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6일 월요일

일요일 늦은 오후, 72번 버스

1. 
일요일 늦은 오후. 이 시간대 72번 버스는 늘 붐빈다. 센느 강변을 따라 시내 중심 관광 요지를 지나는 덕에 관광객들도 많고, 휴일을 맞아 나들이를 다녀오는 16구의 부유한 노인들이나 (이들은 일반적으로 지하철보단 버스를 선호하는 편), 유모차를 앞세운 가족들도 많다 (이들에게도 역시 버스가 더 편할 터). 자리가 없어 뒷문 쪽에 서 있자니 앞으로는 노약자석, 뒤로는 유모차 전용 공간이어서 그야말로 2세대 사이에 낀 꼴이었다.   
그러나 이 사이의 공간은 얼마나 아늑하며 편안한가. 혼자 외출했다 귀가하는 듯한 할머니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고, 집채 만한 유모차를 끄는 엄마는 힘겨워 보였다. 나는 과연 기력이 쇠해 버스에서 서 있는 게 힘들어져 염치고 자존심이고 따질 새 없이 자리가 날라치면 재빨리 가서 앉게 되는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내 아기를 위해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배려받기보다는 배려를 하는 일이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지는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 이라 적으려다, 문득, 나 또한 많은 배려를 받고 살아온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아기였을 때 엄마도 그렇게 낯선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아가며 나와 동생을 이리저리 실어 날랐겠지. 단지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을 남이 내게 베푼 것보다 오래 그리고 많이 기억하고 있을 뿐.
 ...이라고 6년 전의 나는 적었다. 그 사이에도 같은 장면은 여러 번 반복됐고, 나는 여전히 2세대 사이에 낀 채 그대로...인가, 과연? 휴일에 혼자 외출했다 쓸쓸하게 귀가하는 할머니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어쩌면 누군가는 바로 나를 보면서 나이와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했는지도 모른다. 

2.

그런가 하면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짐을 한껏 지고서 같은 버스를 타려 국영 라디오 방송국 앞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중. 마침 방송국에서 공연이 끝났는지 관객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내가 선 정류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머리가 하얀 어르신들. 공연을 관람한 뒤 아마도 16구나 교외 주택가이자 역시나 부촌에 속하는 불론뉴-비양쿠르로 귀가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날따라 하필 꽉꽉 채운 배낭에 카트까지 들고 있던 나. 머리는 복잡해지고 가슴은 쿵쾅대기 시작했다. 과연 탈 수 있을 것인가, 탄다고 하더라도 저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거북이등 효과를 피하기 위해 최소한 배낭은 벗어야 할 텐데, 그러면 카트랑 다른 가방은 또 어떻게 매니지할 것인가... 등등을 생각하다, 문득, 내게도 최소한 이동의 자유와 대중 교통을 이용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심지어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내겐 우선권이 있지 않은가, 언제까지 이렇게 배려와 양보만 할 것인가... 등등의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본성을 거슬러 도전해 보기로 마음을 먹고, 사람들이 모여든 버스 입구 앞에 줄을 섰다. 내 차례가 오자 우선 한 마담에게 양보를 했다. 그 뒤의 다른 마담이 내게 양보를 하여 안심하고 스텝을 밟으려는 찰나, 아무래도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게 양보를 한 마담에게 양해를 구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그곳에서부터 집앞 정류장까지는 대여섯 정거장 정도. 다른 옵션을 몇 가지 생각하다가 그냥 집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자전거 타고 다니거나 조깅할 경우에는 단숨에 뛰기도 할 만큼 가까운 거리지만, 그때는 짐 때문에 걸음 속도도 나지 않고 얼마 가지 않아 지쳐가던 차. 한 정거장 지났을까. 뒷차 도착까지 불과 1-2여분이 남아 있었다. 한번 기다려 보기로 했다. 기다리고 있자니 우아하고 지적인 풍모의 두 마담이 다가왔다. 역시 공연을 마치고 나온 기색이었다. 예정된 시간에 버스는 도착했고, 나는 한결 여유로운 버스 안 풍경에 안도하며 티켓을 수리했다. 그런데 나와 같이 탄 두 마담은 지갑을 뒤지는가 싶더니 그냥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 버스 안이나 동네 수퍼마켓에서 저런 뭐랄까, 얌체에서부터 안하무인까지의 모습들을 가끔 보는데, 그럴 때마다 생경하다. 나라고 무임승차를 전혀 안해 본 건 아니지만, 그리 붐비지도 않는 버스에 기사가 엄연히 감시하고 있는 조건에서라면, 나같은 소심한 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배짱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실천하기 힘든 행동을 저렇게 고상해 보이는 분들이 하다니. 한편으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나 시민의식 운운할 것도 없이, 국적, 출신, 성별, 주거지 등등 이른바 사회적 지표라는 것의 지표로서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3.

일요일인 오늘 오후. 자전거를 타고 어딘가에 가려 했으나, 옷을 얇게 입고 나온 데다 비도 한두 방울 떨어지고 해서, 일정을 급히 변경, 동네를 한 바퀴 도는 산책을 하게 되었다. 날이 궂은 탓에 보통 때보다는 덜했지만 그래도 가족 단위의 산보객들이 제법 보였고, 그 중에서도 유독 아이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이는, 재생산 욕구가 채 걷히지 않은 내 의식이 지각에 미친 효과도 없지 않겠지만, 프랑스에서 그만큼 아이들을 확실히 많이들 낳았고 또 여전히 낳고 있다는 사실을 일정 부분 반영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공원마다 거리마다 아이들이 바글바글한 걸 볼 때면, 저출산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한국의 사례를 생각한다. 인구정책은 근대 국가의 대표적인 생정치 장치 중 하나다. 가장 원초적인 동시에 가장 치밀한 진단과 예측, 동시에 기존의 윤리학과 가치 기준을 끊임없이 재고하고 경계하는, 늘 깨어있는 사유를 요하는 부문. 그 뿐인가. 프랑스의 경우 국가 차원에서 장기간에 걸쳐 다양하고 체계적인 시책을 펼쳐 오늘의 눈부신 성공을 이루었다지만, 이것이 단지 행정적으로 정책적 차원으로만 설명될 것은 아니겠다. 사회 전반의 망딸리떼, 즉 심성 혹은 의식의 수준, 즉 정책이나 그 밖의 사회적 규범 수준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지는 않으면서 그에 완전히 환원되지도 않는 사회심리학적 심급이 있고, 이것이 유의미한 차이를 만드는 주요한 인자 중 하나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비슷한 수준의 선진국이면서 경제 사정에서는 오히려 좀더 나은 편인 데다,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을 일찍이 인지하고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인 장려책을 실시해 왔음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독일의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4.

아이들을 지나치자 이번에는 마주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를 들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져 마침내 스쳐 지날 찰나, 그녀의 말소리가 들렸다. Vive la République, 즉 공화국 만세. 집에 와서 뉴스를 보고야 알았다. 오늘 트로카데로에서 우파 정당인 Les Républicains, 즉 공화(국)당의 대선 후보 프랑수아 피용을 지지하는 집회가 열렸다는 사실을.

피용은 극우인 마린 르펜에 대적할 사실상 유일한 대항마로 거의 당선이 확실시까지 되던 후보다. 그런데 최근 부인인 페넬로프--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에서 온 이름!--에게 보좌관 업무를 맡기고 보수를 그것도 꽤 고액으로 지급했으나 사실 그녀의 업무는 허구였다는 의혹이 제기돼 법정 출두 명령까지 받은 상태. 이러한 이른바 "페넬로프게이트"로 참모들도 떠나고 사퇴 압력이 거세지는 가운데, 그가 주중에 갑자기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긴급 기자 회견을 열자 모두 사퇴 발표를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후보로서의 행보를 끝까지 할 것이며 법은 거스를지언정 민중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등의 발언으로 모두를 아연실색케 했다. 그런가 하면 침묵하던 페넬로페는, 일종의 "일요신문"인 Journal du dimanche 오늘자 인터뷰에서, "남편을 위해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고 밝히면서, 그 예로, 남편이 참석하는 행사에 동행하고, 연설문을 읽고 코멘트하는 등등을 들었다. 그야말로 비선 비서이자 참모의 역할을 했다는 것인데. 여성들이 담당해 온 가사 노동--페넬로페의 바느질!--의 가치화 및 경제 기여도 재평가와 유사한 맥락에서, 배우자로서 관행적으로 비서나 참모의 역할을 대신함에도 보수는 물론이거니와 상징적 가치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차원--
--말하자면 페넬로페가 바느질이나 충절로써 오딧세우스 신화에 기여한 바를 인정하자는 취지?--이었다는 해석으로 쉴드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기도 했으나, 이는 아무래도 과도한 해석이겠다. 설령 이 해석을 따른다 해도, 더욱이 실제로도 정치인 중에 배우자를 그런 명목으로 채용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고도 하니, 정식으로 절차를 거쳐 비서나 참모로 채용하고 규정에 따라 보수를 지급하지 않은 책임은 물을 수밖에 없다.  

트로카데로 집회 사진을 보니, 모두가 단체로 맞춘 꼭 같은 규격의 삼색기를 들고 일제히 흔드는 모양이, 요새 서울시청앞에서 열린다는 태극기 집회의 그것을 빼다 박았다. 심지어 참가 인원을 제멋대로 부풀리는 것도 닮았다.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아니 세태 판단이나 대세론까지 갈 것도 없이, 합리적 동물로서 최소한의 사고력과 판단력만 발휘해도 답이 나오는 문제에, 오답을 답이라 우기면서 정신승리하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프랑스혁명이나 68혁명, 그리고 광주나 87년 항쟁 같은 역사가 결국 이걸 위한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결국 역사는 현재에서 성찰하고 긴장하고 노력하면서 끊임없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는, 또 하나의 역사의 교훈.

2017년 3월 2일 목요일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전집 출간

입수(!) 기념해서 올려보는 다른 이야기


육체의 사용 (또는 몸쓰기몸의 쓰임새이른바 " 쓰는 ",  육체노동을 가리키는 말로부터 출발) 끝으로호모 사케르 연작이 완간되면서 아감벤이 97년부터 20 가까이 펼친 대장정이 막을 내렸다개인적으로도 감회가 남다르다. 2007  세미나에서 처음으로 호모 사케르 1권을 읽은 것을 시작으로 해서, 10년의 세월동안 웅장한 지적 여정에  명의 관객으로 나름대로 참여해 왔으니비록 소극적이고 소심할 뿐더러 게으르기까지 하여 참여는커녕 관찰자로서도 적격이었나 싶을 만큼 불량한 관객이었지만

관객으로서뿐 아니라 독자로서도 불량하여 1 이후로 연이어 나온 책들은 외면했다. 2012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에서 지배와 영광 이탈리어판을 사온 것을 제외하면아감벤에 대한 관심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사실 책이 예뻤고 (그에 비하면 쇠이유에서 나오는 불역판은 미적 우수성에서 현저히 떨어진다), 여행 당시 불타오른 이탈리아에 대한 열정이 이탈리아어 학습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이유 (그러나  역시 오래 가진 않았다 열정이란 것이 사실 마담 보바리에게서처럼 도피성에 가까웠기에). 그런데 작년에 불역판 전집이 나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전집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전작들의 확보를 보류하고심지어  논문의 완성마저(!) 보류해 왔던 ...이라 말하면 스스로 비참해지니전건만 말한 걸로 해두자.

전집은 구했지만 당장 읽기는 힘들 것이므로 얼마  우연히 읽은 최근작 명령이란 무엇인가 이야기를 해본다 책은 아감벤이 줄기차게 내놓고 있는 엽편 에세이  하나분량상 책보다는 아티클에 가깝고 실제로 세미나 발표문이나 강연문을 전문 그대로 옮긴 경우가 많다대표적인 예로 장치란 무엇인가 있다  모아서 논문집이나 선집으로 내면 딱인 텍스트들이다이것이 이탈리아 출판계의 규범인지 아니면 프랑스로 건너 오면서 귤이 탱자가  사례인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이해할  없는 출판 행태그러나 텍스트 자체만으로 보면  가치나 중요성은 상당하다오히려  간명성 때문에 주장과 논증의 명료성이 확보되는 측면이 있다다음은 책을 읽으며 했던  가지 단상.

  • 주제는 명령이다. 혹은 계율이나 계명. 10계명 때의 계명 말이다. 명령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 그런데 고고학이 뭔가. 아르케에 대한 탐구 아닌가. 서양철학의 시원에 있었던 바로 아르케. 만물을 시작하고(commencer) 호령(!)하는(commander) 원리를 탐구하면서 모든 지적 모험이 시작됐고, 이후의 모든 모험은 이러한 원리에 대한 탐구를 따르게 되었다.  
  • 푸코는 아르케를 재개념화하면서 고고학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아르케는 시원이자 명령자라는 속성 때문에 만물에 대해 시간적으로도 우선해 있다고 생각돼 왔다. 그러나 푸코는 현재에서 출발한다. 현재가 고고학적 문제의 출발점인 동시에 명령자 (le présent au commencement/commandment).  
  • "태초에 빛이 있었다" 창세기의 첫구절을 보자. 아감벤은 희랍어 문법상 "태초" "명령"으로 바꿔도 무난하다고 말한다. 빛이 있으라 명령이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는 편이 하늘이 있으라 명하매 하늘이 생기고, 땅이 생기고 등등의 뒷구절과도 좀더 맞아 떨어지고.  
  • 희랍인에게는 의지라는 개념이 없었다. 레미 브라그가 그들에게 개인이나 반성적 혹은 인식적 주체 개념이 없었다고 말한 것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되는 말이다. 대신에 잠재태-완성태 개념이 있었다. 그렇다면 근대는 잠재태가 개인-주체의 의지로 이행으로 정의하는 것도 가능하다
  • 명령의 문법 혹은 논리. 아감벤은 여기에서 오스틴의 수행성 개념을 상당 부분 참조하되, 명령의 논리가 그것만으로 환원되지 않음을 보이고자 한다. 평서문의 참과 거짓을 따지는 것으로 한정된 기존의 논리학은 존재(esti : être) 존재론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명령의 논리학은 존재의 존재론이 아니라, 그렇다고 생성(devenir) 존재론(보통 전통적 존재론에 대항해서 나온 니체나 베르그손의 철학을 지칭하는 것으로 자주 쓰인 표현) 아닌, 당위 혹은 의무(esto : devoir être) 존재론에 의거한다.
  • 칸트 윤리학에서 당위-의무는 의지와 동일시된다.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표어 : devoir pouvoir vouloir. 원하는 바를 있어야만 한다. 하고 싶은 것을 있고 그래야만 한다. 뭔가 해방감을 주는 것도 같지만 사실 괜히 의무론적 윤리학이 아니다. 유명한 정언 명령 "네가 욕망하는 바를 보편 의지와 일치하도록 하라"에서 보듯 의지란 결국 보편의지에 다름 아니다.  
  • 명령에 대한 아감벤의 고고학적 단상은, 나도 그랬지만 아감벤의 독자라면 더더욱 그랬겠듯, 필경사 바틀비의 등장으로 마무리된다. 모든 법의 형식과 명령의 논리마저 무화시키는 것이 바틀비의 j'aimerais mieux pas/I'd rather not 이다. 해야 하는 것도, 있는 것도, 원하는 것도 아닌 무언가를 우리는 과연 " " 있는가?



2017년 3월 1일 수요일

배웅

떠난 이는 공항을 좋아한다 했다. 헤테로토피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의 지대. 아무 곳도 아닌 곳. 어디에나 갈 수 있으면서 아무 곳도 아닌 곳. 아무 곳도 아니기에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곳. 어디를 떠나와서 어디로 가든, 얼만큼 머물렀고 머무를지 간에, 누구에게나, 인생이 전환되고 때로는 초기화되는 순간. 

떠난 이가 남긴 음악을 듣는다. 함께 한 나날들이 선율에 실려 뇌리로 들어와 가슴께로 흐른다. 어떤 음악은 무척 가냘프고 구슬퍼, 듣다가 참, 이런 음악을 다 들었구나, 슬며시 웃다가, 문득, 언젠가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눈이 떠올라, 그래, 그런 여린 면이 있었지,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떠난 이가 주고 간 물건들로 주변을 채운다. 원래 주인의 흔적이 채 지워지지 않은 가느다란 초록빛 파일럿 펜. 여고생도 아니고 이런 펜을, 하며 슬며시 웃으려다, 문득, 언젠가 종이 여백에 능숙한 솜씨로 삽화를 그려넣던 모습이 떠올라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가, 문득, 서로 알면서 모른척하고, 그러면서 설렘과 아픔을 주고받던 기억이 겹쳐지며 마음이 어두워지다가도, 이내, 그땐 우리 모두 어렸지, 하며 다시 미소를.

떠난 이와 함께 한 시간들이 뇌리를 수놓는다. 드문드문 박힌 별처럼. 가늘고 길다란 거미줄로 얽혀 있던 우리. 가늘고 길어 금방이라도 끊길 듯 아슬아슬해 보이고 때론 존재조차 의심스러웠을지라도 우리에게, 적어도 내게, 그것은 한없는 추락으로부터 구제한 구명줄과도 같았다. 서로가 서로의 질량으로 끌어당겨 휘고 비틀어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해진 우리의 공간. 그 때문에 어쩌면 각자 가던 길이 굽어지고 멀어지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외려 더 아름답지 않을지. 함께였다는 이유 하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