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emoiselle la Presidente

blogin.com · 2012-12-21

어제, 박근혜가 한국의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몇 주 전, 마야 달력에 따라 실제로 21일 세계의 종말이 온다면, 그 서막(혹은 그 원인 중 하나?)은 박근혜의 당선이 되리라는 얘길 들었는데, 일단 후자는 실현됐고, 전자가 실현될 지는 두고 볼 일. 그래봤자 하루 남았지만. 문제는, 세계가 내일 종말하지 않으리라는 가정 하에, 앞으로의 5년, 그리고 그 이후다.

나는 정당 정치와 선거 중심 정치에 반감이 있다. 모든 정치적 활동과 의식과 관심이 선거에 집중되는 데에 반대한다. 그것이 좀더 직접적이고 국소적인 영역으로 분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는 수많은 전제가 따를 것이다. 일단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절차가 확립되어야 하고, 나아가 대통령과 중앙 정부의 권력이 축소되고, 다른 군소 정치체들, 이를테면 지방 자치 단체나 노조나 NGO 등등으로 분배될 필요가 있겠다. 왕정제나 1인 독재나 그 밖의 권위주의 체제에서 직접 민주주의로의 이행에는 반드시, 최소한 역사적으로 볼 때 필연적으로(역사적 필연), "혁명"이 따라야 했지만, 일단 형식적 민주주의가 갖춰진 다음에는, 변화는 급진적이지 않고 점진적으로, 대대적이지 않고 소소하게, 이루어져야 하지 않은가, 그리고 실제로 그러하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의 정치적 신념이라면 신념이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투표란 걸 하면서 할 수 있는 만큼 추이를 지켜봤다. 이왕 신념을 저버리고(!) 투표를 할 바에야 좀더 의미 있는 권리 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지지 후보는 일찌감치 정해 놓긴 했지만,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정책만 놓고 본다면, 군사나 대북 정책 등등을 제외한다면,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실질적 차이는 후보의 인물과 소속 정당과 선본에 있는 듯했다. 내가 지지한 후보는 개개인만 놓고 보면 훌륭한 듯했다. 특히, 나로서는, 권력가형 리더보다는 행정관료 스타일이란 점이 맘에 들었다. 그러나 그의 선본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이는 지난 총선 때부터 어느 정도 감지되던 바였다. 한 이주자 여성을 비례 대표 후보로 내세운 것은 내게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저쪽에서, 비록 "코스프레"에 지나지 않을 지언정, 그 "진정성"은 의심해 볼만할 지언정, 최소한 변화하려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동안, 이쪽에서는, 진보당 사태에서도 보듯, 구태의연한 진영 논리와 패권 다툼에 여념이 없지 않았는가. 이번 대선에서는 또 어땠는가. 현정권이 실정도 많이 하고 때로는 반민주적 행태까지 보인 것이 사실이라 해도, 이에 대한 지적과 비판은 타당하며 정당하다 하더라도, 그 사실 하나만으로는 이쪽으로의 "정권 교체"에 명분을 제공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왜 저쪽이 아닌 이쪽으로 교체돼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다면. 이쪽에서는 왜 이쪽이어야 하는지가 아니라 저쪽이면 안 되는지를 주장하기에 급급했다. 저쪽이면 안 된다는 주장의 근거 또한 불충분했다.

그 근거 중 하나는 그녀가 독재자, 게다가 친일파 혐의까지 있는 자의 딸이라는 것. 나는 이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출신 배경과 전적이 그(녀)의 현재, 나아가 미래에 관해 설명해 주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후자가 전자에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자식에게 부모가 행한 과거사의 책임을 묻는 것은 과거 독재 시대의 연좌제 논리가 아니었던가? 언젠가 유시민이 말했듯, 그녀가 독재자의 딸이라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을 독재 시대에 대한 향수에 호소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이용했음을 지적했어야 했다. 전자가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다면, 후자는 그녀의 정치적 선택이고, 잘못된 선택이며, 그에 대해서는 그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함을. 나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독재로의 회귀를 꿈꾸며 박근혜를 지지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만약 그것이 실제로 지지 근거로 작용했다면, 이에 대한 반박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백 번 양보해서 경제 성장이 박정희의 "업적"이라 한다면, 이 업적은 박근혜의 것이 아니다, 부전녀전은 유비 추리의 오류다, 등등.

어쨌든 박근혜에게는 분명 프로필상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반면 문재인은 전력으로는 박근혜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우위에 있었다. 민주화 투사, 인권 변호사 등등. 그러나 약점을 보상할 만한 무언가가 박근혜에겐 있었다면, 바로 그 무언가가 문재인에게는 결핍되어 있었고, 그것이 결정적으로 승패를 가른 요인이 되지 않았나 한다.

그 무언가란 우선 반성과 변화에의 의지다. 보수 진영이 이 지점에서 일정한 진화를 보여주었다면, 오히려 진보 진영에서는 관성적이고 반성이 부족한 모습이었다. 저쪽에서는 하다 못해 반북 논리를 펴더라도 예의 색깔론이 아니라 북한의 인권을 문제 삼는 식으로 세련화하고 정교화해 가고 있는 마당에, 이쪽에서는 과거 독재와 냉전 시대의 투쟁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현실은 분명 변했는데, 저쪽에서는 변화를 인정하고 그에 맞게 전략을 수정 변경했는데, 80년대까지의 민주화 운동으로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한 장본인인 이쪽에서는 정작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원한 감정(ressentiment : 예전 니체 한역판에서는 "복수심"이라 번역)에 호소하는 등 과거에 갇혀 있는 모양새다. 이는 진정성(사실 진정성의 여부는 사실상 관념성과 추상성을 벗어나기 힘들거나 잘못된 문제 제기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의 문제가 아니라 전략상의 문제다. 상대방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적 의식 부족과 권력형 비리를 지적하고, 또 필요한 경우, 관권의 선거 개입 의혹을 제기하는 일은 물론 필요하지만, 전략의 무게 중심이 여기에 실리면 곤란하다. 이는 진정성이나 윤리적 정당성을 넘어 전략으로서 더 이상 효율적이지도, 심지어 유효하지도 않다.

패인 분석도 분석이지만, 원인보다는 결과에 대한 좀더 생산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나아가 앞으로 박근혜 정부하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좀더 적극적으로, 박근혜 정부하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그녀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주의적, 하다못해 여성친화적 정책을 추진할 거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독재자 딸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갖는 상징성만큼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더구나 진영을 막론하고 여성의 대표성이 지극히 미미한 정치계에서, 마드모아젤 라 프레지덩트, 미스 프레지던트로 불릴 인물이 배출된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그녀는 퍼스트 레이디에서 대통령으로 지위를 변경함으로써 확실히 정치(인)의 표상 체계에 균열을 냈다. 선거 과정에서부터 이러한 변화가 이미 감지되긴 했다. 대통령 후보의 여성 비율이 전례없이 높았던 것에서부터, 막판 3자 토론에서는 오히려 남성:여성의 비율이 역전되기까지. 이어 박근혜의 당선은, 그녀 자신의 정치적 이념과 성향을 떠나서, 최소한, 표상 체계의 변화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상징적 효과에서만큼은 오바마의 당선과 견줄 법하다.

"군미필자"인데다가 독신인 여성이라는 사실이 프로필상의 또 하나의 약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을, 그 수많은 "네거티브" 공방 속에서 이 점이 부각되지 않은 것은, 꽤나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출신 배경의 "휘광"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성성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이것이 어쩌면 오히려 당선 요인 중 하나일 수도), 전형적 여성상과도, 전여옥이나 나경원 등 기존 여성 정치인과도 차별화된 그녀 고유의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다. 무성적이거나 혹은 양성적인 이미지. 그녀는 성적 매력이라는 잣대로 판단될 범주에서 아예 제외된 할머니급 "아줌마"인 동시에, 아버지의 권위와 모성애를 한 몸에 지녔다. 앞으로 그녀가 어떤 이미지를 구축할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엘리자베스 1세나 심지어 블러디 메리 같은 "여왕" 이미지로 갈 우려가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나, 그녀로 말미암아 어쨌든 "대통령의 몸"이라는 표상이 더 이상 예전 같지는 않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비가 내린다. 내리는 비를 보며 "유물론의 은밀한 흐름"을 상기하던 알튀세를 떠올린다. 평행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빗줄기 가운데 미세하게나마 엇나가는 줄기들이 있고, 거기에서 만남이 생겨난다. 역사의 변화는 거기에서 온다. 박근혜의 당선도 그렇게 줄기가 빗겨나면서 생긴 사건 중 하나일 것이다. 설사 그것이 역사를 "후퇴"하게 하는 "반동"적인 것이라 해도,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이 유일한 엇나감의 사건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른 무수한 사건들을 통해 이 사건도 달리 해석되고 또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남은 일은 바로 그 무수한 미소 사건들을 만들어내는 일.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