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레의 뉴턴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 : 지금 뉴턴을 들이팔 때가 아니다.
계획대로라면 어제까지만 해도 15장이 채워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혼돈의 상태. 생각은 생각대로, 본문은 본문대로.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서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 그것만 해도 그런데 하루는 꼬박 소일해야 할 것이다. 계획상으로라면 지금은 4장의 첫부분에 매진하고 있어야 하는데. 아침에 나오다가는 그런 생각도 했다. 도서관에서는 채워야 할 내용을 넣는 데에 주력하고, 그러니까 아직 쓰여지지 않은 4장과 6장을, 집에서는 뉴턴, 데카르트, 기타 등등, 이렇게 구분을 해서...? 그러나 지금은 현재 상태 점검도 안 돼있는 상태.
어제는 무얼 했는가? 아침에는 또 돌발적으로 즉흥적으로 이전에 노트해 두었던 하인츠만의 2012 푸앵카레 100주기 콜로크 발표문을 정리. 푸앵카레 철학 전반에 관한. 관념론자인가 아닌가, 구조실재론자인가 아닌가 등등. 논리주의에 대한 푸앵카레의 반박.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국소적 인식론자. 따라서 구분해서 봐야 한다. 산술에 대해서는 직관주의자가 맞는데, 여기에서 직관은 매우 특수한 의미에서 쓰인다. 일종의 지적 직관. 수학적 귀납법. 그러고 보니 이거 참 재미있는 주제인데.
여기에서 문득 스치는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 국어 선생이 연역-귀납 추론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p가 1에 대해 성립하고, n에 대해 성립하면 n+1 에 대해서도 성립한다고 했을 때, 나는 손을 들어 그거랑 이른바 경험적 귀납, 즉 어떤 집합 S의 모든 원소 S={s1, s2, s3...}가 모두 P이면 S는 P이다,라 추리하는 건 다른 것 같다, 라고... 정연하게 말하지는 물론 못했고 더구나 왜 그런지는 더더욱 설명하지 못한 채, 그냥 "그건 좀 다른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데서 그쳤는데, 생각해 보면 나는 당시에 무척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푸앵카레-러셀 논쟁의 핵심. 푸앵카레는 여기에서 1에서부터 n이 무한대로까지 가는 모든 경우를 단번에 포착하는 직관의 능력을 보고, 선험적 종합 판단의 전적인 예라 보는 반면, 러셀은 그러니까 수학적 귀납법이란 것은 사실 말이 귀납법이지 이미 대전제에 결론이 주어져 있는 것을 분석해서 나오는 연역의 다른 이름이며 말하자면 각 경우에 대한 소연역을 축약한 것일 뿐이라 본다. 고등학생인 내가 막연하게나마 감지하고 있었던 바는 러셀의 입장이었던 것 같다. 이와는 별개로 수학적 귀납과 경험적 귀납을 구분하는 문제 또한 중요하고, 푸앵카레도 이 차이를 강조한다. 경험적 귀납은 회귀 논리만으로 되는 게 아니고 경험 및 다른 원리, 이를테면 연속성 원리 같은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정확성 면에서 아무래도 떨어지고 등등.
다시 돌아가서. 공간에 관하여. 아, 공간, 이것이야말로 푸앵카레의 철학소(philosophème)이자 그 철학의 핵심. 구조주의의 근본 문제, 즉 구조 및 구조 내 원소(?)들의 생성과 구조 자체의 보존 간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앞서 말한 회귀에 따라 군(groupe), 일종의 구조를 제공하는 것은 정신. 그렇게 주어지는 군은 무한하다. 그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가 문제. 이 선택에 있어 정신은 경험을 참조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공간이 *생성*된다. 푸앵카레에게서는 이러한 공간의 생성 과정에 대한 기술과 설명이 처음에는 다소 초보적인 수준의 생리-물리학(Fechner 류의) 참조에 머물다가, 갈수록 체계화되고 정교화된다. 그 정점을 이루는 논문이, 루지에 등등이 지적한 바, On the Foundations of Geometry (1898). 간단히 말하면 외부 물체의 운동에 대한 감각 지각을 통해 형성되는 지각 공간, 이것이 가장 원초적인 물리적 공간이다. 어떤 운동은 내 시각과 촉각 지각에 의존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내가 몸을 돌리거나 위치를 바꾸면 원래 상태로 돌릴 수 있다. 즉 위치 변환이 가능하다. 이로부터 무형(amorphe)의 외부 세계는 형태를 갖추고 물리적 공간이 된다. 이런 공간이 절대적 기준점을 가질 리 만무하다. 내 운동은 상대적이다. 상대운동의 원리에서 공간의 상대성 원리로. 그런데 이것과 기하학적 공간은 어떻게 관련을 맺게 되는가? 어떻게 이질적이고 유한하고 비대칭적인 물리적 공간이 무한하고 동질적이고 등방인 기하학적 공간과 동일시되는가? 이 모든 것을 좀더 명료하게 정리해서 상대성이론까지 나아가는 것을 보여야 하는 것이 내 논문 6장의 과제. 하인츠만이 보인 것처럼 문제의 핵심은 상대성원리의 애매성 혹은 이중성. 규약, 즉 선험적 *원리*인 동시에 경험적 *법칙*이기도 하다는 것. 물론 여기에서 푸앵카레적 의미에서 규약 개념을 잘 새겨야 한다. 규약은 원래는 경험적 법칙이다. 물리학에서는. 기하학에서 공리가 규약이라고 할 때는 또 다른 문제. 그러나 그 논리적 성격은 기본적으로 같다. 참 거짓임을 판명할 수 없는 명제, 그저 편리성만을 따질 수 있는 명제라는 것. 편리성의 기준 또한 잘 새겨야 한다. 빛이 직진한다는 명제를 유지하고 그에 의존하는 모든 광학 원리들을 보존하면서 유클리드 평행선 공리를 바꿀 것인가, 아니면 유클리드 기하학은 그대로 두는 대신에 광학을 뜯어 고칠 것인가. 이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답 : 빛이 측지선, 즉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를 따라 이동하는 것은 맞는데, 그 측지선이 직선이란 법은 없고 따라서 "직진"하리란 법은 없다. 곡률을 가진 공간에서 측지선 이동은 굴곡을 함축한다. 푸앵카레의 규약주의는 아인슈타인의 입장과 상충하지 않으며 오히려 포괄한다. 다만 그 기준이 되는 편리성에 대한 이념이 달랐을 뿐. 아인슈타인은 기존의 이론에서부터 기본 개념들을 다 뜯어 고치는 게 더 편리하다고 본 것이고, 푸앵카레는 아무래도 좀더 보수적인 입장에서, 어쩌면 좀더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다 고치는 건 어렵고 다 고치면 기존의 무수한 성과물까지 버려야 하는데, 목욕물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릴 순 없지 않겠는가, 하며 뉴턴 역학과 유클리드 기하학을 보존하자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 간과하지 말하야 할 것은, 하인츠만도 강조하고 있는 바, 편리성이 전체론(holistique)적 입장에서 고려되고 있다는 것. 역학, 물리학, 그리고 기하학을 오가거나 가로지르는. 어찌 보면 국소적 인식론과 모순된다 볼 수도 있겠는데.
쓰다가 또 갑자기 생각나는 것, 맥락을 벗어나긴 하지만 그저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두자. 며칠 전 ㅈ 및 ㅅ 언니와의 토론 중. 모든 지각 및 인식에서 이미지의 근본성에 대한 베르그손의 주장에 대해. 베르그손은 원자나 톰슨의 소용돌이 모델(modèle si cher à Bergson, peut-être même plus qu'à Thomson lui-même ! Même si, apparemment, il n'en parlera plus autant après *Matière et mémoire*) 같은 과학의 개념들이 결국은 이미지로 표상됨을 역설하는데, 이에 대해 나는 그건 개념이고 이미지는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표상이며, 결코 개념에 대해 원초적이고 선험적으로 있거나 심지어 작용하지는 않는다고, 그리고 이미지는 오히려 인식론적 장애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바슐라르를 언급하며 반박했는데, 이에 대해 또 다시 드는 두 가지 생각. 이른바 이론적 존재자(theoritical entity)들. 원자도 원자지만 초끈이나 멀티버스, 그래 우주도 어쩌면, 그런 종류. 이런 것들은 굳이 이미지로 표상되지는 않고 되기 어렵다 하더라도 정신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며 관념과 실재 그 중간 사이의 어떤 것이라는 베르그손이 의미하는 바에서의 이미지의 존재 양태 혹은 존재론적 위치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하나의 생각은 모델. 그러고 보니 모델 이론, 수리논리학적 모델 말고, 보다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기계론의 당구공 모델이나 우주 팽창의 건포도빵 은유등은 베르그손의 입장과 통하는 바가 있겠다는 생각이. 그러나, 계속해서 ㅈ과 ㅅ 언니가 내게 지적하는 것처럼, 베르그손이 이미지과 지각의 근본성을 주장할 때 그 주장이 인식론적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인 것이라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 누구도 원자가 *실제로* 당구공 같은 것이고 우주가 *건포도빵*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인데.
이렇게 오만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니 그 중에서 쓸 만한 걸 솎아내서 다듬고 논증, 무엇보다 논증을 하는 게 쉽지 않은 것이다.
나는 어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인츠만을 정리하고서 다른 노트들을 보다가, 아마도 같은 콜로크에서의 자크 라스카르의 발표 기록으로 넘어갔었나 보다. 태양계 안정성 문제. 그는 그가 으레히 하듯, 최소한 지금까지 여러 번 그랬듯, 역사적 고찰에서부터 출발했다. 그가 이미 다른 논문에서 다루었던 바라 노트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고 그냥 발표를 따라가던 중, 그래도 메모할 만한 것이라 판단했는지 기록한 것이 하나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발표자가 뉴턴을 인용하는 부분이었다. 태양계의 안정성이라는 문제가 처음 문제로서 설정된 순간. 그런데 그게 내가 주로 참고하던 <프린키피아>의 최종 주석이 아니라 <광학>의 "문제들"에서 나온 것이어서 나중에 찾아봐야겠단 심산으로 적어둔 모양인데... 그 '나중'이 거의 3년이 지난 지금이 될 줄이야. "이 책의 결론을 대신하는 질문들"이라는 제하의 가장 마지막 장. 논문에서 "문제" 개념을 "문제삼고" 있고 그 때문에 여전히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나로서는 흥미롭지 않을 수 없는 대목. 그 내용 또한 몹시 흥미롭다.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최초의 원인은 역학적인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신이다. 다른 종류의 세계의 기원을 찾는 일은 반철학적(unphilosophical)이다. 혼돈으로부터 오로지 법칙만으로 이 세계의 질서와 조화가 나왔다고 본 데카르트 기계론도 뉴턴이 보기에 반철학적이기는 마찬가지.
그렇게 해서 나는 또 뉴턴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확실히 지금은 뉴턴을 들이팔 때가 아니긴 하다. 그러나... "If not now then when / If now today then" (Tracy Chap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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