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망한 제목이지만 어쩌겠는가. 자꾸 이 말이 머릿속에 맴도는 것을. 이어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내 평생 그토록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네라" 등등의 문구들도. 이 모두를 쫓아내기 위해서라도, 이를 둘러싼 모든 생각을 비워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써야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비교적 최근 기형도를 다시 떠올린 계기가 있었다. 최근이라 해봤자 기록을 보니 1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규명되어질 필요가 있다"에 관해 ㅅ 언니와 얘기하면서. 당시에 기쁨, 슬픔, 노여움, 즐거움, 요컨대 희로애락의 정서(affect) 혹은 정념(passion)에 관해 얘기를 나누던 중 문득 떠오른 시가 바로 그것이었다. 도대체 이 정서나 정념이라는 것이 내게는 도통 개념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어서 당시에 조금 공부를 해보다가 관두었지만, 그리고 그 이후로도 가끔씩 생각해 보지만,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그중 단연 흥미로웠던 것은 스피노자의 정서(affectus) 개념. 정서보다는 감응 혹은 감응소라는 말을 나는 더 좋아하고 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에티카> 3부는 이런 종류의 감응을 그야말로 "논리적으로 규명"하는 기획이다. 이를 모든 정신과 합리적 이성에 반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그리하여 대개는 배척의 대상으로 보았던 다른 합리론자들과는 달리, 스피노자는 부적합한 관념이 아니라 적합한 관념, 즉 원인을 알고 원인을 내부에 포함하는 관념일 수 있다고 본다. 감응은 정신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신체와 유기/조직적이고 평행한 관계를 맺은 결과로서 나오는, 혹은 그러한 관계의 증거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순수 관념과 다르다. 단지 외부 자극이나 정신의 상태에 대응하는 신체적 혹은 신체상의 반응이거나 반작용이 아니라, 정신과 신체가 감응/변용(affectio)의 원인이거나 결과로서 함께 참여해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감응은 능동적/적극적인 것과 수동적/부정적인 것의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내가 내 변용의 원인에 대한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을 갖지 못할 때 그것은 수동적인 감응, 즉 정념이 된다. 즉 외부의 어떤 것에 영향을 받을 때. 정확히는 그렇다고 생각, 아니 실은 착각할 때. 실은 외부의 자극-나의 반응이라는 과정이 일방향적이지 않고 그 자극을 감각하고 인지함에서부터 이미 나 자신 그 변용 과정에 참여하고 기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모르기 때문에 내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감응 발생의 또 다른, 좀더 근본적인 원리는 일종의 관성 원리. 모든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완전해지기 위한 경향성을 지니는데, 원인에 따라서, 변용에 따라서, 그 존재가 가진 역량 혹은 행위 능력은 증감된다. 어떤 원인으로 인해 내 존재가 감소/위축되면 이것이 내게는 슬픔이 되고, 슬픔은 다시 증오, 분노, 질투 등등 다른 모든 부정적인 감응들의 토대가 된다. 반면에 이 변용의 양태에 따라 내 존재의 역량이 상승하여, 내가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나는 기쁨을, 그 기쁨의 원인을 제공하는 대상에 대해서 나는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그 대상 또한 나와 같은 방식으로 감응하기를 갈구한다.
그러면 그 사랑을 잃었을 때에는? 내가 느꼈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사실은 원인(을) 제공(했다 생각했던) 자에 대한 그릇된 관념으로 인한 부적합한 관념의 소산이었다면? 답 : 그건 사랑이 아니었던 게다. 정념이었던 게다. 완전성은커녕 내 이 한 줌의 존재조차 가누지 못하게 만든. 그래서 더 무서운. 그런만큼 단연코 벗어나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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