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우화다

blogin.com · 2005-03-31



평소 다른 책에서 익히 보아 오던 바와는 사뭇 다른, 둥글둥글하고 어찌 보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장난기마저 어려 있는 듯한 모습이다. 중년 남성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아기처럼 조막만하고 통통한 손에 들고 있는 책에는 Mundus est fabula, 세계는 우화다, 라고 쓰여 있다. 이거야말로 믿기 힘들다. 정녕, 서구 근대 철학의, 합리주의의, 기계론의, 그 무엇보다도 데카르트주의의 창시자(사실상 이 말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것 말고 다른 어떤 수식어가 필요하단 말인가)께서 그런 말을 남겼단 말인가.

철학이건 과학이건 이렇게 공부하면 안 된다는 건 아는데, 안 된다니까 더 하고 싶어진다. 표준적인 철학사/과학사 서술의 그물망에 걸리지 않는 것들이라면 뭐든지. 카르테지앙이 아닌 데카르트, "비판철학"에 앞서 '음수'나 우주 생성론을 연구하던 '과학자' 칸트, 강의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자작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른 시인 맥스웰 등등. 

어쨌든, 제아무리 생뚱맞은 세계-우화-데카르트라는 조합으로 이루어진 미궁이라 해도, 제대로 맞는 길은 아닐 지라도 적어도 갈 만한 길로 인도할 실이 없지는 않을 거다. 문제는 아리아드네를 설득하는 일. 뭐, 못할 것도 없다. 세계가 정말로 우화라면, 그리고/혹은 이 모든 것이 우화로써 설명될 수만 있다면 (사실 이 둘 사이에는 '그리고/혹은'으로 묶일 수 없는 엄청난 존재론적 간극이 자리하고 있거늘).

그림은 1647년경 장-바티스트 비닉스(Jean-Baptiste Weenix)가 그린 것으로, 지금은 유트레히트 미술관에 걸려 있다. 사진 출처는 http://www.math-inf.uni-gre ... bjekte.html>여기 다.

—박쥐

루시드 폴의 신보

blogin.com · 2005-03-23



루시드 폴의 신보 소식을 접하다. 그리고 이번에 처음 가 본 http://www.mulgogi.net> style="BACKGROUND-COLOR: #ffffff" face=바탕 color=#000099>홈피에서 그가 스위스 로잔에서 박사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다. 물론 지금은, 그리고 적어도 며칠 동안은, 콘서트 때문에 한국에 가 있겠지만.

루시드 폴이 아닌 조윤석은 그 외지에서 꿋꿋하게, 그러면서도 즐겁게 버텨가고 있는 듯하다. 공연도 안 보러 가고, 여행도 안 다닌단다. 그리고 시를 읽는단다. 그렇게, 그 많은 끼를 다 숨겨놓은 채 음악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듯한 공부만 하고 있단다. 숨길 만한 끼도 없고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공식적으로는 공부밖에 없는 나도 안 하고 있는 공부를...!

그의 음반을 전부 다 들어본 것은 아니지만, 들어본 미선이 1.5집이나 영화 <버스, 정류장>의 음악들은 전부 다 맘에 쏙 들었다. '이제 소리 없이 시간의 바늘은 자꾸만 내 허리를 베어와'로 시작하는 "송시"의 가사는 여전히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번 앨범 수록곡 "오, 사랑"도 가사가 참 좋다. 벌써 몇 번째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http://mulgogi.net/images/love.swf width=500 height=20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PLAY="false" LOOP="false"> 


—박쥐

신성 모독

blogin.com · 2005-03-14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마리테 프랑수아 지르보사의 광고에 대해 법원이 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유는 "신성 모독죄"라는 건데, 돌려 말하면 프랑스 가톨릭 주교회의 반발이 그만큼 거셌고 이들의 파워와 압력 역시 그에 못지 않게 거셌다는(혹은 여전히 거세다는) 얘기다. 이제 보니 이 주교님들, 한국의 유림 할아버지들 못지 않으시다. 설령 레오나르도의 후손이 자신의 조상에 대한 명예 훼손이라거나 조상의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소송을 걸었다 해도 이보다 더 코미디일 수는 없을 듯.

저 광고 사진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모두 여성으로 재현하고, 원작 중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성인 마리아 막달레나는 남자 모델로, 그것도 상반신을 드러낸 채로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어쩌면 젠더를 비튼 이 발칙한 상상이 주교님들을 화를 더 돋궜는 지도. 그런데 주교님들, 그 "신성"이라는 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었단 말입니까? 아무리 땅에 떨어질 만큼 떨어졌다지만, 겨우 저 정도로 모독을 받을 만큼 떨어졌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주교님들이 그 사실을 몸소 증거해 주시는군요.

—박쥐

봄날 새벽

blogin.com · 2005-03-13



남들은 그것도 일이냐고 핀잔을 줄 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일이라면 일이었던 일 하나를 끝내고 돌아오던 지하철 안에서 봄내음을 맡았다. 그 누가 알았겠는가, 온 도시 안에서 가장 음습한 공기로 가득찬 그곳에 봄이 가장 먼저 찾아들었을 줄을. 밖으로 나와 마신, 여전히 차가운 밤공기에서 포근함이 느껴졌다. 지하철 문틈으로 살살 들어온 봄바람은 어느새 나를 그렇게 에워 싸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 와보니 또 일이 생겨 있다. 역시,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던 게다. 아니다. 봄날은 왔는데, 아직은 새벽인 게다.
 

—박쥐

Liseuse 5

blogin.com · 2005-03-03

Jean Hélion, Lecture pour la fin des choses, 1979
Galerie' target='_son'>http://www.artnet.com/galer ... trigano.html>Galerie Patrice Trigano 홈페이지 에서 가져오다.

퐁피두에서 열린 장 엘리옹의 회고전을 보고 맘에 든 나머지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는 갤러리를 찾아가 발견. 나의 "책 읽는 여인의 초상 콜렉션"에 합류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도다.

참고로 나는 이 사람의 이른바 구상 시기 작품들--엘리옹은 초기(1930년대)에는 추상 미술의 선두 대열에 섰다가 점차 구상/순수 회화로 돌아선, 그러니까 현대 미술사의 흐름에 역행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이 참 좋았다. 심지어 여성의 성기를 의도적으로 형상화한 것임에 분명한, 그래서 평범한 여성 관객에 지나지 않는 나로서도 여성의 성기를 연상할 수밖에 없게 만든 작가의 호박 페티쉬마저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물론, "그렇다면 그의 여러 작품들에서 호박만큼이나 줄기차게 등장하는 바게트는 남근을 상징하는 것일 텐데, 그것마저도 사랑하겠느냐?" 하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자신은 없지만. 나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 "에이,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너무 재미가 없어지잖아."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