및 입수(!)를 기념해서 올려보는 다른 책 이야기
⟨육체의 사용⟩ (또는 몸쓰기? 몸의 쓰임새? 이른바 "몸 쓰는 일", 즉 육체노동을 가리키는 말로부터 출발)을 끝으로⟪호모 사케르⟫ 연작이 완간되면서 아감벤이 97년부터 20년 가까이 펼친 대장정이 막을 내렸다. 개인적으로도 감회가 남다르다. 2007년 한 세미나에서 처음으로 ⟪호모 사케르⟫ 1권을 읽은 것을 시작으로 해서, 10년의 세월동안, 저 웅장한 지적 여정에 한 명의 관객으로 나름대로 참여해 왔으니. 비록 소극적이고 소심할 뿐더러 게으르기까지 하여 참여는커녕 관찰자로서도 적격이었나 싶을 만큼 불량한 관객이었지만.
관객으로서뿐 아니라 독자로서도 불량하여 1권 이후로 연이어 나온 책들은 외면했다. 2012년 이탈리아 여행 때 피렌체에서 ⟨지배와 영광⟩ 이탈리어판을 사온 것을 제외하면. 아감벤에 대한 관심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사실 책이 예뻤고 (그에 비하면 쇠이유에서 나오는 불역판은 미적 우수성에서 현저히 떨어진다), 여행 당시 불타오른 이탈리아에 대한 열정이 이탈리아어 학습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큰 이유 (그러나 이 역시 오래 가진 않았다. 그 열정이란 것이 사실 마담 보바리에게서처럼 도피성에 가까웠기에). 그런데 작년에 불역판 전집이 나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난 이 전집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전작들의 확보를 보류하고, 심지어 내 논문의 완성마저(!) 보류해 왔던 것...이라 말하면 스스로 비참해지니, 전건만 말한 걸로 해두자.
전집은 구했지만 당장 읽기는 힘들 것이므로 얼마 전 우연히 읽은 최근작 ⟨명령이란 무엇인가⟩ 이야기를 해본다. 이 책은 아감벤이 줄기차게 내놓고 있는 엽편 에세이 중 하나. 분량상 책보다는 아티클에 가깝고 실제로 세미나 발표문이나 강연문을 전문 그대로 옮긴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장치란 무엇인가⟩가 있다. 몇 개 모아서 논문집이나 선집으로 내면 딱인 텍스트들이다. 이것이 이탈리아 출판계의 규범인지 아니면 프랑스로 건너 오면서 귤이 탱자가 된 사례인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출판 행태. 그러나 텍스트 자체만으로 보면 그 가치나 중요성은 상당하다. 오히려 그 간명성 때문에 주장과 논증의 명료성이 확보되는 측면이 있다. 다음은 책을 읽으며 했던 몇 가지 단상.
- 주제는 명령이다. 혹은 계율이나 계명. 10계명 할 때의 그 계명 말이다. 그 명령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 그런데 고고학이 또 뭔가. 아르케에 대한 탐구 아닌가. 서양철학의 시원에 있었던 바로 그 아르케. 만물을 시작하고(commencer) 호령(!)하는(commander) 원리를 탐구하면서 이 모든 지적 모험이 시작됐고, 또 그 이후의 모든 모험은 이러한 원리에 대한 탐구를 따르게 되었다.
- 푸코는 아르케를 재개념화하면서 고고학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아르케는 시원이자 명령자라는 속성 때문에 만물에 대해 시간적으로도 우선해 있다고 생각돼 왔다. 그러나 푸코는 현재에서 출발한다. 현재가 고고학적 문제의 출발점인 동시에 명령자 (le présent au commencement/commandment)다.
- "태초에 빛이 있었다"는 창세기의 첫구절을 보자. 아감벤은 희랍어 문법상 "태초"를 "명령"으로 바꿔도 무난하다고 말한다. 빛이 있으라 명령이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는 편이 하늘이 있으라 명하매 하늘이 생기고, 땅이 생기고 등등의 뒷구절과도 좀더 잘 맞아 떨어지고.
- 희랍인에게는 의지라는 개념이 없었다. 레미 브라그가 그들에게 개인이나 반성적 혹은 인식적 주체 개념이 없었다고 말한 것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되는 말이다. 대신에 잠재태-완성태 개념이 있었다. 그렇다면 근대는 잠재태가 개인-주체의 의지로 이행으로 정의하는 것도 가능하다.
- 명령의 문법 혹은 논리. 아감벤은 여기에서 오스틴의 수행성 개념을 상당 부분 참조하되, 명령의 논리가 그것만으로 환원되지 않음을 보이고자 한다. 평서문의 참과 거짓을 따지는 것으로 한정된 기존의 논리학은 존재(esti : être)의 존재론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명령의 논리학은 존재의 존재론이 아니라, 그렇다고 생성(devenir)의 존재론(보통 전통적 존재론에 대항해서 나온 니체나 베르그손의 철학을 지칭하는 것으로 자주 쓰인 표현)도 아닌, 당위 혹은 의무(esto : devoir être)의 존재론에 의거한다.
- 칸트 윤리학에서 당위-의무는 곧 의지와 동일시된다.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의 표어 : devoir pouvoir vouloir. 원하는 바를 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뭔가 해방감을 주는 것도 같지만 사실 괜히 의무론적 윤리학이 아니다. 그 유명한 정언 명령 "네가 욕망하는 바를 보편 의지와 일치하도록 하라"에서 보듯 의지란 결국 보편의지에 다름 아니다.
- 명령에 대한 아감벤의 고고학적 단상은, 나도 그랬지만 아감벤의 독자라면 더더욱 그랬겠듯, 필경사 바틀비의 등장으로 마무리된다. 모든 법의 형식과 명령의 논리마저 무화시키는 것이 바틀비의 j'aimerais mieux pas/I'd rather not 이다. 해야 하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원하는 것도 아닌 무언가를 우리는 과연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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