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16일 토요일

비교우위의 불행이 주는 위안

중세철학자 아벨라르의 Historia calamitatum. 말그대로 그가 겪은 온갖 불행한 개인사를 기술한 자전적 서신이다. 발단은 그의 친구 중 하나가 겪은 또 다른 불행. 본인에게는 더없이 심각한 사태요 비극적 사건이었을 것이고, 그로 인한 비통한 심정을 친구에게 하소연하며 위안을 구했던 모양인데, 그 상대가 하필이면 아벨라르였던 것이다.

아벨라르가 누군가. 파란만장도 그냥 파란만장 정도가 아니라, 몇 세기를 거쳐 몇 명 나올까말까한 드라마틱한 생애를 한 몸으로 산 인물 아닌가. 그 드라마도 어디 그냥 드라마인가. 그저 당대 최고의 사상가로서 겪은 명성, 질투, 모함, 몰인정, 오해, 가난 등등이야 역사상 전례와 후례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실재했더라도 울고 갔을 사상 최고의 연애담을 실제로 살았던 인물은 내가 보기에는 정말로 전무후무할 것 같다.

브르타뉴 출신으로 일찍부터 명석한 두뇌로 두각을 나타내어 파리로 올라와 소르본느에서 신학과 철학 등등을 수학, 당대 최고의 석학의 교리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 그가 당시로서는 파리 외곽에 속해 있던 생트 주느비에브에 개설한 강의에는 소르본느보다 더 많은 제자들이 모이고, 그의 명성은 날로 퍼져 세계 각지에서 그에게 배우러 오기에 이른다. 그렇게 교육과 연구에 여념이 없는 세월을 보내다가 한 사십 줄에 접어들 무렵, 그는 명망있는 성직자로부터 가정교사 제안을 받는다. 그가 맡은 학생은 성직자의 조카인 엘로이즈. 열여덟의 꽃 같은 외모에 학문적 교양까지 갖추어 이미 명성이 자자했다. 이를 회상하며 아벨라르는 말한다. 그 삼촌도 너무하지 않았는가, 그런 어린 양을 늑대에게 맡겨 놓다니.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갈수록 교리문답보다는 달콤한 말이 오가고, 말만 오가는 게 아니라... 급기야 엘로이즈는 태기를 보이기에 이른다. 그러자 아벨라르는 그녀를 브르타뉴 시골집으로 데리고 가 출산까지 돌보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에게 엘로이즈는 아스트롤라브(Astrolabe), 즉 천구의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아스틀로라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이후 엘로이즈의 편지에서도 마찬가지). 이후의 행보를 논하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에게 파리 부근 아르정퇴이 수녀원에 일단 들어갈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엘로이즈의 삼촌과 가족들의 화를 잠재우기 위해 엘로이즈와 결혼할 것을 언약. 대신에 두 사람의 명예를 위해 결혼은 비밀리에 올리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엘로이즈는 이에 반대한다(오, 엘로이즈! 나중에 편지에도 나오지만 그녀는 아벨라르의 연인이기 전에 가장 뛰어난 제자다. 때로 스승을 넘어서는). 이유인즉슨, 결혼생활이 아벨라르의 학문 탐구와 진리 추구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것(위대한 성인과 철학자들이 대부분 독신자로 남았다는 역사적 근거를 대며), 그리고 또 하나는 만약 결혼을 한다면 이는 엘로이즈 자신의 명예를 실추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 자신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단지 결혼이라는 저속하고 현실적인 목표를 가졌던 것으로 오인될 것이므로. 그러나 결국 둘은 비밀결혼식을 올리고 엘로이즈는 수녀원으로 돌아가는데.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고 또 아벨라르가 술수를 쓴다고 의심한 삼촌 일가. 어느날 밤 아벨라르의 숙소에 찾아가 자고 있던 그에게... 거세를 감행한다. "죄를 저지른 바로 그 부분으로 죄값도 치루어야 한다"는 미명 하에.

그 이후에도 아벨라르의 시련은 끊기지 않고 이리저리 방랑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나, 그의 명성만은 여전하여 찾아오는 제자들은 끊이지 않는다. 엘로이즈는 그녀대로 수녀원에서 명성을 쌓아가고. 아벨라르는 그녀를 위해 수녀원을 창립, 원장수녀로 앉힌다. 이후에 둘이 다시 만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아벨라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입수해서 읽은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편지를 보내고 이로부터 둘 사이에 오간 서신 몇 편이 전해질 뿐. 성직과 수녀원 운영에 관한 다소 공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가끔 자신들의 뜨거웠던 과거를 회상하고 또 현재의 감정을 토로하는 대목도 나온다. 아벨라르는 스승이자 성직자로서 자못 엄숙한 태도를 유지하는 반면, 엘로이즈는 상대적으로 감정의 표현에 있어 자유롭고 때로는 놀랄만큼 과감하게. "내가 수녀원에서 수녀로서 한 모든 일은 신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사랑에서였다", "세상을 다 가진 아우구스투스 같은 황제가 나에게 청혼한다 해도, 나는 그의 황후가 되느니 당신의 창녀가 되는 편을 택하겠다", "모두들 나의 정숙함과 신실함을 칭송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 위선자라 느낀다. 어찌 보면 당신이 겪은 그 큰 불행이 당신에게는 오히려 다행인 것이, 당신은 육욕으로 괴로울 일은 없으니. 나는 심지어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고 기도를 드릴 때조차 자꾸 과거 당신과 나눈 그 달콤한 육체의 기억이 자꾸 되살아나 괴롭다" 등등.

다시 처음의 편지로 돌아가면, 요는 이렇다 : 친구여, 그대의 불행은 내가 겪은 바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니, 괴로워하지 말게나. 그러나 과연 그런가? 친구의 더 큰 불행이 내게 위안이 될 수 있는가? 불행을 호소하는 자에게 그보다 더한 불행을 생각하라, 흔히 하는 위로 중 하나다. 그러나 지구상 어딘가에서 지진이 일어나서 수천 명의 사람이 죽어나가도 내 몸에 난 미소한 상처가 실질적으로는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실질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게다가, 비교우위의 불행, 특히 그 불행의 당사자가 친구일 때, 친구의 아픔을 위안으로 삼는 태도는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다른 것을 떠나서 무엇보다 실제로는 위로로서 그다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 오히려 나의 불행으로 겪은 아픔이 친구의 불행으로 인해 배가되지 않겠는가?

아벨라르의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이 가르침과 사례를 본받아 용기를 내어, 시련이 부당하면 부당할수록 믿음을 가지고 견뎌내세나. 이 시련이 우리에게 이롭지 못하다 해도 속죄에 기여하는 바가 있음은 의심하지 말지어니. 모든 것은 신의 뜻에 따르고, 각 신자들은 고난의 순간에 최고선인 신이 세상 어느 것도 당신의 전지적 질서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사, 이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당신이 직접 나서 좋은 결과로 맺어지도록 한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받으니.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 현명한 것일세 :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 되도록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는 사도의 권위있는 말은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안인지. 이것이 현자 중의 현자가 잠언서에서 "정의로운 이는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이라 쓰면서 염두에 두었던 진리이네. 시련이 신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알면서도 이에 노여워하는 사람들은 정의의 길로부터 벗어나고 있음을 그는 보여주고 있네. 그리고, 입으로는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라 말하면서 속으로는 반발하여 자신의 의지를 주의 의지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은 신의 의지보다 자신의 의지에 얽매인 사람임을. 잘 있게나.
이것만 보면 전라이프니츠적 낙관론인가 싶지만, 신이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다 잘 될거야"라는 사소하고 다소 무성의한 위안과 다를 바가 뭔가 싶기도 하지만, 저 모든 불행을 겪은 이가 그에 비하면 사소한 불행에 불평하는 자에게 건네는 말이라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사소한 말이라도 거기에 진심이 담겨 있을 때 그만큼 큰 위안이 되는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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