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남은 예비 박사라고는 정말 나 하나뿐이구나. 이젠 정말 상황 보고하기도 힘들다. 민망하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도 지루해서. 계속 statu quo 이니 말이야. 변화라 할 만한 게 있다면...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싸서 도서관에 정기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 나로선 꽤 큰 변화인 것이 사실. [...] 삶 전반을 뭔가 정규화하고 규칙화하려는 태도의 변화를 상징한다고나 할까.그런데 그로부터 2년 후인 불과 며칠 전. 최근의 새로운 깨달음이랍시고 다른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
예전에는 댄디즘이나 혹은 영혼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명목하에, 그리고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을 운운하면서, 일체의 계획적인, 목표에 맞춰 현재를 희생하는 삶을 두려워하고 회피했었는데, 그것이 결국 삶에 대한 진지하거나 치열하지 않은 태도에 다름 아님을 깨달은 순간이 있었어. 여전히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그에 맞춰 일정을 조직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긴 하지만 (예를 들어 논문 일정은 여전히 차일피일 연기되고 있는 중 : 아무래도 빨라야 올가을), 최소한 일상에서만큼은 규칙성을 담보하고 이를 습관화, 나아가 체질화하는 데까지는 이를 수 있을 것 같고, 한 달여의 경과, 어느 정도는 이른 듯도 한데. 비록 아직 생산성 있는 결과(즉 논문의 진전, 나아가 완성)까지는 이르진 못했지만.
최근에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뷜가트한 니체주의랄까요. 불확실하고 미결정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는 삶을 거부하고 현재에 충실하자. 운명을 사랑하자. 이것이 20대부터 제 모토였는데, 실은 그것이 나태와 불성실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깨달음. 성실한 삶의 태도란 목표를 세우고 그에 맞춰 계획을 세우는, 그리하여 목표를 달성하고 그야말로 미래를 예정된 바대로 현실화하는 것이었구나 하는. 계획 경제, 목표량 달성, 이런 체제의 미덕.같은 결심, 같은 계획, 같은 실패, 같은 재계획의 무한 반복 재생. 이건 뭐 영원회귀에 가깝다. (무려 15년 전에 읽고 배우고 이해한 기억에 의존해서 써보건대)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 순간 하나하나를 견디거나 심지어 사랑할 자신이 있느냐, 그렇게 살아야 한다, 라는 것이 니체 영원회귀 교설이 뜻하는 바라면, 나는 이를 본의 아니게 실천해 왔던 셈. 범속할지언정 태생적 니체주의자였달까. 그런데 바로 그에 모순되는 모토를 세웠으니 실현될 리가 있나.
그래서 계획을 사소하게라도 세워 그에 맞추는 습관을 길러보자, 이런 취지 하에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논문, 나아가 인생에까지 적용해 보려 했는데... 그게 참 안 되더란 말이지요. 계획대로 안되니까 대안인 플랜 비, 그도 안 되어서 씨, 디... 무한까지 가거나 아니면 무한 루프.
원칙주의의 필요성. 아니 필연성. 경험적 수행과 시행착오를 거쳐 축적된 자료로부터 요행히 "우연적" 결과를 얻으리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아무리 확률론적 근거를 찾는다 해도 이는 기껏해야 희망적 사고에 대한 합리화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어떤 원리나 원칙, 하다 못해 사전 모의나 계획 없는 실험 및 관찰이 그 어느 생산적 결과도 가져다 주지 못함은 소박한 경험주의자나 귀납주의자가 아닌 이상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실. 하물며 이론의 영역에서도 그러한데 실천의 영역에서는 어떠하랴. 실천의 영역에서는 의지가 현실에 대한 구성력과 미래에 대한 결정력을 분명히 가지니 말이다. 때로 도덕법칙이 자연법칙보다 오히려 강한 구속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래서다...
... 여기까지 쓴 후 그로부터 다시 2개월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반복. 2년 전부터 지금껏. 이제는 정말 반복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아니 이미 끊겨 있었거늘, 그러고도 못내 아쉬워서, 간신히, 간간이, 그럼에도 끊임없이 고리를 잇고 있었던 것이다. 비누방울처럼 잠깐 피어올랐다 사라지고 말, 그러고 나면 그 뿐일, 그런 고리를. 그러는 동안에 발목에는 사슬이 감기고 그 고리는 점점 더 길고 무거워지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른 채. 이제는 정말 끊어야 한다. 반복한다. 이제는 정말 끊어야 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