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7일 화요일

Hommage, quand même

blogin.com · 2012-07-17



과학사, 철학사, 아니 한 사상가와 그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연구들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편의상 각각을 내재론과 외재론으로 부르자. 내재론은 한 사상가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유일한 것은 오직 그가 남긴 텍스트 뿐이며, 전기적 요소는 불필요하거나 기껏해야 부차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 강의의 초두를 "옛날에 아리스토텔레스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다. 인물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두고, 이제 그가 남긴 텍스트에 집중하자"라는 말로 연 바 있다.

전혀 맥락은 다르지만, 지금의 이 구분법을 따른다면, 구조주의나 바슐라르의 비평이나 푸코의 고고학 기획도 이에 속한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슐라르는 로트레아몽 에서, 로트레아몽이 한때 수학에 취미를 가진 적이 있다는 사소한 전기적 사실을 작품 분석에 반영하려는 일부 주석가들을 거의 조롱조로 비판한 바 있다. 이는, "작품"이 됐든 "책"이 됐든 텍스트가 담은 모든 의미의 담지체이나 수렴점으로서 하나의 "저자"를 상정하고, 모든 의미 분석을 저자의 "의도"와 그가 말하고자 한 "의미"에 대한 그것으로 환원하는, 전기적 비평에서부터 정신분석 비평에 이르는 방법론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분석의 대상이자 수단으로 남는 것은 텍스트 뿐이요, 진정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각각, 구조주의와 바슐라르의 경우,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여 나타난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의 어떤 공통의 지반(구조 혹은 근원적 이미지)이, 푸코의 경우, 특정한 한 시대, 특정한 공간에 나타난 텍스트들이 구성하는 "담론의 장", 그리고 그로부터 하나의 지식의 구축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된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중에서 "누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

외재론은 바로 그 "누구"를 묻는다. 그 어느 텍스트도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남긴 것인만큼 그 저자가 누구였는지는 중요하고, 또 어느 저자고 그의 개인사에서부터 역사적이고 시대적 맥락의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므로, 그러한 맥락을 고려할 때에서야 제대로 이해할 있다는 입장. 저자가 누구이고, 어느 시대에 나서 어떻게 살았고, 누구에게 배웠고, 누구를 가르쳤고, 누구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묻자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를 좀더 철학사적으로, 혹은 사상사적으로 연구하려면, 그의 사상적 배경(이를테면 당시의 지적 환경, 보다 직접적으로는 스승 플라톤의 영향)이나 심지어 개인의 출신 배경과 사회경제적 입지, 나아가 아테네 사회의 물적 토대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사를 철학사로서가 아니라, 이를테면 "존재망각의 역사"로 보는 등의 독창적인 해석,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을 정립하거나 그 수단으로 삼지 않는 한에서는 말이다.

...

여기까지 쓰고 보니 벌써부터 자신이 없다. 특히 구조주의나 바슐라르 문예이론, 거의 아는 바가 없는데 저렇게 써놔도 되나 싶고. 외재론과 내재론이 적절한 명명인지도 의심스럽고. 과학을 순수하고 무사심한 지적 활동으로 보는 내재론과, 과학 역시 인간의 다른 활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활동으로 보는 외재론으로 나누는 과학사에서의 일반적 구분법을 염두에 두었던 것인데... 일단 나부터 헷갈린다.

그래도 일단은 용기를 내어 말해 보자. 그 동안 너무 말을 안 하고 살았다. 이제는 말할 때도 되었다. 아니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시인의 말을 빌어, 아니 시인을 인용한 철학자의 말을 빌어서라도 : "말하라, 그 순간 그대는 더 이상 무지하지 않을지니. 일단 가 닿아라. 다가가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러니." (앙리 미쇼. 바슐라르의 응용 합리론 에서 재인용)

원래 이 글은...


푸앵카레 기일에 쓴 글이다. 더 정확하게는,

쥘 앙리 푸앵카레 (Jules Henri Poincaré).
프랑스의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1854년 4월 29일 낭시에서 태어나 1912년 7월 17일 파리에서 죽었다.
자, 이제 남은 것은 그의 텍스트에 집중하는 일 뿐...


이라는 말을 일종의 석문(아니, 차라리 비문?)으로 삼아, "내재론"의 입장을 취한 뒤 그 입장에 의거한 분석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담기 위해 썼던 글. 그런데 그 이후 1개월도 더 넘은 지금-8월 말-의 시점에서 보건대 아직까지도 외재론적 접근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 글을 보다 보면 글쓴 사람이 누군지가 궁금해지는 것은 아무래도 인지상정이겠고, 그리고 외재론이라 해서 내재론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적합한 맥락들이 제대로 참조되는 경우 텍스트에 대한 이해에 바람직한 역할을 할 수도 있겠으나... 날 자꾸 붙잡는 건 아주 사소하고 미미한 사실들. 잘만 하면 긴즈부르그식 미시사를 과학사에 응용한 꽤 참신한 사례로 기록될 수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오, 너무 부족하다.

그렇게 미소한 단서들의 늪에서 헤매고 헤매다가 지쳐 텍스트로 돌아갔을 때의 그 익숙함과 안도감. 그리하여 한동안은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행복감에 젖어 있다가, 그러다가는 또 이내 지겨워지고, 다시 텍스트 바깥 세상이 궁금해지고, 그 세상에서 새로운 사실을 이래저래 조합해 가설을 세우는 탐정놀이가 그리워지고, 그래서 다시 한 눈 팔고. 그러기를 벌써... 몇 년째. 이제는 멈춰야 한다.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