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장

blogin.com · 2008-11-10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나?

지금의 집, 뒤프렌느 빌라에 살기 시작한지도 이제 3년이 다 되어 간다. 매혹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집에 대한 첫인상에 대해. 누군가 은근히 가꾼 듯한 정원, 빨간 색깔의 현관문, 옛 벽난로의 흔적, 그 위의 낡은 거울, 창가로 손에 닿을 듯한, 파란 잎새들과 빨간 열매. 그래서, 설치된 난방 기기가 아예 부재하다는 치명적인 결점에도 불구하고, 다른 집들을 더 찾아보지도 않은 채로, 결정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다 작년부터 이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틈이 날 때마다 집 방문 약속을 잡았고, 인터넷에 접속할라치면 부동산 사이트부터 챙겨 보았으며, 길을 걸을 때면 부동산을 기웃거렸다. 집 건너편에서 공사를 시작한 것이 그 발단이 되었는데, 그 이후로, 정을 떼려고 그랬는지, 자꾸 이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윗집에 한 가족이 이사왔는데 그 집 아들이 공차기를 좋아한다든지, 알레르기 증상이 심해졌다든지, 허리가 아파졌다든지, 갑자기 추위를 타게 되었다든지, 도서관 및 학교와 집 사이의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든지 하는.

그러다 얼마 전, 결심을 했다. 환율이 극히 불안정하게 된 것이 결심의 가장 큰 이유겠으나, 다른 한편으로 1년 가까이 찾았으니 찾을 만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잃었던 정을 다시 찾아가는 중이다. 침대를 들이고, 몇 가지 가구들을 손보면서. 다행히 앞건물 공사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

그런데

왜 우울할까?

자가진단 : 주부우울증. 다 큰 아이들과 남편이 바깥으로 나간 뒤, 인테리어가 완벽할 뿐 아니라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집안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는 주부를 상상해 보라. 목표하던 바가 너무 싱겁게 달성되거나, 아니면, 나의 경우처럼, 수정된 상태로 달성되는 경우, 목표를 위해 돌진하던 에너지가 순식간에 소진되면서 혼돈에 빠진다. 혹은, 뭔가 더 덧붙일 것이 없나 고민하는 등, 달성되었는지의 여부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며 심지어 실존적인 고민에 빠진다.

그렇다. 사실 12 혹은 13구에 위치한, 중앙 난방에다가 30미터제곱에 600유로 이하인 집도, 지금의 집을 좀더 살기 좋게 만드는 것도, 진정한 목표는 아니었을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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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바리즘에 대하여 (시바에게의 답변을 대신하여, 일주일 후에 덧붙임)

우울을 떨치기 위해, 예전에 읽다가 그만두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던 보바리 부인을 다시 펼쳐든 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나쁘지는 않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왜"에 대한 답을 부분적으로나마 찾았으니까. 아니, 되찾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적어도 예전에는, 이 문제에 대해 지금만큼 무감하지는 않았으니까. '이 세상에서 여성으로서 산다는 것', 그것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난 그렇게 에마를 만났다. 그러면서, 그녀를 만나는 거의 모든 여성들이 그렇겠듯이, 그녀 속의 나와 재회했다. 계속해서 에마 주위를 드리우고 있는 플로베르의 그림자도, 그가 남성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마담 보바리는 내 자신이다"라고.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가 보바리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전형적인 '전지적 작가 시점'을 취할 때도 그 세밀하고 치밀한, 그리고 때로는 영화적인 상황 및 심리 묘사에 그저 탄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플로베르의 치밀함이 발자크의 그것과 다르다면, 그것은 전자의 '전지성'이 후자처럼 '거시적 관점'--그리하여 '사회학'을 가능케 하는--에서가 아니라 주인공 및 각 등장 인물의 내면에 침잠한 데에서 나오는, 미시적이고 내밀한 시선에서 비롯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 있어, 이렇게 제 3자로서,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독자로서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적다. 에마 보바리를 비극으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여성의 조건'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그녀로서 다른 누구보다 통렬히 절감할 수밖에 없었던. 이것이 '시골 의사의 부인이 삶에 염증을 느끼고 바람을 피우다가 재산을 날리고 자살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 통속적인 이야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보바리즘'은 '실제의 자신'과 다른, 이상화된 이미지를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한마디로 '주제 파악'을 못하는 과대망상증으로 정의된다. 맞는 말이다. 여성에게 있어 과대망상 및 자아도취는 자신에게 절대로 우호적이지 않은 세상에서 필요불가결한 생존전략이다. 때로 치명적 결과를 가져오기는 할지언정...

—박쥐

키제트

blogin.com · 2008-09-20

뜻하지 않게 스캐너가 생긴 기념으로...



올리려 했으나, 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구글링 검색 결과 나온 그림으로 대신해서 올린다.

검색 결과, 이 그림이 낭트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타마라 드 렘피카가 자신의 딸 키제트를 꽤 많이 그렸다는 사실도. 원래 그림이 내가 가진 정사각형 모양의 엽서와는 달리 길쭉한 직사각형의 판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 그림을 보면 정말 책 읽는 여자가 위험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저 꼬마 여자애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제목이 "핑크빛의 키제트"인데, 그림에서 핑크빛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어쩌면 원작에서는, 아니 좀 더 그럴듯한 복제판에서는 키제트의 옷이 분홍색을 띠고 있을지도). 작가가 이 색조를 즐겨 썼던 것 같긴 하나...(그렇지만 그녀는 더 밝은 그림들도 많이 그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책읽는 딸래미를 이토록 어둡게 그렸단 말인가.) 원경을 보면 더 암울해진다. 모나리자의 뒤태를 장식했던, 평화로운 목가 혹은 시골 풍경이 산업화된 도시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그것들을 저 꼬마 여자애가 감싸는 게 아니라 압도하고 있다. 역시 책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낭트

낭트에 발길을 디딘 것은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7년 전의 일.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한 화랑에서 자신이 그린 거라며 건넨 엽서 하나 뿐. 덕분에, 처음에는 분명 조용하고 깨끗하며 어느 정도 포근하기까지 한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건만, 지금은 뭔가 뿌옇고 아련한 이미지만 남아 있다. 안개에 싸인 도시에 대한 안개에 싸인 기억.

그러고 보니 작년에 본 에마뉴엘 무레의 영화 "제발 키스 한번만 해주세요 (Un baiser, s'il vous plaît)"에서 낭트가 등장했었다. 거기에서 업무차 낭트에 가게 된 여자 주인공은 우연히 만난 근사한 한 그 지역 남성과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다. 키스 한 번만 하면 안되냐고 묻는 남자에게 그녀는, 바로 그 단 한번의 키스로부터 시작된, 자신의 친구가 겪은 비극 하나를 길게 들려준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그와 작별의 키스를 나누게 된다.

영화를 볼 땐 그녀가 남편을 "배신"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건 그녀의 정조 관념 때문이라기보다는, 배경인 낭트라는 도시가 사람 하나 없고, 자못 경건해 보이며, 도대체 우환이라곤 겪어보지 않은 듯한 탓도 있을 거라고 추측하면서. 그 어떤 종류의 모험(aventure)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그 도시.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지금은 든다. 작별의 키스 이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영화가 단지 침묵하고 있었을 뿐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낯선 곳에서 사람은 때로 도덕적 가치나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가. 그곳이 안개에 싸여 있다면 더더욱 그럴 테다.

—박쥐

넋두리

blogin.com · 2008-07-28

오랜만에 만난 선배는 "한국에서 철학은 죽었다"라 말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긴 하다. 그러나 진부하게 들리지 않았다. 이제 막 학위를 마치고 학문적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을 신진 연구자가 한 말이니만큼 더 절실하게 들렸다.

철학이 죽었다든지 아니면 위기에 봉착했다든지 하는 '진단'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철학은 위기를 먹고 사는 학문이다. 그 어떤 학문 이상으로 시대와 역사의 산물이고, 모든 시대는 각자 스스로의 위기를 포함하고 그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진보하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에서 진보를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구원을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위험 속에 그러나 구원이 자라나나니".

난 내가 지금 공부하는 바가 세계를 구원하기는 고사하고 변화시킬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심지어 세계에 대한 유의미한 해석을 내릴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특히 정신적 능력에 대한 어떤 강한 신념을 기초로 하고, 그러한 신념이 어디에 근거하며 또 무엇을 결과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예를 보여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예"는 근대성 담론--서구 근대의 백인 및 남성중심적 이성주의/합리주의, 인간주의(humanisme)--에 대한 나의 종전의 비판적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되지만, 그런 종류의 담론과 다른 맥락에서, 총체화와는 거리가 먼 일개의 예로서 이해될 때에는 나름의 가치를 갖는다. 즉 인간의 정신이 인식 대상과 맺는 관계 및 그 관계의 메커니즘에 대한 하나의 범례.

아직까지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 하나는, "한 사람이 꿈을 꾸면 그것은 꿈에 지나지 않지만, 열 사람이 같은 꿈을 꾼다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라는 훈데르트바서의 말이다. 인간의 정신은 무한하다.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능한 공리나 원리들은 무한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뛰어난 정신도 외따로 존재하는 경우에는 무가치하다. 가능한 공리나 원리들 중 과학자 집단에 의해 유용하다고 판단된 것들이 규약으로서 선택된다. 개개인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지만 그 가능태 중 몇몇의 것을 현실화하는 것은 인간 집단의 힘이다.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다.

물론 집단이 늘 옳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지식인이 뭔가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대중을 선도하는 것이 지식인의 당위가 될 필요는 없다. 아니, 당위가 되는 것은 도리어 위험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이성에 대한 신념에 따라서 행동하면 그것으로 족할 뿐. 감정이나 그 밖의 모호한 이유들에 휘둘리지 않는, 냉철한 판단에 따른 그러한 행동은 고귀하다. 캉길렘과 카바이예스 등 프랑스 인식론자들의 레지스탕스 활동은 그렇게 설명될 수 있다. 굳이 그들의 과학철학에서 정치적 사상의 맹아를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다. 두 영역은 충분히 양립가능하다. 서로 필요충분조건이 되는지는 불확실하나...

결국 인텔리겐차의 변명인가? 생각해 보면 나의 관심은 오로지 지적 활동에 편중되어 있다. 세상을 제대로, 아니 적어도 말이 되게 읽는 것조차도 내겐 아직까지 벅찬 일이다. 물론 나도 어떤 사물이나 사태에 대해 나만의 특정하고 고유한 기준--결코 정련되지 않고 또 정치하지 않은, 어떤 태생적인 판단 기준들, 이를테면 정의/부정의에 관한 것들--에 따라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그 판단에 의거해서 행동하는 일은 지금껏 거의 없었다. 이 정도면 변명이 아니라 솔직한 자기고백으로 봐도 좋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나는 다시 한 번 지식인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결론을 유보하고 있는 중이다.

오랜만에 찾은 서울은

덥다. 후덥지근하다.

아파트가 너무 많다.

간판들이 너무 크다.

젊은이들은 활기차다. 그런데 연애하는 패턴은 10년 전과 다를 바가 없는 듯하다.

백화점 주차장 입구에는 여전히 "어서 오십시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를 반복하는 아가씨들이 차량을 맞으며 서 있다. 아니, 왜? 그런 건 정말 기계가 대신해도 되는 일 아닌가. 백화점에 투서라도 할까 생각하다 관뒀다. 그녀들이 일자리를 뺏길 수도 있기 때문에. 기계를 설치한다면 그녀들은 기계파괴운동을 벌일지도 모른다.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