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0일 금요일

홍상수 영화를 보고 코끝이 시큰

거릴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보다가 일어난 일이다. 해원이가 엄마랑 서촌 이래저래를 돌아다니다, 사직공원도 가고, 중간에 서점도 들르고, 엄마 모교도 갔다가, 마지막으로 카페에 들어가 나란히 앉아 "엄마 잘 살아요" "너도 잘 살아라" 하다 울음을 툭 터뜨리자, 나도 덩달아 왈칵.

인사동이나 삼청동 등지를 돌아다니며 모녀지간 단촐히 오후 한때를 보내는 일, 나도 엄마와 자주 하던 일이다. 엄마 앞에서 아기처럼 펑펑 우는 일도. 물론 후자는, 전자보다는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믿고 싶)지만, 그 정화와 위안의 효과란 이루 말할 수 없는 바였다.

한편으로 갈수록 홍상수 영화가 좋아진단 생각을 이번에도 했다.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객관적이라 함은 다음의 의미에서다. 갈수록 영화가 가벼워지고, 가벼워지는만큼 외려 작가 고유의 세계가 뚜렷해지고 정합성과 형식미와 압축미 등등이 두드러지는가 하면 각 작품마다 인생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마저 엿보이는 듯하다. 다 똑같게만 보이는 테마("감독님은 왜 맨날 똑같은 얘기만 하세요? 지겹지 않으세요?" : 그가 귀닳도록 들었을 질문), 대표적으로 지식인/예술인들의 현학적이고 위선적인 언어 및 행태("감독님은 본인도 교수직에 있으면서 교수 지식인 비판하고 풍자하는 영화 만드시면 자기모순을 느끼지 않으세요?" 대충 이런 내용의 대사가 이번 영화에도)만,에서부터 제법 다채로운 변주를 끌어냄으로써, 그러면서 어쩌면 심층적이고 가장 본질적일지 모를 테마들, 이를테면 우연, 관점(주의?), 인간관계에서의 진실, 진심, 진정성 등등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기에 이르기까지.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음악의 사용이 갈수록 두드러진단 사실.  <옥희의 영화>에서의 위풍당당 행진곡이나 <해원>의 퍼셀(아마도? <배리 린든>에 나왔던)이나 굳이 의미를 부여하기엔 아직까진 크게 성공적이었던 것 같진 않으나, 잎으로의 진화가 기대되는 부분이다.

주관적인 이유는 이것이다. 홍상수는 초기부터 줄곧 서울과 지방 여기저기의 가장 자연스런 모습을 찾아 담아왔다. 프랑스 곳곳을 돌아다니며 현대판/영화판 "인간 극장"을 꿈꾼 에릭 로메르처럼. 로메리앙이건 아니건 간에 그가 담아내는 서울 풍경은 나같은 이에게 커다란 안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좋아진 데에는, 타향살이가 길어진 탓보단 나이 탓이 크지 않은가 한다. 나도 나이를 먹었지만, 작가도 그만큼 나이가 든 게고.

- Circa 2013

2018년 8월 7일 화요일

블루 자스민, 혹은 우디 앨런의 미소

 최근 몇년 새 우디 앨런이 유럽과 영국을 방랑하며 찍은 작품들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매치 포인트>와 <미드나잇 인 패리스> 정도를 제외하면. <매치 포인트>가 뛰어난 스릴러 감각에 영국 계급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 돋보이는 수작이라면, <패리스>는, 작가로서의 욕심과 역량을 드러내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 취향을 여과없이 담는 데에 주력, 비슷한 취향을 소유한 나같은 관객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어느 작품도 내가 앨런에게서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켜주진 않았다.

내가 앨런에게서 기대하는 바란 이런 것이다. 불평불만 가득하고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도 인간과 관계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하고 그런 가운데 자아와 세계를 성찰하고 나아가 새로운 자아상 및 세계관을 확립할 가능성. 인간주의적 냉소랄까, 냉소적 인간주의랄까. 영화 내내 곤두서 있던 신경을 누그러뜨리며 아주 잠깐, 아주 살짝 미소짓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맨해튼>의 마지막 컷이 엘런 세계의 이러한 근본 이념을 집약해서 보여준 바 있다.

뉴욕은 단순한 로케이션을 넘어 그러한 이념을, 더불어 그 이념을 말하자면 극복할 계기를 보여주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장치였다. 그리고 앨런의 작품들은 뉴요커로서의 존재 증명이었다. 뉴욕에서 찍지 않은 작품들마저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그가 뉴욕만 벗어나면 힘을 잃는다고 단언하는 한편, 어서 외유를 접고 그만의 도시로 돌아가길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블루 자스민> (2013)의 배경은, 애석케도, 뉴욕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다. 주인공은 부유층에서 하루 아침에 빈털터리로 전락한 중년 여성. 영화는 뉴욕에서 최상류층의 삶을 구가하던 그녀의 과거와, 샌프란의 동생네 집에 얹혀 살며 새 인생을 시작하려 애쓰는 현재를 교차하면서 보여준다. 플래시백에서 등장하는 뉴욕은 이전까지 앨런이 그려왔던 뉴욕과는 다르다. 허위와 과시욕과 위선으로 가득한 부자들의 삶. 샌프란의 프롤레타리아 "루저"들의 그것과 대비되지만 둘다 공허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이 같고도 다른 사회에 대한 시선에서 계급 사회 및 현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풍자를 읽을 수 없는 바는 아니나, 전반적으로는 희화화와 진지한 비판이 무질서하게 섞여 블랙유머도 아니고 페이소스도 없는 어정쩡한 코미디가 되어 버렸다.

특히 주인공 케이트 블랜챗은 배우 개인으로서나 앨런 영화의 여주인공으로서나 낯설었다. 정확히는 불편했다.

영화는 그녀가 어떻게 "하락"한 "신분"으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치과병원 접수원이라는 "모욕적"인 직장에서 피곤한 환자들을 상대하는 걸로도 모자라 의사의 성희롱까지 겪는다든지. 그러나 그저 달리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일 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새 삶을 개척하려는 의지는 결여돼 보인다. 계속해서 과거를 복기하며 바로 그 과거로 복귀하길 꿈꿀 뿐이다. 그것도, 과거와 꼭 같이, 돈 많은 남자를 만나는 방식으로.

여기까진 클리셰다. 얼마든지 풍자하고 조롱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그런 그녀의 내면을  관찰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울분을 터뜨리고 마스카라가 범벅된 눈물을 시도때도 없이 흘리거나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신경안정제를 상습적으로 복용하는 등, 그녀의 행태는 희화화 대상으로 삼기엔 심각한 수준의 병리적 상태로 보인다. 이러한 묘사와 관점이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함을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해당 분야 전문가의 몫이겠다. 나는 그저, 인물에 대한 타자화 혹은 소외 혹은 몰이해 혹은 공감부족으로 점철된 시선이 영화의 내적 완성도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앨런은 이전에도 말많고 신경쇠약 직전에 항우울제를 달고 사는 여자들을 즐겨 그려왔다. 그녀들은 대상화되었다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투사, 말하자면 여성적 페르소나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녀들에 대한 묘사는 특별히 친여성적이거나 여성주의적이지는 않았다 해도 적어도 반여성적이진 않았다. 이것은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작가의 대상과의 동일시와 공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로서의 앨런이 단순히 여성관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펠리니의 이탈리아나나 누벨바그 감독들의 파리지엔느처럼 여성 이미지의 창조는 앨런의 작가적 스타일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였다.

다이앤 키튼으로 대표되는 앨런 영화의 뉴욕 여성들은 거개가 전문직에 종사하는 인텔리 계급에 속한다. 거기에 자스민과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자스민은 엑스 뉴요커이긴 해도 신흥 부르주아에 가깝다. 그것도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투자 사업으로 쌓았고, 그마저도 사기 행각으로 점철된 부다. 내가 아는 한 이 시대 최고의 스노브이자 모랄리스트 중 하나인 앨런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부류인 것이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남편의 재산에 의존해 안일한 삶을 구가한 원죄가 있고 따라서 인텔리 여성 동지들이 혐오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췄다. 앨런으로서는 대상을 얼마든지 대상화하고 타자화할 안전 거리를 확보한 셈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획득된 관점이 내 눈엔 의뭉스럽게 보인다. 한 부르주아의 경제적이고 도덕적인 몰락에 안도하는... 또 다른 부르주아의 타락한 도덕과 허위의식을 보는 것만 같다. 

샤워를 마친 뒤 거리에 나와서는 젖은 머리 그대로에 화장기가 전혀 없이 늙고 지친 모습으로 공중 벤치에 앉아 혼잣말을 중얼대는 자스민의 얼굴을 화면 가득 비추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마지막 장면을 다시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맨해튼>의 그 마지막 미소가 더욱 그리워진다.

- 2013년 10월 작성한 글을
2018년 8월 복원하여 게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