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24일 목요일

오랜만이다, 센스 630

센스 630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석사 논문을 쓸 때, 그리고 그보다 조금 후 이곳에서 DEA 논문을 쓸 때 썼던 삼성 노트북이다. 2005년 아이북으로 바꾸면서 내버려 두었다가, ㅇ 언니에게 한 끼 식사를 대가로 넘겼다가, 그 이후에 아주 잠시 ㅅ 언니의 손에 잠시 머물기도 했다가 (지금도 당시에 언니가 남긴 논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다시 ㅇ 언니 집으로 돌아가 (그 사이에 ㅇ 언니는 다른 노트북을 구해 쓰고 있었기에) 자리만 차지하는 흉물로 남아 있었는데... 2010년, 아이북이 부지불식간에 전사한 불상사를 계기로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와… (불과 며칠, 아니, 하루 넘게 걸렸을까, 복구를 시도한 끝에 불가능하다고 판단, 재빨리 맥북프로를 구입해 놓은 상태였기에) 여전히 자리만 차지하는 흉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맥북프로는 본체는 여전히 건재한데 문제는 전원장치였다. 본체와 전선의 연결 부분이 결국 끊어지고 만 것이다. 전선이 지저분해 보이길래 닦는답시고 조금 세게 잡아당긴 것이 화근이었다. 얼마 전부터 접촉이 불안정하긴 했지만 그래도 요령껏 위치를 잡아주면 전류를 통하게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그렇게 해서 다시 찾은 센스 630. 쓰다 보니 내가 얼마나 맥에 익숙해져 있었는지 알겠다. 손의 반사신경은 맥북프로의 자판과 단축키, 특히 트랙패드 작동 원리에 완전히 종속돼 있다. 그런데 그만큼 하나의 작업에 집중을 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 문서 편집기만 열고 작업하면 될 것을, 꼭 하다 보면 필요하다 생각되는 것들이 하나 둘 생겨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사전 두어 개, 에버노트, 비브라텍, 피디에프 문서 대여섯 개 등 수많은 창을 열어놓은 상태가 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저 트랙패드 기능 덕분에 창과 창 사이를 넘나드는 일이 너무나 자유로웠고. 

그렇다 해도 크게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 낙관론을 펼치기에는 최근 크고 작은 불상사들이 끊이지 않았고, 이 일도 그 연장선상으로 보기 쉬웠던 것이 사실. 이래도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무사안일한 태도로 계속해서 버틸 테냐, 하고 운명의 여신이 호령하는 것만 같다.

내가 얼마나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냐 하며는, 최근에는, 남들은 병상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완독할 시간을 내기 힘들다는 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은 아니고 발췌독하던 중이었다. 물론 핑계삼을 사유는, 늘 그렇듯이, 충분히 있었다. 나는 작중 화자가 <되찾은 시간>에서 비로소 작품을 쓰기로 결심하게 되는 순간을 찾고 싶었다.

사실 이것은 정말 기가 막힌 한 방(coup)이다. 장장 7권에 걸친 서사와 인물열전이 아직 쓰여지지 않은, 앞으로 쓰여질 작품이었음을 독자들에게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모든 인물들을, 이 모든 기억을, 영원한 시간 안에, 즉 하나의 작품 속에 위치시키는 일만 남았고, 이제 비로소 그 일을 시작하겠노라는 암시는, 오, 문학사상 커다란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꿈이었다"라는 허무한 결론과 유사한 경우인가도 싶지만, 스토리텔링 기법으로는 다소 초보적으로 보일 법도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 마력에 있어서는 동화책에서 "옛날 옛적에"에 준할 만하다. 독자를 현실로부터 끌어내어 허구 세계로 인도하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무는, 마법의 말. 그 효과는 상당히 제한적이기도 하다. 선택된 독자인 어린이(와 어른이?)에게는 효력을 갖지만 어른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찾아서>에서는 저자와 그 주변인물들이 이전까지 걸어온 여정을 충실하게 따라온, 지극히 소수의 독자들이 이에 해당하겠다.

아직까지 이 선택된 소수에 편입되지 않은 나는 문학사적 가치보다도 어디까지나 그 결심의 계기가 무척 궁금했는데, 이는 작중 화자가, 스스로도 고백하듯, 작가로서 그리 생산적이지 않은 시기를 겪고 있었고, 이 점에서 비슷하게 몇 년째 생산성 저하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는 있는 나로서는 무척이나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어느날 알베르틴이 "내가 내일 오지 않으면 그 시간에 꼭 작업에 몰두하라"고 언질을 주자 마르셀은 깨닫는다. 날이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일하지 않을 핑계를 상비해 두고 있었음을. 그는 위험한 결투를 목전에 둔 한량의 예를 든다. 내일 결투에서 목숨을 잃을 것을 생각하는 그의 눈에는 갑자기 모든 것이 아름답고 안타깝게만 보인다. 그는 그에게 내일이 허락될 경우 그가 할 만한 일들을 떠올린다. 대개 그 전에도 충분히 할 수 있었고 할 만했으나 단지 게으름 때문에 하지 않은 일들이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문제의 결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하자. 그러면 그는 이내 전날의 절박한 상황을 모두 잊고 예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방법적 회의에선지 작가적 불안에선지 못잖게 게으름을 피우던 마르셀이 마침내 작업에의 돌입을 결심하게 되기까지는  <되찾은 시간>에서만 해도 여러 계기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것 중 하나가 생루와 질베르트의 딸, 마드모아젤 드 생루의 등장이다. 이 소녀에게서 마르셀은 극중 앞서 등장했던 인물들 하나하나가 말그대로 현전함을 느낀다. 이 소녀의 할아버지인 샤를르 스완, 할머니인 마담 스완(오데트), 고모 할머니인 마담 드 게르망트 등등. 지금은 세상을 떠났거나 아니면 늙고 지친, 더 이상 과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 않은 인물들이, 이제 겨우 십대인 소녀의 얼굴을 통해 다시금 태어나는 순간.

그러나 진정한 계기는 자신에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깨달음이다. "내게 아직 남은 시간이 있다면 이들을 글에 담으리라."

시간은 또 본질적으로 상대적인 것이어서 속도에 따라 빠르게도 가고 더디게도 가지만, 그만큼이나 또 부인키 힘든 본질적 속성이 불가역성뭐 여기에 대해서도 어떤 "우주"에서는 달라질 수 있다는, 즉 시간과 변화가 가역적일 수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어쨌든 현재 이 세계에서는 불가역적임에 분명하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대로 두고 그걸로 앞으로 무얼 할지를 생각해야 하리라. 그것이, 현재 내가 쓰고 있는 이 센스 630처럼, 나를 다시 과거의 무언가로 데려다 놓는 한이 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