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us traversiez la rue, Madame. Il y avait, devant vous, des voitures qui attendaient que vous passiez, comme moi, de l'autre côté, en vélo. Vous avez jeté un regard aux voitures à votre gauche, puis à moi, à votre droite, puis vous vous êtes tournée vers moi pour me dire : "C'est interdit !" J'allais dire : crier. Oui, Madame, je suis désolée, mais moi qui n'ai pas l'habitude de parler de tonne aussi agressive avec des gens de la rue, comme la plupart des gens d'ailleurs je crois, vous m'a bien étonnée.
En effet, c'était une route "sens unique" et j'allais rouler mon vélo dans le contresens. Mais, Madame, le saviez-vous ? Paris serait peut-être une ville de cauchemar pour les conducteurs, avec ses routes étroites et de sens unique, mais il n'en est pas de même pour les cyclistes. Dans certaines routes, déjà nombreuses et de plus en plus nombreuses, il est permis aux vélos de conduire contre les sens uniques. J'ignore si tel était le cas de la rue où nous nous sommes croisées, mais, même s'il n'y a pas de signe "sauf vélo" qui garantit que telle exception est tout à fait légale, il y a souvent une complicité entre conducteurs et cyclistes pour que ceux-là laissent passer ceux-ci.
De tout cela, je ne vous ai rien dit. La route en question me paraissait assez étroite et montante, j'aillais plutôt marcher sur le trottoir, et ce, après être descendue du vélo. Quand je vous l'ai dit, vous avez répété : "Non, c'est interdit le vélo sur le trottoir !" Vous croyiez que j'allais passer en montée sur mon vélo. J’avoue que cela m'arrive de ne pas descendre du vélo au trottoir, mais ceci uniquement quand il n'y a personne ou peu et il y a suffisamment de place pour que je ne dérange personne avec mon cheval. Evidemment vous ne me connaissez pas, je ne peux vous demander de me connaitre à ce point-là pour vous renseigner sur mes règles de conduite cycliste. Mais qu'est-ce qui vous dit que je ne sois une assez bonne citoyenne, quelqu'un qui a l'horreur d'être impoli et fait tout ce qu'il faut pour ne gêner personne ? Sur quoi fonde votre raisonnement ?
Je ne veux pas vous prendre pour une raciste ou une xénophobe. Peut-être vous aviez simplement une mauvaise humeur et vous vous sentiez irritée par rien. Cela arrive à tout le monde, m'arrive à moi aussi, peut-être plus que quiconque. Mais je crains que, vu la situation, vous risquiez de vous faire prendre pour une telle : une dame assez âgée parle de manière aussi hostile et austère à une fille asiatique plus jeune qui a du mal à se défendre, qu'inspirerait une telle situation ? J'exagère peut-être. Mais pas tellement, vu ce qui se passe en ce moment. Je sens que ce genre de tragédie n'est plus réservée aux banlieues. On dit que c'est la face sombre de la mondialisation, ce repli sur soi et ce rejet de l'autre ou d'autrui, et c'est un phénomène de plus en plus mondialisé. A quoi, hélas, Paris n'échappe pas, en tout cas semble avoir de plus en plus mal à y résister. Excusez-moi de vous le dire, vous êtes vous-même un un symptôme de ce phénomène et vous m'en avez donné une preuve.
Cela m'attriste plus que quiconque parce que, Parisienne adoptée, j'aime profondément cette ville, surtout pour son cosmopolitisme et son ouverture vers autrui. Les gens comme vous laissent quitter même les francophiles dans le fond de leur âme comme moi. Ne gâchez pas Paris. Paris n'est pas seulement à vous. Elle nous appartient, à vous et à moi, à tout le monde.
- ㄴ 언니에게
무심히 보낸 짧은 메세지가 이렇게 세심하게 쓰인 장문의 편지로 돌아오다니. 제가 있는 지금의 여기와 차원이 다른 우주 어딘가로부터 날아온 편지 같아요. 수녀원이라는 공간, 그곳에서 당신이 지내신 일주일 남짓한, 아니 이제 이주가 넘어가는 시간, 그 세계와 이 속세는 질서도 논리도 이렇게 다르군요.
논문을 쓰기 위해선 오롯이 혼자여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당신. 재미있는 것이 마침 저는 그와 전혀 반대인 깨달음을 얻고 그에 따라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중이었거든요. 너무도 오랜동안 혼자서 살고 쓰고 사유해 왔고, 이것이야말로 지체 및 퇴보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었다는 거죠. 사실 이 깨달음도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에요.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물체는 자기 운동을 지속한다는 것이 근대역학의 근간이 된 관성원리. 이 원리는 제가 논문에서도 조금 다루는데 볼 때마다 제 경우에 비춰보곤 했죠 (실제로 데카르트와 갈릴레오에 의해 정립된 이 원리에서 인간학과 윤리의 기본 원리를 유추한 경우가 제법 있었죠. 스피노자, 루소 등. 덧붙이면 속도가 변치 않은 상태로 제 운동을 지속하는 물체는 자신의 운동 상태를 말하자면 자각하지 못하고 자신은 멈춰있고 다른 물체들이 움직이는 것으로 인지한다는 것이 갈릴레오 상대성원리). 너무도 오래 관성 운동을 지속해 오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웬만한 외부 자극에는 꿈쩍도 않게 되었던 것인데. 그러다 얼마 전, 더 이상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새삼스런 자각에, 바닥에 남은 마지막 용기와 의지를 끌어모아 외부 세계를 향한 창을 다시 열게 된 것이죠.
십수 년만에 안과에 가서 검사를 받고 안경을 맞춰서 쓰기 시작했어요. 써보니 그 동안 얼마나 흐릿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또 살아왔는지 알겠더라고요. 작년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하면서 파리를 재발견하는 기쁨을 누렸는데, 이번에는 그 이상이에요. 신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그야말로 계몽, 즉 미몽의 상태에서 깨어난, 나아가 새로 태어난 기분.
지난 주에는 오랜만에, 실로 너무나도 오래만에, 콜로크 하나에 참석했어요. "사상사"가 주제였는데 푸코에 대한 언급이 많았죠. 딱히 푸코를 전공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가 재직했던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열린 만큼, 그리고 그가 해당 혹은 유사 분야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니만큼. 덕분에 지적인 자극과 자신감을 동시에 얻었어요. 푸코의 고고학을 방법론적으로 차용해서 고전시대 우주론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 제 논문 1부의 목표거든요. 꼭 푸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만 푸카디앙임을 천명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내 주장과 주관이 확실하고 그 안에 나만의 고유한 해석을 녹여내면 그것만으로도 의의를 찾을 수 있겠구나.
그리고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 (푸코나 사상사와는 무관하게 얻은 것이지만 사후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보면 푸코랑은 전혀 무관하지는 않겠네요. 다 그가 다룬 주제들) : 순수한 앎에의 의지, 지적 욕망보다, 일정한 지적 수준을 인정받고 싶은, 그야말로 인정욕, 그리하여 결국에는 지적 허영심을 충족하고 우월감을 확인하려는 말하자면 권력에의 의지가 앞서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이것이 그동안 내 논문에, 나아가 삶에서 얼마나 큰 장애물로 작용해 왔는가.
근처에 간 김에 오랜 만에 푸앵카레 연구원 도서관에, 그리고 저녁에는 주느비에브 도서관에 갔는데, 주느비에브에선 아,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주느비에브는 제가 이곳에 온 직후 자주 드나들었던 도서관. 당시 수업이 주로 근처 쥐시유에서 있었고, 또 당시만 해도 저녁 늦게까지 개관하는 도서관이 퐁피두 말고는 유일했던 까닭에. 처음에는 도서 대출 및 출입 시스템을 몰라 입구를 마비시킨 일도 있었고, 그밖에도 당시에는 수치심으로 죽을 듯 괴로웠지만 이제사 다시 생각하면 웃음만 나오는 기억들로 가득한 곳. 높은 천장, 철제 궁륭, 넓은 열람실, 낡고 삐걱대는 책상과 의자, 청록빛 유리갓을 쓴 책상램프,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복제한 벽화, 모든 것이 그대로인 걸로 보였어요. 지난해 테러 이후 등록 및 재등록시 신분증을 요구하는 걸 빼면. 아, 무선인터넷이 가능해진 것도 있네요. 그리고 이는 무척 큰 변화.
그리고 무언가 일을 하나 도모했어요.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시도를 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정도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심각한 무기력증에 시달려 왔는지 짐작할 만하죠. 과감하고 무모해진 김에 지도교수에게도 메일을 보냈어요. 얼마 전 메일을 보냈는데 답이 없어 불안해 하던 차였거든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답장이 왔는데 건강에 문제가 있어 답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기다리라는 내용이었어요. 순간 걱정이 많이 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하고 불경하다고도 할 안도감이. 내가 잊혀지거나 아주 많이 밉보인 것은 아니구나, 그래도 희망이 없지 않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록 불행한 소식이고 가슴은 아프긴 해도 어쨌든 그로 인해 내겐 시간이 좀더 주어지게 된 셈이구나, 하는 생각도.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이것이 정말로 마지막 기회겠구나, 하는 경각심이.
이제 당신이 돌아올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돌아온 당신에겐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 거고요. 나도 또 다른 기쁜 소식을 전하는 주인공이면 좋겠지만, 이번엔 힘들겠네요. "혹시 알아? 돌아와 보니 그 동안에 다 썼다고 할지?"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당신을 놀라게 해주고도 싶었는데. 그래도 다음에는, 조만간에는 꼭.
버스 정류장. 그 옆에 오도카니 떨어져 있는 공중벤치. 여자는 벤치에 앉았고 남자는 서 있다. 여자는 여자가 몸을 숙이고 남자 바지 뒤춤을 봐주고 있다. 바지 끝자락이 길어 신발 뒤로 내려와 밟혔는지 여자에게 걷어달라 한 모양이다. 아니 자기는 손이 없나, 애도 아니고, 저런 건장한 풍채의 사나이가, 하고 속으로 흉을 보다, 그의 우람한 어깨에 드리워진 멜빵에 시선이 갔는데, 아, 순간 더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그 남자는 아기를 앞으로 둘러메고 있었던 것이다. 오른쪽 팔에는 코끼리가 그려진 기저귀 가방을 멘 채로. 그래서 제 스스로 바지 뒷단을 손볼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더운 날에. 그러다 기저귀 가방을 걸친 팔에 시선이 이동하게 되었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역시나 단단해 보이는 팔뚝은 온갖 종류의 문신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팔 전체가 시퍼렇게 보일 정도로. 파르라니 깎은 머리는 또 어떤가.
바지춤이 정리가 되자 아기와 오롯이 남겨진 남자. 그러자 그는 그 문신으로 빼곡한 양팔로 아기 어깨를 감싸쥐고는 아이와 둘만의 대화를 시작한다. 한없이 익살스럽고 다정스럽고 온화한 표정으로. 아기가 사랑스러워서 못견디겠는, 그리고 행복에 겨운 것이 멀찍이 떨어진 내게도 확연히 느껴진다.
사실 남자는 그냥 봤더라면 스킨헤드와 문신 때문에 나로서는 사실 좀 무섭고, 더구나 아이들이 보면 더더욱 무서워할 것 같은 외모. 그런 외모의 소유자가 아기를 업느라 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나머지 동반자에게 아이같이 의존해야 하는 상황, 이것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아이러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판 성(聖)가족, 아니 (세)속(俗)가족의 초상이기도 하다. 아기 예수를 몸소 업고 어르고 달래는 요셉과 육아의 짐을 덜은 대신에 "가장"의 몫을 대신하거나 최소한 공유하는 마리아. 백년 전, 아니 한 오십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낡고 고정된 성역할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상당수의 사회에서는 여전히 상상가능은 해도 실제로 보기는 드문 장면일 것이다. 이런 장면이 상상가능하고 또 실제로 실현가능한 시대와 공간에 사는 것이 참 다행스러운, 그리고 어쩌면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거기에 어쩔 수 없는 박탈감과 자조감이 동반되는 것이 사실이긴 해도.
바지춤이 정리가 되자 아기와 오롯이 남겨진 남자. 그러자 그는 그 문신으로 빼곡한 양팔로 아기 어깨를 감싸쥐고는 아이와 둘만의 대화를 시작한다. 한없이 익살스럽고 다정스럽고 온화한 표정으로. 아기가 사랑스러워서 못견디겠는, 그리고 행복에 겨운 것이 멀찍이 떨어진 내게도 확연히 느껴진다.
사실 남자는 그냥 봤더라면 스킨헤드와 문신 때문에 나로서는 사실 좀 무섭고, 더구나 아이들이 보면 더더욱 무서워할 것 같은 외모. 그런 외모의 소유자가 아기를 업느라 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나머지 동반자에게 아이같이 의존해야 하는 상황, 이것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아이러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판 성(聖)가족, 아니 (세)속(俗)가족의 초상이기도 하다. 아기 예수를 몸소 업고 어르고 달래는 요셉과 육아의 짐을 덜은 대신에 "가장"의 몫을 대신하거나 최소한 공유하는 마리아. 백년 전, 아니 한 오십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낡고 고정된 성역할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상당수의 사회에서는 여전히 상상가능은 해도 실제로 보기는 드문 장면일 것이다. 이런 장면이 상상가능하고 또 실제로 실현가능한 시대와 공간에 사는 것이 참 다행스러운, 그리고 어쩌면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거기에 어쩔 수 없는 박탈감과 자조감이 동반되는 것이 사실이긴 해도.
중세철학자 아벨라르의 Historia calamitatum. 말그대로 그가 겪은 온갖 불행한 개인사를 기술한 자전적 서신이다. 발단은 그의 친구 중 하나가 겪은 또 다른 불행. 본인에게는 더없이 심각한 사태요 비극적 사건이었을 것이고, 그로 인한 비통한 심정을 친구에게 하소연하며 위안을 구했던 모양인데, 그 상대가 하필이면 아벨라르였던 것이다.
아벨라르가 누군가. 파란만장도 그냥 파란만장 정도가 아니라, 몇 세기를 거쳐 몇 명 나올까말까한 드라마틱한 생애를 한 몸으로 산 인물 아닌가. 그 드라마도 어디 그냥 드라마인가. 그저 당대 최고의 사상가로서 겪은 명성, 질투, 모함, 몰인정, 오해, 가난 등등이야 역사상 전례와 후례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실재했더라도 울고 갔을 사상 최고의 연애담을 실제로 살았던 인물은 내가 보기에는 정말로 전무후무할 것 같다.
브르타뉴 출신으로 일찍부터 명석한 두뇌로 두각을 나타내어 파리로 올라와 소르본느에서 신학과 철학 등등을 수학, 당대 최고의 석학의 교리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 그가 당시로서는 파리 외곽에 속해 있던 생트 주느비에브에 개설한 강의에는 소르본느보다 더 많은 제자들이 모이고, 그의 명성은 날로 퍼져 세계 각지에서 그에게 배우러 오기에 이른다. 그렇게 교육과 연구에 여념이 없는 세월을 보내다가 한 사십 줄에 접어들 무렵, 그는 명망있는 성직자로부터 가정교사 제안을 받는다. 그가 맡은 학생은 성직자의 조카인 엘로이즈. 열여덟의 꽃 같은 외모에 학문적 교양까지 갖추어 이미 명성이 자자했다. 이를 회상하며 아벨라르는 말한다. 그 삼촌도 너무하지 않았는가, 그런 어린 양을 늑대에게 맡겨 놓다니.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갈수록 교리문답보다는 달콤한 말이 오가고, 말만 오가는 게 아니라... 급기야 엘로이즈는 태기를 보이기에 이른다. 그러자 아벨라르는 그녀를 브르타뉴 시골집으로 데리고 가 출산까지 돌보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에게 엘로이즈는 아스트롤라브(Astrolabe), 즉 천구의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아스틀로라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이후 엘로이즈의 편지에서도 마찬가지). 이후의 행보를 논하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에게 파리 부근 아르정퇴이 수녀원에 일단 들어갈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엘로이즈의 삼촌과 가족들의 화를 잠재우기 위해 엘로이즈와 결혼할 것을 언약. 대신에 두 사람의 명예를 위해 결혼은 비밀리에 올리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엘로이즈는 이에 반대한다(오, 엘로이즈! 나중에 편지에도 나오지만 그녀는 아벨라르의 연인이기 전에 가장 뛰어난 제자다. 때로 스승을 넘어서는). 이유인즉슨, 결혼생활이 아벨라르의 학문 탐구와 진리 추구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것(위대한 성인과 철학자들이 대부분 독신자로 남았다는 역사적 근거를 대며), 그리고 또 하나는 만약 결혼을 한다면 이는 엘로이즈 자신의 명예를 실추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 자신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단지 결혼이라는 저속하고 현실적인 목표를 가졌던 것으로 오인될 것이므로. 그러나 결국 둘은 비밀결혼식을 올리고 엘로이즈는 수녀원으로 돌아가는데.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고 또 아벨라르가 술수를 쓴다고 의심한 삼촌 일가. 어느날 밤 아벨라르의 숙소에 찾아가 자고 있던 그에게... 거세를 감행한다. "죄를 저지른 바로 그 부분으로 죄값도 치루어야 한다"는 미명 하에.
그 이후에도 아벨라르의 시련은 끊기지 않고 이리저리 방랑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나, 그의 명성만은 여전하여 찾아오는 제자들은 끊이지 않는다. 엘로이즈는 그녀대로 수녀원에서 명성을 쌓아가고. 아벨라르는 그녀를 위해 수녀원을 창립, 원장수녀로 앉힌다. 이후에 둘이 다시 만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아벨라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입수해서 읽은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편지를 보내고 이로부터 둘 사이에 오간 서신 몇 편이 전해질 뿐. 성직과 수녀원 운영에 관한 다소 공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가끔 자신들의 뜨거웠던 과거를 회상하고 또 현재의 감정을 토로하는 대목도 나온다. 아벨라르는 스승이자 성직자로서 자못 엄숙한 태도를 유지하는 반면, 엘로이즈는 상대적으로 감정의 표현에 있어 자유롭고 때로는 놀랄만큼 과감하게. "내가 수녀원에서 수녀로서 한 모든 일은 신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사랑에서였다", "세상을 다 가진 아우구스투스 같은 황제가 나에게 청혼한다 해도, 나는 그의 황후가 되느니 당신의 창녀가 되는 편을 택하겠다", "모두들 나의 정숙함과 신실함을 칭송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 위선자라 느낀다. 어찌 보면 당신이 겪은 그 큰 불행이 당신에게는 오히려 다행인 것이, 당신은 육욕으로 괴로울 일은 없으니. 나는 심지어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고 기도를 드릴 때조차 자꾸 과거 당신과 나눈 그 달콤한 육체의 기억이 자꾸 되살아나 괴롭다" 등등.
다시 처음의 편지로 돌아가면, 요는 이렇다 : 친구여, 그대의 불행은 내가 겪은 바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니, 괴로워하지 말게나. 그러나 과연 그런가? 친구의 더 큰 불행이 내게 위안이 될 수 있는가? 불행을 호소하는 자에게 그보다 더한 불행을 생각하라, 흔히 하는 위로 중 하나다. 그러나 지구상 어딘가에서 지진이 일어나서 수천 명의 사람이 죽어나가도 내 몸에 난 미소한 상처가 실질적으로는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실질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게다가, 비교우위의 불행, 특히 그 불행의 당사자가 친구일 때, 친구의 아픔을 위안으로 삼는 태도는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다른 것을 떠나서 무엇보다 실제로는 위로로서 그다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 오히려 나의 불행으로 겪은 아픔이 친구의 불행으로 인해 배가되지 않겠는가?
아벨라르의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아벨라르가 누군가. 파란만장도 그냥 파란만장 정도가 아니라, 몇 세기를 거쳐 몇 명 나올까말까한 드라마틱한 생애를 한 몸으로 산 인물 아닌가. 그 드라마도 어디 그냥 드라마인가. 그저 당대 최고의 사상가로서 겪은 명성, 질투, 모함, 몰인정, 오해, 가난 등등이야 역사상 전례와 후례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실재했더라도 울고 갔을 사상 최고의 연애담을 실제로 살았던 인물은 내가 보기에는 정말로 전무후무할 것 같다.
브르타뉴 출신으로 일찍부터 명석한 두뇌로 두각을 나타내어 파리로 올라와 소르본느에서 신학과 철학 등등을 수학, 당대 최고의 석학의 교리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 그가 당시로서는 파리 외곽에 속해 있던 생트 주느비에브에 개설한 강의에는 소르본느보다 더 많은 제자들이 모이고, 그의 명성은 날로 퍼져 세계 각지에서 그에게 배우러 오기에 이른다. 그렇게 교육과 연구에 여념이 없는 세월을 보내다가 한 사십 줄에 접어들 무렵, 그는 명망있는 성직자로부터 가정교사 제안을 받는다. 그가 맡은 학생은 성직자의 조카인 엘로이즈. 열여덟의 꽃 같은 외모에 학문적 교양까지 갖추어 이미 명성이 자자했다. 이를 회상하며 아벨라르는 말한다. 그 삼촌도 너무하지 않았는가, 그런 어린 양을 늑대에게 맡겨 놓다니.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갈수록 교리문답보다는 달콤한 말이 오가고, 말만 오가는 게 아니라... 급기야 엘로이즈는 태기를 보이기에 이른다. 그러자 아벨라르는 그녀를 브르타뉴 시골집으로 데리고 가 출산까지 돌보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에게 엘로이즈는 아스트롤라브(Astrolabe), 즉 천구의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아스틀로라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이후 엘로이즈의 편지에서도 마찬가지). 이후의 행보를 논하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에게 파리 부근 아르정퇴이 수녀원에 일단 들어갈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엘로이즈의 삼촌과 가족들의 화를 잠재우기 위해 엘로이즈와 결혼할 것을 언약. 대신에 두 사람의 명예를 위해 결혼은 비밀리에 올리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엘로이즈는 이에 반대한다(오, 엘로이즈! 나중에 편지에도 나오지만 그녀는 아벨라르의 연인이기 전에 가장 뛰어난 제자다. 때로 스승을 넘어서는). 이유인즉슨, 결혼생활이 아벨라르의 학문 탐구와 진리 추구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것(위대한 성인과 철학자들이 대부분 독신자로 남았다는 역사적 근거를 대며), 그리고 또 하나는 만약 결혼을 한다면 이는 엘로이즈 자신의 명예를 실추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 자신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단지 결혼이라는 저속하고 현실적인 목표를 가졌던 것으로 오인될 것이므로. 그러나 결국 둘은 비밀결혼식을 올리고 엘로이즈는 수녀원으로 돌아가는데.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고 또 아벨라르가 술수를 쓴다고 의심한 삼촌 일가. 어느날 밤 아벨라르의 숙소에 찾아가 자고 있던 그에게... 거세를 감행한다. "죄를 저지른 바로 그 부분으로 죄값도 치루어야 한다"는 미명 하에.
그 이후에도 아벨라르의 시련은 끊기지 않고 이리저리 방랑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나, 그의 명성만은 여전하여 찾아오는 제자들은 끊이지 않는다. 엘로이즈는 그녀대로 수녀원에서 명성을 쌓아가고. 아벨라르는 그녀를 위해 수녀원을 창립, 원장수녀로 앉힌다. 이후에 둘이 다시 만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아벨라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입수해서 읽은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편지를 보내고 이로부터 둘 사이에 오간 서신 몇 편이 전해질 뿐. 성직과 수녀원 운영에 관한 다소 공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가끔 자신들의 뜨거웠던 과거를 회상하고 또 현재의 감정을 토로하는 대목도 나온다. 아벨라르는 스승이자 성직자로서 자못 엄숙한 태도를 유지하는 반면, 엘로이즈는 상대적으로 감정의 표현에 있어 자유롭고 때로는 놀랄만큼 과감하게. "내가 수녀원에서 수녀로서 한 모든 일은 신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사랑에서였다", "세상을 다 가진 아우구스투스 같은 황제가 나에게 청혼한다 해도, 나는 그의 황후가 되느니 당신의 창녀가 되는 편을 택하겠다", "모두들 나의 정숙함과 신실함을 칭송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 위선자라 느낀다. 어찌 보면 당신이 겪은 그 큰 불행이 당신에게는 오히려 다행인 것이, 당신은 육욕으로 괴로울 일은 없으니. 나는 심지어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고 기도를 드릴 때조차 자꾸 과거 당신과 나눈 그 달콤한 육체의 기억이 자꾸 되살아나 괴롭다" 등등.
다시 처음의 편지로 돌아가면, 요는 이렇다 : 친구여, 그대의 불행은 내가 겪은 바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니, 괴로워하지 말게나. 그러나 과연 그런가? 친구의 더 큰 불행이 내게 위안이 될 수 있는가? 불행을 호소하는 자에게 그보다 더한 불행을 생각하라, 흔히 하는 위로 중 하나다. 그러나 지구상 어딘가에서 지진이 일어나서 수천 명의 사람이 죽어나가도 내 몸에 난 미소한 상처가 실질적으로는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실질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게다가, 비교우위의 불행, 특히 그 불행의 당사자가 친구일 때, 친구의 아픔을 위안으로 삼는 태도는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다른 것을 떠나서 무엇보다 실제로는 위로로서 그다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 오히려 나의 불행으로 겪은 아픔이 친구의 불행으로 인해 배가되지 않겠는가?
아벨라르의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이 가르침과 사례를 본받아 용기를 내어, 시련이 부당하면 부당할수록 믿음을 가지고 견뎌내세나. 이 시련이 우리에게 이롭지 못하다 해도 속죄에 기여하는 바가 있음은 의심하지 말지어니. 모든 것은 신의 뜻에 따르고, 각 신자들은 고난의 순간에 최고선인 신이 세상 어느 것도 당신의 전지적 질서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사, 이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당신이 직접 나서 좋은 결과로 맺어지도록 한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받으니.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 현명한 것일세 :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 되도록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는 사도의 권위있는 말은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안인지. 이것이 현자 중의 현자가 잠언서에서 "정의로운 이는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이라 쓰면서 염두에 두었던 진리이네. 시련이 신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알면서도 이에 노여워하는 사람들은 정의의 길로부터 벗어나고 있음을 그는 보여주고 있네. 그리고, 입으로는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라 말하면서 속으로는 반발하여 자신의 의지를 주의 의지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은 신의 의지보다 자신의 의지에 얽매인 사람임을. 잘 있게나.이것만 보면 전라이프니츠적 낙관론인가 싶지만, 신이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다 잘 될거야"라는 사소하고 다소 무성의한 위안과 다를 바가 뭔가 싶기도 하지만, 저 모든 불행을 겪은 이가 그에 비하면 사소한 불행에 불평하는 자에게 건네는 말이라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사소한 말이라도 거기에 진심이 담겨 있을 때 그만큼 큰 위안이 되는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