오는가? ‘무로부터의 창조’와 현대우주론

그리스 철학에서 무/허공의 도입 : 원자론의 이론 적 요구

플라톤 : 데미우르고스의 신화 ; 아리스토텔레스 : 영원우주론

사물의 존재 방식에 관한 물음으로서의 PEQ cf. 사물의 기원적 생성(1697)

빅뱅의 이전 혹은 기원에 대한 물음

결론 : 종교, 과학 그리고 철학 

최근 종교-과학 담론의 경향


별첨(인용구)

1° 반성을 할 줄 아는 모든 인간은 세계의 기원이 라는 문제에 몰두해 왔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묻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 앙리 푸앵카레 (1854-1912), 『우주생성론 강의』, 1911

2° 언제나 있는 반면 생겨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언제나 생겨나되 결코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확실히 이성적 설명과 함께 하는 사유를 통해 헌 것은 언제나 동일하게 있는 것인 반면, 비이성적인 감각을 동반하는 판단을 통해 의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일뿐 진짜로는 결코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생겨나는 것은 모두 필연적으로 어떤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원인이 없이는 생겨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실로 하늘 전체를 놓고 보자면, – 혹은 그 것이 세계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그렇게 불렀을때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이름이라면, 우리로서는 그렇게 부르도록 하죠. – 어쨌건 그것에 관해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무엇에 관해서든 맨 처음 탐구하도록 제기되는 물음, 즉 그것이 생성의 시초라고는 일절 갖지 않은 채 항상 있어 왔는지, 아니면 어떤 시초에서 출발하여 생겨났는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겨났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고 만질 수 있으며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요. 그런데 그와 같은 것들은 모두 감각될 수 있으 니, 감각될 수 있는 것들은 감각을 동반한 의견에 의해 파악되는 것들로서, 생겨나고 태어난 것으로 서 밝혀진 것입니다.

사실상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본성에 맞 는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는모상에관해서도,또본에관해서도다음을구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설명이란 무엇인가를 해명 하는 것으로서 바로 그 무엇과 동류이니까요. [...] 그러니까 존재가 생성에 관계하는 것처럼, 그렇게 진리는 믿음에 관계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소크라테스! 여러 가지 점에서, 또 여러 가지 문제들, 예컨대 신들이라든가 우주의 생성과 관련하여, 우리가 전적으로 모든 면에서 그 자체로 일관되며 완벽하게 엄밀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놀라지마세요. 오히려 정말 우리가 누구 못지 않게 그럼직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 플라톤, 『티마이오스』, 27d- 29d

3° 1917년과 1925년 사이 불과 몇 년만의 일이었다. 한 천재물리학자, 그리고 한 천문학자에 의해 다루어진 거대한 망원경이 우주에 대한 관념과 시각을 자연철학에 들여왔다. 이 만남에서 현대 우주론이 탄생했다. – 자크 메를로퐁티, 『20세기 우주론』, 1965

4° 지금까지 우리는 단순한 물리학자로서 논했다. 이제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대(大)원리를 이용해서 형이상학으로 올라서야 한다. 그 원리의 내용은 어느 것도 충분한 이유 없이는생기거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사물에 대해 충분히 알기만 하면 왜 그것이 저러하지않고 이러한지를 규정할 충분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고, 그와 다른 방식으로는[즉 사물이 이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제시되지 않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원리가 일단 제시되면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가? 왜냐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무엇인가 있는 것보다 단순하고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물들이 있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그것들이 왜 달리 있지 않고 이렇게 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 라이프니츠, 『자연과 은총의 원리』, 1714

5° 도대체 우주가 왜 있는가? [우연적인]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살아 있는 존재도, 별도, 원자도, 심지어 시간과 공간조차도. 이러한 [”전무(Null)”의] 가능성을 생각하면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놀라워 보일 수 있다. – 데릭 파핏(D. Parfit), ”The puzzle of reality. Why does the universe exist?”, 1998

6° 그런데 이 질문은 다음을 전제한다. 실재가 허공(vide)을 채우고 있고, 존재의 기저에는 무가 있으며, 당위적으로는 아무 것도 없어야 하고, 따라서 왜 사실상으로는 무엇인가가 있는지가 설명되어야 한다. 이 질문은 순전한 환영이다. 왜나하면 절대적 무의 관념은 둥근 사각형과 다를 바 없는 의미를 가질 뿐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의 부재는 다른 어떤 것의 현존이다 (다만 이 현존하는 대상에 대해 우리는 우리가 관심이 있거나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하는 편을 선호할 뿐이다). 그런 만큼 어떤 것의 제거는 다른 것으로의 대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업은 양면적일진대 우리는 어느 한 면만을 보려 한다. 모든 것의 폐기는 자기 파괴적이요 생각조차 불가능하다. 그것은 유사관념이요 표상의 환영이 다. – 베르그손,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1935

7° 우주의 기원에 대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진보는 존재에 의한 존재의 존재에 대한 고려, 그리고 가장 최초의 혹은 초월적 기원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질문을 다루는 형이상학에서 이루어졌다. 발전하고 진화하기 위해서 세계는 우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무로부터 존재로 화(化)해야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창조되어야 했다. 본질에 의해 존재하는 최초의 존재에 의해. – 베네딕트16세, 교황청 주관 학술대회 ‘우주와 생명의 진화에 관한 과학적 통찰’ 기조 발언, 2008


참고문헌

- 김혜숙, 『칸트: 경계의 철학, 철학의 경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1.
- 플라톤, 『티마이오스』, 김유석 옮김, 아카넷, 2019.
- Adolf Grünbaum (2013) “Science and the im- probability of god” (초판에는 같은 글이 ‘Why is there a universe at all, rather than just nothing’ 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in C. Meister and P. Co- pan (ed), Routledge Companion to Philosophy of Religion, 2nd edition (New York: Routledge).
- 짐 홀트,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역사를 관통하 고 지식의 근원을 통찰하는 궁극의 수수께끼』, 우 진하 옮김, 21세기북스, 2013.


Scarph : PauvRe, Haute, Solitaire et melAnColique: 무와 무한 : 피조물의 창조적 역습 (이화인문아카데미, 2019년 11월)* 5강

무와 무한 : 피조물의 창조적 역습 (이화인문아카데미, 2019년 11월)*

무(無)와 무한(無限)은 서양철학 고유의 개념으로,  전자가 유대교-기독교의 유산이라면 후자는 그리스 철학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양자 모두 오직 신에게만 가능하며 심지어 이해가능하다 여겨져 왔지만 실은 인간 정신의 창조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인간이 창조해서 초월적 존재에 부여한 속성인 것이다. 사실 이 초월적 존재의 개념 역시 인간 스스로 창조한 것이다. 이 존재를 창조주로, 그리고 스스로를 피조물로 규정한 것 역시 인간인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무와 무한 개념은 도전에 직면한다. 근대 과학(특히 우주론)이 "무로부터의 창조"에 기반한 창세기의 우주론이나 "어떻게 무가 아니라 유인가?"라는 문제로 집약되는 철학(특히 형이상학)에 대한 도전이었다면, 근대 수학(특히 미적분학과 칸토르의 초한수론)은 무한의 접근불가능성 혹은 이해불가능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이 도전들은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한다. 이 강좌에서는 무와 무한 개념을 둘러싼 철학, 과학, 그리고 수학의 도전과 응전을 다룬다. 

강사 소개

이지선 : 이화여대에서 물리학(전공)과 철학(부전공)을 수학한 뒤, 동대학원 철학과에서 수학의 적용과 그 존재론적 함축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앙리 푸앵카레의 사상과 17~19세기 우주론의 역사에 관한 논문으로 프랑스 파리 디드로 대학 (구 파리 7대학)에서 과학철학 및 과학사 ("과학기술의 인식론과 역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과학, 철학, 그리고 가끔은 예술의 경계에서의 사유를 과업으로 삼고 있다. 논문으로 "철학자의 시간과 물리학자의 시간"(철학, 2019)이 있으며, 과학사 고전인 알렉상드르 코이레의 <닫힌 세계에서 열린 우주로>(읻다, 2021년 출간 예정)를 옮기고 있다.

세부 내용

- 우주론의 철학 및 역사 개괄, 그리스의 우주론과 유대-기독교의 우주론, 우주론적 문제와 형이상학의 문제 ("어떻게 무가 아니라 유인가?"), 창조를 둘러싼 개념들 (무로부터의 창조, 연속 창조 등), 고전 및 현대우주론의 도전 등
- 수학의 철학 및 역사 개괄, 그리스 수학에서의 무한 및 관련 개념들 (연속, 악무한과 가무한의 구분 등), 무한소와 미분의 발견, 무한의 역설, 칸토르의 도전과 괴델의 정리 등

참고 문헌

- (생명과 우주에 대한) 과학과 종교 논쟁, 최근 50년 : 빅뱅에서 지적 설계까지 / 래리 위덤 지음 ; 박희주 옮김 (서울 : 혜문서관, 2008)
- 수학의 몽상 : 이진경의 매혹적인 근대 수학사 강의 / 이진경 지음 (서울 : Humanist, 2012)
- 우주, 진화하는 미술관 : 이미지로 보는 우주와 과학의 역사 / 존 D. 배로 지음 ; 노태복 옮김 (파주 : 21세기북스, 2011)
- 옥스퍼드 과학사 : 사진과 함께 보는, 과학이 빚어낸 거의 모든 역사 / 이완 라이스 모루스 외 지음 ; 임지원 옮김 (서울 : 반니, 2019)


*2019년 가을 이화철학연구소 주최 이화인문아카데미 연속강좌  "서양 철학 리부팅_1 신과 인간: 크리에이터 vs 크리쳐", 5, 6강 기획안. 이 꼭지는 내가 기획했지만 꽤 그럴 듯하다. 그에 비해 강의는 준비가 부족해 무척 아쉬웠지만 나중에 이런 구성으로 책을 써보면 좋겠다. 

2020년 11월 5일 목요일

베토벤에 대한 사심 어린 진심

 



지니 뮤직의 “베토벤의 사계” 음반 소개. 이에 겸한 추첨 이벤트에 응모했는데 결과는 탈락. 나름대로 정성들여 썼고 쓱 보니 저 정도로 성의 있게 쓴 경우는 드물어서 내심 기대했거늘. 

사심이 동기가 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을 담았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베토벤 현악 4중주가 아니었다면 버틸 수 있었을까 하고. 전에는 가볍고 경쾌한 바로크를 좋아하고 낭만파는 진중하고 무거워서 피하는 편이었는데, 몇 가지 계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듣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저 위에 적은대로, 인생을 함께 해오고 있다. 프루스트와 고다르, 그리고 프랑스 국영 라디오 방송국의 고전음악 위주 채널인 프랑스뮤직, 그 중에서도 현악 4중주 헌정 방송인 Plaisir du quatuor (4중주의 기쁨), 그리고... 너. 너는 가고 (왔던 적도 없지만), 베토벤이 남았다. 그렇게 계절이 벌써 몇 번째 바뀌고, 너는 여전히 오지 않고 있지만... 베토벤은 영원하다.

2020년 6월 18일 목요일

전설의 수련, 수련의 전설

https://drive.google.com/uc?export=view&id=1lUByXVkjX1CFv5MTAacfBioC_4n-5ykNhttps://drive.google.com/uc?export=view&id=1NgwDYs0tPDrWAeHNBrBvDHpAuKf4z-FLhttps://drive.google.com/uc?export=view&id=1o5abjE0SvX-_o56h8g1YhdJu6i7wg0nbhttps://drive.google.com/uc?export=view&id=1Tadgx6jWgTMI1m1Fpul1DHrFAp8Vuhechttps://drive.google.com/uc?export=view&id=1YPV04wZQIVfK1e9BXZBGZKbkpKiCQQf5
춘천, 강원대 연적지
iPhone SE

지베르니 모네의 집에서도 저렇게 연못 한가득인 수련을 본 기억이 없다. 아니 수련 자체의 기억이 모네의 그림으로 본 것 말고는 없다. 시뮬라크르로 대체되었던 실재와의 조우. 그런데 조우한 실재는 다시 시뮬라크르로(위의 사진).

에드워드 윌슨은 1993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인류는 자살 성향을 띠는가?”에서 프랑스에서 전해 내려온다는 수수께끼를 언급한다. 연못가의 수련이 한 번 피어나기 시작하면 하루에 두 배씩 늘어난다. 30일 후 연못이 연꽃으로 가득 찬다면 연못의 절반이 채워지는 것은 언제인가? 정답은 당연히 29일째. 환경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든 예다.

이렇게 급수적인 전개는 많은 종류의 위기와 재난에 적용될 수 있겠으나, 또 적잖은 위기와 재난이 돌발적으로 발생하며 그 전개 양상도 변칙적이어서 (가령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31번 환자의 등장과 더불어 확진자 수가 급증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늘 긴장과 경계를 늦출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느라 힘이 빠져 정작 위기가 닥쳤을 땐 대처 능력이 없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해마다 아니 날마다 반복되는 이 순환을 어떻게 끊을 것인가? 나도 좀 사는 것처럼 살고 싶단 말이다.


위험한 소녀의 조용한 일갈


삼청동, 2019년 9월
iPhone 6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이 블로그다. 블로그를 방치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으나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언어, 그리고 사유와의 불화 때문이었다. 아,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언어와 사유가 밀접히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상호의존적임을.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사유란 자기모순이요 실현은 물론이고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할 말도 쓸 말도 없다는 건 생각이 없다는 것. 그러면서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고 연구한다고 감히 나서 왔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다른 이유는 아이폰 6로 바꾼 후 마땅한 블로깅 앱을 찾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번에 큰맘 먹고 3유로가 넘는 전용 앱을 마련했다 (올케 ㅎ에게 감사).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도, 다른 이유나 핑계나 찾고 뭐고 할 것 없이 무조건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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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에 앞서, 혹은 그와 더불어, 읽자. 이 역시 부끄러운 일이지만 뭐든 제대로 읽은지가 너무도 오래 되었다. 

위의 사진은 지난 9월의 볕 좋은 어느날, 엄마와 삼청동 수제비를 먹고 나오는 길에 찍은 것이다. 보고는 요전 블로그에서 성황리(?)에 진행하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콜렉션이 생각나는 한편으로... 부끄러웠다. “위험한 여자”인지 너무도 오래. 다시 위험해지라, 소녀는 내게 그렇게 일갈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