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e apparition

blogin.com · 2011-02-04

트뤼포의 [도둑맞은 키스]를 뒤늦게서야, 그것도 유튜브에서 봤다. 혹자는 내게 최고의 로맨틱 코미디물이라 했는데, 글쎄, 그런 측면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나더러 굳이 이 영화를 어떤 특정한 장르로서 규정하고 또 그에 준한 평가 술어들을 부여하라 한다면... 무리를 무릅쓰고 "감성교육(éducation sentimentale)-연애입문(initiation d'amour)"이라는 범주를 끌어들이겠다 ("누벨바그"? 글쎄다). 소위 [로맨틱 코미디]를 헐리웃에서 제인 오스틴을 참조하고 소위 "여성적" 취향을 고려해서 그 문법을 만들고 바로 그럼으로써 그 "여성적 취향"을 재생산하는 규칙을 따르는 장르라 친다면, 이 영화는 [베르테르의 슬픔],  [골짜기의 백합], [감성교육]을 시조로 하는, 그러니까 주로 남성인 주인공이 성숙한 여인을 만나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고 인생을 배우는 성장담을 골격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도둑맞은 키스]를 포함, 상당수의 "두아넬 시리즈"가 이에 속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에서 트뤼포, 그의 페르소나인 앙투안 두아넬-장 피에르 레오(이 셋을 어찌 분리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레오에게는 매우 미안한 말이지만)의 트리아드는 정점에 이른다. 특히 앙투안이 거울을 보며 처음에는 자신을 둘러싼 두 여인의 이름을, 그러다가 자신의 이름을 수차례 반복해서 부르는 장면. 처음에는 나직하던 목소리가 나중에 가서는 악에 받친, "외침"이 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여기에서 장-피에르 레오는 배우이자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드러내 보인다. 그가 배우다우면서도 가장 인간적으로 보인, 흔치 않은 경우였달까.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의 에센스, 즉 진수이자 정수이자 본질(!)은 다른 데에 있다. 이것이 트뤼포가 의도한 바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본질이란 바로 파비안느-마담 모르소프-델핀 세리그(아, 이제부터 이 셋을 분리해서 말하기 힘들 것 같다)다.

두아넬은 그녀에 대해 "그녀는 한 명의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나타남'(une apparition)이다"고 말한다. 출현. 현현. 이것은 어쩌면 그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운명적인 첫 만남의 순간을 표현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 즉 나타나는 것은 어떤 하나의 존재로서의 그녀가 아니라 그 순간, 그녀를 포함해서 만물이 만들어내는 우주적 어울림의 상태(agencement !)이라는 것이다. 오직 그 순간에만 지속되고 곧 사라지는. [골짜기의 백합]에서의 유명한 첫만남 장면에서  "여왕처럼 가버리는" 마담 모르소프가 그렇고, 보들레르의 "지나가는 여인"이 그렇다.

그런데 델핀 세리그의 출현-출연에는 19세기 여인들의 '덧없는(éphémère)' 그것과는 다른 뭔가가 있었느니, 그것은 바로 그녀의 "존재감"이었다. 배우이자 여성으로서의 델핀 세리그에게서 나오는 존재감.

"당신은 내가 그저 한 명의 여자가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하죠. 맞아요. 나는 특별해요. 모든 여자들은 특별해요."

이 대사를 델핀 세리그에게 맡긴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델핀은 참, 그냥 여배우로 남는 것만으로도 훌륭했을 텐데, 여성 운동까지 저렇게 적극적으로 하고, 참 대단해."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델핀 세리그에 대해 한 말이다. 그녀는 보부아르와 더불어 "347명의 창녀 선언"--프랑스의 여성 인사들이 본인의 낙태 경험을 밝히고 낙태 합법화를 촉구한 공동 성명서--에 동참했고, 보부아르를 기념한 여성 미디어 센터를 창립하는 등 아주 열렬하고 또 실천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여성주의자였다. 이런 그녀가, 순수하고 수줍고 앳된 앙투안 두아넬 앞에서, 그 첼로 목소리로, 노래하듯이, 저 말을 했다고 생각해 보라. 이 점에 있어서는 정말 트뤼포의 센스를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확실히 한 명의 여자가 아니라 갑자기 "나타난 무엇"이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툭 하고 앞에 던져진. 그 어떤 말로도 규정되지 않는, 그래서 "특별한", "독보적인", "예외적인" 등의 수식어조차 무의미하게 만드는. 그러고서는 스쳐 지나가는. 그렇게 순간적으로 나타남으로써, 오직 그럼으로써만, "영원"으로 남을.

more...

그녀는 내가 본 출연작들에서 정말 다 근사했다. 심지어 뷰뉴엘의 [은하수]에 단 몇 초 등장했을 때조차도. 그렇게 잠깐 나타났다 사라질 때조차 여운을 진하게 남기고 주변의 모든 것을 잔잔하게 흔들어놓는 배우가 몇이나 될까? 장 클로드 카리에르가 말하길, 그녀가 올 때면 보지 않고도 한 50미터 앞에서부터 그녀임을 알 수 있었다고. 전혀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그야말로 특별한 향수를 썼기에.

고혹적인 벨기에 뱀파이어 영화, [빨간 입술]에서는 또 어떤가. 저 사진만 봐도, 앞으로 그녀 이상의 바토리 공작 부인이 나올까 의심스러워질 것이다. 이런 B급 영화 세팅에서 이토록 우아한 결과물이 나온 것은 상당 부분 그녀의 덕이었다. 물론 연출도 나름 괜찮았지만 ([사이코]를 충실히 복습하는 듯한 샤워 시퀀스라든지). 이런 뱀파이어물이 또 나왔으면. 델핀 세리그는 비록 가고 없으나.

이 영화에서 그녀는 아주 인상적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혹자는 내게 뱀파이어인데 죽었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이 맞을 것이다. 뱀파이어가 "실제"로 불사하는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델핀 세리그이기 때문에. 그녀라면, 또 어느 순간, "나타날" 것 같다.

꽤 잘 만든 이 영화의 편집 축약본이 여기에 있다. 자동재생이니 주의하시라 :

http://www.youtube.com/watc ... youtube_gdata_player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