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다른 책에서 익히 보아 오던 바와는 사뭇 다른, 둥글둥글하고 어찌 보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장난기마저 어려 있는 듯한 모습이다. 중년 남성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아기처럼 조막만하고 통통한 손에 들고 있는 책에는 Mundus est fabula, 세계는 우화다, 라고 쓰여 있다. 이거야말로 믿기 힘들다. 정녕, 서구 근대 철학의, 합리주의의, 기계론의, 그 무엇보다도 데카르트주의의 창시자(사실상 이 말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것 말고 다른 어떤 수식어가 필요하단 말인가)께서 그런 말을 남겼단 말인가.
철학이건 과학이건 이렇게 공부하면 안 된다는 건 아는데, 안 된다니까 더 하고 싶어진다. 표준적인 철학사/과학사 서술의 그물망에 걸리지 않는 것들이라면 뭐든지. 카르테지앙이 아닌 데카르트, "비판철학"에 앞서 '음수'나 우주 생성론을 연구하던 '과학자' 칸트, 강의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자작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른 시인 맥스웰 등등.
어쨌든, 제아무리 생뚱맞은 세계-우화-데카르트라는 조합으로 이루어진 미궁이라 해도, 제대로 맞는 길은 아닐 지라도 적어도 갈 만한 길로 인도할 실이 없지는 않을 거다. 문제는 아리아드네를 설득하는 일. 뭐, 못할 것도 없다. 세계가 정말로 우화라면, 그리고/혹은 이 모든 것이 우화로써 설명될 수만 있다면 (사실 이 둘 사이에는 '그리고/혹은'으로 묶일 수 없는 엄청난 존재론적 간극이 자리하고 있거늘).
그림은 1647년경 장-바티스트 비닉스(Jean-Baptiste Weenix)가 그린 것으로, 지금은 유트레히트 미술관에 걸려 있다. 사진 출처는 http://www.math-inf.uni-gre ... bjekte.html>여기 다.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