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콜리너마저의 "편지"를 듣는 묘한 상황

blogin.com · 2009-12-21

루시드폴 새 앨범과 그가 마종기 시인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책과 박홍규 선생의 창조적 진화 강독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값으로 따지자면 꽤 나간다는 도자 박물관 도록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음식물을 싸들고 오신 엄마는 옆에서 10대 청소년이나 입을 법한 츄리닝이 그렇게 편할 수 없다며 입은 채로 잠들어 계시고 바로 그 엄마와 샴페인과 연어와 빈대떡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서 채 마치지 못했던 집안일을 끝내고 이제 겨우 남은 또 다른 일을 마치려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가끔 네가 생각날 땐 조금은 미안했었어 있잖아 사실 난 더 높은 곳을 보고 싶었어 더 많은 것을 하고 싶었어 사실 난 그래도 네가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서 미칠 뻔했어 있잖아 울지 않으려 했는데..." 라는 브로콜리너마저의 "편지" 노랫말이 어쩜 그리 애달피 들리는지 하마터면 눈물이 툭 떨어질 뻔. 내년이면 환갑인 엄마를 옆에 두고 어느새 서른을 훌쩍 넘긴 내 눈에서 하마터면 눈물이.  

—박쥐

마리아

blogin.com · 2009-12-15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도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마리아의 존재는 내게 늘 의문의 대상이었다. 그에 반해 삼위일체에 관해서는 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하나의 같은 대상을 일컫는 세 가지 다른 이름이라 받아들이면 그걸로 충분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성체? 그건 그저 상징일 뿐이다. 그게 다른 불필요한 가설을 만들지 않고 저 "신비"를 이해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다. 그러나 단순히 유명론의 "칼날"을 들이대어 재단하기에는 마리아의 존재론적 위치는 꽤나 복잡미묘하다. "동정녀"가 뭘 뜻하는지 모르던 시절에야 "동정녀=성녀"로 받아들이면 될 일이었다 (뭐 아주 틀린 건 아니겠다만). 그리고 노년의 사라에게 아이를 점지할 능력 정도는 당연히 갖추고 있는 신이 마리아에게 아이를 잉태케 하는 것 쯤이야 별 일도 아니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을 노릇이다. 그러나 생명 탄생의 신비/비밀을 알게 된 후로 나는 이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수를 "동정녀에게 잉태되어 나시"게 함으로써 상식과 과학 법칙으로부터 벗어난 무리한 교리를 만들어야 했는가? 

인간으로서의 속성과 신성을 동시에 갖도록 하기 위해서? 신과 인간의 결합에서 나온 인물들은 얼마든지 있다. 신과 인간의 결합에서 나온 인물들은 

—박쥐

너무도 쉽게 씌어진 시

blogin.com · 2009-12-09


혹은, 윤동주 텍스트 컴필레이션...

···
주의 : 원작을 심히 훼손한 여지가 다분하며 그렇다고 창조적으로 모방했다고 보기도 어려우니, 남아있는 최소한의 기대조차 버리고 대신 최대한의 관용을 준비할 것.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는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피로롭은 일은 아직 끝내지 못하였으나
잠시 잊고 그대를 생각하며
부끄러운 시 한 줄 적어 볼까

사랑과 땀내가 포근히 담긴
학비 봉투를 받아들고
대학 노-트를 끼고
그리 늙지는 않은 교수의 강의를 듣고

세상 사는 일이 어려운 줄
그래도 조금은 알겠고
시를 쉽게 쓰는 일이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으니

그런데도 나는 왜 늘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점이
그렇게도 많은 걸까

나는 다만 무얼 바라
자꾸만 홀로 침전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곧 비가 그치고
별이 바람에 스치우겠지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하기에
내 마음은 너무도 무디어져 있다

이제,
무뎌진 마음으로나마 별을 노래하고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다시,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언젠가 비가 그치고
별이 지고 새벽이 오면

아마도 멀리서 그대는
슬픈 사람 모양을 하고
반석을 지고 나타나리니

그때 하늘은 다시 별로 가득차
만물이 그대의 시를 노래하리라
어느 왕조의 욕된 유물도
봄눈 녹듯 사라지리라
방에 따라 눕던 백골도
곱게 풍화하리라

—박쥐

나는 들었지 네가 보고 있는 걸

blogin.com · 2009-12-03



그림 : Jad Fair in yolatengo.com

Yo' target='_son'>http://yolatengo.com>yolate ... .com</a></P>
@@||Yo La Tengo - I Heard You Looking 에 대한 어줍잖은 오마주||close

나는 듣는다 네가 보고 있는 걸
네게도 보이는지 너를 듣는 내 소리가

한심하다 시선을 흘길 때도
한 눈 가득 애정을 담아 바라볼 때도
네 눈동자는 내 귀로 들어와
끝내는 가슴 속 깊은 곳까지 흘러 들어와

별이 된다

그렇게 별이 하나둘씩 박힌
내 마음은 어느새 은하수 되어

별들이 나고 지고
성난 듯 부딪쳐도 보다가
닿을 듯 말 듯 돌고 돌며 애태우다가
끝내는 몸을 주고 받아  

새 별을 만든다

그렇게 생긴 별들은
다시 네 눈동자로 내려와 또렷이 박혀

네가 바라볼 때마다
늘 눈이 부신 나는
눈을 감고 귀를 종긋 세운다

그렇게 듣는다 네가 보고 있는 걸
네게도 보이는지 너를 듣는 이 소리가


—박쥐

인과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며

blogin.com · 2009-11-30

관련어/주제어 : 인과성causality 인과율principle of causality 인과causation (자연)법칙 결정론 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츠 뉴턴 흄 칸트 라플라스

논리적 선후/포함관계와 인과의 차이. 고전역학적 인과관계에서는 사실상 시간상의 순서는 무의미하다. 그런 점에서는 논리학과 마찬가지. 둘 다 A이면 B이다, 즉 A->B 로 표현된다. 그러나 전자에서는 포함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사람이면 동물이다와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의 차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적 논증이 논리학의 삼단논법과 다른 방식으로 전개됨을 분석론 후서에서 보인 바 있다. 의심할 바 없이 보편타당하며 만고불변의 진리 명제("모든 사람은 죽는다")인 대전제, 대전제와 항을 공유하는 소전제("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로부터 결론("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이 도출될 때 이 논증을 타당하다 한다. 그러나 많은 과학적 실천들에서는 정설(thesis)보다는 가설(hypo-thesis)이 대전제로 제시된다. 이 때 가설은 진리값이 미정된, 엄밀하게 말해서는 거짓이다. 그런데 대전제가 거짓(F)인 모든 논증에서, 결론은 항상 참이다. 소전제의 진리값과 상관 없이 말이다. 그렇다면 가설로부터 나온 모든 결론은 참이란 말인가? 아니다. 과학적 논증에 대해서는 논리학이 아닌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원리, 원인에 대한 탐구다. 모든 변화(생성 및 소멸, 그리고 위치 운동을 포함)는 네 가지 원인(질료인, 형식인, 작용인/기계인, 목적인) 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리고 사물은 변화에 임함(...)에 있어 잠재태와 현실태 두 가지 양태로서 참여(...)한다. 잠재태가 현실태로 이행하되,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마치 잠재태가 그 자체로 하나의 현실태(=최종 상태, 목적)이기라도 한 듯 작용하는 것, 이것이 운동의 본질(...)이다.  

그리고는 중세를 지나 코페르니쿠스, 데카르트, 갈릴레오, 뉴턴까지.

흄 : 비가 오는 것과 땅이 젖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거나 연속해서, 혹은,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비교적 짧은 시간 차이를 두고 일어나는 두 사건이다. 그러나 두 사건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 : 인과율은 오성이 직관이 '수집'한 경험의 다양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음에 있어서 그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하는 규칙의 하나다. 이러한 규칙들은 선험적 혹은 법칙적(apodictique) 필연성을 갖는다. 이 관계의 필연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그 어느 인식도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필연성의 근거는 인식 주체 안에 있다.  

다시 칸트 : 인과율에는 다른 규칙들에 대해서 근본적인 뭔가가 있다. 그리고 인과율은 늘 시간을 전제한다. 이 점이 아주 미묘하다. 비가 오기 전에 땅이 젖을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땅이 젖은 사건에 대해 비가 오는 사건은 인과 관계에서 벗어난다. 그럼에도 비 이외의 다른 '원인'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인과율은 가장 기초적인 사고의 근간을 이룬다. 그리고 시간성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바, "과학적 인과는 시간적 선후관계와 별개"는 테제는 수정되어야 하는가?

또 다시 칸트 : 칸트는 인과율과 시간성의 관계를 논하면서 "계기Moment" 개념을 도입한다. 보통 모멘트는 순간이라는 뜻으로 널리 쓰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역학에서 모멘트는 미분적인/순간적인 양, 0에 가까운 시간 동안 변화하는 양, 달리 말하면 단지 미분적 시간에서만 성립하는 양을 일컫는다 : 관성 모멘트, 회전 모멘트 등등. 그러나 운동체의 전체 궤적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모멘트들이다.

뉴턴의 법칙 및 인과 개념은 바로 여기에 기초한다. 달은 관성에 의해 매 순간 직선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지구는 매 순간 달을 자신의 인력으로 당겨 "떨어뜨린다". 이 힘의 크기는 정확히 지구가 사과를 "떨어뜨리는" 힘과 같다.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것은 이 두 힘이 매 순간 합쳐진 결과다. 달의 운동의 원인은 각 순간에 작용하는 이러한 힘들이다, 법칙은 바로 이 힘들의 관계를 일컫는다. 이 관계, 그리고 특정한 한 순간에 대한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 지구 및 달의 질량의 값을 알기만 하면, 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상태가 결정된다. 물론 교란이나 섭동 등등 다른 미세한 원인들을 고려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겠지만서도 말이다. 어쨌든 원칙적으로 또는 이상적으로는 그렇단 얘기다.

라플라스 : 이 이름은 이상하게도 "악마"의 그것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으로 유명하다("라플라스의 악마"). 그치만 정작 라플라스 자신은 훨씬 고상하게 "최고 지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최고 지성을 신과 동일시하지도 않았다 (나폴레옹에게 "신이란 가설은 필요없다"라고 했던 자가 바로 그다). 그의 결정론은 새로운 교설이라기보다 위에서 얘기한 뉴턴적 인과율의 번역 혹은 확장된 형태라 할 수 있다 (라플라스 자신은 오히려 이 교설을 언급하며 라이프니츠의 충분이유율을 언급한다) : 어떤 최고 지성이 있어, 우주 내 모든 원자들의 위치 및 속도와 그 사이의 법칙을 알기만 한다면, 그는 우주의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는 모든 상태를 한 눈에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시 원칙적이고 이상적인 이야기라 하겠다.  

이에 대한 푸앵카레 선생의 말씀...

을 대강 짧게 말하자면...

1. 뉴턴의 법칙 개념과 라플라스의 결정론 교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 둘은, 그것들이 없으면 과학이 불가능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과학적 사유와 실천의 근간을 이룬다.

2. 그렇지만 이것이 원칙적이고 이상적이라는 점 역시 부인키 힘들다. 왜냐하면 첫째, 초기 조건에 대한 인식에는 늘 한계가 있기 때문이고, 둘째, 초기 조건에서의 아주 작은 차이가 그에 바탕한 상태값 계산에 있어 파국적인 효과를 낳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

사진은 1910년경 여름 휴가 때 찍은 것. 죽기 2년 전 모습이다. 그가 해안가를 거닐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정말 죽도록 궁금하다. 다음 학기 강의에 대한 구상은 아니었을지? 그 해 가을학기에 시작한 우주생성론 가설에 대한 강의 말이다.

—박쥐

윗집 여자

blogin.com · 2009-11-24

저 일가족이 윗집으로 이사 온 게, 가만있자, 언제였더라? 한 1년이나 2년 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그들의 얼굴을 마주친 것은 고작 해야 한두 번 정도다.

한 번은 건물 현관문의 코드가 바뀌었을 때였다. 보통은, 컴퓨터 자판이나 카드 비밀번호처럼, 익숙해지기만 하면 굳이 기억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손의 감각에만 의지해서 누르면 될 일이지만, 문제는 그 익숙한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그 시간도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날만큼은 유난히, 아무리 기억하려 애써도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밤이 꽤 늦은 시간이라 이웃 중 누군가가 드나들길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때 2층 창가로 누군가가 보였다. 한 여자가 창가 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코드를 알려줄 수 있겠느냐고 소리쳐 물었다. 그녀는 외국 억양이 섞인 발음으로 대답해 주었다. 9. 2. A. 6.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그리고 덕분에 문을 열고 들어오며 고맙다 인사하는 나를 향해 아래층에 사느냐고 물었다. 그때야 나는 그녀가 내가 사는 집 바로 위층에 있었음을 알아채고 잠시 멈칫했다. 윗집이라면, 축구를 하는지 술래잡기를 하는지 하루에 적어도 한 번씩은 쿵쿵거리는 아이들이 사는 그 집 아닌가. 가끔 그렇게 시끄럽게 구는 아이들을 향해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엄마의 목소리도 들리곤 했는데, 그렇다면 그녀가 바로 내가 이슬을 맞으며 밖에서 밤을 지새우지 않도록 도와준 이 자상한 여인네와 동일인이란 말인가. 혼란을 숨기기 위해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를 담아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대화가 계속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빨리 계단으로 올라왔다. 한 번만 더 시끄럽게 굴면 올라가서 한마디 하리라던 이전의 다짐을 잊으려 애쓰면서.

다른 한 번은 어느 꽤 늦은 저녁이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올라오는데, 마침 내려오고 있던 윗집의 그녀와 마주쳤다. 어딘가 근사한 곳으로 외출을 하는 모양인지, 아주 화려하고 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남편인 것으로 짐작되는 남자와 함께였는데, 그는 풍만한 그녀에 비해 왜소하고 나약해 보였다. 너무 평범한 차림이라 더욱 그래 보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에게 미안하고 또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운 상상을 해버렸다. 자격지심 많고 열등감으로 가득 찬 나머지, 자신을 사람을 앞에서 돋보이게 해줄 동시에 어떤 치명적 약점을 지니거나 자신에 대한 높은 의존도로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게 해줄 만한 여성을 찾는 선진국 '원주민'이 '그'일 것이고, 외모를 무기로 선진국에서의 안정적인 삶과 신분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제3세계 출신 젊은 여성이 '그녀'일 것이라는.

언젠가부터, 외모상에서의 지나친 불균형과 비대칭성이 보이는 커플을 만날 때면 이렇게 단정하는 나쁜 습관이 생겨 버렸다. 정치적으로 불공정하며 논리적으로도 천부당만부당한 이런 추론을 거의 반사적으로 해버리고, 또 그런 후에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하는 일이 이런 식으로 반복될 때마다, 외모, 국적, 인종, 성별 등의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 듯이 마냥 소박하게 사고하던 어린 시절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뭐, 그 시절이라고 마냥 순진한 생각만 하고 살았을 리는 만무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람들 사는 모습에는 편견을 심화시키는 측면뿐 아니라 가끔 그때까지 쌓아 올린 편견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요소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아 보여도 들어가 보면 다 저마다 특이성을 갖게 마련이다. 이론 이성에게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어쨌든 사람에 관해서라면 가설을 쌓아 하나의 그럴 듯한 이론을 구축할라치면 곧 반증 사례가 나타나게 마련이고, 그게 바로 사람들과 사는 맛이고 사람 삶--인생의 묘미 아닌가.

윗집 부부는 때로 부부 싸움을 처절하게 벌이는 듯했고, 또 그럴 때면, 이곳의 공용어와 낯선 이국의 언어를 섞어 쓰곤 했다. 그런가 하면, 남편과 아이를 내보내고 그녀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듣는 듯한 우아한 피아노 소나타가 가끔 들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게 더 극적이고 흥미진진한 들린 것은 그들이 살면서 무심하게 퍼뜨리는 소리들이었다. 저녁 무렵의 하품하는 소리, 텔레비전으로 영화 보는 소리, 한밤중 휴대전화 진동 소리, 새벽녘 사랑을 나누는 듯한 소리, 아침이 밝고 아이들이 우당탕 학교 가는 듯한 소리 등등.

이것만으로도 벌써 그럴싸한(혹은 진부한?) 이야기 소재로 삼기에 충분했다. 젊지만 벌써 권태에 접어든, "비대칭" 부부, 별 볼 일 없는 영화로 집에서 때워야 하는 지루한 저녁 시간. 그녀의 비루한 삶에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던 애인은 이제 좀 더 대담해져서 자고 있는 배우자를 바로 옆에 둔 그녀에게 한밤에 문자 메세지를 보낸다. 그녀는 가슴이 조마조마한 가운데에서도 바로 그 긴장감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며 잠에 든다. 그렇지만, 달콤한 꿈도 잠시, 새벽녘 잠이 먼저 깬 배우자는 그녀에게 잠자리를 요구한다. 악몽 같은 시간. 그리고 잠시 후 정신없는 아침. 배우자로서 또 학부모로서 아침의 의무를 끝낸 그녀는 오후에 있는 애인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들뜬 마음을 달래기 위해 조용한 피아노곡을 택한다...  
    
그 후로도 한참동안 나는 내 멋대로 윗집 일가족을 "해체"하는 고약한 취미를 버리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음은 아직까지 구상 중.

—박쥐

Feeling like an extra

blogin.com · 2009-11-18


Dear Julie,

Do you ever feel like an extra in your life?
It seems like I'm forever stuck in the background,
watching other people say and
do all the things I feel inside.
One day I'm gonna surprise
everyone with my talents. They
will be laughing and crying and
texting me so often that I will
be annoyed.
Until then,

Sandy

from http://www.viceland.com/int ... iranda-july-136.php> Vice Magazine

Surprise!



우리 모두는 각자 삶에서 주인공이지만 그 협소한 영역을 넘어서면 엑스트라, 나아가 비가시적 존재에 불과하다. 게다가, 크기로만 따져 보건대, '내' 세계에서 나와 타인의 관계가 지구와 달의 관계라면, 사회와 나의 관계는 태양과 지구의 관계, 혹은 은하와 태양의 관계다. 무한한 우주와 미소하기 짝이 없는 나. 무한한 공간 앞에서 나는 공포를 느낀다 (파스칼). 그렇지만 가끔 이 관계가 역전되기도 한다. 나는 사유를 통해 우주를 집어 삼킨다 (역시 파스칼). 이렇게 해서 우주는, 그리고 그 안에 포함된 모든 세계와 사물과 사태들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미란다 줄라이가 새로운 작품을 내놓았다. 신디 셔먼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진 연작들이다. 물론 셔먼보다는 훨씬 얌전하고 귀여우며 그래서 좀 재미가 덜하지만, 다른 종류의 재미가 있다. 이를테면 숨은 그림 찾기 하는 재미 같은 것 말이다.  

나도 줄라이랑 비슷한 궁리를 한 적이 있다. 영화에 나오는, 혹은 실제의 삶에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저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을 "모든 사람은 각각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공허한 정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 조명할 방법이 없을까 하는.

외부로 난 창 없이 각자의 방법으로 우주를 표현하며 살아가는 모나드적 인물들이 연결되어 있다거나 소통가능성을 보여주는 광경을 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예를 들면 영화 바벨 같은 경우. 그리고,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요즘 프랑스 영화에 유난히 이런 예가 많다. 특히 알렝 레네의 최근 작품들.

문제는, 아무리 관점을 달리 하고 또 등장인물을 증폭시켜도 (예를 들어 펠리니처럼 극소수의 주연을 제외한 불특정 다수를 대거 투입하되 후자가 전자에 못지 않은, 아니 전자를 넘어서는 개성--이 말은 펠리니의 인물들을 묘사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괴물성"이 더 나은 표현일지도 모른다--을 발하도록 만든다든가) 거기에서 은폐되거나 소외되는 자는 늘 남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줄라이나 아니면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처럼 그런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복권시킨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샌디'의 소망은 고고하다. 그(녀)의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극히 미미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바로 그 미미한 확률 때문에, 일단 이루어진 소망이 주는 기쁨은 배가 될 것이다 (다시 파스칼). 우리 중 일생에 한 번쯤 '샌디'이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뒷배경에서 벗어나서, 자신만의 숨은 재능을 알리고,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고, 또 문자 메세지도 잔뜩 받고 싶은 세상의 모든 '샌디'들에게 경의를. 그리고 희망을.
  

—박쥐

Composition typographique

blogin.com · 2009-11-12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끊임없이 생성하고 쉴새없이 변화한다. 그런데 원자론자들에 따르면 이 세계는 눈으로 볼 수 없을 뿐더러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가장 단순한 존재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단순성과 불가시성을 속성으로 갖는 원자로 이루어진 세계가 어떻게 그토록 복잡하며 다양한 형태를 띨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답이 있을 수 있겠다. 이를테면,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는 이를 편위(클리나멘)의 원리로 설명한다. 태초에 원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평행하게 수직 낙하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어떤 원자들이 직선으로부터 아주 조금 빗겨 나가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이 편위는 미소한--거의 미분적인-- 정도로 이루어지는데, 외부의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원자 스스로의 운동력, 심지어 의지나 "주체적" 자각에 따른 것이라 해석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하여 원자들 간의 충돌이나 결합이 일어나고, 이렇게 해서 질적인 변화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원자론적 생성론의 핵심은 위와 같은 역학적/운동학적 원리가 아니라 다른 데에 있는 듯하다. 원자론의 가장 주요한 영감의 원천 중 하나는 문자와 그 조합술이다. 세계의 생성은 문자들로부터 단어가 형성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이루어진다. 한정된 개수의 문자로부터 형성할 수 있는 단어의 수와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문장, 문단 나아가 글, 책으로까지 넓힌다면 가능한 조합의 경우의 수는 더더욱 커진다. 세계가 무한히 지속되었거나 아니면 시초로부터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가정할 경우, 원자들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이미 거의 모든 가능한 충돌과 운동과 결합을 겪었을 것이고,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선가 우발적 조합을 통해 지금의 이 세계의 상태에 도달했을 것이다. 철저히 확률 게임으로 이루어지는 이 과정에서 특정한 목적이나 원인은 부재하며, 신과 같은 조물주 또한 설 자리가 없다. 원자의 운동성에 대한 무리한 가정--수직 낙하나 편위--도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억겁의 시간 뿐. 원숭이가 제멋대로(=랜덤하게) 타자를 두드려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완성"하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할 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물론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사실 원자들이 불규칙하게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것이야말로 "확률"적으로 가장 높은 상태--고엔트로피 상태--다. 그에 비해, 세계가 질서나 안정성을 띠게끔 원자들이 배열된 상태는 매우 낮은 확률을 지닌다. 즉,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노력과 에너지를 들이지 않으면(아니면, 억겁의 시간을 기다리지 않으면) 원자들은 곧 다시 무질서한 상태로 돌아간다. 현실적으로 볼 때, 한 번 무질서해진 원자들을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상태로 되돌리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세 가지다. 초자연적인 존재로 하여금 질서를 부여하게 하거나, 아니면 세계가 어떤 목적을 향해 "튜닝"되어 있고 원자들도 이에 복무한다고 가정하거나, 아니면, 볼츠만의 제안대로, 초월계와 현상계를 구분하고(이건 내 해석이다) 전자가 고엔트로피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반면 후자는 어떤 "요동"으로 인해 저엔트로피 상태로의 진입이 가능하다고 가정하거나.

옛날 책들을 보다 보면, 가끔 이런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조판공 또는 인쇄공의 손때묻은 흔적들. 컴퓨터의 손을 거쳐서 나온 요새 책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때로 칼리그람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뭐, 거칠게 말한다면, 인쇄공이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인해) 마땅한 집중력과 에너지를 투자하지 못한 틈을 타서 원자들이 질서에서 이탈하여 "자연스러운" 상태에 이른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는, 우발적 조합으로부터 "이례적인(=낮은 확률의)" 사건이 일어난 한 아름다운 사례로 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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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예에 반해 이것은 아주 "현대적"인 사례다. 옛 책을 스캔/복사하여 전자화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겠기에 말이다. 그렇지만 스캔/복사한 "사람"의 손길이 느껴진다는 점에서는 위와 공통적이라 하겠다. 우발적 조합이 미를 탄생시킨 사례라는 점에서도.

—박쥐

This Guy, this fabulous guy

blogin.com · 2009-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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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감독 http://www.imdb.com/name/nm0534665/> 가이 매딘(Guy Maddin) 의 2003년작 http://www.imdb.com/title/tt0366996/>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The Saddest Music in the World) 의 한 장면. 제목이 제목이니만큼, 영화 속에서 실제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 경연대회가 펼쳐지는 만큼, 더군다나 비극을 구성하는 전통적인 요소들--한 여인을 둘러싼 부자간의 갈등, 또 다른 한 여인을 둘러싼 형제간의 갈등, 기억상실, 트라우마 등등--과 역사적인 요소들--1차대전, 30년대 대공황 등등--을 갖추고 있는 만큼, 눈물을 쏙 뺄만큼 슬픈 음악들이 흘러나와야 할 것 같지만, 사실 이 영화는 눈물 쏙 뺄만큼 정신없이 웃음을 선사하는 하나의 우화다. .. 라는 것이 이 영화를 처음 본 2004년 당시 나의 생각이었는데, 이번의 느낌은 좀 다르다. 아무래도 매딘의 다른 영화를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영화의 배경은 위니페그다. 위니페그는 감독이 태어나서 지금까지도 살고 있는 캐나다 중부의 작은 도시로, 그에 따르면 눈이 많이 오고 겨울도 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곳 중 하나.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들 중 상당수가 흑백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가 경배하는 초기 무성영화, 특히 표현주의나 초현실주의 영화들의 영향도 있겠지만. 나는 그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만의 독특한 향수나 우수어린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서사에 기대지 않은 이미지 고유의 논리를 온전히 담아냄에 있어서도. 도대체 칼라로 찍은 영화들에서는 영화적 미를 제대로 살리기 힘들다고 불평했던 프랑수아 트뤼포도 이에 동의할 거라고 생각한다.

매딘이 재미있는 이유는 멜랑콜리와 공포와 유머, 아주 클래식한 고전과 데이빗 린치류의 영화적 실험 또는 실험(적) 영화, 그리고 B급 영화의 풍모를 묘하게 조화시킨다는 데에 있다 (그의 대표적인 별명 중 하나가 바로 "캐나다의 데이빗 린치"인데, 내가 보기에 매딘은 린치보다는 친절하고 재미있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말러의 음악을 배경으로 위니페그 왕립 발레단(!)과 찍은 우아한 뱀파이어 영화 http://www.imdb.com/title/tt0293113/> Dracula: Pages from a Virgin's Diary 나, 감수성 예민한 소년의 애틋한(!) 성장담이자 그의 가족에 관한 잔혹 동화인  http://www.imdb.com/title/tt0443455/> Brand Upon the Brain! 에서 잘 드러난다. 이자벨라 로셀리니와의 공동 작업은 또 어떤가. 그녀의 다른 작업, 특히 데이빗 린치의 영화를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매딘의 영화 속에서 그녀를 보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과장을 섞자면, 잉그리드 버그만이 펠리니나 혹은 알모도바르의 영화에 출연해서 시치미 뚝 떼고 너스레를 떠는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그 절정은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자신의 아버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시나리오를 쓰고 매딘에게 감독을 맡겨 만든 http://www.imdb.com/title/tt0477785/> My Dad Is 100 Years Old 에서 볼 수 있다).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른 단편들도 꽤 되는데 굳이 위의 뮤지컬 시퀀스를 따다 놓은 이유는... 굳이 찾자면, 옛날 영화같은 느낌이 많이 나게 하는 매딘의 특기가 어느 정도 살아나서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다. 원래 내가 뮤지컬 영화도 좋아하지만, 뮤지컬이 아닌 영화에서 다소 뜬금없이 노래부르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좋아한다. 더군다나, 주변 인물들과 엑스트라들이 총출동하거나 그 주인공이 저기 나오는 마리아 데 메데이로스처럼 가냘프고 힘겹게 노래하면서 몸놀림도 어색할 경우는 더더욱 정감이 간다. 고달픈 삶 속에서 위로의 순간들이 있다면 그 순간들도 그렇게 가냘프고 힘겹고 어색하게 찾아들지 않는가. 비록 찰나에 지나지 않을 지언정, 그 찰나마저 환각에 지나지 않을 지언정, 그래도 삶이 때론 즐거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기에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매딘이 진짜 음악을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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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rklehorse, "It's a Wonderful Life"

—박쥐

Garden State, The Shins, New Slang...

blogin.com · 2009-09-30

http://www.youtube.com/v/Q3 ... fs=1&> name="allowFullScreen" value="true">http://www.youtube.com/v/Q3 ... 2n-f3FlU&hl=fr&fs=1&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always" allowfullscreen="true" width="425" height="344">

잭 브래프의 이 영화, 그리고 더 쉰즈의 이 노래를 나는 그냥 지나쳐 버렸다. 무심코. 그리고 다소 부당한 방식으로.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뒤늦게 유튜브를 찾아서 다시 본 단 몇 장면만으로 완전히 매혹되었다. 내 인생을 바꿨을지 모를, 이제라도 바꾸어 주었음 싶은, 이 영화 그리고 이 노래.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스토리, 음악, 캐릭터 등등을 종합해서 봤을 때 기존의 청춘영화 코드를 답습하고 있다"고 평했었다. 그때는 정녕 이 재기 넘치는, 내가 좋아하는 공드리식 미장센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도, 내성적이고 멜랑콜릭한 캐릭터에, 그 캐릭터의, 복잡미묘하지만 또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유아론적 내면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대체로 이런 스타일의 영화에 약한 편이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남자라는 사실 때문에 이 영화가 내 검열관--일종의 초자아쯤 되겠다-- 고유의 심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던 듯하다. 이 부분에 관해서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전히 여성 작가들이 만들었거나 여성 인물들이 적어도 살아 움직이는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이를테면 내 방이나 이 블로그를 장식하고 있는 재현물들의 주체나 주제/객체는 대부분이 여성이다), 이 기준이 그간 꽤 많이 변한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요즘에는 남자 작가들이 여성과 여성성에 찬사를 보내는 걸 지켜보는 일이 즐겁다. 티치아노나 보티첼리에서 시작해서 펠리니에 이르는, 풍요나 생산성/창조성이나 건강한 미를 숭앙하는, (이렇게 명명해도 될지 모르겠으나) 이탈리아적 방식이건, 보들레르, 마네에서 트뤼포에 이르는, 여성의 영원한 아우라나 낯설음(Unheimlichkeit)--둘 다 가까이 있음에도 멀리 있는 듯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는 공통점을 지닌다--을 상정하는 프랑스식이건 간에.

어쨌든, 지금은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고 간절히 생각하고 있는 중.  

사소하디 사소한 미학적 단상



아무래도 나의 (심)미적 평가 기준은 미보다는 쾌적함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난 내 미적 판단에 자신이 없다. 심미적인 것뿐이랴.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 심지어 철학이나 과학과 관련해서도 그러하다. 이쪽 얘기를 들으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고, 저쪽 얘기는 또 그런대로 그럴싸하게 들린다 (괜히 아호를 '박쥐'로 지었겠는가). 논리적이거나 경험적인 근거로 진위 여부가 판가름나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럴진대, 미에 관해서는 오죽하랴.

미적 가치의 판단이란 게, 주관의 취미 능력에 따라 판단의 신빙성이 결정된다고는 하나, 근본적으로 주관성을 벗어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모든 주관들이 타인들로부터 자신의 판단에 대한 보편적 동의를 얻기를 바란다는 데에 있다. 이것이 미적 판단에 대한 칸트의 진단이다. (그의 상당수의 논제들이 그러하듯이) 생각보다 낡지 않은. 나는 요즘도 사람들과 예술에 관해 얘기할 때마다, 한 작품을 둘러싼 여러 담론이나 논쟁을 접할 때마다, 이 진단을 떠올리곤 한다. 보편적이고 절대적 동의에 대한 끝없는 갈망.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혐오하는) 태생적 한계 또는 (90년대 말 포스트모더니즘이 횡행하던 시절 철학에 눈을 떴다는) 환경적 조건 때문에, (오늘날 철학의 반상대주의 노선이 그 어느 시대보다 지배적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주의자의 천형에서 벗어날 길 없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사실 꼭 이해하기 힘든 것만도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같이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는 바람만큼 소박하고 인간적인 욕망이 또 있겠는가. 나도 그런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고, 또 실제로 그런 마음을 가진 적도 있다. 한편으로 나에게는 덜 소박하고 덜 인간적인 욕망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권위있는 비평가나 아니면 세련된 미적 감각의 소유자가 함께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는 바람이 그것이다. 내가 높이 산 영화가 카이에 뒤 시네마나 imdb 에서 높은 별점을 받을 때 느끼는 우쭐함이나 안도감은 그 영화가 내게 준 카타르시스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그렇지만 내게는 이런 내밀한 바람을 겉으로 표출하여 심지어 다른 누군가를 설득하는 데까지 이르려는 의도가 없다. 용기나 능력도 없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누군가의 설득하려는 노력이 특히 나같은 사람에게는 잘 먹힌다는 것이다. 누구와, 어떤 장소에서, 어떤 심리적 상태에서 봤느냐에 따라, 그리고 누구의 어떤 평을 이미 들어 알고 있거나 나중에라도 들었는가에 따라서 한 작품에 대한 감상이 180도 달라진다. 마치, 작가의 비오그래피나 주고받은 영향들, 그리고 미술사적 맥락 또는 도상학적 해석 등등에 대한 지식을 소지하고 회화를 감상할 경우, 그 작품에 어떤 후광이 드리워지는 것처럼. 말하자면, 단토가 말하는 "변이(metamorphosis)" 같은 것이, 예술계(art world)이 (객관적) 지위를 수여하는 메커니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나같이 한 명의 평범한 관객이 그 작품과 만나는 지극히 내밀하고 주관적인 방식에 있어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아, 너무 멀리 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냐면... 영화고 회화고 건축물이고 음악이고 한 번 보거나 들어선 모른다는 것. 절대적인/무사심적 주관성을 본성으로 갖는 예술의 세계가, 객관성을 표방하는 과학이나 다른 이론의 세계만큼 넓고 깊다는 것. 덧붙여, 세상의 모든, 그 중에서도 특히 내가 무심코, 그리고 부당한 방식으로 폄하했던 창작품들과 창조물들에게 경배를 표하고프다는 것.

—박쥐

여행, 새로/다시 태어나기 위한

blogin.com · 2009-09-17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지 사흘째. 재도약을 위한 최후의 심호흡을 해야 할 때, 컴퓨터 앞에 앉아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이 여행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이라니.  

이번 여름에는 뜻하지 않게 이곳저곳을 다녀왔다. 8월에는 독일, 9월에는 스위스와 이탈리아. 근대적 의미에서의 대학 시스템이 정립된 괴팅엔, 그리고 오랜 대학도시 하이델베르그로부터 시작해서 종교 개혁 및 계몽 사상의 주춧돌이 된 칼뱅과 루소를 배출한 주네브, 그리고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를 돌아 다시 "19세기의 수도" 파리로. 말 그대로 "시간여행"이었다. "시간여행"에 관한 한, 현재까지 알려진 물리법칙을 거스르지 않는 한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 거시적이고 공식적인 의미에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을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내 개인의 사소하고 내밀하며 사적인 기억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번 여행이 더욱 재미있었던 것은 오랜 친구들, 그리고 그보다는 덜 오래된 친구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혼자였더라면, "철학자의 길"을 걷거나 헤겔 생가를 찾아가는 일도 길고 험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피렌체 우피지 갤러리의 그림들을 보면서도 엄숙한 태도로 그 상징적인 의미나 미술사적 의의를 찾느라 머리가 깨졌을 것이다. 혼자 여행하는 일을 좋아하고 또 이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 깨달음만으로도 이미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피렌체

다른 곳들도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피렌체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보티첼리나 티치아노의 작품들을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거리를 걷고 또 그들을 감싸 안았을 햇살, 하늘,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곳. 

이곳에서 우리 모두 다시 태어났/나기(re-naissance)를. 그리하여 함께 깨달음(con-naissance)을 얻(었)기를. 다시 태어나도 서로를 인정할/알아볼(re-connaissance) 수 있도록. 또 새로운 깨달음(re-connaissance)을 얻을 수 있도록.

—박쥐

광인의 배

blogin.com · 2009-05-01


Hieronymus Bosch, 1500년경,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던 중

한 대목에서 눈을 의심했다. 그의 "광인의 배 (Nef des fous, stultifera navis, Narrenschiff)"에 대한 묘사가 갱스부르 노래의 내용과 기가 막히게 일치하고 있지 않은가.

르네상스 시대, 그러니까 데카르트적 이성이 비이성-광기를 축출하거나 가둬놓기 이전, (스스로 미치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광인들을 배에 실어 떠나 보냈다. 왜 배인가? 단지 그것이 당시에 원거리를 이동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이고 또 편리한 수단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요한 이유는 물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유럽인의 꿈 속에서 물과 광기는 연결되어 있었다." (26쪽)

모든 것을 옮기고 또 정화시키는 물, 물에 몸을 실은 배는, 다시 그것에 몸을 실은 사람을 다른 세계로 보낸다. 다른 세계로 간 그는 다른 사람이 되고, 다른 세계의 사람들은 그를 통해 떠나왔던 또 다른 세계를 만난다.

그는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다. 배는 늘 잠시 머물렀다 이내 곧 떠나곤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잠시 머무는 곳도 도시의 성문 주변이다. 그가 있는 곳은, 있어야 할 곳은, 언제나 문지방이나 경계다. 기껏해야 다른 세계와 또 다른 세계를 이동하는 동안 임시로 '점유'하는 공간이 전부다. 그에게는 성문가(성안도 아니고 성밖도 아닌)에 "갇혀" 있을, 배제되면서도 바로 배제로써 포함될 수 있을 특권이 주어져 있다. 그에 앞서서는 "포함적 배제", "배제적 포함"의 대상이었던 "호모 사케르"(아감벤)가 있었고, 그의 뒤엔 "이 세상이 아니라면 어느 곳이든 가겠다"던 보들레르의 이방인이 있었다.

갱스부르의 노래 속에 등장하는 '너'는 바로 배에 실려 떠나가는 광인이다. '나'는 이성이라 해두자. 이 짝은 물론 (상징으로서의) 여성/남성, 인식대상/인식주체, 욕망(사랑)의 대상/욕망(사랑)하는 자, 세계/언어, 진리/이성 등등과도 매치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를 몸소 실어 보냈건만, 막상 네가 멀어져 가는 것을 보고는 이내 맘이 바뀌어 그 뒤를 좇는다. 너를 좇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너와 나는 사실상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와 나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내가 아킬레스라면, 너는 거북이다. 내 정신 속에서 나는 매 순간 정지해 있고, 그런 동안 너는 늘 한 발짝 나아가 있다. 따라서 나는 너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멈추어 서서 나는 너를 본다. 물길이 네 치마자락 휘감고, 너는 얼굴을 가린다. 네 표정에는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후회가 가득하다. 너를 감싸고 있었던 광채는 온데간데 없다. 너는 초라하다. 한때 모든 것을 다 가졌었건만 한 순간에 가족과 부와 영예를 모두 잃은 헤쿠바, 이성의 판정 앞에 무릎꿇은 형이상학이 바로 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너의 노예다. 나는 너를 따르는 일을 멈출 수 없다. 아무리 내 머리나 가슴이 찢어진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너의 경우에 있어 찢기는 것은 네 몸일까?). 비록 너와 내가 맺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지라도. 

—박쥐

물속으로 잠겨드는 너

blogin.com · 2009-04-24

http://www.ina.fr/divertiss ... .html> name="allowFullScreen" value="true">http://www.ina.fr/divertiss ... urg-la-noyee.fr.html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always" allowfullscreen="true" width="425" height="344">

"너는 추억의 강으로 떠나가고,
나는 돌아오라 외치며 강기슭을 달려가네

너는 그저 느리게 멀어져 가고,
네가 아무리 애써 달려도
나는 조금씩 네게로 다가가네

물 속에서 가까스로 떠오를 때마다
너는 망설이네 그리고 나를 기다리네
치마자락을 걷어올려 얼굴을 감추며
얼굴이 상할까 하는 두려움에,
그리고 부끄러움과 후회로

너는 이제 그저 길잃은 배
물에 빠진 개일뿐이지
그래도 난 여전히 너의 노예
물속에 몸을 담그네

추억이 멈출 때 우리는
망각의 망망대해 속에서
가슴이 그리고 머리가 찢어진들
결코 맺어지지 못하리"

이 노래를 처음 접한 것은 카를라 브뤼니의 첫 번째 앨범을 통해서였다. 다른 노래들도 나쁘지 않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세르주 갱스부르가 작곡한 바로 이 곳, "La noyée"다. 브뤼니의 작곡 솜씨도 나름 훌륭하지만, 그래도 명실공히 천재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갱스부르만 하랴. 물론, 브뤼니가 이 노래에 대한 나의 인상에 있어 작지 않은 부분을 차지함은 분명하다. 내게 이 노래의 존재를 알려준 것은 그녀니까. 또 하나 덧붙이자면, 편곡은 둘째치더라도, 적어도 그녀의 우수어린 목소리 만큼은 이 노래와 아주 잘 어울린다. 이를테면 안나 카리나(그녀도 자신이 만든 영화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보다는 훨씬 낫다는 말이다.

이렇게 시간을 거꾸로 거스르고 길을 굽이굽이 돌아 발견한 갱스부르의 이 '정격' 연주. 그런만큼 내겐 매우 값지게 느껴진다(고맙다, 유튜브!). 그 어느 노래가 예외가 되겠냐만, 갱스부르의 곡들은 특히 연주자/해석자/편곡자를 아주 많이 '타는' 것 같다. 같은 "Je t'aime moi non plus"도 제인 버킨과 부른 버전과 브리지트 바르도와 부른 버전이 상당히 다르다.

다음은 마구잡이 인상 비평 :

물속으로 잠겨드는 여인(오필리어), 아니, 물의 여인(운디네), 물에 감겨 올라간 치맛자락. 공무도하가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물론 공무도하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상세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수면, 즉 '네'가 떠올랐다 잠겼다 하는 그 표면 또한 지배적인 인상 중 하나다.

이별 멀어지는, 잡힐 듯하지만 끝내 잡히지 않는(아킬레스와 거북이? 무릇 시간과 운동의 속성이란 그런 것이겠다), 떠나는 자의 뒷모습... 떠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이 아름답다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아무리 끝까지,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감추면서"까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고자 한들, 마지막은 기억 속에서 변형되거나 무화될 뿐이다...  

이번에도 역시...

용두사미가 돼버렸다. 사실 시를 평하듯 가사 비평을 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일부러 번역까지 했거늘...

손을 놓은지 오래여서일까, 문장력이나 필체에 슨 녹이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 또 다른 문제는, 핵심을 피해서 끝없이 우회하는 고질병이다. 어릴 적부터 난 늘, 정면돌파할 방법을 충분히 알면서도, 목표물을 빙 둘러 내 스스로 미로를 쌓아 일을 어렵게 만들곤 했다. 논술을 공부해야 했던 시절에는, 매뉴얼대로 글쓰는 일이 너무 괴로운 나머지 이 버릇을 글쓰기에도 적용시키기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확장된 글버릇은 학부 시절 시험을 치를 때나 명색이 철학도가 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진지하게 글을 써야할 때조차 위력을 발했고, 또 여전히 발하는 중이다.

어쨌든 이번에는 그저 "이전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들을 일 없을" 이 갱스부르의 노래를 듣는 일에 만족하기로 하고... 그래도 여전히 가슴 속에 어떤 아쉬움 같은 감정이 남는다면, 별 수 있으랴, 달리는 수밖에.

http://www.youtube.com/v/mj ... &fs=1> name="allowFullScreen" value="true">http://www.youtube.com/v/mjwCWSOp9DI&hl=fr&fs=1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always" allowfullscreen="true" width="425" height="344">

—박쥐

천문학의 해

blogin.com · 2009-02-14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발명, 처음으로 달의 표면과 목성의 위성, 토성의 고리 등등을 관찰하고, 케플러가 Astronomia nova 를 펴낸 지 400년이 지난 것을 기념해서 UNESCO는 올해를 천문학의 해로 지정했다. 천문학사가들 중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서구중심적 사관의 발로라 비판하지만, 뭐, 꼭 갈릴레오랑 케플러만 경배하라는 것이 유네스코의 뜻은 아닐 터. 어차피 이런 기념 의례라는 것이 천문학적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는 한갓 순간에 지나지 않는가. 다만, 천문학이 인류에 기여하는 바라고는 기껏해야 GPS 정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태반인 이 현실에서, 그것의 역사를 돌이켜 보는 일은 꽤나 의미있는 일일 듯하다. 가능하다면 GPS 외의 기여도를 추적할 수도 있겠다. 예를 들면, 나사와 거래하는 독일 Zeiss 사의 렌즈가 없었더라면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 에 등장하는 촛불 신--인공 조명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촛불의 빛으로만!--은 불가능했으리라는 사실이라든지.

나선 운하 사진은 나사의 천문학의 해 사이트(http://astronomy2009.nasa.gov/)에서 가져왔다.

—박쥐

푸앵카레

blogin.com · 2009-01-25


푸앵카레가 1909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던 날, 신문에 실렸던 사진이다.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가져왔다.

1854~1912. 프랑스 낭시 태생의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마지막 보편적 지식인. 프랑스 학술원(아카데미)과 과학 아카데미라는 양대 엘리트 기관에 선출된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 기하학의 공리와 역학의 원리들이 규약임을 주장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규약주의'의 창시자. 스웨덴 오스카 2세의 환갑을 기념한 콩쿠르에 "3체 문제와 동역학 방정식"이라는 논문을 제출, 1등을 수상하고, 이를 통해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이라는 구절로 유명한 카오스 이론의 서두를 장식한 장본인 (여기에는 아주 극적인 비화가 숨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논하기로 한다)... 그를 수식하는 말은 이밖에도 무수히 많다. 하나 덧붙이자면... 그를 알던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 "심성이 곱고 까다롭지 않다"고 평했다 한다.  

이곳에서 그에 대해 그리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늘 맘에 걸렸더랬다. 사실, 그와 만난 지 벌써 4년이 넘어가는데도, 그에 대해서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게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다. 배움과 독서가 짧은 탓이다.

최근에 그의 철학과 관련해서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길고 긴 밤 순간적으로 번쩍이는 번갯불" (푸앵카레 : "사유란 길고 긴 밤 순간적으로 번쩍 빛나는 번갯불과 같다. 그렇지만 그 번갯불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전부다") 같은... 가장 기초적인 부분을 이제서야 깨닫다니, 한심스럽다. 단지 언어나 수학적으로 테크니컬한 부분에 대한 무지에서 온 문제는 아니고, 이해를 가로막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논문 안팎의 삶에서 부딪치는 문제들 중 상당수도 그 "무언가"들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특별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는, 일단 없애고 난 뒤에는 별 일 아닌 것처럼 여겨질 것들. 변화를 두려워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을, 그런 것들.

  

그러니까 그 깨달음이 무엇인고 하니...


일단 그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문의 체계에 대한 선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수학에 관한 논의는 물리학이나 역학에 대한 그것과 다르고, 수학의 경우도 기하학, 수론(산술) 그리고 대수학에 대한 얘기가 각각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무체계성 혹은 비체계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철학자'로 분류함에 있어 주저하곤 한다. 실제로 그가 남긴 철학서들은 본격적인, 이를테면 칸트의 비판서들만큼의 논리정연한 체계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플라톤의 대화편들에 가깝달까. 공화국 안에 수학, 정치학, 윤리학, 과학, 인식 이론 일반 등 모든 이야기가 한꺼번에 펼쳐지듯이, 푸앵카레의 과학과 가설이나 과학의 가치 같은 저작들에는 이른바 엄밀과학(exact sciences) 각 분야에 대한 담론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다.

근대철학 이후 확립된 어떤 정형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다원적' 면모는 낯설게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면모가 체계의 부재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플라톤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더욱이, 19세기 이후 그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그러니까 더 세분화되고 정교화된 과학을 접한 사상가라면 '과학'을 대문자의, 일의적인 그것으로 취급하는 일에 몹시 부담을 느꼈을 것임에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각 과학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그것들을 통일하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원리--그것이 현상적인 차원에 머물든(콩트의 경우) 아니면 더 통일적이고 제일인 원리, 즉 칸트식으로 말하면 '자연과학의 형이상학 원리'가 되든 간에--를 반드시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종류의 '원리'가 반드시 한 사상가를 '어엿한' 혹은 '훌륭한' 철학자로 만드는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푸앵카레의 사유를 어느 정도 이해하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은, 기본적으로 내 이해력이 부족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를 어떤 정형화된 틀에 무리하게 끼워맞추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흔히 일컬어지듯이 직관주의자라면 무한을 인정하지 않거나 무한 중에서도 잠재적인 그것만을 받아들여야 할 듯한데, 왜 정신의 무한성, 특히 단 한 번에 무한히 진행되는 수열이나 추론의 계열을 직관하는 능력을 중시하는가? 이러한 직관주의가 규약주의와 양립가능한가? 언뜻 보면 푸앵카레는, 한편으로는 기하학의 공리나 역학의 원리들의 경우, 정신이 경험에 기대어 선택한 규약임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규약들의 임의성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는, 어떤 영원 진리로서의 '구조'가 실재함을 누누히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일관적이지 않다 보인다. 또 물리학의 경우, 그 법칙과 원리들을 규약주의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잠정적으로나마 내린 결론은, 각 분야들의 독자성을 우선적으로 인정해야 그의 철학적 논의들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니 나를 일여 년간 괴롭혔던 '상대성 원리'에 대한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다. 상대성 원리는 한편으로는 경험적으로 획득되며 또 경험을 통해 반증가능한 다른 물리학의 법칙들과 유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이 그 선택에 있어 경험을 참조하긴 하나 일단 한 번 선택된 이후에는 결코 반증될 수 없는 규약들과 유사한, 양가성을 지닌다.* 문제는, 아인슈타인의 경우 상대성 원리의 이러한 속성을 단번에 알아차린 반면, 푸앵카레는 계속해서 그 양가성에 대해서 숙고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당대의 모든 물리학 신보들에 통달해 있었고, 그 당대의 물리학이란 것이 다루던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상대성 원리의 실험적 검증이었던 때문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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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후자의 측면이다. 거기에 우주론적 사유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왜 규약들은 정신의 발명품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성을 띠는가? 반증을 위해서는 모든 가능한 경험치들을 실험을 통해 조사해야 하는데, 우주는 그 자체로 실험불가능하며 경험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도 나중에 논하기로 한다.

** 참고로 이 글은, 파업으로 수업이 취소되어 이리저리 방황하던 중 발을 디딘, 내가 다니는 학교 컴퓨터실에서 쓴 것이다. 프랑스 기관 소속의 컴퓨터에서 한글을 입력한 것은 칸느 영화제 이후로 처음이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지난 목요일 대대적인 파업 이후, 그 후폭풍이 잔잔하지만 무시하지 못할 만큼 지속되고 있는 듯하다. 특히 강사-연구원들 사이에서. 이에 대해서도 나중에...

그림 : 폴 모니에(Paul Monnier)가 그린 푸앵카레의 초상. 1946년 스위스에서 출판된 과학의 가치(La valeur de la science) (초판은 파리, 1905년)에 실렸다.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